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는 창문 쪽을 봤다.
정확히는—
보려다가 멈췄다.
“아.”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그녀가 갑자기 창가로 다가왔던 순간.
그리고 분명 내 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던 시선.
나는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보지 말자.”
진짜로.
하루 정도는 안 봐도 된다.
아니.
안 보는 게 맞다.
며칠 사이 나는 너무 이상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의 집을 보고,
저녁이 되면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고,
심지어 그녀의 생활 패턴까지 외우고 있었다.
어제는 술기운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대담하게 창가 가까이까지 갔다.
그리고 거의 들킬 뻔했다.
아니.
어쩌면 정말 들켰을 수도 있다.
“오늘은 진짜 안 본다.”
나는 커튼까지 쳤다.
사락.
창문을 가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조금 편했다.
그래.
정상적으로 살자.
이직 준비도 하고.
밖에도 나가고.
사람도 만나고.
나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모임]
오늘 저녁.
부산 시내.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이자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회사를 그만둔 뒤부터 이상하게 사람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
누가 물어볼 것 같았다.
요즘 뭐 해?
회사 어디 다녀?
결혼은?
집은?
차는?
그런 질문들이 싫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말들인데,
지금은 하나하나가 내 현재 상태를 확인하는 질문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오늘은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특히 맞은편 창문을 또 보게 될 것 같았다.
나는 단체방에 짧게 답했다.
나도 간다.
저녁.
부산 시내 주점.
문을 열자 시끄러운 목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
“야! 박동진!”
“동진이 왔네!”
고등학교 졸업 후 몇 년 만에 보는 얼굴도 있었다.
누군가는 살이 쪘고,
누군가는 머리가 많이 빠졌고,
누군가는 학생 때와 거의 똑같았다.
“야, 너 그대로네.”
“뭐가 그대로야. 늙었지.”
“너는 회사 잘 다니냐?”
“그냥 그렇지.”
테이블에는 이미 소주병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나는 빈자리에 앉았다.
“한잔 받아.”
“오랜만이다.”
잔이 채워졌다.
짠.
술이 들어가자 처음의 어색함은 금방 사라졌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삶으로 흘러갔다.
“나 이번에 과장 달았다.”
“벌써?”
“올해 딱 됐지.”
“와, 너 진짜 빠르다.”
누군가는 진급 이야기를 했다.
“난 내년 봄에 결혼한다.”
“드디어?”
“청첩장 돌릴 거다.”
“신부 보여줘.”
휴대전화 사진이 테이블을 돌았다.
누군가는 결혼 이야기.
“나는 작년에 주식으로 좀 벌었다.”
“얼마나?”
“이걸 말하면 재수 없다고 할 건데.”
“얼마냐니까.”
“거의 집 한 채 값.”
“와, 미친.”
누군가는 투자 성공 이야기.
그리고 옆에 있던 친구가 바로 말했다.
“나는 반대다.”
“왜?”
“코인 물렸다.”
“얼마?”
“묻지 마.”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졌다.
사람 사는 게 정말 제각각이었다.
진급한 사람.
결혼을 앞둔 사람.
아이를 키우는 사람.
투자로 돈을 번 사람.
돈을 잃은 사람.
공무원이 된 사람.
사업을 시작한 사람.
그리고 나.
현재 무직.
취업 준비 중.
나는 술잔을 들었다.
괜히 한 번에 마셨다.
그때였다.
서재홍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야, 동진아.”
“왜.”
“취업 준비는 잘돼 가냐?”
“그냥 하지.”
“근데 그러게 왜 욱해서 좋은 회사 뛰쳐나오냐?”
순간 테이블 분위기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뭐?”
재홍은 별생각 없는 표정이었다.
“아니, 대기업이면 그냥 좀 참고 다니지. 요즘 취업도 힘든데.”
나는 웃지 않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 말이 평소보다 훨씬 거슬렸다.
“야.”
“왜.”
“너 잘 모르면 좀 닥쳐.”
재홍의 표정이 굳었다.
