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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원의 남편이 죽은 날 밤, 그녀는 다른 사내의 입술을 물었다.
상청에는 아직 향 냄새가 가시지 않았고,
마당에는 곡을 하다 지친 상여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죽은 남편의 위패 앞에는 흰 촛농이 흘렀다.
해원은 소복을 입은 채 헛간 문을 닫았다.
그리고 제 앞에서 얼굴이 새파래진 머슴 만복을 바라봤다.
“왜 떨어?”
“마, 마님. 아직 대감마님 초상도 안 끝났습니다.”
“그래서?”
“이러시면 천벌받습니다.”
해원이 피식 웃었다.
“천벌?”
그녀가 만복의 저고리 깃을 움켜잡았다.
“내가 스무 날을 혼인해서 뭘 얻었는지 알아?”
만복이 입을 다물었다.
“밤마다 기침하는 병신 하나 수발들다가 스물둘에 과부 됐어.”
“마님.”
“낮에는 울어라, 밤에는 위패 끌어안아라, 평생 다른 사내 쳐다보지도 마라.”
해원의 웃음이 차갑게 식었다.
“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만복이 뒷걸음질 쳤다.
“저는 싫으면 나가겠습니다.”
해원은 손을 놓았다.
“그래. 나가.”
만복이 멈칫했다.
“싫으면 당장 문 열고 나가. 대신 나가면서 똑바로 생각해. 네가 진짜 싫은 건지, 겁나서 도망가는 건지.”
헛간 안에는 한동안 숨소리만 엉켰다.
만복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열지는 않았다.
마침내 그가 돌아섰다.
“후회하실 겁니다.”
“내가?”
해원이 웃었다.
“내가 평생 한 것 중에 제일 후회되는 게 뭔지 알아?”
그녀는 상복 고름을 풀었다.
“남들 시키는 대로 산 거.”
그날 새벽,
만복은 먼저 해원의 입술을 찾았다.해원은 그제야 알았다.
죽은 사내 곁에서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원한다는 감각.
그리고 상대 역시 자신을 원한다는 확신.
그것은 죄책감보다 달았다.
문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흘 뒤에는 마구간지기 칠복이었다.
칠복은 처음부터 해원을 피해 다녔다.
“마님, 저한테 이러지 마십시오.”
“왜?”
“만복이 새끼가 술 처먹고 떠들었습니다.”
해원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라고?”
“마님이 자길 먼저 불렀다고.”
“그래서 배 아프다더냐?”
칠복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새끼 주둥이를 찢어놓고 싶긴 했습니다.”
“왜?”
“…….”
해원이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말해.”
칠복이 이를 악물었다.
“제가 먼저 마님을 봤으니까요.”
이번에는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집 남자들은 하나같이 겁쟁이네.”
“뭐라고요?”
“탐나면 탐난다고 말을 해. 뒤에서 개처럼 으르렁대지 말고.”
칠복이 해원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럼 지금 말해도 됩니까?”
“말만?”
그날부터 해원의 밤은 달라졌다.
상복은 낮에만 정절이었다.
밤이 되면 그것은 사내들을 미치게 만드는 흰 껍질에 불과했다.
그러는 동안 최씨 부인은 며느리를 조선에서 가장 불쌍한 과부로 만들기에 바빴다.
“우리 해원이는 남편 죽은 뒤 물 한 모금도 마음 편히 못 넘긴다.”
해원은 옆에서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며느리입니다.”
“세상에 이런 열녀가 또 어디 있겠느냐.”
그날 밤,
해원은 사랑채 뒤뜰에서 처음 보는 사내와 입을 맞췄다.목수 돌쇠였다.
열녀문을 짓기 위해 불려온 사내.
해원의 정절을 기념할 문을 제 손으로 만드는 남자였다.
돌쇠는 해원을 밀어내지 않았지만 곧장 품지도 않았다.
“미친 짓입니다.”
“싫어?”
