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3화 — 우연은 두 번 겹쳤다
“아…….”
눈을 뜨자마자 천장이 보였다.
익숙한 천장.
벽지 귀퉁이는 아주 조금 떠 있었고, 형광등 옆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작은 얼룩이 있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것만 바라봤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오전 10시 47분.
“미친…….”
회사 다닐 때였으면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지금은 이제 막 눈을 떴다.
알람도 없고.
누가 깨우는 사람도 없고.
어디로 출근하라는 사람도 없다.
처음 퇴사했을 때는 이게 그렇게 좋았다.
월요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알람을 꺼버리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쓸 때의 해방감.
회사 단체메신저가 울리지 않는다는 것.
팀장의 전화가 오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매일이 일요일처럼 변하자 이번에는 그 자유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오늘이 월요일인지 수요일인지도 가끔 헷갈렸다.
일어나서 씻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고,
점심을 건너뛰어도 상관없었고,
낮부터 맥주를 마셔도 아무도 모른다.
좋은 일 같지만……
이게 계속되니까 사람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일이 다시 떠올랐다.
옥상.
맞은편 창문.
그리고 그 누나.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하…….”
내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박동진. 너 원래 이런 놈이었냐?”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옥상에 올라갔고,
사람을 구경했고,
맞은편 집에 우연히 그 누나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창문이 열릴 때 괜히 신경이 쓰였고,
그녀가 방 안에서 움직일 때 나도 모르게 시선이 따라갔다.
심지어 혹시나 그녀가 이쪽을 바라볼까 봐 몸을 숨겼다.
숨었다는 것 자체가 웃겼다.
아무 잘못도 없다면 왜 숨었겠는가.
“아…… 내가 이렇게 변태였나?”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혼자 변명했다.
“아니지.”
집에만 있으니까 그런 거다.
사람을 너무 안 만나서 그렇다.
회사 다닐 때는 하루에도 수십 명을 마주쳤다.
회의실에서도 사람.
엘리베이터에서도 사람.
구내식당에서도 사람.
퇴근하고 술집에 가도 사람.
그런데 지금은?
어제 내가 실제로 대화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그것도,
“봉투 필요하세요?”
“아니요.”
이게 전부였다.
“이러다 진짜 대인기피증 걸리겠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나가야겠다.
무조건.
마침 건강검진을 미루고 있었다.
회사에 있을 때 매년 받던 검진을 퇴사하고 나니까 괜히 미루게 됐다.
며칠 전에는 배 쪽이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별건 아니겠지만 어차피 할 것도 없었다.
“그래. 병원이나 가자.”
샤워를 했다.
오랜만에 면도도 깔끔하게 했다.
옷장 앞에서 잠깐 고민했다.
트레이닝복을 입으려다가 괜히 청바지를 꺼냈다.
‘누굴 만난다고.’
피식 웃었다.
그래도 병원에 가는데 사람 꼴은 하고 가야지.
거울을 봤다.
스물아홉.
아직 서른은 아니다.
그런데 퇴사하고 몇 달 지났다고 얼굴이 조금 상한 것 같았다.
“다시 취업해야지.”
거울 속의 나에게 말했다.
“정신 차리자, 박동진.”
집 근처 삼성병원까지는 버스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일 낮인데도 병원은 사람들로 붐볐다.
환자.
보호자.
간호사.
의사.
직원.
오랜만에 많은 사람 속에 들어오니 이상했다.
조금 피곤하면서도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살아야 한다.
접수를 하고 기다렸다.
채혈.
엑스레이.
기본 검사.
그리고 초음파.
검진센터의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소독약 냄새와 에어컨 냄새가 섞인 듯한.
나는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만졌다.
주식창을 한번 열었다가 바로 닫았다.
취업 사이트도 들어갔다.
경력직 채용.
품질관리.
공정관리.
생산관리.
대기업 경력 우대.
‘하…….’
한때는 저런 공고를 보면서 내가 고르는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달랐다.
사고가 난 뒤 회사에서 나올 때만 해도 자존심이 있었다.
‘나 정도 경력이면 금방 다시 들어가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직이라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경력은 경력대로 애매했고,
연봉을 낮추자니 아쉬웠고,
예전 회사보다 작은 곳을 가자니 자존심이 걸렸다.
그렇게 하나씩 따지다 보니 몇 달이 흘렀다.
