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날 밤 제가 약을 바꿨으니까요.”
해원은 잠깐 허담을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개소리.”
허담의 눈썹이 움직였다.
“뭐라고요?”
“너 지금 질투해서 아무 말이나 지껄인 거잖아.”
“…….”
“돌쇠 손이 내 허리에 올라가 있으니까 눈깔 뒤집혀서.”
해원이 허담 앞으로 다가갔다.
“죽은 남편까지 팔아먹으며 나한테서 저놈 떼어놓고 싶었어?”
허담이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돌쇠가 헛웃음을 쳤다.
“의원 나리 꼴 좋네.”
“닥쳐.”
“싫은데.”
“둘 다 닥쳐.”
해원이 버럭 소리쳤다.
두 사내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해원은 그 광경을 보고 피식 웃었다.
“웃기네.”
“뭐가 말입니까?”
“낮에는 다들 나더러 불쌍한 과부래.”
해원의 눈길이 돌쇠를 지나 허담에게 닿았다.
“밤에는 서로 내 방에 들어오겠다고 으르렁거리고.”
허담의 턱이 굳었다.
“아무하고나 이러지 마십시오.”
그 말에 해원의 표정이 변했다.
“아무하고나?”
“마님.”
“네가 뭔데 나한테 사내를 골라?”
“걱정돼서 하는 말입니다.”
“지랄.”
해원은 문을 활짝 열었다.
“둘 다 나가.”
돌쇠가 먼저 물었다.
“저도요?”
“특히 너.”
“아까는 붙잡으시더니.”
“마음 바뀌었어.”
“사람 환장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라고 그러는 건데?”
돌쇠가 입술을 깨물었다.
허담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는 할 말이 남았습니다.”
“난 들을 말 없어.”
“해원.”
처음이었다.
허담이 마님이라는 호칭을 버린 것은.
해원이 멈췄다.
“방금 뭐라고 했어?”
“해원.”
“한 번만 더 불러봐.”
허담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해원.”
짝!
해원의 손바닥이 허담의 뺨을 후려쳤다.
그런데 허담은 웃었다.
“이제 좀 살아 있는 사람 같군.”
“미친놈.”
해원은 그대로 방을 나갔다.
“복례야.”
“예, 마님.”
“옷 가져와.”
“이 밤에 어디 가시려고요?”
“사내 만나러.”
복례의 입이 떡 벌어졌다.
“또요?”
해원이 돌아봤다.
“또라니?”
“아, 아닙니다.”
“내가 몇을 만났다고 벌써 또야?”
복례가 입술을 달싹였다.
“둘…….”
뒤에서 돌쇠가 말했다.
“셋 아닌가?”
해원이 홱 돌아봤다.
“넌 왜 아직 안 꺼졌어?”
“숫자 세고 있었습니다.”
“재수 없는 놈.”
그날 밤 해원은 정말 담을 넘었다.
상복 위에 검은 장옷을 뒤집어쓴 채였다.
목적지는 장터 끝 객주였다.
며칠 전부터 해원을 빤히 쳐다보던 사내가 있었다.
평양과 한양 사이를 오간다는 포목상 윤태경.
말끔한 얼굴에 입은 더러웠다.
낮에 해원을 보고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과부, 밤에는 더 예쁠 것 같은데.”
해원은 그 말을 들었다.
그래서 찾아갔다.
객주 방문을 열자 술잔을 들고 있던 태경의 얼굴이 굳었다.
“……마님?”
“왜. 낮에는 잘도 떠들더니 밤에는 말이 안 나와?”
태경이 천천히 일어났다.
“설마 제 말을 들으셨습니까?”
“응.”
“죽이러 오셨습니까?”
“그럴까?”
해원이 장옷을 벗어 걸었다.
태경의 시선이 소복에 멈췄다.
“상중 아니십니까?”
“그러니까?”
“남편이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해원이 술상을 사이에 두고 그에게 다가갔다.
“겁나면 나가.”
태경이 웃었다.
“제가 왜 나갑니까? 제 방인데.”
“그럼 입 닥치고 있어.”
해원은 그의 술잔을 빼앗아 단숨에 마셨다.
태경의 웃음이 사라졌다.
“소문보다 더한 분이네.”
“무슨 소문?”
“낮에는 열녀고 밤에는 사내 잡아먹는다는 소문.”
해원이 잔을 내려놓았다.
“벌써?”
“장터에 입이 몇 갠데요.”
“그래서 싫어?”
