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사람, 사실 마님과 혼인한 적 없습니다.”
해원의 손이 류건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똑바로 말해.”
“혼례는 치렀지만 혼서는 다른 이름으로 들어갔습니다.”
“누구 이름.”
류건이 별당 밖의 강태율을 바라봤다.
“저 사람.”
해원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태율?”
태율의 얼굴이 굳었다.
최씨 부인이 소리쳤다.
“류건! 그 주둥이 닥쳐!”
“왜요? 언제까지 며느리 하나 병신 만들어놓고 열녀 장사할 겁니까?”
해원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강태율.”
“해원, 들어가서 말하자.”
“내가 네 아내야?”
마당이 얼어붙었다.
돌쇠가 욕을 삼켰다.
“이 집구석은 까도 까도 지랄이네.”
태율이 입을 열지 못하자 해원이 웃었다.
“대답 못 하네.”
최씨 부인이 달려와 해원의 팔을 붙잡았다.
“혼서에 이름만 잘못 들어간 것이다.”
“잘못?”
해원이 손을 뿌리쳤다.
“신랑 이름을 바꿔놓고 잘못?”
“태율이가 혼례 전날 사라졌어!”
최씨 부인이 결국 소리쳤다.
“그래서 둘째를 대신 앉혔다!”
해원의 눈이 번뜩였다.
“그럼 난 죽은 놈 마누라도 아니었네.”
“세상은 그렇게 안 본다.”
“세상?”
해원이 상복 고름을 풀어 바닥에 던졌다.
“그놈의 세상이 내 밤마다 대신 살아줘?”
하얀 저고리 위에 걸쳤던 상복이 발밑으로 떨어졌다.
태율이 이를 악물었다.
“옷부터 주워.”
“싫어.”
“해원.”
“내 이름 부르지 마. 서방 행세 역겨우니까.”
류건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태율이 그를 노려봤다.
“너는 꺼져.”
“오늘 밤 선택받은 건 접니다.”
“입 닥쳐.”
해원이 류건의 팔짱을 끼었다.
“왜? 네 아내라며.”
“그렇다면 더더욱 저놈과 들어가면 안 되지.”
“그렇다면?”
해원이 비웃었다.
“방금까지 날 제수씨라 부르던 새끼가 이제 남편이래.”
태율의 얼굴이 붉어졌다.
해원은 일부러 류건의 가슴에 기대었다.
“류건.”
“예.”
“술 좋아해?”
“사람에 따라.”
“오늘은?”
류건의 시선이 해원에게 내려앉았다.
“밤새 마실 수 있습니다.”
“좋아. 객주 가자.”
최씨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어딜 가!”
“과부도 아니라잖아요.”
“네가 열녀문을 망치면 가만두지 않겠다!”
해원이 걸음을 멈췄다.
“아직도 열녀문 타령이야?”
그녀가 웃었다.
“좋아요. 그 문 꼭 세워요.”
“뭐?”
“내가 매일 밤 그 밑으로 사내 하나씩 데리고 지나갈 테니까.”
진필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마님, 그건 좀 보고 싶네.”
해원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넌 내일.”
“예?”
“오늘은 류건. 내일은 너.”
진필의 웃음이 굳었다.
돌쇠가 버럭했다.
“왜 저놈이 또입니까?”
“질투해?”
“아닙니다.”
“표정은 개처럼 물어뜯겠는데?”
“그냥 순서가 좆같아서 그렇습니다.”
해원이 웃었다.
“그럼 모레.”
“누가요?”
“너.”
허담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사람을 줄 세우는 겁니까?”
해원이 그를 돌아봤다.
“넌 맨 뒤.”
“왜요?”
“재수 없어서.”
마당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허담의 얼굴이 썩었다.
그날 밤 해원은 류건과 객주로 갔다.
장터를 지나는 동안 소문을 들은 사내들이 대놓고 고개를 돌렸다.
“저 여자가 그 열녀래.”
“열녀는 무슨.”