“박동진 환자분.”
“네.”
내 이름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음파 검사실.
“여기 누워주세요.”
“네.”
간호사가 검사 준비를 했다.
잠시 뒤 담당자가 들어왔다.
“배에 힘 빼시고요.”
차가운 젤이 닿았다.
“앗.”
“차갑죠?”
“네.”
“숨 크게 한번 들이마실게요.”
“후우…….”
검사는 별일 없이 끝났다.
나는 티셔츠를 내리며 검사실 밖으로 나왔다.
‘끝났나.’
이제 결과만 듣고 가면 됐다.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빠르게 걸어왔다.
하얀색과 옅은 색이 섞인 병원 유니폼.
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봤다.
그러다가 시선이 멈췄다.
‘어?’
한 걸음.
두 걸음.
그 사람이 가까워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익숙한 눈매.
익숙한 얼굴형.
어젯밤 맞은편 창문에서 본 여자.
“……그 누나?”
소리가 나올 뻔해서 입을 다물었다.
맞았다.
아무리 봐도 그 누나였다.
고등학교 때 같은 버스에서 몇 번 봤던 여자.
그리고 어제 맞은편 집에서 다시 발견한 여자.
그녀가 여기 있었다.
‘간호사였어?’
신기했다.
집에서는 머리를 편하게 묶고 돌아다니던 사람이 병원에서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걸음도 빨랐다.
표정도 제법 진지했다.
손에는 서류가 몇 장 들려 있었고 목에는 직원증이 걸려 있었다.
멀어서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
순간 눈이 직원증으로 갔다.
그리고 바로 정신을 차렸다.
‘야. 뭐 하는 거야.’
나는 시선을 거뒀다.
그녀는 동료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갑자기 이상한 긴장감이 올라왔다.
‘눈 마주치면?’
아니.
눈 마주치면 뭐.
그 누나는 나를 모른다.
내가 고2 때 같은 버스에서 몇 번 봤다는 사실도 당연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어젯밤에도 나는 어두운 옥상에 있었다.
그녀가 나를 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
왜인지 나는 몸을 슬쩍 돌렸다.
벽 쪽에 붙어 있는 안내판을 보는 척했다.
‘뭐 하는 거냐.’
진짜 우스웠다.
잘못한 사람처럼 숨고 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내 뒤쪽을 지나갔다.
은은한 향이 잠깐 스쳤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사이로 아주 희미한 샴푸 냄새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대로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한 5초.
10초.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멀어지고 있었다.
뒷모습이 보였다.
‘진짜 여기서 근무하는구나.’
이상했다.
어제까지는 그냥 창문 너머에 있는 사람이었다.
현실감이 별로 없었다.
낡은 주택 3층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이름 모를 여자.
그 정도.
그런데 병원에서 보니 갑자기 사람이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아침에 출근하고.
환자를 만나고.
동료와 이야기하고.
퇴근하면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
당연한 건데도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검진 결과를 기다리면서도 몇 번이나 복도 쪽을 바라봤다.
혹시 다시 지나가나 싶어서.
‘미쳤나.’
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일부러 취업 사이트를 열었다.
채용공고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집중은 하나도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계속 조금 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삼성병원 간호사.’
처음 알아낸 정보였다.
알아내려고 한 것도 아닌데 알게 됐다.
그게 묘하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병원을 나왔다.
햇빛이 생각보다 강했다.
나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커피를 하나 샀다.
창가 자리에서 잠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몇 시에 퇴근하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야.”
혼잣말이 나왔다.
“그걸 네가 왜 궁금해해.”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궁금했다.
어제는 밤 9시쯤 집에 왔다.
간호사면 근무시간이 일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교대근무도 있을 테고.
오늘은?
오늘도 그 시간에 올까?
나는 그 생각을 억지로 밀어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일부러 서점에도 들렀다.
이직 준비용 책을 하나 샀다.
면접 관련 책.
자기소개서 관련 책.
계산을 하면서 스스로 조금 뿌듯했다.
‘그래. 이게 맞지.’
집에 돌아왔다.
오후 4시.
노트북을 켰다.
이력서를 수정했다.
경력기술서도 다시 읽었다.
예전 회사에서 했던 프로젝트를 하나씩 정리했다.
생각보다 집중이 잘됐다.
병원에 갔다 와서 그런지 기분도 조금 환기됐다.
