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사람, 사실 마님과 혼인한 적 없습니다.”
해원의 손이 류건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똑바로 말해.”
“혼례는 치렀지만 혼서는 다른 이름으로 들어갔습니다.”
“누구 이름.”
류건이 별당 밖의 강태율을 가리켰다.
“저 사람.”
해원은 한참 태율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은 놈 과부도 아니고, 저 새끼 아내라는 거야?”
최씨 부인이 소리쳤다.
“말조심해라!”
“닥치세요.”
“뭐?”
“사람 인생을 바꿔놓고 이제 와서 말조심?”
해원이 상복 고름을 풀어 바닥에 던졌다.
“좋네. 과부도 아니면 더 거리낄 게 없잖아.”
태율이 얼굴을 굳혔다.
“해원.”
“왜. 남편 행세라도 하게?”
“혼서는 내 이름이 맞다.”
“그래서?”
“법대로라면 넌 내 아내다.”
해원이 코웃음을 쳤다.
“법 좋아하네. 신방에는 동생 밀어 넣고 이제 와서 아내?”
“사정이 있었다.”
“그 사정 엉덩이에 처박아.”
돌쇠가 웃음을 터뜨렸다.
태율이 그를 노려봤다.
“뭘 웃어?”
“말을 시원하게 하셔서.”
해원이 돌쇠를 가리켰다.
“넌 오늘 아냐.”
돌쇠의 웃음이 싹 사라졌다.
“예?”
“오늘은 류건.”
“왜 또 저놈입니까?”
“내가 골랐으니까.”
허담이 한숨을 쉬었다.
“사람을 무슨 술안주 고르듯 하십니까?”
해원이 허담에게 다가갔다.
“너도 끼고 싶어?”
허담의 입이 닫혔다.
“그럼 질투하지 마. 보기 추해.”
그날 밤 해원은 류건과 객주로 갔다.
장터를 지나는데 사내들이 대놓고 힐끗거렸다.
“저 여자가 그 열녀래.”
“열녀는 얼어 죽을.”
해원이 걸음을 멈췄다.
“방금 말한 놈 나와.”
젊은 장정 하나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제가 했습니다.”
“이름.”
“임도하.”
“혼인했어?”
“아닙니다.”
“마음 둔 여자 있어?”
“없습니다.”
해원이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그럼 내일 밤 비워.”
도하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류건이 헛웃음을 쳤다.
“제 옆에서 다음 사내를 정합니까?”
“싫어?”
“질투는 납니다.”
“그럼 오늘 잘해.”
해원이 먼저 객주 문을 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류건의 방에서 나와 곧장 대장간으로 갔다.
진필이 쇠를 두드리다 해원을 보자 욕부터 했다.
“염병, 아침부터 왜 오셨습니까?”
“오늘 밤 안 돼.”
“뭐가요?”
“네 차례.”
진필의 망치가 멈췄다.
“사람을 진짜 순번 매깁니까?”
“싫으면 빼줄게.”
“누가 싫답니까?”
“그럼 내일.”
진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마님 때문에 동네 사내들 싸움 나겠습니다.”
“싸우면 지는 놈이 빠지라 그래.”
“성질 한번 지랄맞으시네.”
“이제 알았어?”
그날 밤은 도하였다.
도하는 방문을 열어놓고도 한동안 해원을 들이지 못했다.
“무서워?”
“조금.”
“뭐가.”
“마님이요.”
“싫으면 닫아.”
해원이 돌아서자 도하가 손목을 잡았다.
“가라고는 안 했습니다.”
해원이 돌아봤다.
“확실히 말해.”
도하가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해원은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새벽녘까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다음 밤에는 진필.
그 다음은 돌쇠.
해원은 약속한 순서를 실제로 지켰다.
복례는 매일 새벽 담 아래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마님, 이러다 진짜 동네 남자 다 만나시겠어요.”
“다 만날 필요는 없어.”
“그럼 몇 명까지요?”
