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도현은 갑자기 숫자를 세지 않았다.“오늘은 몇 번째예요?”내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없습니다.”“왜?”“당신이 숫자를 기다리기 시작했으니까.”“그게 뭐 어때서.”“다음 명령을 얻기 위해 현재를 버티는 것 같았습니다.”정곡이었다.여덟 번째가 끝나기도 전에 아홉 번째를 궁금해했고, 열한 번째 중에도 열두 번째를 기다렸다.도현은 내 앞에 서서 말했다.“오늘은 다음이 없습니다.”“진짜?”“네.”“그럼 뭘 해요?”“지금 하나만.”그가 손바닥을 펼쳤다.“손을 주십시오.”나는 올려놓았다.“끝.”“…이게 명령이에요?”“네.”“장난하죠?”“아닙니다.”도현은 내 손을 잡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답답해.”“왜?”“뭔가 더 있을 것 같잖아요.”“없습니다.”“키스도?”“원하면 요청하십시오.”“주인님이 알아서 해야지.”“오늘은 아닙니다.”그의 고집은 단단했다.결국 내가 먼저 말했다.“키스해 줘요.”“네.”입술이 닿았다.끝나자 도현은 다시 가만히 있었다.“그 다음은?”“없습니다.”“진짜 미치겠네.”그가 낮게 웃었다.“당신은 명령보다 예고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아니거든요.”“그럼 다음을 묻지 마십시오.”나는 입을 다물었다.도현은 기다렸다.한참 뒤 내가 먼저 그의 품으로 들어갔다.“이건 명령 아니죠?”“당신 선택입니다.”“그럼 됐어요.”숫자 없이 보낸 밤은 예상보다 더 길었다.몇 번째인지, 다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매 순간 선택해야 했다.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게 더 야했다.
총괄실 조직 개편이 시행되자 실제로 내 업무량이 줄었다.하루 열두 개였던 결재가 네 개로 줄었다.긴급 연락도 절반 이하가 됐다.처음 이틀은 좋았다.셋째 날부터 불안해졌다.“진짜 아무것도 없어요?”비서가 웃었다.“대표님이 직접 하던 일을 현지에서 해결하고 있습니다.”“문제는요?”“없습니다.”문제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나는 프라하 운영회의에 필요도 없이 참석했다.파리 물류 자료도 다시 열어봤다.결국 마르틴이 말했다.“총괄님.”“네.”“저희가 일하도록 놔두십시오.”말이 너무 정확해서 반박하지 못했다.집에 돌아오자 도현이 내 표정만 보고 알아챘다.“불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까?”“조금.”“저도 그랬습니다.”“어떻게 버텼어요?”“못 버텼습니다.”“도움 안 되네.”그가 아주 조금 웃었다.“그래서 당신을 통제하려 했습니다.”웃음이 사라졌다.“회사를 통제할 수 없게 되자 관계라도 통제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처음 듣는 고백이었다.“지금 생각하니까 이해돼요?”“네.”“그럼 저도 그럴 수 있어요?”“저를 통제할 겁니까?”“아니.”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주인님한테 더 매달릴 수도 있잖아요.”도현의 눈빛이 깊어졌다.“그건 경계해야 합니다.”“왜요?”“제가 필요하다는 감각을 얻기 위해 당신이 관계 안에서 스스로 작아지면 안 됩니다.”그 말이 묘하게 뜨거웠다.“그럼 오늘은?”“원하는지 먼저 확인하십시오.”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회사에서 잃은 통제감을 여기서 채우고 싶은 건지.아니면 정말 도현을 원하는 건지.한참 뒤 눈을 떴다.“원해요.”“확실합니까?”“네.”“그럼 오늘은 제가 주도합니다.”도현이 일어섰다.“대신 회사에서 잃은 자리를 여기서 보상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알겠어요.”“당신은 이미 충분히 큰 사람입니다.”그 말 뒤에 이어진 명령은 단순했다.“저만 보십시오.”이번에는 어렵지 않았다.
