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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한결

Auteur: Jino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11-07 19:00:00

그 목소리를 듣고 내 안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생각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날들이었다. 새벽 네 시의 작은 방, 칼에 벤 검지, 천천히 하라니까. 지하 4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3번 계단, 4번 문. 무릎 위에 놓인 무거운 머리. 1년 넘게 714호에서 대답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던 오후들 너머, 그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부른 날들. 그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 목소리와 한 덩어리로.

그리고 입이 움직였다. 내가 가진 말 중에서, 그 얼굴을 보면 나오는 말이.

"왔어요."

1년 넘게 매일 714호 문을 열며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이 나왔다. 그 안에서, 그 얼굴 앞에서.

한결 씨가 나를 보았다. 쪼그려 앉은 채로. 피곤한 눈이 조금 커졌다가, 천천히 가늘어졌다.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1년 4개월 전 새벽, 하얀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얼굴이었다.

"응. 왔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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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53화. 한결

    그 목소리를 듣고 내 안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생각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날들이었다. 새벽 네 시의 작은 방, 칼에 벤 검지, 천천히 하라니까. 지하 4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3번 계단, 4번 문. 무릎 위에 놓인 무거운 머리. 1년 넘게 714호에서 대답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던 오후들 너머, 그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부른 날들. 그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 목소리와 한 덩어리로.그리고 입이 움직였다. 내가 가진 말 중에서, 그 얼굴을 보면 나오는 말이."왔어요."1년 넘게 매일 714호 문을 열며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이 나왔다. 그 안에서, 그 얼굴 앞에서.한결 씨가 나를 보았다. 쪼그려 앉은 채로. 피곤한 눈이 조금 커졌다가, 천천히 가늘어졌다.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1년 4개월 전 새벽, 하얀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얼굴이었다."응. 왔네."그의 목소리였다. 1년 4개월 동안 한 번도 듣지 못한. 휴대전화 너머 냉각팬 소리 속에서 매일 기다렸던. 천천히 해, 라고 말하던 그 목소리. 목소리에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 남의 출동 기록을 읽듯이. 그런데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주 조금."진짜로 왔네."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전봇대가 보였고, 그 말이 왔다."한결 씨. 나 왔어요. 지우예요. 한결 씨 하늘에 사람들이 있어요. 이만 명이 넘어요."한결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네가 말해 줬어."그가 내 옆 아스팔트에 앉았다. 쪼그려 앉아 있다가, 그냥 주저앉듯이. 무릎을 세우고, 팔을 무릎에 걸쳤다. 구급차 옆 연석에 앉아 쉬던 사람처럼. 우리 둘 앞으로 수만 명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한결 씨는 그 사람들을 보았다. 나는 한결 씨를 보았다."들렸어." 그가 말했다.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52화. 하얀 하늘

    그 안에는 말이 없었다.지금 나는 이것을 돌아와서 쓰고 있다. 검사실 침대에서 눈을 뜨고, 며칠이 지나고, 철웅의 집 작은 방에서 다은의 공책을 빌려 한 줄씩 적고 있다. 그 안에 있을 때 나는 이 문장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문장은 생각에서 나오고, 그 안에서 나는 새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보기만 했다. 그러니까 여기 적는 것은 그때 본 것을, 돌아와서 붙인 말이다. 그 순서를 틀리지 않으려고 한다.공책은 다은이 가져다주었다. 새 학년 준비물로 산 것 중에 남은 거라고 했다. 내가 첫 장을 펴자 다은이 잠깐 기다리라며 방으로 뛰어갔다. 연필깎이 돌리는 소리가 드르륵, 드르륵, 세 번 났다. 다은은 뾰족하게 깎은 연필 세 자루를 들고 와 내 무릎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심 끝에 나무 부스러기가 붙어 있었다."언니, 거기 써도 돼. 토끼만 지우지 마."첫 장 귀퉁이에 토끼가 한 마리 그려져 있었다. 귀가 한쪽만 서 있고, 입이 삐뚤었다. 나는 토끼 옆 줄부터 쓰기 시작했다. 다은은 한동안 내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다가, 글씨가 너무 많다며 하품을 했다. 방을 나가다 문가에서 돌아보았다."언니 거 다 쓰면 나 읽어도 돼?""나중에.""나중에 언제?""더 나중에."다은이 입을 삐죽 내밀고 문을 닫았다. 토끼는 지금도 첫 장에 있다. 나는 연필이 뭉툭해지면 다음 자루로 바꿔 가며 쓴다. 세 자루째를 쥐고 있다.처음에는 하얬다.천장이 하늘이 되는 순간이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박이던 검사실 천장이, 가장자리부터 번지며 넓어졌다. 벽이 사라지고, 모서리가 사라지고, 하얀색만 남았다. 끝에서 끝까지, 이음매 없이. 눈이 부셨다. 눈을 감으려 했다. 감기지 않았다. 거기서는 눈을 감는 게 안 된다고 문순자 할머니가 말했었다. 그 말이 떠올랐는지, 아니면 떠오른 것처럼 지금 적는 것인지, 나는 확실히 말할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51화. 1분