해원이 발을 멈췄다.
“방금 말한 놈 누구야?”
젊은 장정 하나가 움찔했다.
“접니다.”
“이름.”
“임도하입니다.”
해원이 그 얼굴을 한번 훑었다.
“괜찮네.”
류건이 헛웃음을 쳤다.
“제 옆에서도 고르십니까?”
“내일 약속이라도 잡으면 안 돼?”
도하의 귀가 붉어졌다.
해원이 웃었다.
“내일 밤 비워둬.”
“마님!”
복례가 뒤에서 비명을 질렀다.
“왜.”
“진필 나리랑 약속하셨잖아요!”
“그럼 모레.”
“돌쇠가 모레입니다!”
“그럼 그다음.”
류건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미친 여자군.”
해원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제 알았어?”
하지만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해원은 문을 잠그지 않았다.
“왜 안 잠급니까?”
“오늘은 구경꾼이 올 것 같아서.”
“태율 형님?”
“아니.”
해원은 술을 따랐다.
“내가 진짜 궁금한 놈.”
“누굽니까?”
“죽은 줄 알았던 놈.”
류건의 손이 멈췄다.
해원이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왜.”
“무슨 말씀인지.”
“너 아까부터 죽은 남편 얘기할 때 한 번도 ‘죽었다’고 안 했어.”
류건이 입을 다물었다.
해원의 웃음이 사라졌다.
“설마.”
그 순간 객주 아래층이 소란스러워졌다.
“비켜!”
익숙한 목소리였다.
해원의 손에서 술잔이 떨어졌다.
쨍.
반년 전까지 밤마다 기침하던 목소리.
죽어 관까지 닫았던 남자의 목소리.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류건이 눈을 감았다.
“이래서 제가 오늘 온 겁니다.”
문이 벌컥 열렸다.
해원은 숨을 삼켰다.
죽은 남편 강현수가 살아서 서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팔에는 배가 불러온 여자가 매달려 있었다.
현수가 해원을 보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미친년이.”
해원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수가 여자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
“내가 없는 사이 아주 동네 사내를 다 갈아치웠더라?”
해원의 시선은 여자의 배에 꽂혀 있었다.
“저 여자는 누구야?”
현수가 웃었다.
“내 아내.”
해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잘됐네.”
“뭐?”
해원은 류건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었다.
“나도 이제 남의 남편 눈치 볼 필요 없잖아.”
그러자 임신한 여자가 해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언니는 원래부터 현수 오라버니 아내가 아니었어요.”
해원의 얼굴이 굳었다.
여자가 배를 감싸며 웃었다.
“언니 혼례날 신부 자리에 앉아야 했던 사람.”
그녀가 천천히 덧붙였다.
“원래 저였거든요.”
“왕실이 아니라 네가 먼저 죽어.”해원은 해린이 든 칼을 바라봤다.“내가 왜?”해린의 손끝이 떨렸다.“그 아이 때문이야.”“아이 이름을 말하면 내가 죽는다고?”“그래.”“누가 죽이는데?”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현수가 천천히 해원 앞으로 섰다.“해린아. 칼 내려놔.”“당신이야말로 입 다물어.”“해원은 아무것도 몰라.”“그래서 지금까지 네가 마음대로 했잖아!”해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기억도 빼앗고, 아이도 빼앗고, 이름까지 빼앗았잖아!”해원이 그녀를 바라봤다.“해린.”“왜!”“내 아이 이름.”해린의 얼굴이 굳었다.“말해.”“안 돼.”“내가 죽더라도 알아야겠어.”“안 된다고!”해린이 소리쳤다.그 순간 현수가 해원의 손을 잡았다.“그만하자.”해원이 손을 뿌리쳤다.“너도 알고 있지?”“…….”“내 아이 이름.”현수는 침묵했다.해원이 차갑게 웃었다.“역시 알고 있었네.”“해원아.”“이번에는 나한테 선택권 줘.”현수가 눈을 들었다.“뭘?”“내가 누구를 믿을지.”해원의 시선이 현수에서 해린으로 옮겨갔다.“너희 둘 다 내 인생을 망쳤어.”두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그러니까 이제 내가 결정할 거야.”해원이 해린에게 다가갔다.“칼 내려.”“가까이 오지 마.”“내가 무서워?”“아니.”“그럼 내려.”해린의 손이 조금씩 내려갔다.그 순간 뒤에서 최씨 부인이 말했다.“해원아, 그 아이 이름은 윤서하야.”모두가 얼어붙었다.해원이 천천히 돌아봤다.“……뭐?”최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네 아이 이름.”현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해린은 칼을 떨어뜨렸다.쨍그랑.“안 돼…….”해원이 최씨에게 다가갔다.“서하?”“그래.”“살아 있어?”최씨가 고개를 끄덕였다.“살아 있어.”해원의 입술이 떨렸다.“어디 있어?”최씨는 대답하지 못했다.해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어디 있냐고!”최씨가 눈을 감았다.“네가 가장 믿었던 곳.”“어디?”“네가 매일 지나던 곳.
