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녀는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몇 걸음 뒤에서 따라 올라갔다.
끝까지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녀는 오른쪽 골목으로 사라졌고,
나는 우리 집 쪽으로 향했다.그런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상하게 심장이 가라앉지 않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까지 그녀와 같은 계단을 걸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모르겠다.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창가부터 봤다.
잠시 뒤.
맞은편 3층.
불이 켜졌다.
“왔다.”
이제는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었다.
나는 맥주 대신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런데도 취기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괜히 조심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대담했다.창가 가까이 다가갔다.
평소보다 훨씬 가까이.
‘뭐 어때.’
술이 들어가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녀는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녀의 생활 패턴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다.
강아지들이 뛰어나온다.
가방을 내려놓는다.
창문을 연다.
방 안을 정리한다.
씻으러 들어간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운동을 한다.
처음에는 모든 행동이 새로웠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아마 이제 창문 열겠지.”
드르륵.
정말 열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
잠시 후 그녀가 방 안을 오갔다.
나는 그녀의 다음 행동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 씻으러 가겠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방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빈 방만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쉬웠을 텐데,
이제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샤워 중이겠지.’
잠시 뒤 다시 나타났다.
머리를 정리하고,
물을 마시고, 매트를 꺼냈다.“그리고 운동.”
역시.
매트가 깔렸다.
나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너무 익숙했다.
그녀의 하루가.
그런데 웃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이걸 왜 다 알고 있지?’
몇 시쯤 집에 돌아오는지.
들어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서 운동하는지.
언제쯤 창문을 닫는지.
이제는 조금만 봐도 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게 갑자기 소름 끼쳤다.
하지만 오늘은 술기운 때문인지 그 생각조차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창틀에 팔을 기대고 그녀를 바라봤다.
“이게 뭐냐.”
사랑일까.
아니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
이름조차 모른다.
성격도 모른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무슨 음악을 듣는지도.
누구를 좋아하는지도.
그런데 하루 종일 생각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부터 보고,
밖에 나가면 혹시 마주칠까 생각하고,
밤이 되면 언제 돌아오는지 신경 쓰인다.
이 정도면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했다.
집착.
그 단어가 떠올랐다.
나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몰라.”
입 밖으로 말했다.
“이제 모르겠다.”
사랑이든.
호기심이든.
외로움이든.
집착이든.
이제는 구분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계속 생각났다.
그녀가.
문득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그 순간 아주 현실적인 욕심 하나가 생겼다.
‘번호.’
전화번호.
그녀의 번호를 알고 싶었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갑자기 강하게 들었다.
번호만 알면.
카카오톡 프로필이라도 볼 수 있을 텐데.
이름도 알 수 있고.
사진도 볼 수 있고.
하지만 곧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내가 번호를 어떻게 물어봐.”
오늘 계단에서도 말 한마디 못 했다.
몇 걸음 앞에 있었는데도.
술까지 마신 상태였는데도.
그냥 따라 올라왔을 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아직 백수다.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면?
“지금 쉬고 있어요.”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대기업을 다니다가 그만뒀다고 하면?
왜 그만뒀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때는 뭐라고 해야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요.”
나는 헛웃음을 쳤다.
“퍽이나 좋아하겠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 있게 말이라도 걸었을지 모른다.
대기업 다니고.
월급 받고.
회사 이야기하고.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었을 때.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괜히 내가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골목 아래에서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여자였다.
그녀와 비슷한 또래.
처음 보는 사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맞은편 주택으로 들어간다.
잠시 뒤.
계단 불이 하나씩 켜졌다.
1층.
2층.
그리고 3층.
“누구지?”
그녀의 집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나타났다.
“친구인가?”
분위기가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처음 방문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새로 온 여자가 뭔가 이야기를 하자 그녀가 웃었다.
둘은 꽤 가까운 사이 같았다.
나는 얼굴을 자세히 봤다.
‘어?’
묘하게 닮았다.
눈매.
얼굴형.
전체적인 분위기.
“자매인가?”
그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누가 언니인지 모르겠다.
새로 온 여자가 조금 더 차분해 보였다.
말투나 행동은 오히려 언니처럼 느껴졌다.