태경은 대답 대신 방문을 닫았다.
빗장이 걸렸다.
해원이 웃었다.
“그건 대답으로 알아들을게.”
그날 해원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객주를 나왔다.
그리고 사흘 뒤에는 나루터 사공의 방에 있었다.
이름은 강무진.
말수가 적고 몸이 단단한 사내였다.
해원이 먼저 술병을 들고 찾아가자 무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양반집 과부가 미쳤습니까?”
“조금.”
“잡히면 저부터 죽습니다.”
“싫으면 문 열어.”
무진이 문을 열었다.
해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무진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문밖을 한 번 확인한 뒤 다시 닫았다.
“사람 없는지 본 겁니다.”
“겁쟁이.”
“겁쟁이가 이러겠습니까?”
무진이 해원의 손목을 잡았다.
해원은 빼지 않았다.
“세게 잡네.”
“싫습니까?”
“아니.”
그 한마디 뒤로 등잔불이 꺼졌다.
또 이틀 뒤에는 대장간이었다.
대장장이 진필은 해원을 보자마자 욕부터 했다.
“염병, 여긴 왜 오셨습니까?”
“너 보러.”
“나한테 미친년 소리 들으러 왔습니까?”
“해봐.”
“미친 여자요.”
해원이 웃었다.
“마음에 드네.”
진필이 망치를 내려놨다.
“소문 진짜였네.”
“무슨 소문.”
“마님이 밤마다 사내 갈아치운다는 거.”
“너도 끼고 싶어?”
진필이 해원을 한참 봤다.
그러다 대장간 문을 닫았다.
“내일 후회한다고 지랄하지 마십시오.”
“내가 후회하면 네가 책임져?”
“뭘 어떻게?”
해원이 그의 앞섶을 잡아당겼다.
“그건 네가 생각해.”
그 뒤로 해원은 멈추지 않았다.
객주의 포목상.
나루터의 사공.
대장간의 대장장이.
열녀문을 세우러 온 목수.
그리고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의원 허담까지.
낮이면 최씨 부인은 손님들 앞에서 울었다.
“우리 며느리는 죽은 남편 생각에 잠도 못 잡니다.”
해원은 옆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제가 부족하여 서방님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해원은 담장을 넘으며 중얼거렸다.
“지키긴 뭘 지켜.”
복례가 뒤따라오며 속삭였다.
“오늘은 또 누구십니까?”
“오늘은 나도 몰라.”
“예?”
해원이 장터 쪽을 바라봤다.
“가서 보고 고르려고.”
복례가 입을 틀어막았다.
“마님, 정말 미치셨습니까?”
“응.”
해원이 웃었다.
“이제 좀 살 것 같아.”
하지만 그날 밤은 달랐다.
객주 뒷방 문을 열자 이미 세 사내가 앉아 있었다.
태경.
무진.
그리고 진필.
해원의 얼굴이 굳었다.
“뭐야.”
태경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마님께 여쭤볼 게 있어서요.”
“셋이 짜고 기다렸어?”
진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우리 셋만 있는 줄 아십니까?”
“무슨 소리야?”
무진이 말없이 문밖을 가리켰다.
해원이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 돌쇠가 서 있었다.
그 옆에는 허담까지 있었다.
해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무슨 개판이야?”
태경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마님이 우리 중 누구를 제일 마음에 들어 하는지 내기를 했습니다.”
해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뭐?”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더군요.”
태경이 종이를 펼쳤다.
그곳에는 남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름마다 날짜가 붙어 있었다.
해원이 그 날짜들을 확인하는 순간 웃음기가 사라졌다.
전부 정확했다.
자신이 그 사내들을 찾아갔던 밤.
단 하루도 틀리지 않았다.
“누가 적었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해원이 종이를 구겨버렸다.
“어떤 미친 새끼가 내 뒤를 밟았냐고!”
그때 객주 안쪽 방문이 열렸다.
처음 보는 사내 하나가 걸어 나왔다.
비단 도포.
술기운 하나 없는 눈.
사내는 해원을 보자 웃었다.
“드디어 뵙는군요.”
해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넌 누구야?”
“남편분과 아주 가까웠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내가 해원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봤다.
“저 날짜들.”
입꼬리가 비틀렸다.
“제가 적었습니다.”
해원이 성큼 다가갔다.
“왜.”
사내가 웃었다.
“죽은 친구 부탁이었으니까.”
해원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부탁?”