6시.
저녁을 먹었다.
7시.
유튜브를 잠깐 봤다.
7시 40분.
샤워를 했다.
8시 10분.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봤다.
8시 17분.
아직 이르다.
나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10분쯤 지났다.
또 시간을 봤다.
8시 29분.
“…….”
왜 계속 시간을 보고 있는지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애써 무시했다.
채용공고를 하나 더 봤다.
8시 41분.
이번에는 내가 나 자신에게 웃음이 났다.
“진짜 미쳤네.”
어제 그녀가 집에 들어온 시간이 9시 조금 넘어서였다.
그 시간이 가까워지니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맥주가 보였다.
하나 꺼냈다.
그리고 3초 동안 바라봤다.
‘올라갈 거냐?’
나는 캔을 땄다.
칙.
“바람이나 쐬는 거지.”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변명했다.
옥상 철문을 열었다.
밤공기가 들어왔다.
낮에 더웠던 열기가 아직 콘크리트 바닥에 남아 있었다.
나는 난간에 기대지 않고 조금 뒤에 섰다.
오늘은 괜히 더 의식됐다.
병원에서 그녀를 봤기 때문이었다.
맞은편 주택의 창문은 어두웠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1층에는 다른 집 불이 켜져 있었다.
TV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2층 창문에서는 누군가 빨래를 걷고 있었다.
3층.
그녀의 집.
어둡다.
나는 맥주를 마셨다.
‘오늘 늦나?’
8시 58분.
9시 3분.
골목을 사람들이 지나갔다.
회사원처럼 보이는 남자.
장을 보고 돌아오는 아주머니.
학생 둘.
배달 오토바이.
나는 그 사람들을 보고 있었지만 사실 기다리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9시 11분.
‘안 오네.’
묘하게 허전했다.
9시 17분.
그때였다.
골목 아래에서 익숙한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바로 알아봤다.
‘왔다.’
하루밖에 안 봤는데도 걸음이 눈에 익었다는 게 조금 무서웠다.
그녀였다.
낮에 병원에서 본 모습과는 달랐다.
사복.
어깨에는 가방.
손에는 작은 비닐봉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걸음이 느렸다.
터벅.
터벅.
“피곤해 보이네.”
나도 모르게 말했다.
가까워질수록 얼굴이 조금씩 보였다.
오늘은 머리를 묶지 않고 반쯤 풀어놓은 것 같았다.
병원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온 탓인지 표정에는 힘이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 그 모습이 더 사람답게 느껴졌다.
예쁘게 꾸민 것도 아니었다.
그냥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직장인.
‘나랑 다르네.’
나는 갑자기 조금 씁쓸해졌다.
저 사람은 오늘도 일을 했다.
나는 하루 종일 저 사람이 언제 오는지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녀가 맞은편 주택 입구로 들어갔다.
잠시 후.
찰칵.
1층 계단 불이 켜졌다.
나는 무심코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빛이 꺼졌다.
이번에는 2층.
찰칵.
조금 뒤 다시 꺼졌다.
그리고……
3층.
방에 불이 켜졌다.
“왔네.”
입에서 또 같은 말이 나왔다.
불이 켜지자 작은 그림자 두 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강아지들이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달려드는 것 같았다.
멀리서도 움직임이 요란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두 마리네.”
한 마리가 조금 더 컸다.
다른 한 마리는 작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가 가방을 내려놓고 몸을 숙였다.
강아지들이 그녀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가 녀석들을 쓰다듬는 모습이 보였다.
병원에서 봤던 단정하고 바쁜 간호사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집에 돌아오자 표정부터 풀어진 것 같았다.
물론 여기서 정확하게 얼굴이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느껴졌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여름밤.
창문은 열려 있었다.
커튼은 한쪽으로 대충 밀려 있었다.
맞은편 주택과 우리 집의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 방의 일부가 어렴풋이 보였다.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가구의 위치.
사람의 움직임.
그 정도.
그녀가 냉장고 쪽으로 갔다.
물을 마시는 것 같았다.
다시 돌아왔다.
머리를 한번 털어내더니 어깨를 주물렀다.
‘힘들긴 한가 보네.’
나는 괜히 어깨가 뻐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그녀는 집안을 정리했다.
강아지 밥을 챙기는 것 같기도 했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웠다.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침대 근처 의자에 옷가지 몇 개를 올려놓았다.
