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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Autor: 월야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10-26 19:32:27
날이 밝기도 전에 남쪽 별실의 문이 열렸다.

해린은 등잔 옆에 놓아둔 서찰부터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밤새 아버지의 병환을 걱정하며 쓴 편지는 아직 봉하지 못했고, 손등에 감긴 흰 천에는 어젯밤보다 짙어진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문턱에 선 시녀 둘은 아침 인사도 없이 커다란 옷함을 방 안으로 들였다.

“대감마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오늘 집안 어른들께서 오시니 이것으로 갈아입으라 하셨사옵니다.”

시녀가 뚜껑을 열자 빛바랜 회색 저고리와 수수한 치마가 드러났다. 소맷부리에는 오래전에 기운 흔적이 있었고, 옷고름도 한쪽이 해져 있었다.

해린은 그 옷을 알아보았다.

지난해 안채의 여종 하나가 혼인을 앞두고 내놓았던 헌옷이었다. 해린이 새 옷감을 내어 주며 버리라고 했던 것을 누군가 거두어 두었던 모양이었다.

“내 옷은 어디에 있느냐?”

“백 낭자께서 안채의 의복을 정리하고 계시옵니다. 부인께서는 당분간 이것을 입으시라는 분부이옵니다.”

연화가 이불을 걷다 말고 돌아섰다.

“마님께서 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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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녀문을 불태운 밤   40화

    윤해린.남편이 지우려 했던 이름이었다.현준은 그 이름을 다른 누구의 아내라는 호칭도 없이 불렀다.해린은 손등에 감긴 새 천을 내려다보았다.그때 문밖에서 낯선 발소리가 멈췄다.“윤씨 부인.”집사의 목소리였다.“내일 묘시까지 몸을 단정히 하고 가문의 열녀문 앞으로 나오시라는 분부이옵니다.”해린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누구의 명이냐?”“대감마님과 문중 어른들께서 의논하신 일이옵니다. 정씨 부인께서도 직접 나오실 것이옵니다.”집사는 문밖에서 종이 한 장을 펼쳤다.“윤씨 부인께서는 열녀문 앞에서 세 가지를 맹세하셔야 하옵니다. 남편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것, 정실의 자리를 다시 요구하지 않고 첩으로 강등되는 처분을 받아들일 것, 그리고 오늘 대청에서 있었던 일을 집안 밖에 발설하지 않을 것이옵니다.”연화가 벌떡 일어났다.“그것은 맹세가 아니라 입을 막겠다는 협박이 아니냐!”집사는 연화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읽었다.“맹세를 마치시면 오늘 거부하신 정실 강등 문서에도 지장을 찍으셔야 하옵니다. 문중 어른들께서 모두 지켜보시는 자리이니 이번에는 함부로 거절하지 마시라는 말씀도 계셨사옵니다.”해린은 천천히 문을 바라보았다.“내가 거절하면?”잠시 침묵이 흘렀다.“대감마님께서는 윤씨 부인의 친정으로 보내는 서찰을 일절 허락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곁에서 부인의 고집을 부추기는 시녀는 다른 곳으로 보내겠다는 분부이옵니다.”연화의 손이 해린의 소매를 붙잡았다.집사는 마지막 말을 전하기 전에 목소리를 낮췄다.“그리고 내일 문중 어른들 앞에서 또다시 거역하시면, 윤씨 부인께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고 시어른을 능멸하였다는 사실을 친정에도 알리시겠다 하셨사옵니다.”해린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아버지는 병석에 누워 있었다.그녀가 쓴 편지 한 통조차 아직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도윤은 그보다 먼저 친정에 불효한 딸이라는 오명을 보내려 하고 있었다.“열녀문은 절개를 기리는 곳이라 들었다.”해린이 입을 열었다.“그런데 어