물론 여기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행동만 보고 추측하는 것뿐이다.
둘은 한동안 거실 쪽에서 이야기를 했다.
강아지들도 새로 온 여자에게 상당히 익숙하게 다가갔다.
“가족 맞나 보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에 대해 또 하나의 조각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자매.
아마도.
새로 온 여자도 집에서 편하게 쉬려는 듯 방 안쪽으로 사라졌다.
얼마 뒤 다시 나타났고,
둘은 자연스럽게 각자의 일을 했다.나는 자세한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흐름이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그 집이 갑자기 더 실제 가족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내게 ‘그녀의 집’이었다.
그녀만 있는 공간처럼 생각했다.
그런데 부모님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이제 자매로 보이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녀에게도 가족이 있다.
그녀에게도 내가 모르는 인간관계가 있다.
내가 창문 너머에서 보는 것이 그녀 삶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다가 잔이 비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그 순간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움직였다.
창문 쪽.
빠르게.
“어?”
나는 몸이 굳었다.
그녀가 바로 창가 앞으로 왔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아래로 숙였다.
심장이 세게 뛰었다.
쿵.
쿵.
쿵.
술이 완전히 깨는 느낌이었다.
‘봤나?’
나는 벽에 몸을 붙였다.
숨을 크게 쉬는 것조차 무서웠다.
‘왜 갑자기 밖을 봐?’
혹시 움직임을 봤나?
내 실루엣?
창문에 비친 그림자?
조금 전 내가 너무 가까이 있었나?
술기운 때문에 평소보다 대놓고 본 게 문제였나?
생각이 미친 듯이 돌아갔다.
나는 한참 동안 몸을 낮춘 채 있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
정말 조금만.
고개를 올렸다.
눈만 창틀 위로 내밀었다.
그녀는 여전히 창가에 있었다.
“…….”
그리고 내 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 우리 집인지,
옥상 쪽인지,
골목을 보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방향이 너무 정확했다.
나는 바로 다시 몸을 숨겼다.
“아, 큰일났다.”
작게 중얼거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들킨 건가?’
‘진짜 본 건가?’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몇 초 뒤.
사락.
커튼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살짝 위를 봤다.
창문은 거의 가려져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상했다.
지금까지는 그녀에게 들킬 것 같다는 상상조차 묘한 긴장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실제로 들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전혀 달랐다.
무서웠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갑자기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냥 자기 집에서 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매일 시간을 기다렸고,
창문을 확인했고,
그녀의 패턴을 외웠다.
그리고 오늘은 술까지 마시고 평소보다 대담하게 바라봤다.
혹시 정말 눈이 마주친 거라면?
혹시 내 얼굴을 봤다면?
혹시—
오늘 계단에서 뒤에 있던 남자가 바로 나라는 걸 알아본다면?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계단.
버스.
병원.
그리고 맞은편 집.
머릿속에서 모든 장면이 연결됐다.
“설마…….”
나는 다시 창문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바닥에 주저앉았다.
술기운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녀의 번호를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다고.
그런데 지금은—
제발 나를 못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났다.
나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다.
커튼을 닫았다.
이번에는 내가.
침대에 앉았다.
방 안이 너무 조용했다.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놨다.
‘내일은 어떻게 하지?’
창문을 볼까?
말까?
옥상에 올라갈까?
아니면 당분간 아예 가지 말까?
생각이 복잡했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
그렇게 놀랐는데도—
내일이 되면 또 그녀가 궁금해질 것 같다는 사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진짜 미쳤네…….”
그리고 그날 밤 처음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건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면 상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나는—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가 궁금했고,
무엇을 입었는지가 궁금했고,
누구를 만나는지가 궁금했고,
언제 집에 들어오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 오히려 편했던 것 같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자꾸 마지막 장면만 떠올랐다.
창가로 갑자기 다가오던 그녀.
그리고—
정확히 내 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던 눈.
‘들켰나?’
그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됐다.