창문 안쪽에서 움직이는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불빛 때문에 윤곽만 조금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어제처럼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
‘그만 봐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도 시선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자기 집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내 존재를 모른다.
내가 맞은편 옥상에서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그 사실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그녀가 의자 위에 올려놓았던 옷가지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얇은 천이 바닥에 흐트러졌다.
정확히 뭔지는 보이지 않았다.
작은 옷가지.
그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시선이 그곳에 멈췄다.
“……야.”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이 괜히 말랐다.
‘정신 차려.’
그녀가 그 옷가지를 다시 주워 의자 위에 올렸다.
그리고 방 안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실루엣이 다시 나타났다.
머리끈을 풀었는지 머리카락이 어깨 쪽으로 내려왔다.
병원에서 단정하게 묶고 있던 모습과 달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머리 풀면 저런 느낌이구나.’
고등학교 때 버스 안에서 본 기억이 아주 희미하게 겹쳤다.
그때도 긴 머리였던 것 같았다.
정확하지 않다.
십 년이 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래된 기억이 하나씩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잠시 창문 가까이 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거리가 고작 2미터 남짓.
서로 다른 건물이라고 해도 너무 가까웠다.
조금만 밝았다면 얼굴도 보였을 것이다.
나는 난간 아래쪽에 몸을 낮췄다.
‘들키면?’
상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뭐라고 할 것인가.
그냥 바람 쐬러 나왔다고?
사람 구경했다고?
우연히 몇 번 봤다고?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부 진실도 아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조용했다.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창가에 없었다.
“후…….”
나도 모르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 다시 움직임이 보였다.
그녀가 방 안쪽에서 옷을 정리하는 듯했다.
겉옷 하나가 의자 위로 넘어갔다.
또 다른 옷가지가 침대 끝에 걸렸다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골목.
가로등.
맞은편 지붕.
‘이건 아니지.’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그 궁금함을 느끼는 나 자신이 더 당황스러웠다.
나는 한동안 맞은편을 보지 않았다.
맥주캔만 바라봤다.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 물방울 하나가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렸다.
‘내려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사락.
천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커튼이었다.
그녀가 창가에 서 있었다.
“앗.”
나는 바로 몸을 숙였다.
아까와는 다르게 심장이 정말 세게 뛰었다.
쿵.
쿵.
쿵.
‘봤나?’
소름이 돋았다.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몇 초.
길게 느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눈만 내밀었다.
그녀가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골목 쪽을 한번.
아래쪽을 한번.
그리고……
내가 있는 옥상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았다.
“…….”
나는 바로 몸을 낮췄다.
숨까지 멈췄다.
‘봤어?’
아니.
못 봤을 것이다.
옥상은 어두웠다.
나는 난간보다 뒤에 있었다.
그래도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혹시 내가 움직이는 그림자를 본 것은 아닐까.
잠시 후 다시 슬쩍 확인했다.
그녀는 아직 창가에 있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커튼을 잡았다.
사락.
한쪽이 닫혔다.
또 사락.
반대쪽도 닫혔다.
완전히.
순식간에 방 안이 가려졌다.
빛만 희미하게 천 너머로 비쳤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공간이 사라졌다.
강아지들이 움직이는 것도.
그녀가 돌아다니는 것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냥 커튼.
“…….”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안도감.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동시에……
아쉬움.
그 감정을 깨닫는 순간 내가 더 싫어졌다.
“뭐 하는 거야.”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맥주를 마셨다.
거의 미지근해져 있었다.
평소 같으면 맛없다고 버렸을 텐데 그냥 다 마셨다.
커튼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5분.
10분.
나는 왜인지 계속 기다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
결국 옥상 철문 쪽으로 걸어갔다.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커튼 사이로 노란 불빛만 아주 조금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왔다.
철문을 닫았다.
철컥.
방에 들어왔다.
갑자기 조용했다.
TV도 켜지 않았다.
침대 끝에 앉았다.
맥주캔을 책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멍하니 창문을 바라봤다.
내 방 창문에서도 맞은편 집의 일부가 보였다.
하지만 각도가 달라서 그녀의 방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커튼을 닫았다.
왜인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웠다.
불을 껐다.
눈을 감았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본 모습이 떠올랐다.
간호사복.
단정하게 묶은 머리.
