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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먼저 연락하는 법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4 21:45:06

4화. 먼저 연락하는 법

[그 말, 네 번째 명령 때 확인하죠.]

차도현의 마지막 메시지를 읽은 뒤에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내가 보낸 문장은 분명했다.

[저도 쉽게 끝낼 생각 없어요.]

보낼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의 말에 지고 싶지 않았고, 매번 나만 당황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보냈다.

그런데 도현은 그 짧은 문장을 놓치지 않았다.

확인하겠다고 했다.

네 번째 명령으로.

나는 침대 위에 앉아 채팅창을 다시 읽었다.

삭제할 수도 없었다.

이미 읽혔고, 답장까지 받았다.

“대체 뭘 확인한다는 거야.”

혼잣말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다음 연락을 보내기 전까지 기다리면 됐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오늘 현관에서 들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연락하기 전에 먼저 연락해도 됩니다.’

허락을 받았는데도 선뜻 연락할 수 없었다.

먼저 연락한다는 건 내가 그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계약 상대에게 굳이 할 말도 없었다.

안부를 묻기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고, 다음 명령을 물으면 너무 조급해 보일 것 같았다.

나는 채팅창에 몇 번이나 문장을 적었다가 지웠다.

[잘 들어가셨어요?]

집주인에게 집에 잘 들어갔냐고 묻는 것도 이상했다.

[오늘은 감사했어요.]

대체 무엇이 감사하다는 건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주인님.]

두 글자를 쓰는 순간 손가락이 굳었다.

계약 시간이 끝났는데 그렇게 부르면 규칙 위반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했다.

휴대전화를 엎어놓고 누웠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검은 천이 시야를 가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던 도현.

손을 내밀자 아래에서 받쳐주던 그의 손바닥.

‘나를 믿고 따라오세요.’

그 말에 망설이지 않고 걸었던 나.

생각할수록 낯설었다.

나는 원래 다른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다.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도, 대신 무언가 해달라는 요구도 단번에 거절했다.

누군가 내 선택을 대신하려 들면 기분부터 상했다.

그런 내가 차도현에게는 계속 물었다.

다음에는 뭘 하면 되는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는 나를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내가 스스로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에도 연락은 없었다.

점심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부러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집 안을 정리했다.

밀린 빨래를 돌리고, 냉장고 안의 오래된 음식을 버렸다.

그러다 세탁기 종료 알림이 울릴 때마다 흠칫했다.

도현의 메시지인 줄 알았다.

오후 세 시.

나는 결국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채팅창에는 여전히 어젯밤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그 말, 네 번째 명령 때 확인하죠.]

내가 먼저 연락해도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짧게 보냈다.

[오늘은 연락 없어요?]

보낸 직후 후회했다.

너무 직접적이었다.

‘오늘은’이라는 말에는 이미 오늘 하루 동안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삭제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읽음 표시가 나타났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1분.

3분.

5분.

나는 화면을 끄고 소파 위에 던졌다.

“괜히 보냈어.”

그때 진동이 울렸다.

[기다렸습니까?]

역시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답해야 한다는 첫 번째 규칙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계약 시간이 아니었다.

거짓말해도 되는 걸까.

[조금요.]

곧바로 답장이 왔다.

[조금이 어느 정도죠?]

[알림이 울릴 때마다 확인한 정도요.]

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

[솔직하군요.]

[오늘 저녁 8시까지 지난번 집으로 오세요.]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 12분.

다섯 시간도 남지 않았다.

[오늘 네 번째 명령을 하는 거예요?]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먼저 연락하면 한다고 했잖아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젯밤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그는 분명 먼저 연락해도 된다고만 했다.

연락하면 명령을 내리겠다는 말은 없었다.

내가 혼자 기대한 것이다.

[그럼 왜 오라고 해요?]

[당신이 먼저 나를 찾은 이유를 확인하려고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내가 먼저 연락한 건 그저 일정이 궁금해서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알림이 울릴 때마다 확인했다고 털어놓은 뒤였다.

더는 변명할 수 없었다.

---

저녁 7시 53분.

검은 대문이 열리자 도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평소와 달리 검은 셔츠 위에 얇은 니트를 입고 있었다.