“뭘 그렇게까지 말하냐?”
“네가 뭘 안다고 ‘욱해서 나왔다’고 말해.”
“아니, 그냥 하는 말이지.”
“그냥 하는 말이면 아무 말이나 해도 되냐?”
옆에 있던 친구가 내 어깨를 잡았다.
“야야.”
다른 친구도 끼어들었다.
“동진아, 참아.”
나는 재홍을 계속 바라봤다.
재홍도 기분이 상한 듯 소주잔을 내려놨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됐어.”
“좋은 회사였잖아.”
“됐다니까.”
목소리가 커졌다.
그때 옆자리 친구가 재홍을 밀었다.
“야, 재홍아.”
그리고 나를 보며 말했다.
“동진아. 점마 원래 남 기분 생각 안 하고 말하잖아. 네가 그냥 이해해.”
“내가 왜 이해해야 하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조금 과하게 반응했다는 걸.
문제는 재홍의 말 자체보다—
그 말이 내가 스스로에게 매일 하던 말과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왜 나왔지?
조금만 더 버텼으면 되는 것 아닌가?
좋은 회사였는데.
연봉도 괜찮았는데.
다시 그런 곳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 생각을 남에게 듣는 순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좀 피고 올게.”
“너 담배 끊었잖아.”
“오늘만.”
밖으로 나왔다.
주점 앞 골목.
나는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샀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딸깍.
불을 붙였다.
후—
처음 한 모금에 바로 기침이 나왔다.
“콜록.”
나는 혼자 웃었다.
“이제 이것도 못 피네.”
그런데 두 번째부터는 조금 익숙했다.
연기가 천천히 올라갔다.
나는 벽에 기대었다.
“나도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재홍에게?
나 자신에게?
세상에게?
나도 회사에서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니다.
이렇게 몇 달씩 집에서 놀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진급하고.
누군가는 결혼하고.
누군가는 돈을 번다.
나라고 그러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
그냥—
조금 꼬였다.
그런데 한번 꼬이기 시작하니까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담배를 다시 빨았다.
그때였다.
골목 건너편 주점.
문이 열렸다.
여자 두 명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봤다.
그러다가—
손이 멈췄다.
“……어?”
익숙한 옆모습.
익숙한 머리.
나는 담배를 든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설마.”
다시 봤다.
맞았다.
그녀였다.
맞은편 집의 그 누나.
친구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술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뭐야.”
오늘 쉬는 날인가?
그래서 아침부터 집에 있었나?
아니.
나는 오늘 아침 일부러 보지 않았다.
그러니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친구와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멍하니 그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또?’
병원.
버스.
계단.
그리고 오늘은 부산 시내의 술집.
물론 이상할 건 없다.
같은 동네에 살고,
비슷한 나이대고,
부산에서 생활하면 갈 만한 곳도 어느 정도 겹친다.
그런데도 자꾸만 의미가 생겼다.
‘왜 계속 마주치지?’
나는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발로 비벼 껐다.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것도 우연이 아닌가?
아니.
무조건 우연이다.
그녀는 나를 모른다.
내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그녀를 발견한다.
그게 이상했다.
그리고 조금 반가웠다.
아까까지 재홍 때문에 엉망이었던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나는 주점 안으로 돌아갔다.
“어디 갔다 왔냐.”
“담배.”
“진짜 다시 피냐?”
“오늘만.”
나는 자리에 앉았다.
술잔이 다시 채워졌다.
이번에는 재홍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런데 나는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자꾸 건너편 술집이 신경 쓰였다.
그녀가 있다.
바로 저기.
창문 하나 너머가 아니라,
같은 거리.
같은 시간.
같은 부산의 밤.
나는 몇 번이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10분.
20분.
30분.
결국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다시 밖으로 나왔다.
건너편 주점 유리창 너머로 그녀가 보였다.
친구와 마주 앉아 있었다.
맥주잔.
작은 안주.
그녀는 무슨 이야기를 듣는지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집에서 강아지를 안을 때와도 달랐다.