서류를 들고 빠르게 걷던 모습.
그리고 밤.
집으로 돌아온 모습.
피곤하게 계단을 올라오던 모습.
강아지들에게 몸을 숙이던 모습.
머리를 풀던 그림자.
바닥에 툭 떨어졌던 작은 옷가지.
그리고……
커튼.
나는 눈을 떴다.
“하…….”
베개를 뒤집었다.
조금 시원했다.
‘이게 뭐지?’
나는 그 누나의 이름도 모른다.
나이도 정확히 모른다.
아마 나보다 한 살 정도 많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연애를 하는지도 모른다.
결혼했는지도 모른다.
혼자 사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나는 오늘 그녀가 몇 시에 집에 돌아왔는지를 알고 있었다.
9시 17분.
왜 그 시간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병원에서 일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가 알아내려고 한 게 아니었다.
우연이었다.
그런데 우연이 두 번 겹치자 이상하게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 시절 같은 버스에서 봤던 여자.
십 년이 훌쩍 지난 뒤 맞은편 집에서 다시 발견했다.
그리고 다음 날 병원에서 또 만났다.
“우연이지.”
당연히 우연이다.
부산에서 같은 동네에 살면 근처 병원에서 일할 수도 있다.
별것 아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별것 아닌 우연에 의미를 붙이기 시작한다.
‘혹시 인연인가?’
그 생각이 떠오르자 나는 웃었다.
“미친놈.”
인연은 무슨.
서로 말 한마디 해본 적 없다.
그녀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
나는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한 단어가 떠올랐다.
사랑.
“사랑인가?”
나는 내 입으로 말하고도 기가 막혀 웃었다.
“뭔 사랑이야.”
사랑이라면 그 사람을 알아야 하지 않나.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어떤 성격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런 걸 하나도 모른다.
그런데 왜 궁금하지?
왜 계속 보고 싶지?
왜 커튼이 닫히니까 아쉬웠지?
외로워서?
아니면 그냥 이성을 너무 오래 가까이하지 않아서?
퇴사한 뒤 무너진 일상 속에서 우연히 눈에 들어온 사람이어서?
나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녀를 발견한 뒤 내 하루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아침에 일어난다.
밥을 먹는다.
인터넷을 본다.
취업 준비를 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시간을 확인한다.
오늘은 몇 시에 올까.
그 생각을 한다.
그게 조금 무서웠다.
사람의 습관은 별것 아닌 것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한 번.
다음에는 두 번.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하지 않으면 허전해진다.
오늘 내가 옥상에 올라간 것도 어쩌면 그런 시작일지 몰랐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커튼이 닫히기 직전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가 창밖을 바라봤다.
혹시……
정말로 나를 봤던 건 아닐까?
아니.
그럴 리 없다.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확실하다.
아마 그냥 바깥을 본 것이다.
여름밤이라 창문을 닫기 전에 골목을 한번 본 것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심장은 조금 빨리 뛰었다.
혹시 내일은 커튼을 처음부터 닫아놓으면?
왜인지 그 생각이 싫었다.
나는 그 순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문제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집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문제는 나였다.
그녀를 기다리고,
그녀가 나타나면 반갑고,
사라지면 아쉬워하는 나.
“아…….”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집에만 있으니까 미쳐가는 거다.”
내일은 진짜 밖에 나가야겠다.
운동도 하고.
카페도 가고.
사람도 만나고.
취업 준비도 제대로 하고.
옥상에는 올라가지 말자.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전혀 달랐다.
‘내일은 몇 시에 들어오려나.’
그 생각과 함께 입가에 아주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곧바로 스스로가 한심해져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호기심인가.
외로움인가.
설렘인가.
아니면 점점 위험해지는 집착인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그녀는 아직 나를 모른다.
내 이름도.
내가 맞은편 집에 산다는 것도.
고등학교 시절 같은 버스를 탔다는 것도.
그리고……
밤마다 자신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옥상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불 켜지는 창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조금씩 그녀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상할 정도로 짜릿하면서도,
동시에 불편했다.
그날 밤 나는 꽤 늦게 잠들었다.
창문 밖에서는 여름 벌레 소리가 들렸다.
가끔 자동차가 골목을 지나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도 났다.
그러다 잠이 들기 직전,
맞은편 어딘가에서 작은 강아지가 두어 번 짖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생각했다.
