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2화 — 밤 9시의 귀가
아…… 무료하다.
집에만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직 준비를 한다고 노트북을 켜놓긴 했는데, 어느 순간 채용 사이트 대신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배가 고파졌다.
결국 배달앱을 켰다.
치킨.
그리고 맥주.
“캬…….”
대낮부터 한 모금 들이켜니 기가 막혔다.
“낮술은 역시 최고네.”
스스로 말해놓고 피식 웃었다.
백수가 낮술 마시는 걸 자랑할 일은 아닌데.
그래도 회사 다닐 때는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평일 낮에 치킨을 시켜놓고 맥주를 마시는 것.
처음 며칠은 자유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자유도 지루했다.
“이러다 진짜 대인기피증 걸리는 거 아냐?”
오늘 대화한 사람이 배달기사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라도 구경해야겠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철문을 밀어 열자 익숙한 동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낡은 주택.
빨랫줄.
복잡하게 얽힌 전선.
좁은 골목.
이상하게 회사 다닐 때는 이런 걸 볼 시간도 없었다.
아침이면 출근하기 바빴고,
밤이면 피곤해서 집에 들어오기 바빴으니까.
옥상 난간에 기대 사람들을 바라봤다.
저기 슈퍼마켓 앞에는 김 씨 아저씨가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놈 아버지다.
“어?”
걷는 모습이 예전과 달랐다.
한쪽 다리를 조금씩 끌고 있었다.
“다리가 안 좋으신가 보네…….”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게 이런 데서 느껴졌다.
나만 늙는 게 아니었다.
동네도,
사람들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별 의미 없이 사람 구경을 했다.
학생들이 지나가고,
퇴근하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배달 오토바이가 골목을 오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오후 8시 58분.
“벌써 아홉 시네.”
슬슬 내려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아래쪽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멈췄다.
“어?”
그 누나다.
어제 봤던 여자.
고등학교 때 버스에서 몇 번 봤던 그 사람.
시간을 확인했다.
9시 2분.
‘이 시간에 퇴근하나?’
아니면 회식이라도 했나.
여자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왔다.
가까이서 보니 어제보다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묘하게 귀여운 인상이었다.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다.
적어도 원래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내가 얼마나 사람을 안 만나고 사는지 생각해보면……
“외로우니까 다 예뻐 보이나.”
피식 웃었다.
늘씬한 편이었고, 전체적으로 단정했다.
그 정도였다.
여자는 내가 있는 옥상으로 올라온 게 아니라 맞은편 주택 계단을 올라가는 중이었다.
우리 집과 저 집은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 옥상에서는 움직임이 꽤 잘 보였다.
잠시 뒤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켜졌다.
‘혼자 사나?’
전부터 조금 궁금하긴 했다.
낮에는 거의 불이 꺼져 있었고,
가끔 작은 강아지들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두 마리인가?
세 마리인가?
정확히는 몰랐다.
“강아지는 키우는 것 같고…….”
나는 난간에 기대 멍하니 맞은편을 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창문이 열렸다.
드르륵.
“앗.”
나도 모르게 몸을 숙였다.
심장이 순간 철렁했다.
가까운 거리다.
창가에 내가 서 있는 걸 정면으로 보면 바로 알아챌 수도 있었다.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만 조금 들어봤다.
다행히 이쪽을 보는 것 같진 않았다.
여자는 환기를 시키려는 듯 방 창문과 안쪽 문을 차례로 열었다.
그리고 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정리하고,
강아지 용품 같은 것도 치웠다.
나는 잠깐 바라보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지?’
남의 집을 이렇게 보는 게 맞나.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묘하게 눈길이 갔다.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퇴근해서 자기 방을 정리하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평범해서 더 이상했다.
회사 다닐 때는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지금 내 하루에서 가장 오래 보는 사람이 이름도 모르는 옆집 여자라니.
그때 그녀가 창문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다시 몸을 낮췄다.
그리고 몇 초 뒤,
다시 슬쩍 확인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려는 듯 방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야, 박동진.”
작게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지.”
방금까지는 그냥 사람 구경이라고 생각했다.
동네 풍경의 일부라고.
그런데 여기서 계속 보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나는 난간에서 몸을 떼고 옥상 철문 쪽으로 걸어갔다.
두 걸음.
세 걸음.
그런데 묘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려가자.’
머리는 그렇게 말하는데,
괜히 뒤가 신경 쓰였다.
결국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렸다.
창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게 단순한 호기심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미쳤나 보네, 진짜.”
나는 결국 옥상 문을 열었다.
철컥.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도 맞은편 창문이 계속 생각났다.