    날짜는 3월 9일, 월요일 밤으로 정해졌다. 본회의 사흘 전이었다.주치의가 그 날짜를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그날 한결 씨가 성진대학병원으로 정기 검사를 가는 날이었다. 요양병원에서는 할 수 없는 영상 검사를 석 달에 한 번씩 협력 대학병원에서 받았다. 안식이 넘겨받은 그 협약서에도 적혀 있는 일정이었다. 구급차가 오후에 한결 씨를 싣고 가서, 밤에 다시 싣고 온다. 그 사이 몇 시간 동안 한결 씨는 요양병원 714호가 아니라 성진대학병원 본관 지하의 검사 대기실에 누워 있게 된다."방문 금지는 요양병원 공문입니다." 주치의가 말했다. "성진대에서는 정하윤 씨를 막을 서류가 없어요."그리고 그 지하 복도 끝에, 심장내과 선배의 검사실이 있었다.나는 그날 새벽에도 골목에 갔다. 스물한 번째였다. 하늘은 흐렸다. 나는 기운 전봇대 옆에 서서, 그 옆 한 뼘을 비워 두고, 고개를 들고 같은 말을 했다.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예순까지 세고, 가자, 하고 말했다. 세탁소 할아버지가 셔터를 올리다 나를 보고 오늘도 커피 줄까,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빈속으로 오라고 했다."오늘은 안 와도 돼?" 할아버지가 물었다. 매일 오던 사람이 무언가 달라 보였던 모양이다."내일은 못 올 수도 있어요."할아버지는 다리미를 옆구리에 낀 채로 한참 나를 보다가, 들어가면서 말했다."그럼 모레 와. 커피 타 놓을게."점심 무렵 은평 시장에 들렀다. 생선 가게 셔터는 반만 올라가 있었다. 기자회견 뒤로 할머니는 오전에만 장사를 했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며느리가 무서워해서라고 했다. 할머니는 셔터 아래로 허리를 숙이고 나와 내 손을 잡았다. 고무장갑을 벗은 손이 차고 거칠었다."오늘이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한테는 말해 두었었다."가서 옆에 있어 줘. 혼자 있으면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50화. 물어보러 간다

    법안의 본회의 날짜가 정해졌다. 3월 12일.2월 중순, 뉴스는 매일 그 날짜를 말했다. 여야 합의, 통과 유력. 국회 앞에서는 찬성 쪽 가족 모임이 촛불을 들었다. 우리 부모님의 마지막을 지켜 주세요. 반대 쪽 집회는 작았다. 종교 단체 몇 곳과 대학생 몇십 명. 그 사이 어디에도 우리 다섯 사람의 얼굴은 없었다. 조작된하늘이라는 말만 가끔 댓글 창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국회 공청회에 린세영은 나오지 않았다. 안식의 부대표라는 남자가 대신 앉았다. 건강상 이유라고 했다. 기자 한 명이 무슨 병이냐고 물었고, 부대표는 개인 정보라며 웃었다. 나는 그 장면을 철웅의 집 거실 텔레비전으로 보았다. 봉안당 복도에서 벽을 짚고 기침하던 등이 떠올랐다.그날 밤, 나는 작은 방의 이불 위에 앉아 오래 생각했다.당신도 안 가 봤습니다.린세영의 그 한마디가 봉안당에서부터 나를 따라왔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 하늘의 주인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다. 모니터의 초록 선에 대고 물었을 뿐이었다. 대답할 수 없는 사람에게.쟤들은 물어보지를 않아. 문순자 할머니가 말했다. 남의 좌판에 물건 올려놓으려면 주인한테 물어봐. 주인이 자리에 없으면 기다려.나는 1년 넘게 기다렸다.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그렇다면 주인이 있는 데로 가야 했다.김정옥 씨의 패치를 뗀 건 철웅의 손이었다. 그녀의 아들의 손.나는 한결 씨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 하늘에 이 사람들이 있어도 괜찮으냐고. 당신은 거기서 뭘 하고 있느냐고.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그리고 당신은, 거기서 행복하냐고.그 질문을 할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다음 날 아침, 나는 부엌에서 철웅에게 말했다.미경 씨는 다은을 학교에 데려다주러 나갔고, 철웅은 식탁에 앉아 식은 된장국을 데우지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49화. 린의 경고