‘저 집인가.’
그리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내일 아침이면 또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루하기만 했던 내 일상에,
조금 궁금한 사람이 생겼다.
그 정도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녀는 계단을 올라갔다.나는 몇 걸음 뒤에서 따라 올라갔다.끝까지 말을 걸지는 않았다.그녀는 오른쪽 골목으로 사라졌고,나는 우리 집 쪽으로 향했다.그런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상하게 심장이 가라앉지 않았다.술기운 때문인지,아니면 방금까지 그녀와 같은 계단을 걸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모르겠다.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창가부터 봤다.잠시 뒤.맞은편 3층.불이 켜졌다.“왔다.”이제는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었다.나는 맥주 대신 물을 한 잔 마셨다.그런데도 취기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평소 같으면 괜히 조심했을 텐데,오늘은 이상하게 대담했다.창가 가까이 다가갔다.평소보다 훨씬 가까이.‘뭐 어때.’술이 들어가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어차피 그녀는 모른다.그리고 나는 이제 그녀의 생활 패턴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집에 돌아온다.강아지들이 뛰어나온다.가방을 내려놓는다.창문을 연다.방 안을 정리한다.씻으러 들어간다.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운동을 한다.처음에는 모든 행동이 새로웠다.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아마 이제 창문 열겠지.”드르륵.정말 열렸다.나는 피식 웃었다.“역시.”잠시 후 그녀가 방 안을 오갔다.나는 그녀의 다음 행동까지 예상하고 있었다.‘이제 씻으러 가겠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방 안쪽으로 사라졌다.나는 한동안 빈 방만 바라봤다.예전 같았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쉬웠을 텐데,이제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샤워 중이겠지.’잠시 뒤 다시 나타났다.머리를 정리하고,물을 마시고,매트를 꺼냈다.“그리고 운동.”역시.매트가 깔렸다.나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너무 익숙했다.그녀의 하루가.그런데 웃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내가 이걸 왜 다 알고 있지?’몇 시쯤 집에 돌아오는지.들어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는지.어디에서 운동하는지.언제쯤 창문을 닫는지.이제는 조금만 봐도 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 있었다.그게 갑자기 소름 끼쳤다.하지만 오
오늘도 그녀의 창문이 열렸다.드르륵—이제는 저 장면이 너무 익숙했다.내 하루에 시계처럼 반복되는 풍경.아침이면 불이 켜지고,창문이 열리고,그녀가 나타난다.“오늘도 환기부터 하네.”나는 부엌에서 냄비에 물을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오늘 점심도 라면이었다.백수가 된 뒤 가장 많이 늘어난 소비 품목이 있다면 맥주와 라면일 것이다.회사 다닐 때는 점심 메뉴라도 매일 달랐다.구내식당.국밥.중국집.팀원들과 가끔 먹던 고깃집.그런데 지금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배가 고프면 라면.조금 기분 내고 싶으면 치킨.그마저 귀찮으면 그냥 맥주.“계란이나 하나 넣자.”냉장고를 열었다.계란 두 개.하나를 꺼냈다.그러면서 또 맞은편을 바라봤다.그녀가 방 안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잠시 뒤 옷 몇 벌을 들었다.‘옷 갈아입으려나?’그 생각이 드는 순간,보글보글.물이 넘치기 시작했다.“아!”급하게 가스불을 줄였다.라면봉지를 뜯어 면을 넣고 스프를 털어 넣었다.계란까지 하나 깨 넣었다.그러고 다시 창가 쪽을 봤을 때는—“……어?”이미 늦었다.조금 전과 옷이 달라져 있었다.“벌써 갈아입었네.”나는 피식 웃었다.“또 놓쳤네.”말하고 나서 내가 생각해도 웃겼다.“뭘 놓쳐, 이 인간아.”스스로 머리를 한번 긁었다.요즘 혼잣말이 정말 많이 늘었다.사람과 대화를 안 하니까 내가 나랑 대화하는 느낌이었다.라면 냄비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후루룩.“음.”계란 노른자를 살짝 터뜨려 면에 섞었다.역시 맛있다.TV를 켰다.경제 뉴스가 나왔다.청년 취업.경기 침체.기업 채용 축소.나는 두 젓가락 먹다가 채널을 돌렸다.“내가 밥 먹으면서까지 저걸 봐야 하냐.”예능 프로그램.몇 번 웃다가 그것도 재미없어 껐다.결국 다시 조용해졌다.라면을 다 먹고 싱크대에 냄비를 올려놓았다.“커피나 마시자.”커피 한 잔을 만들어 다시 창가에 앉았다.그리고 무심코 맞은편을 봤다.그녀의 방 바닥에 매트가 깔려 있었다.“어