정확히는,
그 누나가 아니라……
다시 올라가 보고 싶었던 내 자신이 더 신경 쓰였다.
단순한 호기심.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내일도 저녁이 되면 옥상에 올라갈 거라는 걸.
그 주에 고등학교 단톡방이 시끄러웠다.평소엔 몇 달씩 조용하던 방이었다. 동창회 공지나 부고 정도만 올라오던. 그런데 재홍이 신혼여행 사진을 올리면서 불이 붙었다.[재홍: 몰디브 다녀왔다 ㅋㅋ 사진 투척][사진 12장]에메랄드빛 바다. 수상 방갈로. 선글라스를 쓴 재홍과 신부.[태훈: 와 부럽다 ㅋㅋ 우리는 애 때문에 제주도도 못 감][민혁: 재홍이 성공했네][성호: 몰디브 좋지. 나도 작년에 갔는데][재홍: 민혁이 니도 이번에 팀장 됐다매 축하한다!!][민혁: ㅋㅋ 아직 대행이다][태훈: 대행이 어디냐 우리 회사는 40 넘어야 팀장인데][성호: 나 이번에 차 바꿨다 ㅋㅋ][사진 1장 — 검은색 외제 SUV][준영: 다들 잘 사네 ㅋㅋ 나도 요즘 가게 자리 잡았다. 다음에 놀러 와라]나는 알림을 끄지 않았다. 한 줄씩 올라오는 메시지를 봤다. 반지하 매트리스 위에서. 깁스한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몰디브. 팀장. 외제 SUV. 가게.그리고 원주.[원주: 나도 발령받고 첫 명절 보너스 받았다 ㅋㅋ][사진 1장 — 공무원증을 목에 건 원주가 청사 앞에서 어색하게 웃는][재홍: 원주 드디어!! 4년 고생했다 진짜][태훈: 원주 축하한다 ㅠㅠ 진짜 대단하다][민혁: 서원주 공무원 ㅋㅋㅋ 적응 안 되네]모두가 원주를 축하했다. 원주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4년. 떨어져도 다음 날 아침 여섯 시에 독서실에 가던.나는 그 사진 속 원주의 얼굴을 봤다. 공무원증. 청사. 새 정장. 반듯한.그리고 한 줄이 올라왔다.[성호: 근데 동진이는 요새 뭐 하노? 대기업 그만두고 소식이 없네]단톡방이 조용해졌다.일 분. 이 분.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 동창회에서의 일. 재홍과의 충돌. 담배를 다시 피우던 나. 소문은 돌았을 것이다. 원주를 통해서든, 누구를 통해서든.삼 분 뒤.[원주: 동진이 잘 지낸다. 요새 바쁘다]원주가 나를 덮어주고 있었다. 차단당한 채로. 단톡방에서.[성호: 오 그래? 어디 들어갔나?]
2월이 됐다.깁스는 3주째였다. 오른손은 여전히 쓸 수 없었다. 왼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왼손으로 휴대폰을 봤다.입력창의 한 줄은 그대로였다. 서연 씨, 저 박동진입니다. 매일 밤 대화방을 열어 그 한 줄을 확인했다. 지워지지 않았는지. 보내지지 않았는지. 장전된 총을 점검하듯이.월세 날이 지났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문을 두드렸다."총각, 이번 달 거는?""…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손을 다쳐서 일을 못 해서요. 산재 나오면 바로 드릴게요."할아버지는 깁스를 보고 혀를 찼다."아이고. 알았다. 보름만 기다리꾸마."문이 닫혔다. 나는 노트북을 중고 거래 앱에 올렸다. 대기업 시절에 산. 이력서를 쓰던. 이틀 만에 팔렸다. 사십만 원.노트북이 사라진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채용 공고를 볼 수단이 없어졌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더 이상 척할 필요가 없었다.*토요일 오전, 누가 문을 두드렸다.통장이었다. 26화에서 이상한 남자를 봤느냐고 묻던. 클립보드 대신 작은 봉투 뭉치를 들고 있었다."아이고, 새로 이사 온 총각이가. 반상회비 받으러 왔어요. 한 달에 오천 원."통장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깁스, 덥수룩한 수염, 푹 눌러쓴 모자. 몇 달 사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네, 잠깐만요."지갑에서 오천 원을 꺼내는 동안, 통장은 현관에 서서 수다를 떨었다."요 위에 간호사 아가씨 있제? 강아지 두 마리 키우는. 그 아가씨 4월에 시집간다. 내가 청첩장 받았다 아이가. 봐라, 이쁘제."통장이 봉투 뭉치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베이지색 종이. 금박 테두리. 레이스 문양. 41화, 그녀의 책상 위에 있던 시안이 완성된 모습이었다.그리고 그 위에 사진. 벚꽃 아래, 하얀 드레스와 턱시도. 서로를 보며 웃는.신랑 정도윤 · 신부 한서연.4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 2시.나는 오천 원을 내밀던 손을 멈췄다. 통장이 오천 원을 받아 들며 계속 말했다."그 아가씨 고생 많이 했다. 저 위
