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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화. 소리가 먼저 닿는 밤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7 20:42:55

도현이 꺼내온 건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검은 손잡이 끝에.

부드러운 스웨이드 끈이 여러 갈래로 달려 있었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채 그걸 한참 봤다.

“이거 뭐예요?”

“플로거.”

“주인님 이런 것도 샀어요?”

“오늘 도착했습니다.”

도현은 손잡이를 한번 돌려봤다.

생각보다 묵직해 보였지만.

끝에 달린 끈은 손가락으로 만지자 부드럽게 휘었다.

나는 하나를 집어봤다.

“생각보다 안 딱딱하네.”

“그래서 골랐습니다.”

“써봤어요?”

“아직.”

“그럼 나한테 처음?”

도현이 나를 봤다.

“아닙니다.”

그는 갑자기 자기 손바닥을 폈다.

그리고.

플로거를 아주 가볍게 한번 내려쳤다.

탁.

소리는 생각보다 선명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본인한테 먼저 해보는 거야?”

“어느 정도 힘인지 알아야 하니까.”

한 번 더.

이번에는 조금 세게.

탁.

도현이 손을 한번 폈다 쥐었다.

“어때요?”

내가 물었다.

“소리보다 약합니다.”

“진짜?”

“네.”

그가 내게 손바닥을 보여줬다.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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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70화. 손끝으로 정한 속도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시간이 평소보다 조금 늦었다.현관문을 닫자마자 휴대폰이 한 번 울렸다.업무 메신저였다.나는 화면을 확인하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거실에 있던 도현이 그걸 보고 말했다.“끝났습니까.”“응.”“회사?”“응.”나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오늘은 진짜 끝.”도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소파에 앉았다.몸이 조금 무거웠다.일이 특별히 많았던 건 아닌데.하루 종일 사람 말을 듣고 판단한 탓인지 머리가 지쳤다.도현이 물었다.“저녁은.”“먹었어요.”“어디서.”“회의 끝나고 예린이랑.”“알겠습니다.”그는 더 묻지 않았다.나는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잠시 뒤.옆자리가 내려앉았다.도현이었다.그가 바로 손을 대지는 않았다.그냥 가까이 앉아 있었다.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왜 이렇게 조용해요.”“당신이 피곤해 보여서.”“오늘은 그냥 잘까요?”“원하면.”나는 잠깐 생각했다.그리고 고개를 저었다.“아니.”“그럼?”나는 눈을 뜨고 그를 봤다.“조금 하고 싶어요.”도현의 시선이 바로 달라졌다.“강하게?”“모르겠어요.”“그럼.”그가 몸을 조금 돌렸다.“오늘은 제가 정합니다.”나는 작게 웃었다.“또?”“싫습니까.”“아니.”“좋습니다.”그는 아주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그런데 손목도.허리도 아니었다.내 손끝.정확히는 검지 끝을 잡았다.나는 눈썹을 올렸다.“이건 뭐예요?”“오늘은.”도현이 내 손가락 끝을 자기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이걸로 시작합니다.”“손가락?”“네.”“왜.”“잡아당기면 오십시오.”나는 그를 봤다.“얼마나?”“제가 당기는 만큼.”“놓으면?”“멈추십시오.”단순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도현은 손가락 끝을 아주 조금 당겼다.정말 미세하게.나는 몸을 몇 센티미터 옮겼다.그가 놓았다.멈춤.다시.이번에는 조금 더.나는 또 따라갔다.한 번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손가락 하나로.조금씩.“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69화. 한 번 더, 다른 방식으로