병원에서 동료와 이야기할 때와도 달랐다.
친구와 있을 때의 얼굴.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냥—
바라봤다.
‘저렇게 웃는구나.’
그녀가 맥주잔을 들었다.
친구와 잔을 부딪쳤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당연했다.
나는 그들의 세계 밖에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 궁금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무슨 고민이 있는지.
남자친구 이야기도 하는지.
혹시 남자친구가 있는지.
나는 그 생각에서 잠깐 멈췄다.
‘왜 그게 궁금하지?’
답은 뻔했다.
싫은 거다.
있을까 봐.
그 사실을 인정하자 가슴 한쪽이 묘하게 답답했다.
“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미쳐가네.”
사랑인가?
아직도 모르겠다.
그런데 적어도 예전처럼 단순히 ‘예쁜 옆집 여자’ 정도는 아니었다.
오늘 같은 날.
친구들 앞에서 자존심이 상하고,
내 인생이 남들보다 뒤처진 것처럼 느껴지고,
술과 담배로 기분을 달래던 순간에도—
그녀를 발견하자 기분이 달라졌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 감정은 그녀 하나 때문에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계속 바라봤다.
혹시 나오려나.
몇 시에 나가려나.
어디로 갈까.
머릿속에 질문이 하나씩 생겼다.
그러다 스스로 정신을 차렸다.
‘집에 가야지.’
하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술기운 탓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만.
오늘만 조금 더 보자.
그녀는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나는 거리 건너편의 어두운 곳에서 그녀가 있는 술집을 바라봤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우연이 계속 겹칠 수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 버스.
십 년 뒤 맞은편 집.
삼성병원.
출근 버스.
동네 계단.
그리고 부산 시내 술집.
하나하나만 보면 전부 별것 아니다.
그런데 이어 붙이면—
마치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무슨 영화 찍냐.”
당연히 우연이다.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우연.
하지만 나에게는 점점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다시 술집 안의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그녀도 나를 알아보게 되는 날이 올까.
아니면 나는 계속 이렇게,
그녀는 나를 모르는 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게 될까.
그날 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침에 나는 다짐했다.
오늘은 그녀를 보지 말자.
그런데 정작 집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 시내 한복판에서—
나는 또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주에 고등학교 단톡방이 시끄러웠다.평소엔 몇 달씩 조용하던 방이었다. 동창회 공지나 부고 정도만 올라오던. 그런데 재홍이 신혼여행 사진을 올리면서 불이 붙었다.[재홍: 몰디브 다녀왔다 ㅋㅋ 사진 투척][사진 12장]에메랄드빛 바다. 수상 방갈로. 선글라스를 쓴 재홍과 신부.[태훈: 와 부럽다 ㅋㅋ 우리는 애 때문에 제주도도 못 감][민혁: 재홍이 성공했네][성호: 몰디브 좋지. 나도 작년에 갔는데][재홍: 민혁이 니도 이번에 팀장 됐다매 축하한다!!][민혁: ㅋㅋ 아직 대행이다][태훈: 대행이 어디냐 우리 회사는 40 넘어야 팀장인데][성호: 나 이번에 차 바꿨다 ㅋㅋ][사진 1장 — 검은색 외제 SUV][준영: 다들 잘 사네 ㅋㅋ 나도 요즘 가게 자리 잡았다. 다음에 놀러 와라]나는 알림을 끄지 않았다. 한 줄씩 올라오는 메시지를 봤다. 반지하 매트리스 위에서. 깁스한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몰디브. 팀장. 외제 SUV. 가게.그리고 원주.[원주: 나도 발령받고 첫 명절 보너스 받았다 ㅋㅋ][사진 1장 — 공무원증을 목에 건 원주가 청사 앞에서 어색하게 웃는][재홍: 원주 드디어!! 4년 고생했다 진짜][태훈: 원주 축하한다 ㅠㅠ 진짜 대단하다][민혁: 서원주 공무원 ㅋㅋㅋ 적응 안 되네]모두가 원주를 축하했다. 원주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4년. 떨어져도 다음 날 아침 여섯 시에 독서실에 가던.나는 그 사진 속 원주의 얼굴을 봤다. 공무원증. 청사. 새 정장. 반듯한.그리고 한 줄이 올라왔다.[성호: 근데 동진이는 요새 뭐 하노? 대기업 그만두고 소식이 없네]단톡방이 조용해졌다.일 분. 이 분.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 동창회에서의 일. 재홍과의 충돌. 담배를 다시 피우던 나. 소문은 돌았을 것이다. 원주를 통해서든, 누구를 통해서든.삼 분 뒤.[원주: 동진이 잘 지낸다. 요새 바쁘다]원주가 나를 덮어주고 있었다. 차단당한 채로. 단톡방에서.[성호: 오 그래? 어디 들어갔나?]