단추가 풀린 셔츠보다 훨씬 단정한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눈길은 더 오래 머물렀다.

도현은 내 얼굴을 살피더니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은 일찍 오지 않았군요.”

“정확히 맞춰왔어요.”

“지난번에는 십팔 분이나 빨리 왔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한서윤 씨에 관한 건 대부분 기억합니다.”

아무렇지 않게 한 말인데 심장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그는 몸을 비켜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평소처럼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작은 검은 상자도, 눈가리개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앉으세요.”

나는 지난번과 같은 소파에 앉았다.

도현은 맞은편이 아니라 내 옆에 앉았다.

처음에는 거리가 한 사람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자 갑자기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먼저 연락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소감까지 있어야 해요?”

“후회합니까?”

“조금요.”

“왜요?”

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기다렸다는 걸 들킨 것 같아서요.”

“들킨 게 아니라 직접 말했죠.”

“그렇게 정확하게 짚지 마세요.”

도현의 입가가 희미하게 움직였다.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그럼 묻지 않겠습니다.”

그가 찻잔을 들었다.

“대신 한 가지는 확인해야겠군요.”

“뭘요?”

“오늘 먼저 연락한 이유.”

“이미 말했잖아요. 연락이 없어서요.”

“그건 상황이고, 이유가 아닙니다.”

역시 쉽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달지 않은 향이 입안에 퍼졌다.

“다음 명령이 궁금했어요.”

“그것뿐입니까?”

“또 뭐가 있어야 하는데요?”

“내가 궁금했던 건 아닙니까?”

차를 삼키다 목이 막힐 뻔했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신감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에요?”

“부정하지는 않는군요.”

“그냥 대답할 가치가 없어서 그래요.”

“계약 중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그 말에 괜히 찔렸다.

계약 중이었다면 솔직하게 대답해야 했다.

차도현이 궁금했는지.

그의 연락이 없어서 서운했는지.

다음 명령보다 그를 다시 보고 싶었던 건 아닌지.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명령 안 해요?”

결국 내가 먼저 물었다.

도현이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고 싶습니까?”

“그걸 확인하러 오라고 한 거 아니었어요?”

“한서윤 씨가 스스로 결정하게 하려고 불렀습니다.”

“무슨 결정이요?”

그는 테이블 위의 계약서를 펼쳤다.

세 개의 숫자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1/12.

2/12.

3/12.

“지금까지는 내가 먼저 연락했고, 장소와 시간을 정했습니다.”

“네.”

“당신은 내 연락을 기다렸다가 시키는 일을 수행했죠.”

“그게 계약이잖아요.”

“계약은 열두 번의 명령에 관한 것이지, 모든 선택을 내게 넘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가 나를 바라봤다.

“네 번째 명령부터는 조금 달라질 겁니다.”

긴장감이 서서히 올라왔다.

“어떻게요?”

“명령을 받기 전에 당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말해야 합니다.”

“제가 원하는 걸요?”

“네.”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면요?”

“그럼 네 번째 명령은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는 내게 무언가를 시키기 전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하는 걸 입 밖으로 내는 일이 명령을 따르는 것보다 어려웠다.

명령은 그의 책임이었다.

나는 따르거나 거부하면 됐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말하는 순간, 그 욕망은 온전히 내 것이 됐다.

“그냥 전처럼 당신이 정하면 안 돼요?”

“안 됩니다.”

“왜요?”

“명령 뒤에 숨는 습관을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보고 있었다.

내가 원했지만, 그가 시켜서 했다고 변명할 수 있는 행동들.

무릎을 꿇은 것도.

전화 속 그의 말에 따라 거울을 본 것도.

눈가리개를 쓴 것도.

모두 그의 명령이었다.

나는 선택했지만, 그 책임을 완전히 내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어렵네요.”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얼마나요?”

“오늘 안에 답하지 못하면 돌아가도 됩니다.”

말은 부드러웠지만, 도망칠 구실은 주지 않았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었다.

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찻잔을 들고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그 침묵이 더 부담스러웠다.

나는 시선을 피해 거실 안을 둘러봤다.

처음 왔을 때는 차갑고 낯설기만 했던 공간이었다.