해원이 장옷을 털며 웃었다.
“마음에 드는 놈이 없어질 때까지.”
하지만 문제는 사내들끼리였다.
돌쇠가 진필의 멱살을 잡았고,
진필은 태경에게 주먹을 날렸으며, 태경은 류건에게 해원이 누구를 제일 오래 품었는지 따졌다.결국 어느 밤, 해원이 객주에 도착했을 때 사내 여섯이 한 방에 모여 있었다.
돌쇠가 말했다.
“마님이 정하십시오.”
“뭘.”
“우리 중 누가 제일입니까?”
해원은 기가 막혀 웃었다.
“이 새끼들이 단체로 돌았나.”
진필이 팔짱을 꼈다.
“누군가는 제일일 것 아닙니까?”
“없어.”
“거짓말.”
그때 객주 문이 열렸다.
허담이 들어왔다.
그 뒤에는 태율까지 있었다.
해원이 눈썹을 올렸다.
“너희는 왜 왔어?”
태율이 탁자 위에 은전 주머니를 던졌다.
“오늘부터 저놈들 다 끊어.”
마당처럼 시끄럽던 방이 조용해졌다.
해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돈으로 나 사게?”
“필요한 만큼 주지.”
해원은 은전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태율 얼굴에 던졌다.
“개수작 부리지 마.”
은전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내 밤값 매기는 새끼는 제일 먼저 탈락이야.”
태율이 이를 악물었다.
“윤해원.”
“왜.”
“그럼 얼마면 돼?”
해원이 성큼 다가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짝.
“이게 대답이야.”
돌쇠가 낮게 웃었다.
그 순간 문밖에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돈으로 안 된다면 몸으로 경쟁하면 되겠군.”
모두가 돌아봤다.
갓을 벗은 사내의 얼굴을 본 태율이 새파랗게 질렸다.
“형님?”
해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태율에게 형이 또 있었다.
사내는 해원을 보며 웃었다.
“강태성입니다.”
“그래서?”
“저 집안 장남.”
그가 방 안의 사내들을 한 번 훑었다.
“그리고 당신 남편이라는 놈들 중에서 유일하게.”
태성이 해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첫날밤도 치를 수 있었던 사내지.”
해원이 그 손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또 남편 타령이네.”
“싫습니까?”
“아니.”
해원은 그의 손을 잡지 않고 바로 앞에 섰다.
“혼인했어?”
“안 했습니다.”
“마음 둔 여자?”
“없습니다.”
해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오늘은 너.”
태율이 버럭 소리쳤다.
“해원!”
해원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왜.”
“저 인간은 내 형이야!”
해원이 태성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러니까 더 재밌잖아.”
“왕실이 아니라 네가 먼저 죽어.”해원은 해린이 든 칼을 바라봤다.“내가 왜?”해린의 손끝이 떨렸다.“그 아이 때문이야.”“아이 이름을 말하면 내가 죽는다고?”“그래.”“누가 죽이는데?”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현수가 천천히 해원 앞으로 섰다.“해린아. 칼 내려놔.”“당신이야말로 입 다물어.”“해원은 아무것도 몰라.”“그래서 지금까지 네가 마음대로 했잖아!”해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기억도 빼앗고, 아이도 빼앗고, 이름까지 빼앗았잖아!”해원이 그녀를 바라봤다.“해린.”“왜!”“내 아이 이름.”해린의 얼굴이 굳었다.“말해.”“안 돼.”“내가 죽더라도 알아야겠어.”“안 된다고!”해린이 소리쳤다.그 순간 현수가 해원의 손을 잡았다.“그만하자.”해원이 손을 뿌리쳤다.“너도 알고 있지?”“…….”“내 아이 이름.”현수는 침묵했다.해원이 차갑게 웃었다.“역시 알고 있었네.”“해원아.”“이번에는 나한테 선택권 줘.”현수가 눈을 들었다.“뭘?”“내가 누구를 믿을지.”해원의 시선이 현수에서 해린으로 옮겨갔다.“너희 둘 다 내 인생을 망쳤어.”두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그러니까 이제 내가 결정할 거야.”해원이 해린에게 다가갔다.“칼 내려.”“가까이 오지 마.”“내가 무서워?”“아니.”“그럼 내려.”해린의 손이 조금씩 내려갔다.그 순간 뒤에서 최씨 부인이 말했다.“해원아, 그 아이 이름은 윤서하야.”모두가 얼어붙었다.해원이 천천히 돌아봤다.“……뭐?”최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네 아이 이름.”현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해린은 칼을 떨어뜨렸다.쨍그랑.“안 돼…….”해원이 최씨에게 다가갔다.“서하?”“그래.”“살아 있어?”최씨가 고개를 끄덕였다.“살아 있어.”해원의 입술이 떨렸다.“어디 있어?”최씨는 대답하지 못했다.해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어디 있냐고!”최씨가 눈을 감았다.“네가 가장 믿었던 곳.”“어디?”“네가 매일 지나던 곳.