공개 토론회에는 예상보다 많은 직원이 접속했다.스톡홀름 직원대표가 먼저 말했다.“총괄실이 생긴 뒤 현지 승인 절차가 늘었습니다.”파리 쪽에서도 불만이 나왔다.“도시별 대표가 있는데 왜 상위 조직이 또 필요합니까?”나는 변명하지 않았다.“그럼 묻겠습니다. 총괄실이 없어져도 되는 기능과 반드시 필요한 기능을 구분해 주세요.”세 시간 동안 목록이 쌓였다.필요 없는 것.일정 보고.소액 예산 승인.현지 채용 검토.필요한 것.도시 간 물류 조정.공동 투자.분쟁 중재.대규모 안전사고 대응.결론은 의외였다.직원들은 총괄직 자체를 없애길 원한 게 아니었다.총괄실이 너무 많은 일을 가져간 것을 문제 삼았다.나는 조직을 절반으로 줄이기로 결정했다.내 직속 인력도 40% 감축했다.“당신 권한도 줄어듭니다.”마르틴이 확인했다.“그래야죠.”“후회할 수도 있습니다.”“그럼 다시 고치면 돼요.”개편안은 직원 투표 72% 찬성으로 통과됐다.집에 돌아오니 도현이 와인을 따르고 있었다.“축하합니다.”“권한 줄인 걸요?”“당신 없이도 돌아갈 수 있는 조직에 가까워진 것.”“조금 허전해요.”“알고 있습니다.”“도현 씨도 예전에 이런 기분이었어요?”그는 잔을 내려놓았다.“대표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요?”“네.”“처음에는 제가 없어지면 회사도 무너질 줄 알았습니다.”“안 무너졌죠.”“네.”그가 나를 바라봤다.“그래서 더 힘들었습니다.”처음으로 이해가 갔다.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두려움.도현이 나를 붙잡으려 했던 이유 중 하나.“그럼 오늘 좀 이상해도 이해해 줘요.”“얼마든지.”“명령은?”“당신이 원하면.”나는 와인잔을 내려놓았다.“오늘은 하나만.”“내용은?”“제가 총괄이 아니어도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 줘요.”도현은 잠시 침묵했다.“그건 명령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그럼?”그가 내 손을 잡았다.“내일 아침까지 옆에 있겠습니다.”생각보다 그 말이 더 필요했다.
다음 날 아침, 스톡홀름 지부에서 긴급 메일이 도착했다.새로운 노동계약 적용을 두고 일부 직원들이 집단 서명을 제출했다.내용은 단순한 임금 요구가 아니었다.[유럽 총괄 체제 해체 및 도시별 독립 경영 요구.]서명자는 전체 직원의 31%.상당한 숫자였다.마르틴은 즉시 회의를 요청했다.“합병 이후 중앙 의사결정에 대한 불만입니다.”“우리가 권한 많이 넘겼잖아요.”“직원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한예린은 비용 자료를 띄웠다.“특히 파리 총괄실 운영비가 불만의 핵심입니다.”내 직책 자체가 문제로 올라온 셈이었다.도현은 회의 내용을 듣고도 바로 방어하지 않았다.“직원들이 총괄 체제를 없애길 원한다면 검토해야 합니다.”뜻밖의 말이었다.“도현 씨도 그렇게 생각해요?”“당신 자리를 지키는 것이 회사보다 먼저일 수는 없습니다.”가슴이 순간 서늘해졌다.맞는 말인데도 듣기 싫었다.“제가 없어져도 괜찮아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직책이 없어지는 것과 당신이 없어지는 것은 다릅니다.”“알아요.”“지금은 안 아는 얼굴입니다.”그가 내 손을 잡으려다 멈췄다.“만져도 됩니까?”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손이 맞닿았다.“총괄 자리가 사라져도 당신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근데 제가 만든 체제잖아요.”“만든 사람이 필요 없어질 정도로 성장하면 성공일 수도 있습니다.”그 말이 오래 남았다.나는 직원들과 직접 공개 토론회를 열기로 했다.도현은 참석하지 않았다.이번에는 정말 내 자리의 가치가 검증돼야 했다.