  • 열녀문을 불태운 밤   39화

    “너는 아직 내 아내다.”“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해린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그러니 먼저 저를 버리려 하신 분이 누구인지도 잊지 마십시오.”도윤은 손을 들어 올리려다가 대문 밖에 남은 호위의 발소리를 듣고 멈췄다.그는 해린의 팔목을 거칠게 놓았다.“네가 어디까지 날 우롱할 수 있는지 보겠다.”해린이 소매를 내리자 도윤은 집사를 불렀다.“윤해린을 방으로 돌려보내라.”해린은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그러나 그녀가 회랑 끝으로 사라진 뒤에도 도윤은 한동안 대문을 바라보았다.소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오라버니, 전하께서 잠시 마음을 쓰신 것뿐이옵니다. 너무 괘념하지 마시옵소서.”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대군이 직접 자신의 집까지 찾아왔다.그것도 자신이 내치려는 아내를 보기 위해서였다.오늘 낮 문중 어른들 앞에서 자신을 거역한 여인이, 밤에는 대군의 관심까지 받았다.도윤은 손가락을 천천히 굽혔다.“저 계집이 무엇을 믿고 저리 당당한지 이제 알겠구나.”소영이 고개를 들었다.“오라버니…….”“전하의 이름을 등에 업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도윤은 집사를 불렀다.“어머니께 전하여라. 내일 새벽 문중 어른들을 다시 모셔야겠다고.”집사가 머뭇거렸다.“대감마님, 오늘도 어른들께서 모두 돌아가셨사온데…….”“이번에는 대청이 아니다.”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가문의 열녀문 앞이다.”소영의 눈빛이 흔들렸다.도윤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전하께서 집안의 일에 손을 대실 수는 있어도, 우리 가문의 절개와 법도를 대신 정하실 수는 없겠지.”집사는 더 묻지 못하고 물러났다.도윤은 대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현준이 떠난 길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는 그 빈자리를 오래 바라보다가 차갑게 웃었다.“윤해린이 제 발로 무릎을 꿇게 만들겠다.”***회랑을 지나 남쪽 별실에 가까워졌을 때, 연화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마님!”그녀는 해린을 보자마자 달려왔다.“어찌 되셨사옵니까? 또 다치신 곳은

  • 열녀문을 불태운 밤   38화

    해린은 그를 돌아보았다.“오늘 밤 그대가 거절한 것은 내 도움이오. 그대가 안전하게 지낼 권리까지 거절한 것은 아니오.”그녀는 잠시 그 말을 되새겼다.현준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대청 앞에는 도윤이 여전히 서 있었다.그는 두 사람이 돌아오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전하, 제 아내가 무례한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 염려되옵니다.”현준은 해린보다 먼저 대답했다.“윤 부인은 예를 잃지 않았네.”“그러하시옵니까.”“오히려 내가 오래 붙잡아 두었군.”도윤은 웃음을 유지하려 애썼다.현준은 집사에게 손짓했다.“의원은 오늘 밤까지 대문 밖에 머물 것이다. 윤 부인이 청하면 들이도록 하라.”“예, 전하.”“그리고 서 대감.”도윤이 허리를 숙였다.“전하.”“내가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을 때, 다친 사람이 없다고 거짓으로 답하는 일은 다시 없었으면 하네.”도윤의 얼굴이 굳었다.“명심하겠사옵니다.”현준은 더 머물지 않았다.그가 대문을 향해 걸어가자 호위들이 뒤따랐고, 집사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해린은 대청 아래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가 문턱을 넘기 직전이었다.현준이 걸음을 멈췄다.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잠시 서 있었다.돌아보아서는 안 되었다.서도윤이 지켜보고 있었고, 대청에는 하인들이 남아 있었다. 오늘 이 집을 찾아온 것만으로도 이미 지나친 관심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현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그녀를 그냥 두고 떠나는 일이 쉽지 않았다.“해린.”대청의 공기가 멎었다.해린은 숨을 삼켰다.혼인한 뒤로 남편은 그녀를 이름보다 아내라는 호칭으로, 최근에는 윤씨라는 성으로 더 자주 불렀다. 정실에서 밀어내려는 지금은 그마저도 귀찮다는 듯 이름을 생략했다.그런데 남편의 상전인 사내가 모든 사람이 듣는 자리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현준이 천천히 돌아섰다.그의 눈에는 조금 전 뜰에서 보았던 절제된 온기가 남아 있었다.“손을 함부로 쓰지 마시오. 상처가 덧날 것이오.”해린은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 열녀문을 불태운 밤   37화

    “내가 감당해야 할 마음까지 그대에게 떠넘기지는 않을 것이니.”해린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현준은 희미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평소의 여유가 없었다.“다만 내가 그대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이 오직 서도윤의 상전이기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소.”해린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그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그 사실이 오히려 더 위험했다.해린은 남편의 이름을 떠올리며 두 손을 맞잡았다. 현준 역시 그 모습을 보고 더 다가가지 않았다.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남은 몇 걸음이, 해린에게는 방금 전보다 훨씬 좁게 느껴졌다.“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소.”현준의 말이 끝나자 해린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이제 그가 돌아갈 것이었다.대군의 말 한마디에 도윤은 손을 거두었고, 닫혔던 방문이 열렸다. 해린이 오래도록 바라던 일들이 그가 나타난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그런데 정작 해린이 붙잡고 싶은 것은 그가 가진 권세만이 아니었다.자신을 바라보던 눈이었다.“전하.”돌아서려던 현준이 걸음을 멈췄다.해린은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이 아파 몸이 조금 기울었지만, 그가 다가오려 하자 손을 들어 괜찮다는 뜻을 보였다.“제가 전하의 도움을 거절했다고 하여, 다시는 저를 찾아보지 않으실 것이옵니까?”현준의 표정이 달라졌다.“그대는 내가 다시 오기를 바라오?”해린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그가 서 있는 곳까지 한 걸음 다가갔다.“전하께서는 제게 무엇이든 제 뜻대로 하라 하셨사옵니다.”“그랬소.”“그렇다면 이 말씀도 제 뜻으로 드리겠사옵니다.”해린은 눈을 들었다.“오늘 밤 전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저는 제가 아직 누군가에게 귀한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뻔하였사옵니다.”현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해린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다가가면 이 사내가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했다.그런 마음이 든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었다.“그러니…….”그녀는 말을 멈추었다가 입가를 조금 올렸다.