    저녁을 먹고 난 뒤에도 도현은 평소보다 말이 적었다.나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도현은 맞은편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겉으로는 평범했다.그런데 자꾸 시선이 느껴졌다.한 번.두 번.세 번째쯤 됐을 때.나는 결국 화면을 내렸다.“왜 자꾸 봐요?”도현은 책갈피를 끼웠다.“보고 싶어서.”“그 말 요즘 너무 자주 써.”“싫습니까?”“아니.”나는 웃었다.“근데 오늘은 뭔가 있어 보여.”그는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책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내 앞까지 왔다.“있습니다.”“뭔데?”도현은 잠깐 나를 봤다.“어제 쓴 걸.”“플로거?”“네.”“또?”나는 눈썹을 올렸다.“어제 또 똑같이 안 한다며.”“똑같이 안 합니다.”그 대답이 빨랐다.“그럼?”도현은 서랍 쪽으로 갔다.이번에는 플로거만 꺼내지 않았다.작은 검은 패드 하나.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얇고.부드러운 가죽으로 감싸진 패들이었다.나는 바로 물었다.“이건 처음 보는데.”“오늘 써보려고 샀습니다.”“또 새 거?”“네.”“이름은?”“패들.”나는 받아서 손바닥 위에 올려봤다.생각보다 가벼웠다.한쪽 면은 매끈했고.다른 쪽은 조금 더 부드러운 소재.“이것도 때리는 거?”“네.”“플로거랑 뭐가 달라요?”도현이 내 손에서 패들을 가져갔다.“닿는 면적.”“응.”“소리.”“응.”“느낌.”그는 자기 팔 안쪽에 아주 가볍게 한 번 쳤다.탁.어제와는 달랐다.플로거가 공기를 가르고 흩어지는 느낌이었다면.패들은 소리가 더 짧고.접촉이 한 번에 모였다.나는 바로 눈썹을 올렸다.“이게 더 아플 것 같은데.”“힘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릅니다.”“오늘 세게?”도현은 나를 봤다.“처음부터는 아닙니다.”“최대는?”“당신이 괜찮다고 한 범위 안.”나는 잠시 생각했다.“중간 정도.”“어제보다 낮게?”“응.”“좋습니다.”그는 패들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오늘은.”“또 있어?”“한 가지 더.”“뭔데.”도현은 이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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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 오전.내 책상 위에 올라온 첫 보고서는 예상보다 얇았다.한예린이 직접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시스템 알림 하나.[유럽 지역 운영비 승인 체계 개편 완료]나는 파일을 열었다.도시별 책임 범위.예외 조항.법무 검토 기준.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예전에는 분명 내 이름이 있던 칸이 사라져 있었다.아예.공란도 아니었다.칸 자체가 없어졌다.나는 화면을 한참 봤다.그때 한예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봤어?”“응.”“어때.”“진짜 없앴네.”“네가 승인했잖아.”“알아.”“근데 왜 놀라.”나는 화면을 가리켰다.“보통은 이름만 빼는 줄 알았지.”“칸을 남겨두면 나중에 또 넣고 싶어질까 봐.”나는 바로 그녀를 봤다.“누가 그렇게까지 했어?”“카렐.”“역시.”한예린이 웃었다.“왜 그렇게 싫은 얼굴이야.”“싫은 게 아니라.”나는 다시 화면을 봤다.이제 내 이름을 다시 넣으려면.단순 수정이 아니라.승인 구조 자체를 다시 바꿔야 했다.카렐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였다.“쟤 꽤 독하네.”“좋은 쪽으로.”“나 못 건드리게 구조까지 잠가놨잖아.”한예린이 의자에 앉았다.“그게 권한 넘긴 거지.”“알아.”“근데?”나는 입술을 한번 눌렀다.“기분이 묘해.”“허전해서?”“조금.”“불안?”“그것도 조금.”한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 있지.”“반대 안 해?”“왜.”“보통은 네가 이런 거 좋아하잖아.”“좋아하지.”“그런데?”“좋은 변화라고 불안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나는 그녀를 잠깐 봤다.그 말은 의외로 편했다.잘하고 있다고.곧바로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나는 파일을 닫았다.“됐어.”“뭐가.”“그냥 이대로 가.”“다시 넣고 싶으면?”“말은 해볼게.”“그리고?”나는 웃었다.“네가 막아.”“좋아.”*오후 회의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내 일이 줄었다.예전 같으면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건들.이제는 담당 도시에서 결과만 공유했다.프라하.리스본.뮌헨.그중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66화. 그림자만 남은 방