“싫다는 말은 안 했습니다.”
“그럼 입 닥쳐.”
돌쇠가 헛웃음을 흘렸다.
“성질 더럽다는 소문은 없던데.”
“죽은 남편 집구석에서 착한 척하느라 숨겼지.”
“제가 뭘 믿고 마님한테 손을 댑니까?”
해원은 그의 손을 끌어 제 허리에 얹었다.
“지금 네 손이 어디 있는지 보고도 그런 개소리가 나오니?”
돌쇠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둘이 보기 좋구나.”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원과 돌쇠가 동시에 돌아봤다.
최씨 부인이 서 있었다.
시어머니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소리치지도 않았다.
뺨을 때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어머님.”
최씨 부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돌쇠의 얼굴을 훑어본 뒤 해원에게 말했다.
“만복이, 칠복이, 이제는 목수까지.”
해원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사라졌다.
최씨 부인이 어떻게 알고 있는가.
“뭘 그렇게 놀라느냐?”
최씨 부인은 품에서 작은 장부 하나를 꺼냈다.
첫 장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남편이 죽은 날.
그 아래에는 이름 하나.
만복.
그다음 장에는 칠복.
그리고 오늘 날짜 아래에는 이미 적혀 있었다.
돌쇠.
해원의 손끝이 굳었다.
“이게…… 뭡니까?”
최씨 부인이 웃었다.
“네가 어느 놈과 붙어먹는지 적어놓은 거다.”
돌쇠가 욕을 삼켰다.
“이 집 미쳤네.”
“닥쳐라, 상놈아.”
최씨 부인은 돌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직 해원만 보았다.
“넌 열녀가 되어야 해.”
해원이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지금 뭘 하는지 보고도 그 말이 나옵니까?”
“그래서 더 열녀가 되어야지.”
“무슨 미친 소리예요?”
최씨 부인이 해원의 뺨을 쓰다듬었다.
“세상에는 깨끗한 열녀보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더러운 비밀을 가진 열녀가 다루기 쉽거든.”
해원이 시어머니의 손을 쳐냈다.
“나를 감시했어요?”
“감시?”
최씨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얘야.”
그리고 장부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해원은 그곳에 적힌 이름을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
허담.
죽은 남편의 친구이자,
남편의 마지막 밤을 지켰던 의원이었다.그 이름 옆에는 아직 날짜가 없었다.
대신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다음 사내.
최씨 부인이 해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고른 줄 알았니?”
해원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뜻이에요?”
“네가 만난 사내들.”
시어머니가 웃었다.
“전부 내가 네 앞에 갖다 놓은 놈들이야.”
“왕실이 아니라 네가 먼저 죽어.”해원은 해린이 든 칼을 바라봤다.“내가 왜?”해린의 손끝이 떨렸다.“그 아이 때문이야.”“아이 이름을 말하면 내가 죽는다고?”“그래.”“누가 죽이는데?”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현수가 천천히 해원 앞으로 섰다.“해린아. 칼 내려놔.”“당신이야말로 입 다물어.”“해원은 아무것도 몰라.”“그래서 지금까지 네가 마음대로 했잖아!”해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기억도 빼앗고, 아이도 빼앗고, 이름까지 빼앗았잖아!”해원이 그녀를 바라봤다.“해린.”“왜!”“내 아이 이름.”해린의 얼굴이 굳었다.“말해.”“안 돼.”“내가 죽더라도 알아야겠어.”“안 된다고!”해린이 소리쳤다.그 순간 현수가 해원의 손을 잡았다.“그만하자.”해원이 손을 뿌리쳤다.“너도 알고 있지?”“…….”“내 아이 이름.”현수는 침묵했다.해원이 차갑게 웃었다.“역시 알고 있었네.”“해원아.”“이번에는 나한테 선택권 줘.”현수가 눈을 들었다.“뭘?”“내가 누구를 믿을지.”해원의 시선이 현수에서 해린으로 옮겨갔다.“너희 둘 다 내 인생을 망쳤어.”두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그러니까 이제 내가 결정할 거야.”해원이 해린에게 다가갔다.“칼 내려.”“가까이 오지 마.”“내가 무서워?”“아니.”“그럼 내려.”해린의 손이 조금씩 내려갔다.그 순간 뒤에서 최씨 부인이 말했다.“해원아, 그 아이 이름은 윤서하야.”모두가 얼어붙었다.해원이 천천히 돌아봤다.“……뭐?”최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네 아이 이름.”현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해린은 칼을 떨어뜨렸다.쨍그랑.“안 돼…….”해원이 최씨에게 다가갔다.“서하?”“그래.”“살아 있어?”최씨가 고개를 끄덕였다.“살아 있어.”해원의 입술이 떨렸다.“어디 있어?”최씨는 대답하지 못했다.해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어디 있냐고!”최씨가 눈을 감았다.“네가 가장 믿었던 곳.”“어디?”“네가 매일 지나던 곳.