이제는 검은 소파의 질감도, 찻잔이 놓이는 위치도 익숙해졌다.

익숙해진 것이 두려웠다.

열두 번이 끝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집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가슴 안쪽이 묘하게 답답해졌다.

“말하면 정말 해줘요?”

내가 묻자 도현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가능한 범위라면.”

“싫으면요?”

“거절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거부할 수 있어요?”

“당연합니다.”

그제야 조금 안심됐다.

나만 시험받는 게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맞물렸다.

원하는 것.

거창한 건 아니었다.

이미 마음속에는 한 가지가 떠올라 있었다.

다만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지난번에요.”

“말하세요.”

“제가 눈가리개를 하고 있었을 때.”

도현은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당신이 잘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랬죠.”

“그 말이 좋았어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래서요?”

“오늘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도현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오늘도 잘했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침묵이 흘렀다.

내가 결국 고작 칭찬 한마디를 원했다고 말한 것이다.

계약까지 맺고, 그에게 먼저 연락하고, 이 집에 다시 찾아와서.

나는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덧붙였다.

“이상하면 그냥 잊어도 돼요.”

“이상하지 않습니다.”

도현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부드러웠다.

“하지만 아직은 말할 수 없군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왜요?”

“잘한 일이 없으니까.”

순간 어이가 없었다.

“먼저 연락하라고 해서 연락했고, 오라고 해서 왔잖아요.”

“그건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뭘 해야 잘했다고 해줄 건데요?”

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알 수 있었다.

내가 그가 기다리던 말을 했다는 것을.

“그게 네 번째 명령이 될 겁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계약을 시작하겠습니다.”

분위기가 단숨에 바뀌었다.

그가 단지 일어섰을 뿐인데 거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했다.

“계약 중 나를 어떻게 부르죠?”

“주인님.”

“네 번째 명령을 원합니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네, 주인님.”

차도현이 내 앞에 섰다.

“그럼 일어나세요.”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테이블과 소파 사이에 공간을 만들었다.

“내 앞에 서세요.”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네 번째 명령입니다.”

나는 긴장한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늘 내가 무엇을 시키든, 수행하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의사를 먼저 말하세요.”

예상과 다른 명령이었다.

“무슨 뜻이에요?”

“내가 손을 내밀면 잡고 싶은지 말하고, 가까이 오라고 하면 오고 싶은지 말하는 겁니다.”

“싫다고 하면요?”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명령을 거부한 게 되는 건가요?”

“아니요.”

도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솔직하게 의사를 밝히는 것까지가 오늘의 명령입니다.”

그는 내게 복종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원하는지 먼저 말하라고 했다.

오히려 그것이 더 어렵게 느껴졌다.

“시작하죠.”

차도현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으세요.”

나는 그의 손을 바라봤다.

잡고 싶었다.

그의 손이 내 손을 감싸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로 인정해야 했다.

“잡고 싶어요.”

“그럼 잡으세요.”

나는 손을 올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천천히 내 손을 감쌌다.

손을 맞잡는 것뿐인데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는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내가 놓고 싶다면 언제든 뺄 수 있을 정도였다.

“한 걸음 가까이 오세요.”

이번에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대답해야 했다.

“가까이 가고 싶어요.”

“오세요.”

한 걸음 다가섰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좁아졌다.

맞잡은 손이 그의 옆으로 내려갔고, 고개를 조금 들자 얼굴이 가까이 보였다.

“나를 똑바로 보세요.”

나는 그의 눈을 바라봤다.

“보고 싶어요.”

말하고 나니 이상하게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매번 원하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게 어색했다.

도현은 웃지 않았다.

대신 내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긴장했습니까?”

“네.”

“멈추고 싶습니까?”

“아니요.”

“계속하고 싶습니까?”

나는 숨을 고른 뒤 답했다.

“계속하고 싶어요.”

도현이 맞잡지 않은 손을 들어 내 얼굴 가까이 가져왔다.

손끝이 뺨에 닿기 직전 멈췄다.

“당신의 얼굴을 만지겠습니다.”

명령이 아니라 예고였다.

나는 그의 손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만져줬으면 좋겠어요.”