4화 — 아침부터 그녀를 따라가다아침.눈을 뜨자마자 나는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아…….”대충 팬티 위로 긁적거리며 천장을 바라봤다.무료하다.진짜 너무 무료하다.회사 다닐 때는 아침이 그렇게 싫었다.알람 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났고,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이불 속에서 버텼다.그런데 지금은?눈을 떠도 갈 곳이 없다.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출근할 회사도 없다.회의도 없고.보고할 것도 없다.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처음 한두 달은 분명 좋았다.평일 아침 늦잠.낮술.게임.넷플릭스.그런데 이것도 계속되니까 사람이 점점 썩는 느낌이었다.나는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리고……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맞은편.그 누나네 집.이제는 거의 습관이었다.눈을 뜨면 휴대전화를 보는 게 아니라,먼저 맞은편 창문을 본다.“하…….”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나 진짜 왜 이러냐.”그런데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어?”아침부터 일어났네.출근 준비인가?나는 조금 더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그녀가 방 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한여름이라 그런지 편한 홈웨어 차림이었다.짧은 민소매.그리고 숏팬츠.잠이 덜 깬 듯한 흐트러진 머리.회사나 병원에서 봤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오…….”괜히 웃음이 나왔다.화려하게 꾸민 것도 아닌데 묘하게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거울 앞에 앉았다.화장품을 하나 꺼냈다.뭔가를 바르고.다시 일어났다.옷장을 열었다.다시 거울.또 옷장.또 거울.“여자들은 출근 준비도 바쁘네.”그녀는 침대 위에 옷을 하나 던졌다.휙.또 하나.휙.마음에 안 드는지 다시 집었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나는 피식 웃었다.“은근히 덤벙거리네.”그녀가 옷을 들고 방 안쪽으로 사라졌다.시야에서 없어졌다.“아…….”나도 모르게 작은 탄식이 나왔다.그리고 바로 정신을 차렸다.“야.”내가 내 머리를 한번 쳤다.“뭐가 아쉬워.”혼자 웃었다.몇 분 뒤 그녀가
3화 — 우연은 두 번 겹쳤다“아…….”눈을 뜨자마자 천장이 보였다.익숙한 천장.벽지 귀퉁이는 아주 조금 떠 있었고, 형광등 옆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작은 얼룩이 있었다.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것만 바라봤다.휴대전화를 확인했다.오전 10시 47분.“미친…….”회사 다닐 때였으면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었다.지금은 이제 막 눈을 떴다.알람도 없고.누가 깨우는 사람도 없고.어디로 출근하라는 사람도 없다.처음 퇴사했을 때는 이게 그렇게 좋았다.월요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알람을 꺼버리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쓸 때의 해방감.회사 단체메신저가 울리지 않는다는 것.팀장의 전화가 오지 않는다는 것.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했다.한 달이 지나고,두 달이 지나고,매일이 일요일처럼 변하자 이번에는 그 자유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오늘이 월요일인지 수요일인지도 가끔 헷갈렸다.일어나서 씻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고,점심을 건너뛰어도 상관없었고,낮부터 맥주를 마셔도 아무도 모른다.좋은 일 같지만……이게 계속되니까 사람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어젯밤 일이 다시 떠올랐다.옥상.맞은편 창문.그리고 그 누나.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하…….”내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박동진. 너 원래 이런 놈이었냐?”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다.옥상에 올라갔고,사람을 구경했고,맞은편 집에 우연히 그 누나가 살고 있었다.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창문이 열릴 때 괜히 신경이 쓰였고,그녀가 방 안에서 움직일 때 나도 모르게 시선이 따라갔다.심지어 혹시나 그녀가 이쪽을 바라볼까 봐 몸을 숨겼다.숨었다는 것 자체가 웃겼다.아무 잘못도 없다면 왜 숨었겠는가.“아…… 내가 이렇게 변태였나?”나는 머리를 긁적였다.그러다가 혼자 변명했다.“아니지.”집에만 있으니까 그런 거다.사람을 너무 안 만나서 그렇다.회사 다닐 때는