2월이 됐다.깁스는 3주째였다. 오른손은 여전히 쓸 수 없었다. 왼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왼손으로 휴대폰을 봤다.입력창의 한 줄은 그대로였다. 서연 씨, 저 박동진입니다. 매일 밤 대화방을 열어 그 한 줄을 확인했다. 지워지지 않았는지. 보내지지 않았는지. 장전된 총을 점검하듯이.월세 날이 지났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문을 두드렸다."총각, 이번 달 거는?""…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손을 다쳐서 일을 못 해서요. 산재 나오면 바로 드릴게요."할아버지는 깁스를 보고 혀를 찼다."아이고. 알았다. 보름만 기다리꾸마."문이 닫혔다. 나는 노트북을 중고 거래 앱에 올렸다. 대기업 시절에 산. 이력서를 쓰던. 이틀 만에 팔렸다. 사십만 원.노트북이 사라진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채용 공고를 볼 수단이 없어졌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더 이상 척할 필요가 없었다.*토요일 오전, 누가 문을 두드렸다.통장이었다. 26화에서 이상한 남자를 봤느냐고 묻던. 클립보드 대신 작은 봉투 뭉치를 들고 있었다."아이고, 새로 이사 온 총각이가. 반상회비 받으러 왔어요. 한 달에 오천 원."통장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깁스, 덥수룩한 수염, 푹 눌러쓴 모자. 몇 달 사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네, 잠깐만요."지갑에서 오천 원을 꺼내는 동안, 통장은 현관에 서서 수다를 떨었다."요 위에 간호사 아가씨 있제? 강아지 두 마리 키우는. 그 아가씨 4월에 시집간다. 내가 청첩장 받았다 아이가. 봐라, 이쁘제."통장이 봉투 뭉치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베이지색 종이. 금박 테두리. 레이스 문양. 41화, 그녀의 책상 위에 있던 시안이 완성된 모습이었다.그리고 그 위에 사진. 벚꽃 아래, 하얀 드레스와 턱시도. 서로를 보며 웃는.신랑 정도윤 · 신부 한서연.4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 2시.나는 오천 원을 내밀던 손을 멈췄다. 통장이 오천 원을 받아 들며 계속 말했다."그 아가씨 고생 많이 했다. 저 위
다른 간호사가 왔다. 오십 대. 수간호사 같은 얼굴. 무표정하게 라인을 잡았다. 바늘이 들어갈 때 설명도 없었다. 진통제가 들어갔다."깁스는 정형외과 선생님 오시면 할 거예요. 기다리세요."그녀는 그 말만 하고 커튼을 쳤다. 세게. 커튼 고리가 레일에서 쨍하고 울렸다.진통제가 퍼지기 시작했다. 손의 통증이 멀어졌다. 대신 귀가 밝아졌다.커튼 너머 스테이션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간호사들. 낮게, 그러나 들리게."…그 사람이야? 서연 쌤 말한 그?""응. 창문에 돌 던지고, 새벽에 전화하고. 경찰서까지 갔었대.""미친. 근데 왜 여기 와.""공사장에서 다쳤대. 일용직 한대.""서연 쌤 불쌍해 죽겠네. 결혼 앞두고 이게 뭐야. 요즘 겨우 좀 살 만하다더니.""수간 쌤이 7번 볼 때 두 명씩 들어가래. 혹시 모르니까."혹시 모르니까.나는 들것 위에서 그 말들을 들었다.스토커. 그 단어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단어가 모든 문장 사이에 있었다. 그 사람. 창문에 돌. 새벽에 전화. 경찰서. 혹시 모르니까.