그제야 손바닥이 뺨에 닿았다.

따뜻했다.

그의 엄지가 광대 아래를 천천히 쓸었다.

아주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첫날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말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바닥 쪽으로 얼굴을 조금 기울였다.

도현의 눈빛이 깊어졌다.

“방금 행동은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알아요.”

“왜 그랬죠?”

“더 닿고 싶어서요.”

이번에는 말이 조금 더 쉽게 나왔다.

한 번 인정하고 나니 다음은 덜 두려웠다.

그가 손을 거두려 하자 나도 모르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도현은 손을 완전히 떼지 않았다.

손끝이 턱선 아래로 천천히 이동했다.

“이제 눈을 감으세요.”

나는 바로 눈을 감으려다가 멈췄다.

오늘의 규칙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싶어요.”

“왜요?”

“당신이 뭘 할지 궁금해서요.”

“무서울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무서웠지만 멈추고 싶지는 않았어요.”

잠시 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좋습니다. 눈을 감으세요.”

나는 눈을 감았다.

시야가 사라졌지만 지난번과는 달랐다.

눈가리개가 없어서 언제든 뜰 수 있었다.

내 선택으로 감고 있었다.

도현의 손이 턱을 가볍게 받쳤다.

그가 조금 가까워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숨결이 이마 근처에 닿았다.

입술이 닿을 것 같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접촉은 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다.

“무엇을 기대했습니까?”

눈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말하기 싫어요.”

“왜요?”

“너무 티 날 것 같아서요.”

“이미 충분히 티가 납니다.”

그 말에 눈을 뜨려 했지만, 턱을 받친 손이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아직 뜨지 마세요.”

나는 다시 힘을 뺐다.

“키스를 기대했습니까?”

직접적인 질문에 숨이 막혔다.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원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 게 명령이었다.

“조금요.”

“조금?”

“많이 기대한 건 아니에요.”

“또 그 표현이군요.”

그가 낮게 웃었다.

“연락도 조금 기다렸고, 키스도 조금 기대했습니까?”

“그만 놀려요.”

“대답하세요.”

나는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

“기대했어요.”

도현의 손이 턱에서 떨어졌다.

접촉이 사라지자 허전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기다렸다.

그러나 그가 입술을 맞추지는 않았다.

대신 이마에 아주 짧고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입맞춤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가벼운 접촉이었다.

그래서 더 선명했다.

나는 놀라 눈을 떴다.

도현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었다.

“왜…….”

“당신이 원한다고 말한 건 키스였지, 입술이라고 정하지는 않았으니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죠?”

“네.”

그가 순순히 인정했다.

“오늘은 원하는 것을 말하는 연습을 하는 날이니까.”

“그럼 제가 정확히 말했으면요?”

“그래도 해줬을지는 모릅니다.”

“너무하네요.”

“나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이라 더 얄미웠다.

도현은 내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 손을 놓았다.

“오늘 명령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 남았어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그가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나는 먼저 말했다.

“앉고 싶어요.”

“좋습니다.”

소파에 앉자 도현은 맞은편이 아니라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혔다.

세 번째 명령이 끝났을 때와 같은 자세였다.

그는 늘 내려다보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필요하면 내 눈높이까지 내려왔다.

그가 내 손을 다시 잡았다.

“한서윤 씨.”

“네.”

“오늘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행동한 게 아닙니다.”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원하는 것을 직접 말했고,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엄지가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

“먼저 연락한 것도, 이곳에 온 것도, 내 손을 잡은 것도 전부 당신이 선택했습니다.”

내가 듣고 싶다고 말했던 한마디가 곧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죽였다.

차도현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잘했습니다.”

가슴 안쪽이 세게 울렸다.

지난번보다 더 기뻤다.

이번에는 그저 명령을 잘 수행해서 받은 칭찬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인정한 것에 대한 말이었다.

나는 기쁨을 숨기려 했지만 실패했다.

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렇게 좋습니까?”

“네.”

이번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좋아요.”

차도현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내가 너무 솔직하게 대답해서인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곧 평소의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계약서를 가져와 새로운 숫자를 적었다.

4/12.

“네 번째 명령은 여기까지입니다.”