“해원의 인생이었어.”현수의 말에 해린의 표정이 굳었다.해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무슨 뜻이야?”해린이 먼저 웃었다.“현수가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보네.”“닥쳐.”“왜? 네가 제일 잘 알잖아.”해린이 해원을 바라봤다.“내가 네 인생을 훔친 게 아니야.”“그럼?”“네가 직접 줬어.”해원의 눈빛이 흔들렸다.“내가?”“그래.”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를 살리는 대신 네 인생을 포기하겠다고 네가 선택했어.”현수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그건 네가 강요한 거잖아.”“아니.”해린이 차갑게 웃었다.“내가 아니라 네가 제안했어.”현수가 굳었다.해원이 천천히 현수에게 다가갔다.“뭘 제안했어?”“해원아.”“대답해.”“……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무슨 방법?”현수가 입술을 깨물었다.해린이 대신 말했다.“네가 왕실의 신분을 포기하면 아이를 살려주겠다고 했어.”해원의 얼굴이 굳었다.“그리고?”“네 이름도.”“또?”“네 가족도.”해린이 잠시 멈췄다.“그리고 네가 사랑했던 사람까지.”해원이 현수를 바라봤다.“사랑했던 사람?”현수의 눈빛이 흔들렸다.해린이 웃었다.“바로 나.”해원이 숨을 삼켰다.“뭐?”“그때 현수는 나와 결혼하기로 했어.”현수가 소리쳤다.“그건 계약이었어!”“그래.”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해원은 그걸 몰랐지.”해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나 몰래 결혼까지 했어?”“정확히는 네가 기억을 잃기 전에.”현수가 고개를 숙였다.해원이 그에게 다가갔다.“그럼 내가 왜 너랑 다시 만났어?”“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했으니까.”“그래서 다시 사랑한 거야?”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해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너 정말 잔인하다.”그 순간 태율이 말했다.“아니.”모두가 태율을 바라봤다.태율은 해린을 가리켰다.“저 여자가 하나 빼먹었어.”해린의 표정이 굳었다.“뭘?”“해원이 왕실을 포기한 이유.”해원이 태율을 바라봤다.“뭔데?”태
“그날 네 옆에 있던 사람이야.”해원은 여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자신과 너무 닮았다.눈매도, 코도, 입술도.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누구야?”여자가 웃었다.“정말 기억이 안 나는구나.”“대답해.”“내 이름은 윤해린.”해원의 눈이 흔들렸다.“해린?”뒤에서 최씨 부인이 숨을 삼켰다.“안 돼…….”해원이 돌아봤다.“당신도 알아?”최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해린이 대신 말했다.“당연히 알지.”그녀가 최씨를 향해 웃었다.“이 여자가 나를 만든 사람이니까.”“뭐?”해원이 굳었다.최씨가 다급하게 말했다.“해원아, 저 여자의 말 듣지 마.”“왜?”“거짓말이야.”해린이 피식 웃었다.“거짓말?”그녀는 품에서 낡은 사진을 꺼냈다.사진에는 어린 해원과 해린이 나란히 서 있었다.해원의 얼굴이 굳었다.“우리…… 자매야?”“아니.”해린이 말했다.“나는 네 자매가 아니야.”해원이 사진을 뺏어 들었다.“그럼 어떻게 이렇게 닮았어?”“네 얼굴을 본떠 만들었으니까.”허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사람을 얼굴까지 만들어?”해린이 그를 바라봤다.“가능해.”“누가?”해린은 아무 말 없이 현수를 바라봤다.현수의 얼굴이 굳었다.해원이 천천히 현수를 돌아봤다.“너야?”“아니.”“그럼 왜 저 여자가 널 봐?”현수는 대답하지 못했다.해린이 말했다.“강현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 얼굴을 결정했어.”