2화 — 밤 9시의 귀가아…… 무료하다.집에만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이직 준비를 한다고 노트북을 켜놓긴 했는데, 어느 순간 채용 사이트 대신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그러다 배가 고파졌다.결국 배달앱을 켰다.치킨.그리고 맥주.“캬…….”대낮부터 한 모금 들이켜니 기가 막혔다.“낮술은 역시 최고네.”스스로 말해놓고 피식 웃었다.백수가 낮술 마시는 걸 자랑할 일은 아닌데.그래도 회사 다닐 때는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평일 낮에 치킨을 시켜놓고 맥주를 마시는 것.처음 며칠은 자유 같았다.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자유도 지루했다.“이러다 진짜 대인기피증 걸리는 거 아냐?”오늘 대화한 사람이 배달기사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밖에라도 구경해야겠다.옥상으로 올라갔다.철문을 밀어 열자 익숙한 동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낡은 주택.빨랫줄.복잡하게 얽힌 전선.좁은 골목.이상하게 회사 다닐 때는 이런 걸 볼 시간도 없었다.아침이면 출근하기 바빴고,밤이면 피곤해서 집에 들어오기 바빴으니까.옥상 난간에 기대 사람들을 바라봤다.저기 슈퍼마켓 앞에는 김 씨 아저씨가 있었다.고등학교 동창놈 아버지다.“어?”걷는 모습이 예전과 달랐다.한쪽 다리를 조금씩 끌고 있었다.“다리가 안 좋으신가 보네…….”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게 이런 데서 느껴졌다.나만 늙는 게 아니었다.동네도,사람들도,조금씩 변하고 있었다.그렇게 별 의미 없이 사람 구경을 했다.학생들이 지나가고,퇴근하는 사람들이 지나가고,배달 오토바이가 골목을 오갔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휴대전화를 확인했다.오후 8시 58분.“벌써 아홉 시네.”슬슬 내려가려고 몸을 돌렸다.그 순간,아래쪽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또각.또각.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나는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멈췄다.“어?”그 누나다.어제 봤던 여자.고등학교 때 버스에서 몇 번 봤던 그 사람.시간을 확인했다.9시 2분.‘
1화 — 다시 보게 된 여자내 이름은 박동진.스물아홉.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들이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대기업을 다녔다.월급도 제때 들어왔고, 회사 명함을 내밀 때만큼은 그래도 남들 앞에서 기죽을 일은 없었다.그런데 사람 인생이라는 게 참 웃기다.한 번 꼬이기 시작하니까 정말 순식간이었다.회사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고.내가 원했던 것도 아니었고, 모든 책임이 내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퇴사.그리고 지금은 실업급여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신세다.“참 부질없다…….”나는 창문 너머로 빼곡하게 붙어 있는 낡은 주택들을 바라보며 맥주캔을 땄다.칙.오늘도 저녁은 맥주 한 캔에 마른오징어.퇴사 초기에는 그래도 뭔가 해보려고 했다.자격증 책도 샀고, 운동도 시작했고, 이력서도 몇 군데 넣었다.딱 한 달이었다.두 달째부터는 늦잠을 자기 시작했고,세 달째부터는 요일도 헷갈렸다.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하나였다.오늘은 뭘 하지?그리고 곧바로 두 번째 생각이 따라왔다.아무것도 하기 싫다.“아…… 이 동네도 지긋지긋하네.”내가 사는 곳은 오래된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였다.집은 4층짜리 낡은 주택.골목은 좁고, 전봇대마다 전선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창문을 열면 맞은편 집 벽이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웠다.잘해야 2미터.어렸을 때야 아무 생각 없었다.그런데 스물아홉이 되고 나니 갑자기 모든 게 초라하게 느껴졌다.나는 가끔 상상했다.좋은 차.넓은 아파트.그리고 조수석에는 예쁜 여자친구.주말이면 어디 근사한 곳에 가서 밥을 먹고,회사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 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삶.그런데 현실은?낡은 방.구겨진 티셔츠.편의점 맥주.그리고 오징어.“내 인생 참…….”피식 웃으며 오징어 다리를 뜯었다.그때였다.맞은편 집 창문 하나가 열렸다.드르륵.별생각 없이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잠깐 멈췄다.“어?”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