나는 계약서를 바라봤다.

이제 여덟 번 남았다.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가 처음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졌다.

“주인님.”

나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차도현이 펜을 멈췄다.

“계약은 끝났습니다.”

“아.”

나는 황급히 고쳐 말했다.

“도현 씨.”

그는 계약서를 덮으며 나를 바라봤다.

“말하세요.”

“아까 입술에 키스해달라고 정확히 말했으면 정말 안 해줬을 거예요?”

도현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아주 짧게 머물렀다가 다시 눈으로 올라왔다.

“오늘은요.”

“그럼 다음에는요?”

“다음에도 당신이 원한다고 말해야 알 수 있겠죠.”

또 명확한 답은 주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한 거절도 아니었다.

나는 괜히 입술을 만졌다.

그가 입을 맞춘 건 이마인데, 왜 입술이 뜨거운지 알 수 없었다.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 도현이 말했다.

“오늘부터 새로운 규칙을 하나 추가하겠습니다.”

“또요?”

“계약 외의 시간에도 하루 한 번은 먼저 연락하세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게 규칙이에요, 명령이에요?”

“규칙입니다.”

“안 하면요?”

“불이익은 없습니다.”

“그럼 왜 정해요?”

도현은 잠시 나를 바라봤다.

“당신이 내 연락만 기다리지 않도록.”

그의 대답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나를 의존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사람이라면, 연락을 줄이는 편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하루 한 번 먼저 연락하라고 했다.

“혹시 도현 씨가 제 연락을 기다리는 거 아니에요?”

장난처럼 물었지만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죠.”

생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내가 말을 잃자 도현이 문을 열었다.

“오늘 연락은 이미 했으니 내일부터 시작하세요.”

“무슨 말을 보내야 하는데요?”

“그것도 당신이 선택해야 합니다.”

검은 대문이 닫힌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도 내 연락을 기다릴 수 있다는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았다.

---

집으로 돌아온 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휴대전화를 켜자 도현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사진 한 장.

계약서 위에 적힌 숫자였다.

4/12.

그 아래 한 문장이 함께 도착했다.

[오늘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한 점은 좋았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

[입술에 키스해달라는 말은 못 했는데요.]

보내고 나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잠시 뒤 읽음 표시가 나타났다.

[지금은 말했군요.]

나는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지금 말하면 소용없잖아요.]

[왜 소용없다고 생각하죠?]

손가락이 멈췄다.

그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한참 동안 답장을 쓰지 못했다.

곧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다섯 번째 명령 때까지 기억하겠습니다.]

나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손끝으로 눌렀다.

이제 남은 명령은 여덟 번.

그리고 처음으로,

다음 명령의 내용이 무엇일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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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86화. 늦게 시작한 둘째 날

    서윤이 눈을 떴을 때는 방 안이 꽤 밝았다.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침대 끝까지 길게 번져 있었다.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어젯밤 뒤집어둔 휴대폰도 그대로였다.도현의 팔은 자신의 허리 위에 느슨하게 얹혀 있었다.서윤이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도현은 아직 자고 있었다.“……진짜 자네.”평소라면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있을 사람이었다.서윤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도현을 구경했다.평소보다 흐트러진 머리.힘이 완전히 빠진 얼굴.이불 밖으로 조금 나온 손.그 순간 어제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서로 몰래 한 장씩 찍기.서윤의 시선이 협탁으로 향했다.휴대폰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어젯밤에도 몇 번이나 고민했다.바다를 보는 도현.젖은 머리로 침대에 앉아 있던 도현.밤길을 걷던 도현.그때마다 조금 더 기다렸다.그런데 지금은—서윤이 아주 천천히 휴대폰을 집었다.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켰다.화면 안에 도현이 들어왔다.잠든 얼굴만 찍으려다 조금 뒤로 물렸다.흐트러진 이불.베개.침대 옆 바닥에 나란히 놓인 두 사람의 슬리퍼.그리고 잠든 도현.서윤은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찰칵.단 한 장.곧바로 휴대폰을 뒤집었다.“됐다.”괜히 심장이 빨리 뛰었다.도현이 눈을 뜰까 봐 가만히 있었는데—“찍었습니까?”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서윤이 굳었다.“……자고 있었잖아.”도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방금 깼습니다.”“봤어요?”“뭘요.”“내가 찍는 거.”“확실히는 못 봤습니다.”서윤이 경계하듯 휴대폰을 끌어안았다.“그럼 모르는 거야.”“알겠습니다.”“그리고 보여달라고 하면 안 돼.”“마지막 날까지.”“응.”도현이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서윤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왜 웃어요.”“당신이 드디어 한 장 쓴 것 같아서요.”“모른다니까.”“네. 모릅니다.”“진짜 얄미워.”말은 그렇게 하면서 서윤은 웃고 있었다.자신의 한 장은 끝났다.이제 남은 건 도현이었다.시간을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85화. 불을 끄고 남은 것