나는 이 병원에서, 그녀의 동료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진통제 때문인지 분노가 늦게 왔다. 한참 뒤에야, 천천히, 뜨겁게.그녀가 말했다. 동료들에게. 나에 대해. 내 얼굴을 보기도 전에, 병원 전체가 나를 알고 있었다.나는 한 번도 말할 기회가 없었다.내 입장을. 내 마음을. 83번 버스를. 강릉을. 두부를. 캔커피를.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얼마나 오래.모두가 그녀의 이야기만 듣는다. 경찰도, 어머니들도, 원주도, 이 간호사들도. 아무도 내 이야기를 묻지 않는다.그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단 한 번만.*깁스를 한 채 새벽 두 시에 반지하로 돌아왔다.택시비 이만 원. 응급실 비용은 산재 처리한다고 반장이 말했다. 한 달은 일을 못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한 달이면 월세를 못 낸다.매트리스에 누웠다. 오른손이 욱신거렸다. 천장을 봤다.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었다. 돈. 손. 일. 그리고 3월 초, 그녀의 신혼집 입주
1월 둘째 주. 현장은 신축 오피스텔 공사장이었다.오후 세 시, 3층 슬라브에서 거푸집 자재를 나르던 중이었다. 잠을 못 잔 지 사흘째였다. 제야 이후로, 눈을 감으면 스파클러 불꽃이 보였다. 불꽃 사이 두 사람의 얼굴이.발이 꼬였다. 자재 더미가 무너졌다. 나는 오른손을 짚으며 넘어졌다. 그 위로 합판 모서리가 떨어졌다.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나는 처음 들었다. 둔하고 짧았다.그다음은 소리가 없었다. 통증이 너무 커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 꺼졌다.*현장 반장이 119를 불렀다. 구급차 안에서 구급대원이 물었다."가까운 데 삼성병원 응급실 갑니다. 괜찮으시죠?"삼성병원.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다른 데는 안 됩니까.""손 상태 보면 빨리 가야 돼요. 거기가 제일 가깝습니다."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렸다. 나는 들것 위에서 천장을 봤다. 오른손이 붓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그녀는 병동 간호사다. 응급실이 아니다. 3화에서 건강검진 때 봤을 때도, 12화에서 간 수치 상담 때 봤을 때도, 그녀는 내과 병동 스테이션에 있었다.응급실에는 없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응급실은 시끄러웠다. 커튼으로 나뉜 베드들. 모니터 소리. 의사를 부르는 방송. 누군가의 신음.나는 7번 베드에 눕혀졌다. 젊은 의사가 와서 손을 봤다. 엑스레이. 골절. 두 군데. 수술은 필요 없고 정복 후 깁스. 진통제부터."간호사 선생님, 7번 베드 진통제 라인 좀 잡아주세요."커튼 너머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하얀 크록스. 빠르고 가벼운.커튼이 걷혔다."박동진 님, 팔 좀 이쪽으로…"그녀였다.하늘색 간호복. 마스크. 그 위로 고양이 같은 눈매. 손에 수액 세트와 주사 바늘을 든 채.그녀가 나를 봤다. 차트의 이름을 다시 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그녀의 손에서 수액 세트가 떨어졌다. 바닥에. 투명한 튜브가 풀리며 뱀처럼 굴렀다.*우리는 서로를 봤다. 삼 초. 오 초.