다른 간호사가 왔다. 오십 대. 수간호사 같은 얼굴. 무표정하게 라인을 잡았다. 바늘이 들어갈 때 설명도 없었다. 진통제가 들어갔다."깁스는 정형외과 선생님 오시면 할 거예요. 기다리세요."그녀는 그 말만 하고 커튼을 쳤다. 세게. 커튼 고리가 레일에서 쨍하고 울렸다.진통제가 퍼지기 시작했다. 손의 통증이 멀어졌다. 대신 귀가 밝아졌다.커튼 너머 스테이션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간호사들. 낮게, 그러나 들리게."…그 사람이야? 서연 쌤 말한 그?""응. 창문에 돌 던지고, 새벽에 전화하고. 경찰서까지 갔었대.""미친. 근데 왜 여기 와.""공사장에서 다쳤대. 일용직 한대.""서연 쌤 불쌍해 죽겠네. 결혼 앞두고 이게 뭐야. 요즘 겨우 좀 살 만하다더니.""수간 쌤이 7번 볼 때 두 명씩 들어가래. 혹시 모르니까."혹시 모르니까.나는 들것 위에서 그 말들을 들었다.스토커. 그 단어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단어가 모든 문장 사이에 있었다. 그 사람. 창문에 돌. 새벽에 전화. 경찰서. 혹시 모르니까.나는 이 병원에서, 그녀의 동료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진통제 때문인지 분노가 늦게 왔다. 한참 뒤에야, 천천히, 뜨겁게.그녀가 말했다. 동료들에게. 나에 대해. 내 얼굴을 보기도 전에, 병원 전체가 나를 알고 있었다.나는 한 번도 말할 기회가 없었다.내 입장을. 내 마음을. 83번 버스를. 강릉을. 두부를. 캔커피를.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얼마나 오래.모두가 그녀의 이야기만 듣는다. 경찰도, 어머니들도, 원주도, 이 간호사들도. 아무도 내 이야기를 묻지 않는다.그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단 한 번만.*깁스를 한 채 새벽 두 시에 반지하로 돌아왔다.택시비 이만 원. 응급실 비용은 산재 처리한다고 반장이 말했다. 한 달은 일을 못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한 달이면 월세를 못 낸다.매트리스에 누웠다. 오른손이 욱신거렸다. 천장을 봤다.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었다. 돈. 손. 일. 그리고 3월 초, 그녀의 신혼집 입주
1월 둘째 주. 현장은 신축 오피스텔 공사장이었다.오후 세 시, 3층 슬라브에서 거푸집 자재를 나르던 중이었다. 잠을 못 잔 지 사흘째였다. 제야 이후로, 눈을 감으면 스파클러 불꽃이 보였다. 불꽃 사이 두 사람의 얼굴이.발이 꼬였다. 자재 더미가 무너졌다. 나는 오른손을 짚으며 넘어졌다. 그 위로 합판 모서리가 떨어졌다.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나는 처음 들었다. 둔하고 짧았다.그다음은 소리가 없었다. 통증이 너무 커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 꺼졌다.*현장 반장이 119를 불렀다. 구급차 안에서 구급대원이 물었다."가까운 데 삼성병원 응급실 갑니다. 괜찮으시죠?"삼성병원.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다른 데는 안 됩니까.""손 상태 보면 빨리 가야 돼요. 거기가 제일 가깝습니다."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렸다. 나는 들것 위에서 천장을 봤다. 오른손이 붓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그녀는 병동 간호사다. 응급실이 아니다. 3화에서 건강검진 때 봤을 때도, 12화에서 간 수치 상담 때 봤을 때도, 그녀는 내과 병동 스테이션에 있었다.응급실에는 없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응급실은 시끄러웠다. 커튼으로 나뉜 베드들. 모니터 소리. 의사를 부르는 방송. 누군가의 신음.나는 7번 베드에 눕혀졌다. 젊은 의사가 와서 손을 봤다. 엑스레이. 골절. 두 군데. 수술은 필요 없고 정복 후 깁스. 진통제부터."간호사 선생님, 7번 베드 진통제 라인 좀 잡아주세요."커튼 너머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하얀 크록스. 빠르고 가벼운.커튼이 걷혔다."박동진 님, 팔 좀 이쪽으로…"그녀였다.하늘색 간호복. 마스크. 그 위로 고양이 같은 눈매. 손에 수액 세트와 주사 바늘을 든 채.그녀가 나를 봤다. 차트의 이름을 다시 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그녀의 손에서 수액 세트가 떨어졌다. 바닥에. 투명한 튜브가 풀리며 뱀처럼 굴렀다.*우리는 서로를 봤다. 삼 초. 오 초.