    도현의 머리가 거의 마를 때까지 서윤은 수건을 놓지 않았다.“됐어.”수건을 치우자 헝클어진 머리가 드러났다.서윤이 손끝으로 앞머리를 정리했다.“이제 사람 같다.”“그전에는 뭐였습니까.”“물에 빠진 사람.”“바다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요.”“비유잖아.”도현이 서윤의 손목을 잡았다.“이제 당신 차례 아닙니까?”“뭐가?”“샤워.”“아.”서윤은 욕실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도현을 봤다.“나 씻고 나오면 뭐 할 거예요?”“기다려야죠.”“그냥?”“뭘 원합니까?”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건 내가 씻고 나와서 생각할래.”그녀가 손목을 빼내려 하자 도현이 바로 놓아주었다.서윤은 몇 걸음 가다가 돌아봤다.“자면 안 돼요.”“안 잡니다.”“진짜.”“기다리겠습니다.”그제야 서윤이 욕실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서윤은 편한 얇은 잠옷 차림이었다.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다.도현은 침대 헤드에 기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서윤이 나오자 바로 화면을 껐다.“뭐 봤어요?”“내일 날씨.”“계획 세운 거 아니죠?”“비가 오는지만 봤습니다.”“와?”“안 옵니다.”“그럼 됐네.”서윤은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닦다가 드라이어를 찾았다.도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주세요.”“내가 할 수 있어.”“압니다.”서윤이 웃었다.“우리 오늘 이 말 몇 번 하는지 알아요?”“뭘요.”“‘할 수 있어.’ ‘압니다.’”도현도 웃었다.“그래도 주십시오.”결국 서윤은 드라이어를 넘겼다.침대 끝에 앉자 따뜻한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왔다.도현의 손가락이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갈랐다.서윤은 눈을 감았다.“좋아.”“뭐가요.”“여행 와서 이런 거.”“집에서도 해주는데요.”“그러니까 좋은 거야.”도현이 바람을 약하게 줄였다.“아까 제가 한 말이랑 똑같네요.”“뭐?”“낯선 데서도 똑같은 거.”서윤은 대답 대신 웃었다.머리를 다 말린 뒤에도 두 사람은 바로 눕지 않았다.서윤은 창가로 갔다.밖은 완전히 어두웠다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84화. 배고파서 깬 저녁

