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그렇다. 나는 아바마마께서 어릴 적부터 '너는 자라면 온달에게 시집 보내겠다' 하신 말씀을 잊지 않았다. 국왕의 말은 한 입으로 두말할 수 없는 법. 아바마마께서 나를 상부 고씨 가문으로 시집보내려 하시기에, 나는 맹세를 지키고자 궁을 나왔다. 나는 너의 아내가 될 것이다."
진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지독한 고집이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배짱이었다. 권력의 중심인 궁궐과 공주의 신분을 던져버리고 스스로 야인(野人)의 삶을 선택한 여인. 진우의 마음 한구석에서 깊은 울림이 일었다.
'대단한 여자다. 단순한 철부지 공주가 아니야.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졌어.'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몇 가지 조건을 걸겠습니다. 첫째, 품속의 금은 절대로 함부로 시장에 풀지 않습니다. 갑작스러운 대량의 금 유입은 지역 경제의 화폐 가치를 폭락시키고 타깃이 되기 쉽습니다. 자금은 아주 조금씩, 필요한 자재를 구입할 때만 환전하여 사용할 겁니다."
"화... 화폐 가치? 환전?"
공주는 눈을 번뜩이며 온달을 주시했다. 도대체 이 사내가 쓰는 언어는 어느 나라의 언어란 말인가? 하지만 그 어조에는 이상할 정도로 듣는 이를 설득하는 논리와 힘이 실려 있었다.
"둘째, 이 집의 열효율과 위생 상태가 최악입니다. 당장 내일부터 주거 환경 개선 공사에 들어갈 겁니다. 온돌 구조를 재설계하고 배수 시설을 확충해야 합니다. 공주님께서도 놀고 계실 수는 없습니다. 노동의 효율적인 분업이 필요합니다."
"노동의 분업...?"
"예. 저는 토목과 기술 개량을 담당할 테니, 공주님께서는 노모 봉양과 가사 노동의 시스템화를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다음 단계인 부국강병이든 영지 개발이든 할 것 아닙니까?"
평강공주는 순간 멍하니 진우를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마치 봄날의 꽃봉오리가 터지는 것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마을 사람들은 너를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라 부르더구나. 허나 내가 보기엔 세상 그 누구보다 지혜롭고 기괴한 사내로구나. 네가 말하는 단어들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으나, 네 눈빛만큼은 나라를 호령하는 대장부의 그것과 같다."
공주는 품에서 작고 고운 손을 내밀어 진우의 거친 손을 잡았다.
"좋다. 온달아. 네가 말한 그 분업인지 뭔지를 해보자. 내가 너를 도울 것이고, 너는 나를 도울 것이다."
두 사람의 손이 마주 잡힌 순간, 진우의 가슴속에서 찌릿한 전율이 흘렀다. 단순한 빙의물 소설 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한 여인의 운명과 자신의 목숨이 완벽하게 얽혀버렸음을 직감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나는 이 여자를 만나 장수가 되고, 아단성에서 화살을 맞아 죽는다. 하지만 그렇게 두지 않겠다. 나의 현대 공학 지식과 과학적 사고방식, 그리고 이 여자의 강인한 정치적 결단력이 합쳐진다면 고구려는 물론, 나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
그날 밤, 세 사람은 초라한 흙집에서 첫 끼니를 함께했다. 진우가 산에서 주워온 산나물과 노모가 끓인 묽은 죽이 전부였지만, 공주는 불평 한마디 없이 그릇을 비워냈다.
밤이 깊어지자, 진우는 짚자리를 깔고 마당으로 나왔다. 밤하늘에는 현대의 서울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별들이 은하수를 이루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진우는 나뭇가지를 들어 흙바닥 위에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효율적인 열전달을 위한 온돌 구들장의 각도, 수력 물레방아를 이용한 곡물 방앗간 도면, 그리고 쇠를 단단하게 제련하기 위한 고풍로의 공기 순환 구조.
학위 논문을 쓰며 밤을 새우던 열정이 고구려의 밤하늘 아래에서 다시 불타오르고 있었다.
방 문이 살짝 열리고, 비단 옷 대신 초라한 베옷으로 갈아입은 평강공주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진우 옆에 가만히 앉아, 흙바닥에 그려진 기이한 도형과 공식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살아남고, 나아가 이 나라를 바꿀 과학입니다."
진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자, 공주는 그를 향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바보 온달이라 불리던 사내가 나라를 바꾼다라... 흥미롭구나. 나 역시 궁에서 쫓겨난 울보 공주로 끝날 생각은 없다. 온달아, 어디 한번 해보거라. 내가 너의 가장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터이니."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지만, 두 사람이 나누는 눈빛만큼은 그 어떤 화로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고구려의 역사를 뒤흔들 기묘하고도 위대한 동거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동이 트기도 전에 강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흙방 안에는 노모의 낮게 깔린 숨소리와 함께 평강공주의 고운 호흡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방 안을 맴도는 서늘한 공기는 고구려의 혹독한 아침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진우는 살금살금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산골짜기의 차가운 새벽바람이 뺨을 스쳤다. 그는 차가운 우물물로 세수를 하며 머리를 식혔다.