그녀는 계단을 올라갔다.나는 몇 걸음 뒤에서 따라 올라갔다.끝까지 말을 걸지는 않았다.그녀는 오른쪽 골목으로 사라졌고,나는 우리 집 쪽으로 향했다.그런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상하게 심장이 가라앉지 않았다.술기운 때문인지,아니면 방금까지 그녀와 같은 계단을 걸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모르겠다.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창가부터 봤다.잠시 뒤.맞은편 3층.불이 켜졌다.“왔다.”이제는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었다.나는 맥주 대신 물을 한 잔 마셨다.그런데도 취기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평소 같으면 괜히 조심했을 텐데,오늘은 이상하게 대담했다.창가 가까이 다가갔다.평소보다 훨씬 가까이.‘뭐 어때.’술이 들어가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어차피 그녀는 모른다.그리고 나는 이제 그녀의 생활 패턴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집에 돌아온다.강아지들이 뛰어나온다.가방을 내려놓는다.창문을 연다.방 안을 정리한다.씻으러 들어간다.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운동을 한다.처음에는 모든 행동이 새로웠다.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아마 이제 창문 열겠지.”드르륵.정말 열렸다.나는 피식 웃었다.“역시.”잠시 후 그녀가 방 안을 오갔다.나는 그녀의 다음 행동까지 예상하고 있었다.‘이제 씻으러 가겠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방 안쪽으로 사라졌다.나는 한동안 빈 방만 바라봤다.예전 같았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쉬웠을 텐데,이제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샤워 중이겠지.’잠시 뒤 다시 나타났다.머리를 정리하고,물을 마시고,매트를 꺼냈다.“그리고 운동.”역시.매트가 깔렸다.나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너무 익숙했다.그녀의 하루가.그런데 웃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내가 이걸 왜 다 알고 있지?’몇 시쯤 집에 돌아오는지.들어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는지.어디에서 운동하는지.언제쯤 창문을 닫는지.이제는 조금만 봐도 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 있었다.그게 갑자기 소름 끼쳤다.하지만 오
오늘도 그녀의 창문이 열렸다.드르륵—이제는 저 장면이 너무 익숙했다.내 하루에 시계처럼 반복되는 풍경.아침이면 불이 켜지고,창문이 열리고,그녀가 나타난다.“오늘도 환기부터 하네.”나는 부엌에서 냄비에 물을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오늘 점심도 라면이었다.백수가 된 뒤 가장 많이 늘어난 소비 품목이 있다면 맥주와 라면일 것이다.회사 다닐 때는 점심 메뉴라도 매일 달랐다.구내식당.국밥.중국집.팀원들과 가끔 먹던 고깃집.그런데 지금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배가 고프면 라면.조금 기분 내고 싶으면 치킨.그마저 귀찮으면 그냥 맥주.“계란이나 하나 넣자.”냉장고를 열었다.계란 두 개.하나를 꺼냈다.그러면서 또 맞은편을 바라봤다.그녀가 방 안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잠시 뒤 옷 몇 벌을 들었다.‘옷 갈아입으려나?’그 생각이 드는 순간,보글보글.물이 넘치기 시작했다.“아!”급하게 가스불을 줄였다.라면봉지를 뜯어 면을 넣고 스프를 털어 넣었다.계란까지 하나 깨 넣었다.그러고 다시 창가 쪽을 봤을 때는—“……어?”이미 늦었다.조금 전과 옷이 달라져 있었다.“벌써 갈아입었네.”나는 피식 웃었다.“또 놓쳤네.”말하고 나서 내가 생각해도 웃겼다.“뭘 놓쳐, 이 인간아.”스스로 머리를 한번 긁었다.요즘 혼잣말이 정말 많이 늘었다.사람과 대화를 안 하니까 내가 나랑 대화하는 느낌이었다.라면 냄비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후루룩.“음.”계란 노른자를 살짝 터뜨려 면에 섞었다.역시 맛있다.TV를 켰다.경제 뉴스가 나왔다.청년 취업.경기 침체.기업 채용 축소.나는 두 젓가락 먹다가 채널을 돌렸다.“내가 밥 먹으면서까지 저걸 봐야 하냐.”예능 프로그램.몇 번 웃다가 그것도 재미없어 껐다.결국 다시 조용해졌다.라면을 다 먹고 싱크대에 냄비를 올려놓았다.“커피나 마시자.”커피 한 잔을 만들어 다시 창가에 앉았다.그리고 무심코 맞은편을 봤다.그녀의 방 바닥에 매트가 깔려 있었다.“어