옥상에는 바람이 불었다. 1월 1일을 앞둔 부산의 겨울바람.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나는 옥상 난간 뒤, 물탱크 그림자 속에 웅크렸다. 2화에서 처음 그녀를 기다리던 그 자리였다. 백수 생활의 무료함 속에서 치킨과 낮술을 곁에 두고, 사람 구경을 하던.그때는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았다. 지금은.맞은편 옥상. 그녀와 도윤이 캠핑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담요 한 장을 둘이 덮고.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제야의 종 중계가 흘러나왔다. 보신각. 사람들의 함성.두부가 도윤의 무릎 위에서 자고 있었다. 콩이는 그녀의 발치에.행복한 한 장면.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나는 그 카드 바깥, 물탱크 그림자 속에 있었다.*"오빠, 올해 소원 뭐야?"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왔다. 2미터. 옥상과 옥상 사이도 그 거리였다."음… 너랑 결혼하는 거?""그건 이미 하잖아.""그럼 너랑 잘 사는 거.""뻔해.""너는?"그녀가 잠깐 말이 없었다. 담요 속에서 도윤의 손을 잡는 게 보였다."…나는 그냥, 무섭지 않은 거. 올해는 무섭지 않았으면 좋겠어."도윤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머리가 도윤의 어깨에 기댔다."안 무섭게 해줄게. 약속.""…응."나는 그 대화를 들었다. 물탱크 그림자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그녀의 새해 소원은, 무섭지 않은 것이었다.그 소원의 반대편에 내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무섭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바로 그 순간, 나는 2미터 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나는 그 아이러니를 알아봤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가 나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스피커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열. 아홉. 여덟.도윤이 일어섰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느다란 막대기 두 개. 불꽃놀이용 스파클러.일곱. 여섯. 다섯.라이터 불이 켜졌다. 스파클러 끝에 불이 붙었다. 치지직. 하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넷. 셋.그녀가 웃으며 스파클러 하나를 받았다. 두 개의 불꽃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두부가 짖었다. 내 발을 향해.나는 철문 손잡이를 쥔 채 굳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그녀와 눈이 마주칠 것이다. 계단 두어 칸 위, 1미터 거리."두부야, 왜 그래. 가자."그녀의 목소리. 리드줄을 당기는 소리. 두부가 버텼다. 계속 짖었다.나는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 먼지 묻은 작업 모자. 마스크는 턱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마스크를 올렸다. 코까지."죄송해요, 얘가 원래 이래요."그녀가 사과했다. 나에게. 모르는 인부에게 하듯이."……괜찮습니다."목소리를 낮췄다. 갈라지게. 먼지 때문에 쉰 목소리처럼.그녀가 리드줄을 짧게 감았다. 두부를 안아 올렸다. 두부는 그녀 품에서도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콩이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 골목 아래로 걸어갔다.한 번도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나는 그녀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철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들어가 문을 잠그고, 현관에 주저앉았다.1미터. 그녀가 나를 보지 않았다. 먼지와 모자와 마스크가 나를 지웠다. 그녀의 눈에 나는 그냥, 반지하에 사는 일용직 인부였다.투명 인간.다시.*그날 밤 열한 시 반. 산책에서 돌아오는 발소리.나는 창문 아래 벽에 붙어 있었다. 늘 그렇듯이.발소리가 계단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두부가 다시 짖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 창문을 향해."두부야, 또 왜 그래. 아까부터."두부가 리드줄을 끌었다. 반지하 창문 쪽으로. 창문 바로 앞 골목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유리 너머 5센티미터. 두부의 까만 코가 유리에 닿았다. 김이 서렸다.나는 창문 바로 아래,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멈췄다. 두부의 코는 내 머리 위 30센티미터에 있었다."여기 뭐 있어?"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그녀가 쪼그려 앉았다.창문 너머로 그녀의 무릎이 보였다. 그다음 그녀의 손. 유리창에 손바닥을 댔다. 햇빛을 가리듯이. 그리고 얼굴.그녀의 얼굴이 반지하 창문에 다가왔다. 유리에 이마를 댈 듯이. 어두운 방 안을 들여다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