    봉안당에 다녀오고 이틀 뒤, 복실이 할아버지의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아빠가 아가씨 한번 보고 싶대요. 요새 잘 못 드셔서요. 시간 되면.석 달 전 주차장에서 번호를 주고받은 뒤로, 나는 12층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복도 끝 창가를 보았다. 철웅의 어머니를 뵈러 갈 때, 재민을 만나러 갈 때, 1월의 그 긴 밤에도. 할아버지는 거의 늘 거기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이마를 유리에 대고. 일곱 시가 가까우면 두 번째 가로등을 보았다. 나는 몇 번 그 옆에 서서 비상등을 대신 세어 드렸다. 한 번, 두 번. 왔네.기자회견 뒤로는 가지 못했다. 성진대 로비에도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화요일 오후 세 시, 나는 모자를 눈썹까지 내리고 12층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 옆 안식 안내판은 그대로였다. 본 병동 환자 및 가족 대상 할인. 누군가 그 아래에 볼펜으로 작게 적어 놓았다가 지운 자국이 있었다. 무슨 글자였는지는 읽을 수 없었다.1202호의 할아버지는 창가에 있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었다.석 달 사이에 많이 작아져 있었다. 털모자 아래 얼굴이 한 줌이었다. 수액 줄이 두 개로 늘어 있었다. 그래도 나를 보자 이가 몇 개 없는 입이 먼저 벌어졌다."왔네."비상등을 셀 때와 같은 말이었다.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침대 난간에 빨간 줄 하나가 감겨 있었다. 가죽이 닳아 반들반들해진 개 목줄이었다. 쇠고리 한쪽이 녹슬어 있었다."복실이 거야. 옛날 거." 할아버지가 손을 뻗어 목줄을 쥐었다. "새것 사 주면서 딸내미가 이건 나 주더라고. 밤에 이거 코에 대고 자. 복실이 냄새 나."그는 정말로 목줄을 코에 댔다. 눈을 감고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웃었다."개 냄새지 뭐. 쿰쿰한 거. 근데 그게 좋아."그는 목줄을 쥔 채 옛날 얘기를 했다. 복실이를 데려온 첫해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48화. 내 딸을 살리지 못한 사람의 하늘

    전철역 앞에서 추모공원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일요일 낮인데도 자리가 반쯤 차 있었다. 꽃다발을 든 사람, 보자기로 싼 찬합을 무릎에 올린 사람. 철웅은 지팡이를 다리 사이에 세우고 앞쪽 자리에 앉았고, 나는 그 뒤에 앉았다. 모자챙을 눈썹까지 내리고.버스가 시내를 벗어날 즈음이었다. 뒤쪽에서 휴대전화 카메라 소리 같은 게 났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뒷자리의 교복 입은 여학생 하나가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화면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심장이 먼저 뛰었다. 기자회견 날 화면에 떴던 내 얼굴이 떠올랐다. 모자챙 아래로 반쯤 가려진 얼굴, 턱선에서 자른 단발. 관리국해커. 조작된하늘. 버스 창문에 내 얼굴이 흐리게 비쳤다. 나는 고개를 더 숙였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야 하나, 여기서 내리면 산길을 얼마나 걸어야 하나, 그런 계산이 저절로 돌았다.철웅이 아무 말 없이 일어났다. 버스가 흔들리는데도 지팡이를 짚고 한 칸 뒤로 와서, 내 옆자리에 앉았다. 통로 쪽에. 그의 넓은 어깨가 나와 뒷자리 사이를 막았다. 그는 앞만 보고 있었다.버스는 한참 산길을 올랐다. 나는 내내 숨을 얕게 쉬었다. 종점에서 내릴 때 뒷자리를 흘끗 보았다. 여학생은 아직 휴대전화를 창에 대고 있었다. 화면 안에는 눈 덮인 산등성이가 있었다. 햇빛이 비스듬히 걸린 소나무들. 그 애는 처음부터 창밖을 찍고 있었다.얼굴이 뜨거웠다. 웃어 넘기려는데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잘했어." 철웅이 버스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가며 말했다. "그렇게 가리는 거야. 틀려도 가리는 게 나아."추모공원은 산을 반쯤 깎아 만든 계단 위에 있었다.일요일 오후 한 시 오십 분. 주차장에서 봉안당 건물까지 돌계단이 이어졌다. 철웅은 계단을 오르는 데 오래 걸렸다. 한 칸 오를 때마다 지팡이를 먼저 짚고, 왼쪽 다리를 끌어올렸다. 나는 옆에서 속도를 맞췄다. 그는 도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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