4화 — 아침부터 그녀를 따라가다아침.눈을 뜨자마자 나는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아…….”대충 팬티 위로 긁적거리며 천장을 바라봤다.무료하다.진짜 너무 무료하다.회사 다닐 때는 아침이 그렇게 싫었다.알람 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났고,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이불 속에서 버텼다.그런데 지금은?눈을 떠도 갈 곳이 없다.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출근할 회사도 없다.회의도 없고.보고할 것도 없다.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처음 한두 달은 분명 좋았다.평일 아침 늦잠.낮술.게임.넷플릭스.그런데 이것도 계속되니까 사람이 점점 썩는 느낌이었다.나는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리고……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맞은편.그 누나네 집.이제는 거의 습관이었다.눈을 뜨면 휴대전화를 보는 게 아니라,먼저 맞은편 창문을 본다.“하…….”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나 진짜 왜 이러냐.”그런데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어?”아침부터 일어났네.출근 준비인가?나는 조금 더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그녀가 방 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한여름이라 그런지 편한 홈웨어 차림이었다.짧은 민소매.그리고 숏팬츠.잠이 덜 깬 듯한 흐트러진 머리.회사나 병원에서 봤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오…….”괜히 웃음이 나왔다.화려하게 꾸민 것도 아닌데 묘하게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거울 앞에 앉았다.화장품을 하나 꺼냈다.뭔가를 바르고.다시 일어났다.옷장을 열었다.다시 거울.또 옷장.또 거울.“여자들은 출근 준비도 바쁘네.”그녀는 침대 위에 옷을 하나 던졌다.휙.또 하나.휙.마음에 안 드는지 다시 집었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나는 피식 웃었다.“은근히 덤벙거리네.”그녀가 옷을 들고 방 안쪽으로 사라졌다.시야에서 없어졌다.“아…….”나도 모르게 작은 탄식이 나왔다.그리고 바로 정신을 차렸다.“야.”내가 내 머리를 한번 쳤다.“뭐가 아쉬워.”혼자 웃었다.몇 분 뒤 그녀가
3화 — 우연은 두 번 겹쳤다“아…….”눈을 뜨자마자 천장이 보였다.익숙한 천장.벽지 귀퉁이는 아주 조금 떠 있었고, 형광등 옆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작은 얼룩이 있었다.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것만 바라봤다.휴대전화를 확인했다.오전 10시 47분.“미친…….”회사 다닐 때였으면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었다.지금은 이제 막 눈을 떴다.알람도 없고.누가 깨우는 사람도 없고.어디로 출근하라는 사람도 없다.처음 퇴사했을 때는 이게 그렇게 좋았다.월요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알람을 꺼버리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쓸 때의 해방감.회사 단체메신저가 울리지 않는다는 것.팀장의 전화가 오지 않는다는 것.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했다.한 달이 지나고,두 달이 지나고,매일이 일요일처럼 변하자 이번에는 그 자유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오늘이 월요일인지 수요일인지도 가끔 헷갈렸다.일어나서 씻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고,점심을 건너뛰어도 상관없었고,낮부터 맥주를 마셔도 아무도 모른다.좋은 일 같지만……이게 계속되니까 사람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어젯밤 일이 다시 떠올랐다.옥상.맞은편 창문.그리고 그 누나.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하…….”내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박동진. 너 원래 이런 놈이었냐?”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다.옥상에 올라갔고,사람을 구경했고,맞은편 집에 우연히 그 누나가 살고 있었다.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창문이 열릴 때 괜히 신경이 쓰였고,그녀가 방 안에서 움직일 때 나도 모르게 시선이 따라갔다.심지어 혹시나 그녀가 이쪽을 바라볼까 봐 몸을 숨겼다.숨었다는 것 자체가 웃겼다.아무 잘못도 없다면 왜 숨었겠는가.“아…… 내가 이렇게 변태였나?”나는 머리를 긁적였다.그러다가 혼자 변명했다.“아니지.”집에만 있으니까 그런 거다.사람을 너무 안 만나서 그렇다.회사 다닐 때는
