Masuk
윤해원은 낮에는 죽은 남편의 위패에 절했고,
밤에는 살아 있는 사내의 손을 기다렸다.
그날도 세 번째 절을 올리는 동안 별당 밖에서는 망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해원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다는 열녀문의 나무를 다듬는 소리였다.
혼례를 치른 지 스무 날 만에 남편은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정한 말도 따뜻한 체온도 나누지 못했으니,
해원에게 남은 것은 밤마다 이어지던 마른기침과 방 안에 밴 약 냄새뿐이었다.
그가 죽은 지 여섯 달이 지난 지금은 얼굴보다 위패의 먹빛 글자가 더 익숙했다.
“네 정성이 하늘에 닿으면 우리 집안에도 마침내 열녀문이 서겠구나.”
최씨 부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해원의 머리에서 옥비녀를 뽑았다.
“과부가 이런 것을 꽂을 필요는 없지. 거울도 치우거라.
이제부터는 꾸밀 일도, 제 얼굴을 들여다볼 일도 없을 테니.”
해원은 소복 자락 아래에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가 천천히 펼쳤다.
“어머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거짓말은 얌전한 목소리를 입히면 진실보다 단정하게 들렸다.
최씨 부인이 나가자 복례가 방문을 닫았다.
해원은 향로에 꽂힌 향을 뽑아 손끝으로 비벼 껐고,
가느다란 연기는 위패 앞에서 잠시 흔들리다가 사라졌다.
“마님, 오늘도 뒤 담을 넘으시려고요?”
“오늘은 그럴 필요 없어.”
해원은 창호지 너머로 길게 번진 사내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사내가 제 발로 들어올 테니까.”
며칠 전부터 그녀는 돌쇠가 망치질을 멈추는 시각을 알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어느 쪽 소매부터 걷는지,
손에 묻은 톱밥을 털 때 고개를 어느 방향으로 기울이는지도 어느새 눈에 익었다.
그러나 해원이 돌쇠를 기다린 까닭은 넓은 어깨나 단단한 팔 때문만은 아니었다.
낮에 최씨 부인이 해원을 가리키며 곧 열녀가 될 사람이라 자랑했을 때,
모두가 안쓰럽거나 경건한 얼굴로 그녀를 훔쳐보았다.
오직 돌쇠만은 문살을 다듬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손을 가까이 두시면 다칩니다.”
그는 해원을 죽은 사내의 그림자처럼 보지 않았다.
손이 끼면 피가 흐르고, 다치면 아픈 살아 있는 사람으로 대했을 뿐이었다.
밤이 깊어서야 망치 소리가 멎었다.
해원은 복례에게 등잔 하나만 남기게 한 뒤 소복의 윗고름을 느슨하게 풀었다.
낮 동안 단단히 묶여 있던 숨이 그제야 조금 트였다.
잠시 후 문밖에서 돌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문고리는 다 고쳤습니다.”
“들어와 확인시켜라.”
대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날이 늦었습니다.”
“그러니 들어오라는 것이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돌쇠는 문턱을 넘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낮보다 더 커 보이는 몸이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고,
손가락 사이에는 마른 송진과 톱밥이 붙어 있었다.
해원은 그의 옆을 지나 문을 닫았다.
덜컥.
빗장이 내려가는 소리에 돌쇠의 시선이 비로소 올라왔다.
“안에서 잠그면 밖에서는 열 수 없다 했지?”
“그렇습니다.”
“열어 보아라.”
돌쇠가 문고리로 손을 뻗자 해원이 먼저 그의 손등을 덮었다.
거친 살결 아래로 힘줄이 선명하게 움직였다.
그가 손을 빼려 하자 해원은 손가락을 그 사이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마님.”
“무서우냐?”
“마님이 아니라 이 집이 무섭습니다.”
“나는 아니고?”
돌쇠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시선이 느슨해진 옷고름을 스쳤다가 황급히 옆으로 비껴났다.
“먼저 고름부터 여미십시오.”
“보기 싫으냐?”
그의 목울대가 느리게 움직였다.
“보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손 하나 닿지 않았는데도 느슨해진 옷고름 안쪽으로 열이 번졌다.