“해원의 인생이었어.”현수의 말에 해린의 표정이 굳었다.해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무슨 뜻이야?”해린이 먼저 웃었다.“현수가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보네.”“닥쳐.”“왜? 네가 제일 잘 알잖아.”해린이 해원을 바라봤다.“내가 네 인생을 훔친 게 아니야.”“그럼?”“네가 직접 줬어.”해원의 눈빛이 흔들렸다.“내가?”“그래.”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를 살리는 대신 네 인생을 포기하겠다고 네가 선택했어.”현수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그건 네가 강요한 거잖아.”“아니.”해린이 차갑게 웃었다.“내가 아니라 네가 제안했어.”현수가 굳었다.해원이 천천히 현수에게 다가갔다.“뭘 제안했어?”“해원아.”“대답해.”“……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무슨 방법?”현수가 입술을 깨물었다.해린이 대신 말했다.“네가 왕실의 신분을 포기하면 아이를 살려주겠다고 했어.”해원의 얼굴이 굳었다.“그리고?”“네 이름도.”“또?”“네 가족도.”해린이 잠시 멈췄다.“그리고 네가 사랑했던 사람까지.”해원이 현수를 바라봤다.“사랑했던 사람?”현수의 눈빛이 흔들렸다.해린이 웃었다.“바로 나.”해원이 숨을 삼켰다.“뭐?”“그때 현수는 나와 결혼하기로 했어.”현수가 소리쳤다.“그건 계약이었어!”“그래.”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해원은 그걸 몰랐지.”해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나 몰래 결혼까지 했어?”“정확히는 네가 기억을 잃기 전에.”현수가 고개를 숙였다.해원이 그에게 다가갔다.“그럼 내가 왜 너랑 다시 만났어?”“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했으니까.”“그래서 다시 사랑한 거야?”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해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너 정말 잔인하다.”그 순간 태율이 말했다.“아니.”모두가 태율을 바라봤다.태율은 해린을 가리켰다.“저 여자가 하나 빼먹었어.”해린의 표정이 굳었다.“뭘?”“해원이 왕실을 포기한 이유.”해원이 태율을 바라봤다.“뭔데?”태
“그날 네 옆에 있던 사람이야.”해원은 여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자신과 너무 닮았다.눈매도, 코도, 입술도.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누구야?”여자가 웃었다.“정말 기억이 안 나는구나.”“대답해.”“내 이름은 윤해린.”해원의 눈이 흔들렸다.“해린?”뒤에서 최씨 부인이 숨을 삼켰다.“안 돼…….”해원이 돌아봤다.“당신도 알아?”최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해린이 대신 말했다.“당연히 알지.”그녀가 최씨를 향해 웃었다.“이 여자가 나를 만든 사람이니까.”“뭐?”해원이 굳었다.최씨가 다급하게 말했다.“해원아, 저 여자의 말 듣지 마.”“왜?”“거짓말이야.”해린이 피식 웃었다.“거짓말?”그녀는 품에서 낡은 사진을 꺼냈다.사진에는 어린 해원과 해린이 나란히 서 있었다.해원의 얼굴이 굳었다.“우리…… 자매야?”“아니.”해린이 말했다.“나는 네 자매가 아니야.”해원이 사진을 뺏어 들었다.“그럼 어떻게 이렇게 닮았어?”“네 얼굴을 본떠 만들었으니까.”허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사람을 얼굴까지 만들어?”해린이 그를 바라봤다.“가능해.”“누가?”해린은 아무 말 없이 현수를 바라봤다.현수의 얼굴이 굳었다.해원이 천천히 현수를 돌아봤다.“너야?”“아니.”“그럼 왜 저 여자가 널 봐?”현수는 대답하지 못했다.해린이 말했다.“강현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 얼굴을 결정했어.”