    서윤이 다시 눈을 뜬 건 창밖의 빛이 조금 어두워진 뒤였다.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낯선 천장.낯선 침대.그리고 베개 대신 머리 아래에 놓인 익숙한 팔.서윤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도현 씨.”“깼습니까?”바로 대답이 돌아왔다.서윤은 고개만 조금 들었다.“안 잤어요?”“잠깐 졸았습니다.”“나 얼마나 잤어?”“시간 안 봤습니다.”“진짜?”“네.”서윤은 협탁 위 휴대폰을 집어 시간을 확인했다.“헐.”“몇 시입니까.”“일곱 시 넘었어.”그제야 배에서 작게 소리가 났다.서윤이 그대로 멈췄다.도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들었습니다.”“못 들은 척해.”“꽤 크게 났는데요.”“그러니까 못 들은 척하라고.”서윤은 이불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배고파.”“나갈까요?”“응.”그러면서도 일어나지는 않았다.도현이 물었다.“지금?”“오 분 뒤.”“아까도 십 분 더 잔다고 하고 꽤 오래 잤습니다.”“여행 왔으니까 괜찮아.”“그건 맞습니다.”서윤이 슬쩍 웃었다.“도현 씨.”“네.”“팔 안 저려요?”“조금.”서윤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왜 말 안 했어?”“잘 자길래.”“그래도 빼지.”“당신이 잡고 있었습니다.”서윤은 그제야 자신의 손을 봤다.도현의 셔츠 자락이 손안에 잡혀 있었다.“내가?”“네.”“기억 안 나.”“자는 사람이 어떻게 기억합니까.”서윤은 구겨진 셔츠 부분을 손바닥으로 펴줬다.“미안.”“괜찮습니다.”“이것도 찍었어?”도현이 웃었다.“아니요.”“진짜?”“후보로는 생각했습니다.”서윤의 눈이 커졌다.“후보?”“한 장만 찍기로 했으니까.”“아.”서윤은 괜히 머리카락을 정리했다.“그러면 안 찍은 게 다행인가.”“왜요.”“나 자고 있었잖아.”“평소 모습 찍자면서요.”“그건 맞는데…….”서윤이 잠깐 고민했다.“다음에는 그냥 찍어요.”“자는 모습도?”“응.”“나중에 취소하기 없습니다.”“대신 진짜 이상하게 나오면 공개만 하지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83화. 바다부터 보기로 한 날

    강릉에 가까워질수록 창밖 풍경이 달라졌다.서윤은 아까보다 자주 창문 밖을 내다봤다.그러다 멀리 푸른빛이 보이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도현 씨.”“네.”“저거 바다 아니야?”도현도 앞을 보며 대답했다.“맞는 것 같습니다.”“진짜?”서윤이 창문 가까이 붙었다.건물 사이로 잠깐 보였다 사라지는 푸른색.그것만으로도 표정이 달라졌다.“숙소 가지 말고 진짜 바로 가요.”“그러기로 했잖습니까.”“혹시 피곤해서 마음 바뀔까 봐.”“안 바뀌었습니다.”“그럼 가까운 데 아무 데나.”“검색 안 하고?”서윤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바다만 나오면 돼.”도현은 길을 따라 그대로 차를 움직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멈췄다.서윤은 문을 열자마자 바람에 머리카락부터 흐트러졌다.“추워.”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차에 타지는 않았다.도현이 트렁크에서 얇은 겉옷을 꺼냈다.“입어요.”“도현 씨는?”“저는 괜찮습니다.”“또 그러지.”서윤은 옷을 받아 입었다.“같이 추워요.”“그건 이상한 요구인데요.”“그럼 나중에 춥다고 하지 마.”“알겠습니다.”두 사람은 나란히 바다 쪽으로 걸었다.파도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서윤의 걸음도 빨라졌다.모래가 시작되는 곳에 도착한 순간 그녀가 멈췄다.“와.”그 말 하나뿐이었다.도현은 옆에서 서윤을 바라봤다.서윤은 한동안 바다만 봤다.사진부터 찍지도 않았다.휴대폰도 꺼내지 않았다.그냥 눈앞에 펼쳐진 물결을 보고 있었다.“좋다.”도현이 물었다.“많이요?”“응.”서윤이 그제야 옆을 돌아봤다.“강릉 고르길 잘했다.”“둘이 골랐죠.”“동시에.”“네.”“그것도 신기해.”서윤은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두 사람은 신발에 모래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만 가까이 걸었다.서윤은 파도가 밀려왔다 빠지는 모습을 보다가 도현에게 말했다.“밤에 여기 다시 올까?”“벌써 밤 산책 장소 정하는 겁니까?”“아.”서윤이 입을 다물었다.“그러네.”“계획 없이 걷기로 했잖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82화. 알람 없는 출발