  • 열녀문을 불태운 밤   36화

    “전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크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지금 제가 그 은혜를 받으면, 제게 남은 마지막 선택마저 남의 손에 맡기게 될 것 같사옵니다.”현준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내가 그대의 선택을 빼앗으려 하였소?”“그런 뜻이 아니옵니다.”“알고 있소.”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대가 왜 거절하는지도.”해린은 그를 바라보았다.현준은 조금 떨어진 매화나무 아래로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다.“다만 한 가지는 알아 두시오.”그가 낮게 말했다.“내가 돕겠다고 한 것은 그대가 내게 빚을 지라는 뜻이 아니오.”해린의 눈빛이 흔들렸다.“전하…….”“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소. 그러나 도움이 필요해지는 날이 오면, 오늘의 거절 때문에 망설이지는 마시오.”해린은 대답하지 못했다.그의 말에는 어떤 재촉도 없었다.도윤은 늘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한 뒤 그 결과까지 정해 놓았다. 정실로 남고 싶다면 굴복하라 했고, 떠나고 싶다면 자신의 허락을 받으라 했다.그러나 현준은 거절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해린은 그것이 낯설었다.현준이 손을 뻗었다.해린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놀라게 하였군.”현준은 손을 거두었다.“옷깃이 상처에 닿아 있소.”해린은 목덜미로 시선을 내렸다. 뜨거운 찻물에 데인 살갗이 저고리 깃에 쓸려 따가웠다.평소 같았다면 서둘러 옷깃을 여몄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전하께서는 참으로 눈이 밝으시옵니다.”해린은 그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제가 감추려는 것까지 모두 알아보시니, 앞으로는 전하 앞에서 무엇 하나 숨기기 어렵겠사옵니다.”현준의 눈길이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다.“상처를 숨기지 말라는 뜻이었소.”“상처만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그녀의 목소리는 나직했다.현준이 대답하지 않자 해린은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대담한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하지만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이 사내는 자신을 구

  • 열녀문을 불태운 밤   35화

    도윤은 더는 해린에게 함부로 손을 뻗지 못했고, 집사는 현준의 눈치를 살피며 마당 끝으로 물러났다.현준은 해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윤 부인.”“예, 전하.”“잠시 걸을 수 있겠소?”해린은 도윤을 바라보았다.도윤의 턱이 굳어 있었다.현준이 그 시선을 따라가더니 조용히 말했다.“서 대감의 아내에게 묻고 있네. 대답은 윤 부인이 할 것이야.”해린은 한동안 입술을 다물었다.이 집에 들어온 뒤 누군가 자신의 뜻을 먼저 물어 준 적이 언제였던가.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잠시라면 괜찮사옵니다.”현준은 호위들에게 대청 앞에서 기다리라고 명했다.그가 앞장서자 해린은 몇 걸음 떨어져 뒤따랐다.두 사람은 안채와 바깥채 사이의 작은 뜰로 나왔다.담장 너머로 달빛이 내려앉았고, 오래된 매화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밤이 깊어 집안은 조용했지만, 해린은 등 뒤에서 도윤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현준은 뜰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췄다.“여기까지는 들리지 않을 것이오.”해린은 그를 바라보았다.“전하께서는 어찌 오늘 일을 아셨사옵니까?”현준은 잠시 침묵했다.“서씨 문중에서 돌아간 사람 하나가 내게 말을 전했소.”“그렇사옵니까.”“처음에는 믿지 않았소.”현준은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어제 상처를 입은 사람이 오늘 또 다쳤다는 말이었으니.”해린은 손을 소매 안으로 감췄다.“전하께서 직접 오실 일은 아니었사옵니다.”“그대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소.”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해린은 뜻밖의 표정에 잠시 말을 잃었다.현준은 그녀가 놀란 것을 보았는지 웃음을 거두었다.“어제도 그랬지. 내가 손을 살펴보겠다고 하자 괜찮다고 하였소.”“전하께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사옵니다.”“오늘도 같은 말을 하는군.”그는 나무 아래 놓인 돌의자를 가리켰다.“앉으시오. 다리가 불편해 보이오.”해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앉았다.무릎을 굽히는 순간 통증이 올라왔지만, 현준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지 않으려 애썼다.그는 그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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