해원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뜻이야?”“네가 사라졌을 때 왕실이 널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거든.”해린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그래서 나를 데려왔어.”“내 대역으로?”“그래.”해린이 웃었다.“십 년 동안 나는 네 이름으로 살았어.”해원이 숨을 삼켰다.“그럼 왕실에 있던 건…….”“나야.”현수가 갑자기 말했다.“그만.”해린이 그를 노려봤다.“왜? 이제 와서 숨기게?”현수가 다가갔다.“해원에게 말하지 마.”“이미 늦었어.”해린이 차갑게 웃었다.“네가 해원에게
“강현수의 친동생이었어.”해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수한테 동생이 있어?”현수의 얼굴이 굳었다.“없어.”태율이 비웃었다.“있어.”“없다고 했잖아.”“네가 죽었다고 처리한 동생.”현수가 태율에게 달려들었다.“입 닥쳐!”두 사람이 엉켜 넘어졌다.허담이 둘을 떼어냈다.“그만해!”해원은 움직이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조용했다.“강현수.”현수가 숨을 몰아쉬며 해원을 바라봤다.“말해.”“…….”“네 동생 이름.”현수의 입술이 굳었다.“강태문.”해원의 눈이 커졌다.“강태문?”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번쩍 흔들렸다.어린 시절.눈 오는 밤.한 남자가 자신에게 목도리를 둘러주던 장면.그리고 웃으며 했던 말.‘해원아, 내가 대신 갈게.’해원이 관자놀이를 붙잡았다.“아…….”현수가 다가왔다.“해원아.”“오지 마!”해원이 소리쳤다.“지금 내 머릿속에 누가 보여.”현수가 멈췄다.“누구?”“태문.”현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네가 기억하고 있어?”“내가 그 사람을 알아.”해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릴 때 나를 데리고 도망치려고 했어.”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런데 왜 죽었다고 했어?”이번에는 최씨 부인이 대답했다.“죽은 게 아니니까.”해원이 그녀를 바라봤다.“그럼 어디 있어?”최씨는 입을 열지 못했다.해원이 다가갔다.“이번에는 제발 제대로 말해.”최씨가 눈물을 흘렸다.“강태문은 왕실에 들어갔어.”“왜?”“널 대신해서.”해원의 표정이 굳었다.“내 대신?”“왕실은 네가 필요했어. 하지만 네가 도망쳤지.”최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태문이 네 이름을 사용했어.”허담이 욕설을 내뱉었다.“미친…….”해원이 물었다.“얼마나 오래?”“십 년.”해원의 눈이 커졌다.“십 년 동안?”“왕실은 태문을 윤해원으로 알고 있었어.”현수가 고개를 숙였다.해원이 현수를 바라봤다.“너도 알고 있었어?”“그래.”“그런데
“네가 낳은 아이는 이미 죽었어.”해원은 현수를 바라봤다.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품에 안긴 아이가 작은 손으로 해원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해원은 아이를 내려다봤다.그리고 다시 현수를 봤다.“그럼 이 아이는 누구야?”현수는 입을 다물었다.“대답해.”“…….”“또 침묵하면 이번엔 내가 알아서 판단할 거야.”현수가 낮게 말했다.“그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야.”“누구 아이인데?”“말할 수 없어.”해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지겹다.”그녀가 아이를 태율에게 내밀었다.“받아.”태율이 당황했다.“해원아.”“받으라고.”태율이 아이를 받아 안았다.해원은 현수 앞으로 걸어갔다.“너는 내가 미쳐 있다고 생각하지?”“아니.”“그럼 왜 계속 거짓말해?”“널 살리려고.”“그 말 이제 믿지 않아.”해원이 현수의 뺨을 세게 때렸다.찰싹.현수의 얼굴이 돌아갔다.“이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날의 대가야.”