“해원의 인생이었어.”현수의 말에 해린의 표정이 굳었다.해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무슨 뜻이야?”해린이 먼저 웃었다.“현수가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보네.”“닥쳐.”“왜? 네가 제일 잘 알잖아.”해린이 해원을 바라봤다.“내가 네 인생을 훔친 게 아니야.”“그럼?”“네가 직접 줬어.”해원의 눈빛이 흔들렸다.“내가?”“그래.”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를 살리는 대신 네 인생을 포기하겠다고 네가 선택했어.”현수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그건 네가 강요한 거잖아.”“아니.”해린이 차갑게 웃었다.“내가 아니라 네가 제안했어.”현수가 굳었다.해원이 천천히 현수에게 다가갔다.“뭘 제안했어?”“해원아.”“대답해.”“……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무슨 방법?”현수가 입술을 깨물었다.해린이 대신 말했다.“네가 왕실의 신분을 포기하면 아이를 살려주겠다고 했어.”해원의 얼굴이 굳었다.“그리고?”“네 이름도.”“또?”“네 가족도.”해린이 잠시 멈췄다.“그리고 네가 사랑했던 사람까지.”해원이 현수를 바라봤다.“사랑했던 사람?”현수의 눈빛이 흔들렸다.해린이 웃었다.“바로 나.”해원이 숨을 삼켰다.“뭐?”“그때 현수는 나와 결혼하기로 했어.”현수가 소리쳤다.“그건 계약이었어!”“그래.”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해원은 그걸 몰랐지.”해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나 몰래 결혼까지 했어?”“정확히는 네가 기억을 잃기 전에.”현수가 고개를 숙였다.해원이 그에게 다가갔다.“그럼 내가 왜 너랑 다시 만났어?”“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했으니까.”“그래서 다시 사랑한 거야?”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해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너 정말 잔인하다.”그 순간 태율이 말했다.“아니.”모두가 태율을 바라봤다.태율은 해린을 가리켰다.“저 여자가 하나 빼먹었어.”해린의 표정이 굳었다.“뭘?”“해원이 왕실을 포기한 이유.”해원이 태율을 바라봤다.“뭔데?”태
“그날 네 옆에 있던 사람이야.”해원은 여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자신과 너무 닮았다.눈매도, 코도, 입술도.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누구야?”여자가 웃었다.“정말 기억이 안 나는구나.”“대답해.”“내 이름은 윤해린.”해원의 눈이 흔들렸다.“해린?”뒤에서 최씨 부인이 숨을 삼켰다.“안 돼…….”해원이 돌아봤다.“당신도 알아?”최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해린이 대신 말했다.“당연히 알지.”그녀가 최씨를 향해 웃었다.“이 여자가 나를 만든 사람이니까.”“뭐?”해원이 굳었다.최씨가 다급하게 말했다.“해원아, 저 여자의 말 듣지 마.”“왜?”“거짓말이야.”해린이 피식 웃었다.“거짓말?”그녀는 품에서 낡은 사진을 꺼냈다.사진에는 어린 해원과 해린이 나란히 서 있었다.해원의 얼굴이 굳었다.“우리…… 자매야?”“아니.”해린이 말했다.“나는 네 자매가 아니야.”해원이 사진을 뺏어 들었다.“그럼 어떻게 이렇게 닮았어?”“네 얼굴을 본떠 만들었으니까.”허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사람을 얼굴까지 만들어?”해린이 그를 바라봤다.“가능해.”“누가?”해린은 아무 말 없이 현수를 바라봤다.현수의 얼굴이 굳었다.해원이 천천히 현수를 돌아봤다.“너야?”“아니.”“그럼 왜 저 여자가 널 봐?”현수는 대답하지 못했다.해린이 말했다.“강현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 얼굴을 결정했어.”