    아침 햇빛이 커튼 사이로 들어왔다.서윤은 눈을 뜨자마자 시간을 찾지 않았다.대신 옆자리를 먼저 봤다.도현이 있었다.눈을 뜬 채 서윤을 보고 있었다.“……언제 일어났어요?”“조금 전에.”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조금 전이 몇 시인데.”“시간 안 보기로 했잖습니까.”“진짜 안 봤어요?”“네.”“휴대폰도?”“안 봤습니다.”서윤은 이불 속에서 손을 뻗어 도현의 손목을 잡았다.시계도 없었다.“잘했네.”“검사하는 겁니까?”“응.”“통과했습니까?”“일단은.”서윤은 다시 눈을 감았다.도현이 물었다.“더 잘 겁니까?”“조금만.”“그러십시오.”그 대답에 서윤이 다시 눈을 떴다.“진짜 안 깨우네.”“깨우지 말라면서요.”“그래도 여행 가는 날인데.”“강릉 안 도망갑니다.”서윤이 웃었다.“그 말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사진도 안 도망갔고, 강릉도 안 도망갑니다.”“그럼 도현 씨도 가지 마.”“어디를요.”“침대에서.”서윤이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십 분만 더.”결국 도현도 다시 누웠다.십 분이 실제로 십 분이었는지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침대에서 나온 뒤에야 시간을 확인했다.오전 9시 47분.서윤이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괜찮네.”“뭐가요.”“열한 시 아니잖아.”“열한 시까지 잤어도 괜찮았습니다.”“그래도 지금이 좋아.”서윤은 머리를 대충 묶은 채 주방으로 갔다.찬장을 열어 어제 받아온 머그 두 개를 꺼냈다.“드디어.”“어제 이미 썼잖습니까.”“오늘은 의미가 다르지.”커피를 내린 뒤 서윤은 컵을 일부러 뒤집어 바닥을 확인했다.자신의 것.우리 집.도현의 것.같이 마실 사람.서윤이 두 개를 나란히 놓았다.“출발 전에 사진 찍자.”“컵을?”“응.”“잘 나오려고 하지 않기로 한 건 사람 사진 아니었습니까?”“컵은 예쁘게 찍어도 돼.”“예외가 또 생겼네요.”“여행 시작 기념.”서윤은 식탁 위 두 컵을 한 장 찍었다.그러고는 바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끝.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81화. 출발 전에 온 것

    금요일 오후.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서윤은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메시지를 발견했다.잠깐 확인한 뒤 눈이 커졌다.[도자기 공방입니다. 제작하신 머그컵 소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수령 가능합니다.]“왔네.”작게 중얼거린 서윤은 곧바로 도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서윤 : 컵 나왔대요.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도현 : 여행 전에 나왔네요.서윤 : 오늘 찾으러 갈래요?도현 : 같이 갑시다.서윤은 화면을 보며 웃었다.강릉으로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생겼다.퇴근 후 두 사람은 곧장 공방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선반 위로 완성된 작품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직원이 포장된 상자를 가져왔다.“두 분이 만드신 컵 맞으시죠?”서윤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포장을 열자 두 개의 머그가 모습을 드러냈다.사진 촬영을 했던 날 직접 만들었던 컵.모양은 완벽하지 않았다.서윤의 컵은 손잡이 아래쪽이 아주 조금 두꺼웠고, 도현의 컵은 입구가 미세하게 기울어 있었다.서윤이 자신의 컵을 들어 올렸다.“생각보다 괜찮은데?”도현도 하나를 들었다.“그때는 더 삐뚤어진 줄 알았습니다.”“도현 씨 거 진짜 조금 기울었다.”“당신 것도 완벽하진 않습니다.”“내 건 개성 있는 거야.”“제 것도 개성이라고 하죠.”서윤이 웃었다.그리고 컵을 뒤집었다.바닥에는 자신이 새겼던 글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우리 집.“잘 나왔다.”도현의 컵도 뒤집어봤다.같이 마실 사람.두 문장을 나란히 놓자 서윤이 한참 바라봤다.“이거 우리가 쓴 거 맞는데도 좀 이상하다.”“뭐가요.”“완성되니까 진짜 물건이 됐잖아.”도현이 웃었다.“원래 물건을 만들러 온 거였습니다.”“그 말이 아니라.”서윤은 자신의 컵을 다시 바로 세웠다.“사진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요즘 우리 집에 남는 게 많아지는 것 같아서.”웨딩사진.커플사진.둘이 그린 그림들.그리고 이제는 직접 만든 머그까지.“좋지 않습니까?”도현이 물었다.서윤은 망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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