자신 때문에 사내의 숨이 흐트러지는 광경은 생각보다 달았다.
해원은 돌쇠의 손을 등잔 가까이 끌어왔다.
손바닥에는 잔가시가 박혀 있었고, 손등의 작은 상처에서는 피가 조금 배어나왔다.
그녀가 소매 끝으로 피를 닦자 돌쇠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렸다.
“양반가 과부의 손에 피를 묻혔으니 큰 죄를 지었구나.”
“제가 묻힌 것이 아닙니다.”
“그래?”
해원은 그의 엄지를 붙잡아 제 아랫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닿을 듯 말 듯 멈춘 손끝에서 마른 나무와 희미한 피 냄새가 났다.
“보았구나.”
“아무것도 보지 않았습니다.”
“보지 않은 사내가 어째서 숨을 참지?”
돌쇠는 한 차례 문고리를 잡았다.
그대로 열고 나갈 듯했으나, 끝내 빗장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만하라 하시면 물러가겠습니다.”
양반 남편도, 집안 어른들도 묻지 않았던 말을 돌쇠가 먼저 물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까지 허락하는지.
해원의 입가에 느린 미소가 번졌다.
“내가 그만하라고 했느냐?”
돌쇠가 다시 손을 들었다.
손끝이 소복 자락 가까이 다가오던 순간, 별당 앞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복례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마님, 의원 나리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 선 허담의 발이 흙 묻은 짚신과 목수의 연장 앞에서 멈췄다.
“해원 마님.”
허담이 그녀를 불렀다.
한 번.
그리고 방 안의 숨소리까지 헤아린 사람처럼, 잠시 뒤 다시 한 번.
돌쇠가 손을 거두려 하자 해원은 오히려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거친 손바닥을 제 허리 위에 정확히 올려놓았다.
돌쇠의 숨이 짧게 엉켰다.
“열녀가 아닌 나를 보았으니.”
해원은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보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문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침묵이 더 오래 이어졌다.
그러다 허담이 조용히 말했다.
“돌쇠를 내보내십시오.”
잠시 뒤, 낮게 덧붙이는 목소리가 문살을 타고 스며들었다.
“열이 난다는 분의 숨소리가 둘이군요.”
해원은 돌쇠의 손을 허리에서 치우지 않았다.
오히려 문밖의 허담이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돌쇠야.”
해원은 다음 날 아침 돌쇠를 불렀고,별당 문은 열어 두었으나 그는 문턱 밖에서 더 들어오지 않았다.마당 건너편에는 허담이 약갑을 내려놓고 있었는데,전날 해원이 약만 두고 가라고 했던 탓에 계단 아래에서 발을 멈춘 채였다.거울 앞에 앉은 해원은 옥비녀를 머리에 꽂은 채 돌쇠를 바라봤다.“들어와.”돌쇠는 문턱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들어가도 됩니까?”“불렀으니까.”그제야 한 발 안으로 들어왔지만,시선은 해원의 얼굴보다 비녀에 먼저 닿았다.어제 제 품에서 떨어졌던 물건이라 눈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빼고 싶어?”“예.”“오늘은 안 돼.”돌쇠의 손가락이 옷자락 곁에서 접혔고,해원은 거울로 그의 반응을 지켜봤다. 그러나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으며,비녀를 한 번 더 본 뒤 스스로 문턱 쪽으로 물러났다.“왜 가?”“안 된다고 하셨으니까요.”“갖고 싶은데도?”돌쇠는 비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숨을 삼켰다.“더 보고 있으면 또 손이 먼저 갈 것 같습니다.”그 말을 들은 해원의 손이 옥비녀 끝에서 멈췄다.어제는 욕심이 먼저였으나 오늘은 물러날 자리를 골랐고,해원은 잠시 그를 본 뒤 손짓했다.“이제 와.”돌쇠가 고개를 들었다.“비녀만 빼.”“허락하시는 겁니까?”“이번에는.”