사내가 그녀의 귀 가까이 얼굴을 기울였다.
“자기가 죽으면.”
잠시 후 떨어진 말에 방 안의 모든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마누라가 몇 놈까지 품는지 끝까지 지켜봐 달라고 했습니다.”
“왕실이 아니라 네가 먼저 죽어.”해원은 해린이 든 칼을 바라봤다.“내가 왜?”해린의 손끝이 떨렸다.“그 아이 때문이야.”“아이 이름을 말하면 내가 죽는다고?”“그래.”“누가 죽이는데?”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현수가 천천히 해원 앞으로 섰다.“해린아. 칼 내려놔.”“당신이야말로 입 다물어.”“해원은 아무것도 몰라.”“그래서 지금까지 네가 마음대로 했잖아!”해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기억도 빼앗고, 아이도 빼앗고, 이름까지 빼앗았잖아!”해원이 그녀를 바라봤다.“해린.”“왜!”“내 아이 이름.”해린의 얼굴이 굳었다.“말해.”“안 돼.”“내가 죽더라도 알아야겠어.”“안 된다고!”해린이 소리쳤다.그 순간 현수가 해원의 손을 잡았다.“그만하자.”해원이 손을 뿌리쳤다.“너도 알고 있지?”“…….”“내 아이 이름.”현수는 침묵했다.해원이 차갑게 웃었다.“역시 알고 있었네.”“해원아.”“이번에는 나한테 선택권 줘.”현수가 눈을 들었다.“뭘?”“내가 누구를 믿을지.”해원의 시선이 현수에서 해린으로 옮겨갔다.“너희 둘 다 내 인생을 망쳤어.”두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그러니까 이제 내가 결정할 거야.”해원이 해린에게 다가갔다.“칼 내려.”“가까이 오지 마.”“내가 무서워?”“아니.”“그럼 내려.”해린의 손이 조금씩 내려갔다.그 순간 뒤에서 최씨 부인이 말했다.“해원아, 그 아이 이름은 윤서하야.”모두가 얼어붙었다.해원이 천천히 돌아봤다.“……뭐?”최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네 아이 이름.”현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해린은 칼을 떨어뜨렸다.쨍그랑.“안 돼…….”해원이 최씨에게 다가갔다.“서하?”“그래.”“살아 있어?”최씨가 고개를 끄덕였다.“살아 있어.”해원의 입술이 떨렸다.“어디 있어?”최씨는 대답하지 못했다.해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어디 있냐고!”최씨가 눈을 감았다.“네가 가장 믿었던 곳.”“어디?”“네가 매일 지나던 곳.
“해원의 인생이었어.”현수의 말에 해린의 표정이 굳었다.해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무슨 뜻이야?”해린이 먼저 웃었다.“현수가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보네.”“닥쳐.”“왜? 네가 제일 잘 알잖아.”해린이 해원을 바라봤다.“내가 네 인생을 훔친 게 아니야.”“그럼?”“네가 직접 줬어.”해원의 눈빛이 흔들렸다.“내가?”“그래.”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를 살리는 대신 네 인생을 포기하겠다고 네가 선택했어.”현수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그건 네가 강요한 거잖아.”“아니.”해린이 차갑게 웃었다.“내가 아니라 네가 제안했어.”현수가 굳었다.해원이 천천히 현수에게 다가갔다.“뭘 제안했어?”“해원아.”“대답해.”“……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무슨 방법?”현수가 입술을 깨물었다.해린이 대신 말했다.“네가 왕실의 신분을 포기하면 아이를 살려주겠다고 했어.”해원의 얼굴이 굳었다.“그리고?”“네 이름도.”“또?”“네 가족도.”해린이 잠시 멈췄다.“그리고 네가 사랑했던 사람까지.”해원이 현수를 바라봤다.“사랑했던 사람?”현수의 눈빛이 흔들렸다.해린이 웃었다.“바로 나.”해원이 숨을 삼켰다.“뭐?”“그때 현수는 나와 결혼하기로 했어.”현수가 소리쳤다.“그건 계약이었어!”“그래.”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해원은 그걸 몰랐지.”해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나 몰래 결혼까지 했어?”“정확히는 네가 기억을 잃기 전에.”현수가 고개를 숙였다.해원이 그에게 다가갔다.“그럼 내가 왜 너랑 다시 만났어?”“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했으니까.”“그래서 다시 사랑한 거야?”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해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너 정말 잔인하다.”그 순간 태율이 말했다.“아니.”모두가 태율을 바라봤다.태율은 해린을 가리켰다.“저 여자가 하나 빼먹었어.”해린의 표정이 굳었다.“뭘?”“해원이 왕실을 포기한 이유.”해원이 태율을 바라봤다.“뭔데?”태