해원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뜻이야?”“네가 사라졌을 때 왕실이 널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거든.”해린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그래서 나를 데려왔어.”“내 대역으로?”“그래.”해린이 웃었다.“십 년 동안 나는 네 이름으로 살았어.”해원이 숨을 삼켰다.“그럼 왕실에 있던 건…….”“나야.”현수가 갑자기 말했다.“그만.”해린이 그를 노려봤다.“왜? 이제 와서 숨기게?”현수가 다가갔다.“해원에게 말하지 마.”“이미 늦었어.”해린이 차갑게 웃었다.“네가 해원에게
“강현수의 친동생이었어.”해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수한테 동생이 있어?”현수의 얼굴이 굳었다.“없어.”태율이 비웃었다.“있어.”“없다고 했잖아.”“네가 죽었다고 처리한 동생.”현수가 태율에게 달려들었다.“입 닥쳐!”두 사람이 엉켜 넘어졌다.허담이 둘을 떼어냈다.“그만해!”해원은 움직이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조용했다.“강현수.”현수가 숨을 몰아쉬며 해원을 바라봤다.“말해.”“…….”“네 동생 이름.”현수의 입술이 굳었다.“강태문.”해원의 눈이 커졌다.“강태문?”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번쩍 흔들렸다.어린 시절.눈 오는 밤.한 남자가 자신에게 목도리를 둘러주던 장면.그리고 웃으며 했던 말.‘해원아, 내가 대신 갈게.’해원이 관자놀이를 붙잡았다.“아…….”현수가 다가왔다.“해원아.”“오지 마!”해원이 소리쳤다.“지금 내 머릿속에 누가 보여.”현수가 멈췄다.“누구?”“태문.”현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네가 기억하고 있어?”“내가 그 사람을 알아.”해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릴 때 나를 데리고 도망치려고 했어.”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런데 왜 죽었다고 했어?”이번에는 최씨 부인이 대답했다.“죽은 게 아니니까.”해원이 그녀를 바라봤다.“그럼 어디 있어?”최씨는 입을 열지 못했다.해원이 다가갔다.“이번에는 제발 제대로 말해.”최씨가 눈물을 흘렸다.“강태문은 왕실에 들어갔어.”“왜?”“널 대신해서.”해원의 표정이 굳었다.“내 대신?”“왕실은 네가 필요했어. 하지만 네가 도망쳤지.”최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태문이 네 이름을 사용했어.”허담이 욕설을 내뱉었다.“미친…….”해원이 물었다.“얼마나 오래?”“십 년.”해원의 눈이 커졌다.“십 년 동안?”“왕실은 태문을 윤해원으로 알고 있었어.”현수가 고개를 숙였다.해원이 현수를 바라봤다.“너도 알고 있었어?”“그래.”“그런데
“네가 낳은 아이는 이미 죽었어.”해원은 현수를 바라봤다.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품에 안긴 아이가 작은 손으로 해원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해원은 아이를 내려다봤다.그리고 다시 현수를 봤다.“그럼 이 아이는 누구야?”현수는 입을 다물었다.“대답해.”“…….”“또 침묵하면 이번엔 내가 알아서 판단할 거야.”현수가 낮게 말했다.“그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야.”“누구 아이인데?”“말할 수 없어.”해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지겹다.”그녀가 아이를 태율에게 내밀었다.“받아.”태율이 당황했다.“해원아.”“받으라고.”태율이 아이를 받아 안았다.해원은 현수 앞으로 걸어갔다.“너는 내가 미쳐 있다고 생각하지?”“아니.”“그럼 왜 계속 거짓말해?”“널 살리려고.”“그 말 이제 믿지 않아.”해원이 현수의 뺨을 세게 때렸다.찰싹.현수의 얼굴이 돌아갔다.“이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날의 대가야.”