그가 천천히 다가오자 해원은 등을 보였고,거울 속에서는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렸다.거친 손이 옥비녀 가까이 올라왔으나 곧장 닿지는 않았다.“머리카락에는 닿아도 됩니까?”“필요한 만큼만.”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돌쇠의 손가락이 매끈한 옥을 감쌌다.이윽고 비녀가 검은 머리 사이에서 빠져나오자 풀린 머리카락이 해원의 등 위로 흘러내렸고,가까워진 돌쇠의 숨도 함께 흐트러졌다.다만 그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지 않았으며, 옥비녀만 받쳐 들었다.해원이 손바닥을 내밀자 돌쇠는 곧바로 비녀를 올려놓지 못했다.엄지가 옥 표면을 한 번 쓸었고,해원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비녀가 손바닥 위로 옮겨졌다.“아직 놓기 싫지?”“예.”“그런데 놓았
“못 봤다고 했지?”흰 옥비녀가 마루 위에서 멈췄다.돌쇠도 허담도 허리를 굽히지 못했다.해원은 비녀보다 두 남자의 손을 먼저 봤다.한쪽은 대패 자국으로 거칠었고, 다른 한쪽은 약재 물이 배었지만 반듯했다.허담의 손이 비녀를 향해 움직였다.돌쇠도 뒤늦게 손을 내밀었다.해원이 옥비녀 위에 손바닥을 덮었다.“둘 다 손대지 마.”두 손이 동시에 멎었다.해원은 직접 비녀를 집었다.차갑던 옥 표면에는 돌쇠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비녀 끝에 붙은 대팻밥 한 조각을 손톱으로 떼어 냈다.밤새 얼마나 오래 품고 있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갖고 싶다고 했지.”돌쇠의 시선이 비녀에 붙었다.“예.”“가져도 된다고는 안 했어.”“알고 있습니다.”“알면서 가져갔고, 물었을 때는 못 봤다고 했네.”돌쇠는 변명하지 못했다.허담이 약갑을 내려놓았다.“거짓말까지 한 사람을 다시 곁에 두실 겁니까?”해원이 고개를 돌렸다.“그 말을 할 자격이 생겼다고 생각해요?”허담의 입술이 닫혔다.“훔치지 않았으니 돌쇠보다 낫다고 생각했죠?”“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지금도요?”허담은 대답하지 못했다.해원은 그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대답 못 하는 걸 보니 아직도 그러네.”허담의 맥이 손끝 아래에서 빠르게 뛰었다.“다시 같은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누가요?”대답이 늦어졌다.“의원 나리가?”“마님께서 원하신다면.”“그 말을 끝까지 하면 의원 나리도 오늘은 돌아가야 해요.”해원이 손을 놓자 허담은 더 말하지 못했다.돌쇠가 마루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제가 잘못했습니다.”“무엇을?”“허락 없이 가져갔습니다.”“또.”“못 봤다고 거짓말했습니다.”“또.”돌쇠는 비녀를 바라보다 입술을 다물었다.해원이 옥비녀 끝으로 그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내가 찾아오길 바랐어?”돌쇠의 손이 천천히 접혔다.“갖고 있고 싶었습니다.”“그게 전부야?”“그 말까지 하면 더 비겁해질 것 같습니다.”
돌쇠는 해원의 비녀를 훔칠 생각이 없었다.적어도 별당 마루의 대팻밥을 쓸어 담을 때까지는 그랬다.새벽빛이 담장 위로 번지고 있었지만 방 안에는 아직 등잔불이 남아 있었다.돌쇠는 닫힌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기다리는 것과 부름받는 것은 다르다는 말을 전날 밤 배웠다.바구니를 들고 돌아서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해원은 풀어진 머리를 한쪽 어깨로 넘긴 채 서 있었다.손목에는 허담의 갓끈이 그대로 감겨 있었다.“아직도 안 갔어?”“치울 게 남았습니다.”“나무 조각보다 네가 더 오래 남아 있네.”돌쇠는 대답하지 않았다.시선만 갓끈에서 해원의 머리로 옮겨 갔다.검은 머리 사이에 꽂힌 옥비녀가 등잔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해원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왜 봐?”