해원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뜻이야?”“네가 사라졌을 때 왕실이 널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거든.”해린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그래서 나를 데려왔어.”“내 대역으로?”“그래.”해린이 웃었다.“십 년 동안 나는 네 이름으로 살았어.”해원이 숨을 삼켰다.“그럼 왕실에 있던 건…….”“나야.”현수가 갑자기 말했다.“그만.”해린이 그를 노려봤다.“왜? 이제 와서 숨기게?”현수가 다가갔다.“해원에게 말하지 마.”“이미 늦었어.”해린이 차갑게 웃었다.“네가 해원에게
“강현수의 친동생이었어.”해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수한테 동생이 있어?”현수의 얼굴이 굳었다.“없어.”태율이 비웃었다.“있어.”“없다고 했잖아.”“네가 죽었다고 처리한 동생.”현수가 태율에게 달려들었다.“입 닥쳐!”두 사람이 엉켜 넘어졌다.허담이 둘을 떼어냈다.“그만해!”해원은 움직이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조용했다.“강현수.”현수가 숨을 몰아쉬며 해원을 바라봤다.“말해.”“…….”“네 동생 이름.”현수의 입술이 굳었다.“강태문.”해원의 눈이 커졌다.“강태문?”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번쩍 흔들렸다.어린 시절.눈 오는 밤.한 남자가 자신에게 목도리를 둘러주던 장면.그리고 웃으며 했던 말.‘해원아, 내가 대신 갈게.’해원이 관자놀이를 붙잡았다.“아…….”현수가 다가왔다.“해원아.”“오지 마!”해원이 소리쳤다.“지금 내 머릿속에 누가 보여.”현수가 멈췄다.“누구?”“태문.”현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네가 기억하고 있어?”“내가 그 사람을 알아.”해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릴 때 나를 데리고 도망치려고 했어.”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런데 왜 죽었다고 했어?”이번에는 최씨 부인이 대답했다.“죽은 게 아니니까.”해원이 그녀를 바라봤다.“그럼 어디 있어?”최씨는 입을 열지 못했다.해원이 다가갔다.“이번에는 제발 제대로 말해.”최씨가 눈물을 흘렸다.“강태문은 왕실에 들어갔어.”“왜?”“널 대신해서.”해원의 표정이 굳었다.“내 대신?”“왕실은 네가 필요했어. 하지만 네가 도망쳤지.”최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태문이 네 이름을 사용했어.”허담이 욕설을 내뱉었다.“미친…….”해원이 물었다.“얼마나 오래?”“십 년.”해원의 눈이 커졌다.“십 년 동안?”“왕실은 태문을 윤해원으로 알고 있었어.”현수가 고개를 숙였다.해원이 현수를 바라봤다.“너도 알고 있었어?”“그래.”“그런데
“네가 낳은 아이는 이미 죽었어.”해원은 현수를 바라봤다.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품에 안긴 아이가 작은 손으로 해원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해원은 아이를 내려다봤다.그리고 다시 현수를 봤다.“그럼 이 아이는 누구야?”현수는 입을 다물었다.“대답해.”“…….”“또 침묵하면 이번엔 내가 알아서 판단할 거야.”현수가 낮게 말했다.“그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야.”“누구 아이인데?”“말할 수 없어.”해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지겹다.”그녀가 아이를 태율에게 내밀었다.“받아.”태율이 당황했다.“해원아.”“받으라고.”태율이 아이를 받아 안았다.해원은 현수 앞으로 걸어갔다.“너는 내가 미쳐 있다고 생각하지?”“아니.”“그럼 왜 계속 거짓말해?”“널 살리려고.”“그 말 이제 믿지 않아.”해원이 현수의 뺨을 세게 때렸다.찰싹.현수의 얼굴이 돌아갔다.“이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날의 대가야.”