2화 — 밤 9시의 귀가아…… 무료하다.집에만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이직 준비를 한다고 노트북을 켜놓긴 했는데, 어느 순간 채용 사이트 대신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그러다 배가 고파졌다.결국 배달앱을 켰다.치킨.그리고 맥주.“캬…….”대낮부터 한 모금 들이켜니 기가 막혔다.“낮술은 역시 최고네.”스스로 말해놓고 피식 웃었다.백수가 낮술 마시는 걸 자랑할 일은 아닌데.그래도 회사 다닐 때는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평일 낮에 치킨을 시켜놓고 맥주를 마시는 것.처음 며칠은 자유 같았다.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자유도 지루했다.“이러다 진짜 대인기피증 걸리는 거 아냐?”오늘 대화한 사람이 배달기사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밖에라도 구경해야겠다.옥상으로 올라갔다.철문을 밀어 열자 익숙한 동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낡은 주택.빨랫줄.복잡하게 얽힌 전선.좁은 골목.이상하게 회사 다닐 때는 이런 걸 볼 시간도 없었다.아침이면 출근하기 바빴고,밤이면 피곤해서 집에 들어오기 바빴으니까.옥상 난간에 기대 사람들을 바라봤다.저기 슈퍼마켓 앞에는 김 씨 아저씨가 있었다.고등학교 동창놈 아버지다.“어?”걷는 모습이 예전과 달랐다.한쪽 다리를 조금씩 끌고 있었다.“다리가 안 좋으신가 보네…….”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게 이런 데서 느껴졌다.나만 늙는 게 아니었다.동네도,사람들도,조금씩 변하고 있었다.그렇게 별 의미 없이 사람 구경을 했다.학생들이 지나가고,퇴근하는 사람들이 지나가고,배달 오토바이가 골목을 오갔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휴대전화를 확인했다.오후 8시 58분.“벌써 아홉 시네.”슬슬 내려가려고 몸을 돌렸다.그 순간,아래쪽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또각.또각.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나는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멈췄다.“어?”그 누나다.어제 봤던 여자.고등학교 때 버스에서 몇 번 봤던 그 사람.시간을 확인했다.9시 2분.‘
1화 — 다시 보게 된 여자내 이름은 박동진.스물아홉.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들이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대기업을 다녔다.월급도 제때 들어왔고, 회사 명함을 내밀 때만큼은 그래도 남들 앞에서 기죽을 일은 없었다.그런데 사람 인생이라는 게 참 웃기다.한 번 꼬이기 시작하니까 정말 순식간이었다.회사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고.내가 원했던 것도 아니었고, 모든 책임이 내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퇴사.그리고 지금은 실업급여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신세다.“참 부질없다…….”나는 창문 너머로 빼곡하게 붙어 있는 낡은 주택들을 바라보며 맥주캔을 땄다.칙.오늘도 저녁은 맥주 한 캔에 마른오징어.퇴사 초기에는 그래도 뭔가 해보려고 했다.자격증 책도 샀고, 운동도 시작했고, 이력서도 몇 군데 넣었다.딱 한 달이었다.두 달째부터는 늦잠을 자기 시작했고,세 달째부터는 요일도 헷갈렸다.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하나였다.오늘은 뭘 하지?그리고 곧바로 두 번째 생각이 따라왔다.아무것도 하기 싫다.“아…… 이 동네도 지긋지긋하네.”내가 사는 곳은 오래된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였다.집은 4층짜리 낡은 주택.골목은 좁고, 전봇대마다 전선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창문을 열면 맞은편 집 벽이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웠다.잘해야 2미터.어렸을 때야 아무 생각 없었다.그런데 스물아홉이 되고 나니 갑자기 모든 게 초라하게 느껴졌다.나는 가끔 상상했다.좋은 차.넓은 아파트.그리고 조수석에는 예쁜 여자친구.주말이면 어디 근사한 곳에 가서 밥을 먹고,회사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 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삶.그런데 현실은?낡은 방.구겨진 티셔츠.편의점 맥주.그리고 오징어.“내 인생 참…….”피식 웃으며 오징어 다리를 뜯었다.그때였다.맞은편 집 창문 하나가 열렸다.드르륵.별생각 없이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잠깐 멈췄다.“어?”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