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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데모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3-09 23:07:44

카페에서 받은 명함을 몇 번이고 뒤집어 보다가,  결국 나는 주말 약속을 잡았다.

녹음실이라고 해도 거창한 곳은 아니었다. 

반지하, 흰색 스펀지로 둘러진 벽, 오래된 방음문과 탁한 형광등. 

그래도 나에겐 낯설고 숨 막히는 성역처럼 느껴졌다.

재운은 이미 와 있었다.

단정한 셔츠 차림, 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며 

무심한 듯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왔군요.”

그의 목소리는 차갑다기보다 건조했다.

“편하게 하세요. 그냥 집에서 하듯이. 다만, 한 번은 제대로.”

나는 기타를 꺼내면서도 심장이 쿵쿵 울렸다.

손끝이 땀으로 젖어 코드를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불안했다.

그때, 무대 뒤에서 언제나 보였던 그 눈빛이 떠올랐다. 숨 고르라.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줄을 튕겼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했다.

“창문 틈 바람 사이 이름 없는 내 하루가 조용히 흔들리네”

스스로 놀랄 만큼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등이 가볍게 받쳐주는 것처럼.

곡이 끝나자, 방음벽 너머로 다시 고요가 흘렀다.

재운은 화면에 뜬 파형을 한참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거짓이 없어요. 가끔 불안정한데,  그게 오히려 살아 있게 들립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바로 이어서 말했다.

“곡이 더 필요합니다.  한두 개로는 부족해요. 만들 수 있겠죠?”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만들 수 있습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단호하게.

재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확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여기서부터가 시작이에요.”

녹음실을 나와 옥탑방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은 가볍기도 하고, 묘하게 무겁기도 했다.

기회가 눈앞에 주어진 것 같았지만,  어깨에 내려앉은 책임감이 함께 따라왔다.

문을 열자, 그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커튼 사이로 바람이 스치며 그의 머리칼을 흔들고 있었다.

“돌아왔군.”

“오늘… 녹음했어요.”

나는 가방에서 악보와 명함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조용히 악보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땠나?”

“…긴장됐지만, 좋았어요.  근데 더 많은 곡이 필요하대요.”

나는 의도치 않게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네 안엔 이미 곡이 있다. 나는… 그냥 열쇠일 뿐.”

“열쇠라니요?”

“문은 네가 열고 싶을 때 열리는 법이지.”

말은 시 같았지만, 표정은 묘하게 수줍었다.

나는 웃다가 불쑥 물었다.

“근데, 당신은 왜 그렇게 저를 믿어요?”

그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잠시 창밖을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전에 놓친 노래가 있어서. 이번엔 놓치고 싶지 않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그를 바라봤다.

무슨 뜻인지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오래된 후회의 그림자가 그의 어깨에 얹혀 있는 것 같았다.

밤이 깊자, 우리는 다시 기타를 꺼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멜로디를 잡았다.

그가 허밍으로 옆을 채워주자, 노래는 자연스럽게 길을 찾았다.

“불빛은 이름을 새기고 바람은 노래를 데려가네…”

소리가 방 안에 맴돌았다.

나는 순간 눈을 감고, 노래에 몰입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손끝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노래를 멈추고 손을 뻗었다.

“또… 사라지고 있어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일 뿐이다. 괜찮아.”

“괜찮지 않아요. 당신은 계속 줄어드는데…”

“줄어드는 게 아니라… 네 노래에 스며드는 거다.”

“그럼 결국 없어지는 거잖아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조용히 내 손을 감싸며 말했다.

“네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기쁨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오늘, 내 노래는 누군가에게 기회가 되었고, 

동시에 누군가를 조금 더 희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며칠 동안 나는 기타와 노트를 끼고 살았다.

데모를 더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했고,  알바 시간 틈틈이 가사를 메모했다.

편의점 계산대 옆 영수증에도, 카페 머그잔 옆 티슈에도.

어쩌면 가사라는 건 원래 일상의 구석에 숨어 있다가,  불쑥 고개를 내미는 건지도 몰랐다.

옥탑방으로 돌아와 기타를 잡으면, 그는 언제나 내 옆에 앉았다.

“다시, 네 안을 열어보자.”

그가 낮게 허밍을 흘리면, 내 손끝은 조금 더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숨겨진 선율을 끌어내는 열쇠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 구절, 이상하지 않나?”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름답다.”

“근데… 너무 흔해요. 요즘은 사람들이 이런 가사 잘 안 좋아하거든요.”

“요즘?”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사람들이 지금 좋아하는 건… 아, 설명이 어렵네.”

나는 펜을 쥔 채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과, 내가 지금 부딪혀야 하는  ‘대중성’은 확실히 다른 길이었다.

내 속이 조금 답답해졌다.

며칠 뒤, 재운에게서 연락이 왔다.

“주말에 작은 공연이 있어요. 

신인들이 무대에 서는 자리인데, 수정 씨도 올 수 있나요?”

나는 망설였지만 결국 “네”라고 답했다.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 재운은 이미 리허설을 챙기고 있었다.

“왔군요. 여기, 대기실 쓰세요.”

그는 악보를 훑어보며 지적을 이어갔다.

“이 부분, 단어가 너무 낡았어요.  조금 더 직설적으로 바꾸는 게 어때요?”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날카로웠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무대 리허설을 마치고 내려오자, 그는 나를 똑바로 보았다.

“긴장하지 마세요. 노래는 결국 타이밍이에요.  너무 미루지 말고, 부를 땐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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