“그날 네 옆에 있던 사람이야.”해원은 여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자신과 너무 닮았다.눈매도, 코도, 입술도.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누구야?”여자가 웃었다.“정말 기억이 안 나는구나.”“대답해.”“내 이름은 윤해린.”해원의 눈이 흔들렸다.“해린?”뒤에서 최씨 부인이 숨을 삼켰다.“안 돼…….”해원이 돌아봤다.“당신도 알아?”최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해린이 대신 말했다.“당연히 알지.”그녀가 최씨를 향해 웃었다.“이 여자가 나를 만든 사람이니까.”“뭐?”해원이 굳었다.최씨가 다급하게 말했다.“해원아, 저 여자의 말 듣지 마.”“왜?”“거짓말이야.”해린이 피식 웃었다.“거짓말?”그녀는 품에서 낡은 사진을 꺼냈다.사진에는 어린 해원과 해린이 나란히 서 있었다.해원의 얼굴이 굳었다.“우리…… 자매야?”“아니.”해린이 말했다.“나는 네 자매가 아니야.”해원이 사진을 뺏어 들었다.“그럼 어떻게 이렇게 닮았어?”“네 얼굴을 본떠 만들었으니까.”허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사람을 얼굴까지 만들어?”해린이 그를 바라봤다.“가능해.”“누가?”해린은 아무 말 없이 현수를 바라봤다.현수의 얼굴이 굳었다.해원이 천천히 현수를 돌아봤다.“너야?”“아니.”“그럼 왜 저 여자가 널 봐?”현수는 대답하지 못했다.해린이 말했다.“강현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 얼굴을 결정했어.”해원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뜻이야?”“네가 사라졌을 때 왕실이 널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거든.”해린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그래서 나를 데려왔어.”“내 대역으로?”“그래.”해린이 웃었다.“십 년 동안 나는 네 이름으로 살았어.”해원이 숨을 삼켰다.“그럼 왕실에 있던 건…….”“나야.”현수가 갑자기 말했다.“그만.”해린이 그를 노려봤다.“왜? 이제 와서 숨기게?”현수가 다가갔다.“해원에게 말하지 마.”“이미 늦었어.”해린이 차갑게 웃었다.“네가 해원에게
“강현수의 친동생이었어.”해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수한테 동생이 있어?”현수의 얼굴이 굳었다.“없어.”태율이 비웃었다.“있어.”“없다고 했잖아.”“네가 죽었다고 처리한 동생.”현수가 태율에게 달려들었다.“입 닥쳐!”두 사람이 엉켜 넘어졌다.허담이 둘을 떼어냈다.“그만해!”해원은 움직이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조용했다.“강현수.”현수가 숨을 몰아쉬며 해원을 바라봤다.“말해.”“…….”“네 동생 이름.”현수의 입술이 굳었다.“강태문.”해원의 눈이 커졌다.“강태문?”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번쩍 흔들렸다.어린 시절.눈 오는 밤.한 남자가 자신에게 목도리를 둘러주던 장면.그리고 웃으며 했던 말.‘해원아, 내가 대신 갈게.’해원이 관자놀이를 붙잡았다.“아…….”현수가 다가왔다.“해원아.”“오지 마!”해원이 소리쳤다.“지금 내 머릿속에 누가 보여.”현수가 멈췄다.“누구?”“태문.”현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네가 기억하고 있어?”“내가 그 사람을 알아.”해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릴 때 나를 데리고 도망치려고 했어.”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런데 왜 죽었다고 했어?”이번에는 최씨 부인이 대답했다.“죽은 게 아니니까.”해원이 그녀를 바라봤다.“그럼 어디 있어?”최씨는 입을 열지 못했다.해원이 다가갔다.“이번에는 제발 제대로 말해.”최씨가 눈물을 흘렸다.“강태문은 왕실에 들어갔어.”“왜?”“널 대신해서.”해원의 표정이 굳었다.“내 대신?”“왕실은 네가 필요했어. 하지만 네가 도망쳤지.”최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태문이 네 이름을 사용했어.”허담이 욕설을 내뱉었다.“미친…….”해원이 물었다.“얼마나 오래?”“십 년.”해원의 눈이 커졌다.“십 년 동안?”“왕실은 태문을 윤해원으로 알고 있었어.”현수가 고개를 숙였다.해원이 현수를 바라봤다.“너도 알고 있었어?”“그래.”“그런데