옥상에는 바람이 불었다. 1월 1일을 앞둔 부산의 겨울바람.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나는 옥상 난간 뒤, 물탱크 그림자 속에 웅크렸다. 2화에서 처음 그녀를 기다리던 그 자리였다. 백수 생활의 무료함 속에서 치킨과 낮술을 곁에 두고, 사람 구경을 하던.그때는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았다. 지금은.맞은편 옥상. 그녀와 도윤이 캠핑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담요 한 장을 둘이 덮고.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제야의 종 중계가 흘러나왔다. 보신각. 사람들의 함성.두부가 도윤의 무릎 위에서 자고 있었다. 콩이는 그녀의 발치에.행복한 한 장면.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나는 그 카드 바깥, 물탱크 그림자 속에 있었다.*"오빠, 올해 소원 뭐야?"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왔다. 2미터. 옥상과 옥상 사이도 그 거리였다."음… 너랑 결혼하는 거?""그건 이미 하잖아.""그럼 너랑 잘 사는 거.""뻔해.""너는?"그녀가 잠깐 말이 없었다. 담요 속에서 도윤의 손을 잡는 게 보였다."…나는 그냥, 무섭지 않은 거. 올해는 무섭지 않았으면 좋겠어."도윤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머리가 도윤의 어깨에 기댔다."안 무섭게 해줄게. 약속.""…응."나는 그 대화를 들었다. 물탱크 그림자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그녀의 새해 소원은, 무섭지 않은 것이었다.그 소원의 반대편에 내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무섭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바로 그 순간, 나는 2미터 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나는 그 아이러니를 알아봤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가 나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스피커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열. 아홉. 여덟.도윤이 일어섰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느다란 막대기 두 개. 불꽃놀이용 스파클러.일곱. 여섯. 다섯.라이터 불이 켜졌다. 스파클러 끝에 불이 붙었다. 치지직. 하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넷. 셋.그녀가 웃으며 스파클러 하나를 받았다. 두 개의 불꽃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두부가 짖었다. 내 발을 향해.나는 철문 손잡이를 쥔 채 굳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그녀와 눈이 마주칠 것이다. 계단 두어 칸 위, 1미터 거리."두부야, 왜 그래. 가자."그녀의 목소리. 리드줄을 당기는 소리. 두부가 버텼다. 계속 짖었다.나는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 먼지 묻은 작업 모자. 마스크는 턱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마스크를 올렸다. 코까지."죄송해요, 얘가 원래 이래요."그녀가 사과했다. 나에게. 모르는 인부에게 하듯이."……괜찮습니다."목소리를 낮췄다. 갈라지게. 먼지 때문에 쉰 목소리처럼.그녀가 리드줄을 짧게 감았다. 두부를 안아 올렸다. 두부는 그녀 품에서도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콩이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 골목 아래로 걸어갔다.한 번도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나는 그녀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철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들어가 문을 잠그고, 현관에 주저앉았다.1미터. 그녀가 나를 보지 않았다. 먼지와 모자와 마스크가 나를 지웠다. 그녀의 눈에 나는 그냥, 반지하에 사는 일용직 인부였다.투명 인간.다시.*그날 밤 열한 시 반. 산책에서 돌아오는 발소리.나는 창문 아래 벽에 붙어 있었다. 늘 그렇듯이.발소리가 계단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두부가 다시 짖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 창문을 향해."두부야, 또 왜 그래. 아까부터."두부가 리드줄을 끌었다. 반지하 창문 쪽으로. 창문 바로 앞 골목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유리 너머 5센티미터. 두부의 까만 코가 유리에 닿았다. 김이 서렸다.나는 창문 바로 아래,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멈췄다. 두부의 코는 내 머리 위 30센티미터에 있었다."여기 뭐 있어?"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그녀가 쪼그려 앉았다.창문 너머로 그녀의 무릎이 보였다. 그다음 그녀의 손. 유리창에 손바닥을 댔다. 햇빛을 가리듯이. 그리고 얼굴.그녀의 얼굴이 반지하 창문에 다가왔다. 유리에 이마를 댈 듯이. 어두운 방 안을 들여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