“아무것도 아닙니다.”“아무것도 아닌 얼굴은 아닌데.”그녀가 비녀를 뽑았다.머리카락이 어깨와 등 위로 한꺼번에 흘러내렸다.돌쇠의 손이 바구니 가장자리를 눌렀다.해원은 비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갖고 싶어?”돌쇠의 대답은 늦었다.“예.”“왜?”“마님이 늘 몸에 지니는 것이니까요.”“그걸 가지면 나도 네 쪽에 남는 것 같아?”돌쇠는 부정하지 못했다.“갖고 싶다고 다 가져도 되는 건 아니라는 말, 들었지?”“들었습니다.”“그럼 돌아가.”회랑 끝에서 복례가 해원을 불렀다.“마님, 안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해원이 고개를 돌렸다.최씨 부인이 보낸 사람이 무슨 말을 가져왔는지 묻는 짧은 사이였다.돌쇠의 손이 문턱을 넘었다가 멈췄다.해원이 돌아보면 바로 들킬 거리였다.그 순간 손목에 감긴 허담의 갓끈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돌쇠는 옥비녀를 움켜쥐어 소매 안에 숨겼다.해원이 돌아봤을 때 그는 이미 바구니를 들고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왜 아직 있어?”“이제 갑니다.”돌쇠는 별당을 떠나면서도 소매 안 비녀를 놓지 못했다.차갑던 옥은 손바닥의 열을 먹고 빠르게 미지근해졌다.몇 걸음 지나지 않아 비녀 끝이 손바닥을 찔렀다.해원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이미 마님이 제 문 안에 계시니까요.”허담의 말이 끝나자 의원방 안이 조용해졌다.해원은 손가락에 감긴 갓끈을 놓지 않았다.팽팽해진 끈 아래로 그의 숨이 빠르게 오갔다.“다시는 문밖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다리겠다고 했죠.”“그렇습니다.”“둘 중 어느 쪽이 진심이에요?”“둘 다입니다.”해원은 매듭을 한 번 당겼다.허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그럼 오늘은 기다리는 쪽만 보여 줘요.”“무엇을 기다리면 됩니까?”“내가 이걸 풀 때까지.”허담은 손을 올리지 않았다.해원은 매듭부터 풀지 않고 갓 아래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끈이 그의 뺨을 스치며 느슨해졌다.그 순간 허담의 손이 해원의 허리를 끌어당기려다 옷감 위에서 멎었다.“또 참네요.”“풀라고 하신 것은 갓끈뿐입니다.”“내가 허락한 만큼만 가지려고요?”“그러지 않으면 전부 원하게 될 테니까요.”해원은 마지막 매듭을 풀었다.갓이 기울어 책상 위 약서로 떨어졌다.먹 받침이 밀리고 붓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허담은 줍지 않았다.해원은 풀린 갓끈을 그의 목에 느슨하게 둘렀다.“이제 의원인 척 못 하겠네요.”“마님이 벗기셨으니까요.”“갓 하나 풀었다고 남자가 돼요?”허담의 손이 허리에서 등으로 올라갔다.이번에는 해원이 막지 않았다.“어젯밤부터 남자였습니다.”“그런데 오늘까지 의원방에 숨었네.”“여기로 오시면 덜 흔들릴 줄 알았습니다.”“틀렸어요?”허담은 바닥에 떨어진 약서를 보지 않았다.“마님이 들어오신 뒤로 이 방의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무엇부터요?”“제가 앉던 자리부터.”그의 시선이 해원이 밀어낸 약서와 비뚤어진 먹 받침을 지나 그녀에게 멈췄다.“그리고 문을 열어 두는 일까지.”해원은 갓끈을 목 뒤로 당겨 그의 얼굴을 가까이 끌었다.“내가 벗긴 건 갓이지 예법이 아니에요.”허담의 눈길이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다.“예법까지 벗기고 싶으십니까?”“의원 나리가 얼마나 버티는지 보고.”허담의 손이 옷고름 가까이에서 멎었다.“제