해원이 다시 손을 내렸다.“그리고 이것도.”두 번째 손바닥이 현수의 얼굴을 때렸다.“이건 내 아이를 죽었다고 속인 대가.”현수는 맞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허담이 씁쓸하게 웃었다.“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현수가 그를 노려봤다.“너까지 끼어들지 마.”“나도 알아.”허담이 해원을 바라봤다.“그 아이가 네 친자가 아니라는 거.”해원이 멈칫했다.“너도?”“그래.”“언제부터?”“오늘.”해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거짓말.”“나도 방금 알았어.”허담은 태율에게 시선을 돌렸다.“문제는 저놈이 알고 있었다는 거야.”태율의 표정이 굳었다.해원이 태율을 바라봤다.“너는?”태율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한참 고개를 숙였다.“알고 있었어.”해원의 얼굴이 굳었다.“처음부터?”“그래.”“그런데 왜 내 아들이라고 했어?”태율이 입술을 깨물었다.“네가 살아갈 이유가 필요했으니까.”“그래서 남의 아이를 내 아이로 속였어?”“미안해.”“미안하다고 끝날 일이야?”태율이 고개를 숙였다.그때
“강태율……?”해원의 입에서 이름이 새어 나왔다.강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품에 안긴 아이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아이는 울음을 멈췄다.그 모습을 본 순간 해원의 눈빛이 변했다.“그 아이…….”태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네 아들이야.”해원이 그대로 굳었다.현수가 앞으로 뛰어나왔다.“아이 내려놔.”태율이 차갑게 웃었다.“왜?”“당장.”“네가 무슨 자격으로?”현수가 이를 악물었다.“그 아이는 해원의 아들이야.”“그래.”태율이 아이를 바라봤다.“그래서 내가 데리고 있었어.”해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왜?”“네가 찾으러 오지 못하게 하려고.”“누가 시켰어?”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해원이 한 걸음 다가갔다.“태율아.”그가 움찔했다.“나한테 말해.”태율은 한참 해원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네가 나를 죽었다고 믿게 만든 것도 나야.”해원의 얼굴이 굳었다.“무슨 말이야?”“내가 죽은 척했어.”“왜?”“최씨가 부탁했어.”최씨 부인이 고개를 숙였다.해원이 그녀를 노려봤다.“또 당신이야?”“해원아…….”“당신 때문에 몇 번을 속아야 해?”최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널 지키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어.”“그런데 왜 태율까지 숨겼어?”최씨는 대답하지 못했다.태율이 대신 입을 열었다.“내가 네 아이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이야.”해원이 숨을 삼켰다.“그럼 현수는?”태율이 현수를 바라봤다.“저 새끼는 아이가 죽었다고 믿게 만들었지.”현수가 소리쳤다.“네가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잖아!”“네가 죽였다고 속였으니까.”“그건 해원을 지키려고—”“웃기지 마.”태율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넌 해원을 지킨 게 아니라 네 곁에 묶어둔 거야.”허담이 현수에게 다가갔다.“이제 인정해.”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해원은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봤다.그리고 태율에게 물었다.“내 아이를 왜 지금 데려온 거야?”태율의 얼굴이 굳었다.“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됐어.”“무슨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