“네가 낳은 아이는 이미 죽었어.”해원은 현수를 바라봤다.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품에 안긴 아이가 작은 손으로 해원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해원은 아이를 내려다봤다.그리고 다시 현수를 봤다.“그럼 이 아이는 누구야?”현수는 입을 다물었다.“대답해.”“…….”“또 침묵하면 이번엔 내가 알아서 판단할 거야.”현수가 낮게 말했다.“그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야.”“누구 아이인데?”“말할 수 없어.”해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지겹다.”그녀가 아이를 태율에게 내밀었다.“받아.”태율이 당황했다.“해원아.”“받으라고.”태율이 아이를 받아 안았다.해원은 현수 앞으로 걸어갔다.“너는 내가 미쳐 있다고 생각하지?”“아니.”“그럼 왜 계속 거짓말해?”“널 살리려고.”“그 말 이제 믿지 않아.”해원이 현수의 뺨을 세게 때렸다.찰싹.현수의 얼굴이 돌아갔다.“이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날의 대가야.”해원이 다시 손을 내렸다.“그리고 이것도.”두 번째 손바닥이 현수의 얼굴을 때렸다.“이건 내 아이를 죽었다고 속인 대가.”현수는 맞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허담이 씁쓸하게 웃었다.“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현수가 그를 노려봤다.“너까지 끼어들지 마.”“나도 알아.”허담이 해원을 바라봤다.“그 아이가 네 친자가 아니라는 거.”해원이 멈칫했다.“너도?”“그래.”“언제부터?”“오늘.”해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거짓말.”“나도 방금 알았어.”허담은 태율에게 시선을 돌렸다.“문제는 저놈이 알고 있었다는 거야.”태율의 표정이 굳었다.해원이 태율을 바라봤다.“너는?”태율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한참 고개를 숙였다.“알고 있었어.”해원의 얼굴이 굳었다.“처음부터?”“그래.”“그런데 왜 내 아들이라고 했어?”태율이 입술을 깨물었다.“네가 살아갈 이유가 필요했으니까.”“그래서 남의 아이를 내 아이로 속였어?”“미안해.”“미안하다고 끝날 일이야?”태율이 고개를 숙였다.그때
“강태율……?”해원의 입에서 이름이 새어 나왔다.강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품에 안긴 아이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아이는 울음을 멈췄다.그 모습을 본 순간 해원의 눈빛이 변했다.“그 아이…….”태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네 아들이야.”해원이 그대로 굳었다.현수가 앞으로 뛰어나왔다.“아이 내려놔.”태율이 차갑게 웃었다.“왜?”“당장.”“네가 무슨 자격으로?”현수가 이를 악물었다.“그 아이는 해원의 아들이야.”“그래.”태율이 아이를 바라봤다.“그래서 내가 데리고 있었어.”해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왜?”“네가 찾으러 오지 못하게 하려고.”“누가 시켰어?”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해원이 한 걸음 다가갔다.“태율아.”그가 움찔했다.“나한테 말해.”태율은 한참 해원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네가 나를 죽었다고 믿게 만든 것도 나야.”해원의 얼굴이 굳었다.“무슨 말이야?”“내가 죽은 척했어.”“왜?”“최씨가 부탁했어.”최씨 부인이 고개를 숙였다.해원이 그녀를 노려봤다.“또 당신이야?”“해원아…….”“당신 때문에 몇 번을 속아야 해?”최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널 지키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어.”“그런데 왜 태율까지 숨겼어?”최씨는 대답하지 못했다.태율이 대신 입을 열었다.“내가 네 아이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이야.”해원이 숨을 삼켰다.“그럼 현수는?”태율이 현수를 바라봤다.“저 새끼는 아이가 죽었다고 믿게 만들었지.”현수가 소리쳤다.“네가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잖아!”“네가 죽였다고 속였으니까.”“그건 해원을 지키려고—”“웃기지 마.”태율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넌 해원을 지킨 게 아니라 네 곁에 묶어둔 거야.”허담이 현수에게 다가갔다.“이제 인정해.”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해원은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봤다.그리고 태율에게 물었다.“내 아이를 왜 지금 데려온 거야?”태율의 얼굴이 굳었다.“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됐어.”“무슨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