의원방의 등불은 해원이 문 앞에 서자 한 번 크게 흔들렸다.문은 닫혀 있었다.허담은 안에서 기다리면서도 먼저 열지 않았다.해원은 손목에 감은 약향 밴 천을 한 번 당겼다.“들어오십시오.”“먼저 열어 주지는 않네요.”“오실지 제가 정할 수 없으니까요.”해원은 문고리를 잡았다.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안에는 약재 서랍과 낮은 책상, 침상 하나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등불을 켜 둔다더니 정말 진맥만 하려고요?”“필요하시면.”해원은 문을 닫지 않은 채 들어갔다.약향이 별당에서 맡았을 때보다 짙었다.옷이 아니라 벽과 이불, 오래 밴 나무 서랍에서 올라오는 냄새였다.“여기서는 의원 나리 향을 피할 곳이 없네요.”“다만 문을 닫으면 의원 나리 방에 갇힌 모양이 되겠네.”허담이 문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해원은 문을 절반만 닫았다.“아직은 이것만.”허담은 남은 틈에 손대지 않았다.해원은 그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약서 위에 손을 얹고 붓을 옆으로 밀자 먹 받침이 비뚤어졌다.“바로잡고 싶어요?”“평소라면 그랬을 겁니다.”“오늘은?”“마님이 무엇을 흐트러뜨리는지 보고 싶습니다.”해원은 그의 손목에 두 손가락을 올렸다.맥박이 곧 손끝을 밀어냈다.“빠르네.”“의원방에 환자가 아닌 분이 오셨으니까요.”해원이 손가락을 손목 안쪽으로 옮겼다.“어젯밤의 남자?”“그 이름으로 부르시면 오늘도 그 사람이 될 겁니다.”“여긴 의원 나리 방인데.”“그래서 더 어렵습니다.”“뭐가요?”허담의 시선이 반쯤 닫힌 문으로 향했다.“제가 정한 곳에서까지 허락을 기다리는 일입니다.”해원은 그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자기 방에서는 마음대로 하고 싶어요?”“아닙니다.”“거짓말.”허담의 손이 책상 가장자리를 짚었다.정렬돼 있던 약서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그는 줍지 않았다.“제가 문을 닫으면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이미 그러고 싶은 얼굴인데요.”“그래서 손대지 않는 겁니다.”해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돌쇠는 밤이 지나도록 허담의 향이 묻은 손을 씻지 않았다.우물은 몇 걸음 앞에 있었지만 그는 대패부터 집었다.나무 장식의 둥근 면이 얇게 벗겨졌다.해원은 문턱에 기대어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그러다 전부 없어지겠어.”“없어지면 다시 만들겠습니다.”“내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대패날이 나무 위에서 멎었다.돌쇠는 해원의 풀어진 머리와 새로 여민 옷고름을 차례로 살폈다.허담의 약향은 소매뿐 아니라 소복 안쪽까지 깊이 배어 있었다.“마님께 드리려고 깎는 게 아닙니다.”“그럼 왜 깎아?”“손을 멈추면 방 안에서 있었던 일만 생각날 것 같아서요.”해원이 계단을 내려갔다.소매 끝이 돌쇠의 손등을 스쳤다.옅어졌던 약향이 다시 짙어진 듯했다.“궁금해?”“예.”“어디까지 갔는지?”돌쇠는 대패를 내려놓았다.“묻지 않으려 했습니다.”“왜?”“마님이 고른 밤이니까요.”“그런데 떠나지도 않았잖아.”그의 시선이 깊게 파인 문살에 머물렀다.“떠났으면 문을 열고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내 허락도 없이?”“그래서 밖에 있었습니다.”해원은 그의 바로 앞에 섰다.“의원 나리와도 끝까지 갔어.”돌쇠의 엄지가 나무 장식의 모서리를 눌렀다.한동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화나?”“의원에게 화가 납니다.”“나한테는?”돌쇠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마님께 화낼 자격이 없다는 게 더 화납니다.”해원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내가 다른 남자를 고른 게 싫어?”“제가 받았던 걸 저 사람도 받았다는 게 싫습니다.”해원은 돌쇠의 손에서 나무 장식을 빼앗아 대패 옆에 놓았다.“내가 너한테 준 걸 의원 나리한테 나눠 준 게 아니야.”그녀가 약향 밴 소매를 들어 올렸다.“그날에는 너를 골랐고, 어젯밤에는 그 사람을 골랐어.”돌쇠의 입술이 닫혔다.“같은 밤 아니었어.”“무엇이 달랐습니까?”“그걸 왜 알고 싶은데?”“다음에는 더 잘하고 싶습니다.”“누구보다?”대답이 막혔다.해원의 표정에서 남아 있던 장난기가 사라졌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