    도현의 바다 그림은 다음 날에도 완성되지 않았다.정확히는.완성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퇴근하고 서재에 들어가 보니 스케치북은 어제 그 자리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고.수평선도.의자 두 개도.더해진 게 없었다.나는 문틀에 기대 물었다.“오늘은 안 그렸어요?”도현이 노트북에서 눈을 들었다.“네.”“바다 어렵죠?”“많이.”“그래서 포기?”“아닙니다.”“그럼?”그는 화면을 닫았다.“오늘은 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예전이라면 끝내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려서라도 연필을 들었을 사람.그런데 이제는 꽤 아무렇지 않았다.나는 그림 속 두 번째 의자를 가리켰다.“내 자리 그대로 있네.”“어제 앉는다면서요.”“응.”“그럼 두십시오.”“도현 씨는?”“제 자리도 있습니다.”나는 웃었다.“그럼 둘이 앉았네.”도현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녁 먹읍시다.”*회사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오히려 그게 조금 낯설었다.새 승인 구조도 문제없이 굴러갔고.파리 업체도 제 역할을 했다.카렐에게 따로 확인할 일도 없었다.오후 다섯 시쯤 한예린이 내 자리로 와서 물었다.“오늘 뭐 남았어?”“없어.”“그럼 가.”“진짜 다들 왜 나만 보면 퇴근하래.”“네가 남으면 주변이 불편해져.”“내가 뭐 했다고.”“총괄이 여섯 시 넘어서 앉아 있으면 밑에서는 괜히 눈치 보지.”나는 모니터를 한번 봤다.정말 남은 건 없었다.“알았어.”한예린이 눈을 크게 떴다.“오늘은 빨리 듣네.”“사람이 배워.”“드디어.”나는 가방을 들며 그녀를 노려봤다.“그 말 취소해.”“싫어.”그대로 헤어졌다.*집에 돌아온 뒤.저녁을 먹고.샤워까지 마쳤다.나는 편한 잠옷을 입고 거실로 나왔다.도현은 소파에 앉아 있지 않았다.창가 쪽 스탠드 앞에서 뭔가 만지고 있었다.“뭐 해요?”그가 조명을 조금 돌렸다.원래 벽을 향하던 빛이 방향을 바꿨다.방 한쪽이 밝아지고.반대쪽은 훨씬 어두워졌다.“전구 나갔어요?”“아닙니다.”“그럼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65화. 다시 걸린 바다

    차명희의 두 번째 전시는 첫 번째보다 훨씬 작았다.호텔 갤러리도.재단 행사도 아니었다.도심 외곽의 작은 전시 공간.작품도 열두 점뿐이었다.나는 초대장을 받아들고 한참 들여다봤다.“이번에는 진짜 조용하게 하시나 봐요.”도현이 옆에서 넥타이를 매며 말했다.“본인이 그렇게 원했습니다.”“사람도 많이 안 부르고?”“가족이랑 가까운 지인 정도.”나는 초대장 뒷면을 봤다.전시 제목은.《돌아오는 물결》첫 번째 전시 때보다 제목도 훨씬 단순했다.“준호 씨도 와요?”내가 묻자.도현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나는 바로 웃었다.“왜.”“아무것도 아닙니다.”“표정 봤는데.”“오시겠죠.”“싫어요?”도현은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봤다.“싫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그럼?”“아직 조금 어색합니다.”솔직했다.“엄마 친구잖아요.”“압니다.”“오래된.”“그것도.”“그럼 됐네.”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당신은 왜 그렇게 쉽게 말합니까.”“내 엄마 아니니까.”그가 바로 나를 봤다.나는 웃었다.“농담.”“별로입니다.”“알았어요.”나는 재킷을 챙겼다.“그래도 오늘은 아무 말 하지 마요.”“제가 무슨 말을 합니까.”“준호 씨한테.”“안 합니다.”“엄마한테도.”“안 한다고 했습니다.”“표정도.”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표정까지 관리하라고?”“조금.”“그건 노력하겠습니다.”그 정도면 됐다.*전시장에 도착하자.명희는 입구 가까이에 서 있었다.정장도.화려한 드레스도 아니었다.짙은 청색 원피스에 얇은 회색 재킷.머리도 평소보다 자연스럽게 풀어져 있었다.나는 먼저 다가갔다.“어머니.”명희가 웃었다.“왔구나.”“축하드려요.”“고맙다.”도현도 옆에서 짧게 말했다.“축하드립니다.”명희는 아들을 보더니 눈썹을 올렸다.“이번에는 평가 안 할 거지?”도현이 바로 대답했다.“지난번에도 안 했습니다.”“표정으로 했어.”나는 웃음을 참았다.명희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얘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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