다음 날 도현은 평소처럼 출근했다.아무 말도 없었다.저녁이 되어도 열두 번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참다못해 내가 먼저 물었다.“잊었어요?”“무엇을?”“열두 번째.”“안 잊었습니다.”“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해요?”“당신이 하루 종일 기억하는지 보고 싶었습니다.”“또 시험.”“아닙니다.”도현은 서랍에서 작은 흰색 카드 한 장을 꺼냈다.예전 [12] 카드와 달리 숫자가 없었다.“이제 번호 안 만든다며요.”“그래서 쓰지 않았습니다.”“그럼 열두 번째라는 건 뭐예요?”도현이 카드를 뒤집었다.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당신이 기억하는 순간 자체가 열두 번째입니다.”“뭔 소리예요?”그는 내 앞에 앉았다.“처음의 열두 번째는 당신이 제게 내린 명령이었습니다.”“붙잡아 달라고 말하라고 했죠.”“네.”“이번에는요?”도현은 카드를 내 손에 올려놓았다.“제가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겁니다.”“명령이라면서.”“당신이 받아들여야 명령이 됩니다.”그 말에 가슴이 묘하게 뛰었다.“내용.”도현이 내 손을 감싸지 않고 기다렸다.“제가 불안해서 당신을 의심하는 말을 하면.”잠시 멈췄다.“그 자리에서 바로 멈춰 세워 주십시오.”“제가요?”“네.”“주인님한테?”“그 순간에는 한서윤으로.”그는 숨을 골랐다.“제가 당신을 잃을까 봐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려 할 때, 넘어가지 마십시오.”이번 열두 번째는 내가 따르는 명령이 아니었다.둘의 관계를 지키기 위한 약속이었다.“받아들일게요.”도현의 시선이 내려갔다.“그리고 오늘 밤은?”내가 묻자 그가 눈을 들었다.“무엇을 원합니까?”“어제 열한 번째까지 했잖아요.”“그래서?”“열두 번째도 뭔가 있어야죠.”그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다.“욕심이 많아졌군요.”“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섰다.“그럼 열두 번째는 간단합니다.”“말해요.”그가 손을 내밀었다.“오늘은 제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열한 번째는 도구가 없었다.도현은 리드도 리본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전부 치워요?”“네.”“강하게 한다면서.”“강한 게 꼭 도구를 뜻하지는 않습니다.”그는 의자 하나를 침실 중앙에 놓았다.“앉으십시오.”이번에는 바로 따랐다.“손은 양옆으로.”“어디에요?”“의자 끝.”나는 손가락으로 의자 가장자리를 잡았다.“열한 번째 명령.”도현이 내 앞에 섰다.“제가 허락하기 전까지 눈을 피하지 마십시오.”“그게 다예요?”“해 보면 압니다.”처음에는 쉬웠다.도현 얼굴을 보는 일 정도야 늘 하던 일이었다.그런데 그가 아무 말 없이 내 앞에 서 있으니 이상하게 더 버티기 어려웠다.시선이 입술로 내려갔다.“눈.”도현이 바로 말했다.나는 다시 올려다봤다.“왜 자꾸 잡아내요.”“열한 번째니까.”그는 아주 천천히 가까워졌다.무릎 사이에 서면서도 여전히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손이 턱 아래에 닿았다.“색깔.”“초록색.”엄지가 턱선을 따라 움직였다.“지금 무슨 생각합니까?”“말 안 할래요.”“거절입니까?”“…부끄러운 거예요.”“그럼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도현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대신 눈은 피하지 마십시오.”입술이 닿았다.이번에도 길지는 않았다.하지만 떨어진 뒤에도 그는 눈을 마주친 채 있었다.“왜 계속 봐요.”“보고 싶어서.”“진짜…”나는 결국 시선을 내리고 싶어졌다.그 순간 턱을 받친 손이 아주 조금 올라왔다.“눈.”“주인님.”“네.”“진짜 못 보겠어요.”그의 표정이 달라졌다.“노란색입니까?”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너무 부끄러워서.”“그럼 열한 번째를 중단해도 됩니다.”“싫어요.”“왜?”나는 숨을 고르며 다시 그를 바라봤다.“끝까지 해 볼래요.”도현의 눈빛이 깊어졌다.“좋습니다.”그는 더 가까이 왔다.이번에는 입술이 아니라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열한 번째 명령의 마지막.”“말해요.”“제가 당신을 볼 때, 숨지 마십시오.”순간 모든 장난기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