해원이 다시 손을 내렸다.“그리고 이것도.”두 번째 손바닥이 현수의 얼굴을 때렸다.“이건 내 아이를 죽었다고 속인 대가.”현수는 맞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허담이 씁쓸하게 웃었다.“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현수가 그를 노려봤다.“너까지 끼어들지 마.”“나도 알아.”허담이 해원을 바라봤다.“그 아이가 네 친자가 아니라는 거.”해원이 멈칫했다.“너도?”“그래.”“언제부터?”“오늘.”해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거짓말.”“나도 방금 알았어.”허담은 태율에게 시선을 돌렸다.“문제는 저놈이 알고 있었다는 거야.”태율의 표정이 굳었다.해원이 태율을 바라봤다.“너는?”태율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한참 고개를 숙였다.“알고 있었어.”해원의 얼굴이 굳었다.“처음부터?”“그래.”“그런데 왜 내 아들이라고 했어?”태율이 입술을 깨물었다.“네가 살아갈 이유가 필요했으니까.”“그래서 남의 아이를 내 아이로 속였어?”“미안해.”“미안하다고 끝날 일이야?”태율이 고개를 숙였다.그때
“강태율……?”해원의 입에서 이름이 새어 나왔다.강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품에 안긴 아이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아이는 울음을 멈췄다.그 모습을 본 순간 해원의 눈빛이 변했다.“그 아이…….”태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네 아들이야.”해원이 그대로 굳었다.현수가 앞으로 뛰어나왔다.“아이 내려놔.”태율이 차갑게 웃었다.“왜?”“당장.”“네가 무슨 자격으로?”현수가 이를 악물었다.“그 아이는 해원의 아들이야.”“그래.”태율이 아이를 바라봤다.“그래서 내가 데리고 있었어.”해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왜?”“네가 찾으러 오지 못하게 하려고.”“누가 시켰어?”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해원이 한 걸음 다가갔다.“태율아.”그가 움찔했다.“나한테 말해.”태율은 한참 해원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네가 나를 죽었다고 믿게 만든 것도 나야.”해원의 얼굴이 굳었다.“무슨 말이야?”“내가 죽은 척했어.”“왜?”“최씨가 부탁했어.”최씨 부인이 고개를 숙였다.해원이 그녀를 노려봤다.“또 당신이야?”“해원아…….”“당신 때문에 몇 번을 속아야 해?”최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널 지키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어.”“그런데 왜 태율까지 숨겼어?”최씨는 대답하지 못했다.태율이 대신 입을 열었다.“내가 네 아이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이야.”해원이 숨을 삼켰다.“그럼 현수는?”태율이 현수를 바라봤다.“저 새끼는 아이가 죽었다고 믿게 만들었지.”현수가 소리쳤다.“네가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잖아!”“네가 죽였다고 속였으니까.”“그건 해원을 지키려고—”“웃기지 마.”태율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넌 해원을 지킨 게 아니라 네 곁에 묶어둔 거야.”허담이 현수에게 다가갔다.“이제 인정해.”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해원은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봤다.그리고 태율에게 물었다.“내 아이를 왜 지금 데려온 거야?”태율의 얼굴이 굳었다.“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됐어.”“무슨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