해원이 다시 손을 내렸다.“그리고 이것도.”두 번째 손바닥이 현수의 얼굴을 때렸다.“이건 내 아이를 죽었다고 속인 대가.”현수는 맞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허담이 씁쓸하게 웃었다.“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현수가 그를 노려봤다.“너까지 끼어들지 마.”“나도 알아.”허담이 해원을 바라봤다.“그 아이가 네 친자가 아니라는 거.”해원이 멈칫했다.“너도?”“그래.”“언제부터?”“오늘.”해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거짓말.”“나도 방금 알았어.”허담은 태율에게 시선을 돌렸다.“문제는 저놈이 알고 있었다는 거야.”태율의 표정이 굳었다.해원이 태율을 바라봤다.“너는?”태율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한참 고개를 숙였다.“알고 있었어.”해원의 얼굴이 굳었다.“처음부터?”“그래.”“그런데 왜 내 아들이라고 했어?”태율이 입술을 깨물었다.“네가 살아갈 이유가 필요했으니까.”“그래서 남의 아이를 내 아이로 속였어?”“미안해.”“미안하다고 끝날 일이야?”태율이 고개를 숙였다.그때
“강태율……?”해원의 입에서 이름이 새어 나왔다.강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품에 안긴 아이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아이는 울음을 멈췄다.그 모습을 본 순간 해원의 눈빛이 변했다.“그 아이…….”태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네 아들이야.”해원이 그대로 굳었다.현수가 앞으로 뛰어나왔다.“아이 내려놔.”태율이 차갑게 웃었다.“왜?”“당장.”“네가 무슨 자격으로?”현수가 이를 악물었다.“그 아이는 해원의 아들이야.”“그래.”태율이 아이를 바라봤다.“그래서 내가 데리고 있었어.”해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왜?”“네가 찾으러 오지 못하게 하려고.”“누가 시켰어?”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해원이 한 걸음 다가갔다.“태율아.”그가 움찔했다.“나한테 말해.”태율은 한참 해원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네가 나를 죽었다고 믿게 만든 것도 나야.”해원의 얼굴이 굳었다.“무슨 말이야?”“내가 죽은 척했어.”“왜?”“최씨가 부탁했어.”최씨 부인이 고개를 숙였다.해원이 그녀를 노려봤다.“또 당신이야?”“해원아…….”“당신 때문에 몇 번을 속아야 해?”최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널 지키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어.”“그런데 왜 태율까지 숨겼어?”최씨는 대답하지 못했다.태율이 대신 입을 열었다.“내가 네 아이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이야.”해원이 숨을 삼켰다.“그럼 현수는?”태율이 현수를 바라봤다.“저 새끼는 아이가 죽었다고 믿게 만들었지.”현수가 소리쳤다.“네가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잖아!”“네가 죽였다고 속였으니까.”“그건 해원을 지키려고—”“웃기지 마.”태율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넌 해원을 지킨 게 아니라 네 곁에 묶어둔 거야.”허담이 현수에게 다가갔다.“이제 인정해.”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해원은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봤다.그리고 태율에게 물었다.“내 아이를 왜 지금 데려온 거야?”태율의 얼굴이 굳었다.“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됐어.”“무슨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