'당장 오늘부터 살아남으려면 주거 환경부터 바꿔야 한다. 이대로 겨울을 맞이했다간 셋 다 입과 코가 마르고 감기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
진우는 어제 나뭇가지로 그려두었던 구들장 개량 도면을 떠올렸다. 전통적인 고구려의 온돌 구조는 아궁이에서 발생한 열기가 구들장 아래를 지나면서 방을 데우는 방식이었지만, 이 집의 온돌은 제대로 된 기울기조차 잡혀 있지 않았다. 열기가 방 전체로 고르게 전달되지 않고, 연기가 아궁이 밖으로 역류하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진우는 지게를 지고 집 뒤편의 산자락으로 향했다. 온달의 몸은 상상 이상으로 강건했다. 커다란 바위와 흙을 나르는 일쯤은 현대에서 무게추를 들고 트레이닝을 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진우는 산에서 열전도율이 높은 납작한 열석(熱石)과 단열에 뛰어난 황토를 한 지게 가득 짊어지고 내려왔다.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거대한 돌들을 가뿐하게 옮기는 진우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거인이 산을 옮기는 듯했다.
지렛대의 원리를 적용한 관절 꺾기였다. 적은 힘으로도 인체의 약점에 정확한 충격을 가하는 테크닉이었다."으아아악!"건달이 손목이 꺾이는 비명을 지르며 몽둥이를 놓쳤다. 진우는 건달의 팔을 잡고 그대로 회전하며 맹배 쪽으로 내던졌다.쿵!100kg에 육박하는 성인 남성이 공중을 날아가 맹배와 충돌했다. 두 사람은 흙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나머지 건달 한 명이 당황하여 칼을 꺼내 들었다."이, 이 미친 바보 놈이!"건달이 조잡한 철제 단도를 들고 진우의 배를 향해 질렀다.진우는 냉정했다. 칼날이 다가오는 순간, 마당 옆에 세워두었던 개량형 지게의 나무 프레임을 쳐올렸다. 지게의 끝부분이 건달의 턱을 정확하게 가격했다.투각!"컥!"건달은 혀를 깨물며 뇌진탕으로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단 1분도 되지 않아 건달 둘이 바닥에 나뒹굴었다.흙바닥에 쓰러져 있던 맹배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진우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알던 싱글벙글 웃으며 마을 아이들에게 돌을 맞던 바보 온달이 아니었다. 진우의 눈빛은 마치 야생의 거대한 범이나 장수의 그것처럼 서슬 퍼런 살기를 띠고 있었다.진우는 천천히 맹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맹배가 떨군 철제 단도를 집어 들었다.진우는 단도를 손에 쥐고 악력을 가했다. 순간 온달의 타고난 괴력이 펼쳐졌다.오도독!조잡한 재질의 철단도가 진우의 악력에 의해 활처럼 휘어지며 구부러져 버렸다."히, 히익!"맹배는 바지가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철을 손으로 구부리는 괴물이라니!진우는 휘어진 단도를 맹배의 코앞에 던져버렸다."다음에 또 내 집을 찾아오거나, 공주님에게 불경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땐 이 단도처럼 너희들의 뼈를 접어놓겠다. 알아들었습니까?""아, 알아들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맹배는 기절한 패거리들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비틀거리며 마을 밖으로 도망쳤다.마을 어귀에서 이 광경을 몰래 숨어보던 주민들은 충격으로 말을 잊지 못했다."봤는가? 온달 저 놈이 맹배 패거리를 단숨에 제압
마당에서 자재를 정리하고 있을 때, 흙구덩이 집의 방문이 열리며 평강공주가 나왔다. 비단옷 대신 노모가 건네준 초라한 베옷을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이른 아침부터 무엇을 그리 바쁘게 움직이느냐?"공주가 다가오며 물었다. 진우는 상의를 벗어 던지고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집을 다시 짓는 중입니다. 정확히는 온돌과 배수 시스템을 개량하는 것입니다.""온돌과... 배수?"공주는 진우가 마당 한구석에 깔아놓은 납작한 돌들과 황토 반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아궁이의 불길이 들어가는 길을 경사지게 만들고, 연기가 빠져나가는 굴뚝의 높이를 두 배로 높일 겁니다. 열의 대류 현상을 이용하면 적은 땔감으로도 방 전체를 하루 종일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진우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대류 현상과 열전도 기작을 간단하게 그려 보였다. 공주는 진우의 설명에 입을 살짝 벌린 채 집중했다.'이 사내는 정말 바보가 아니다. 아니, 바보는커녕 궁궐의 그 어떤 조정 관리나 건축 장인보다도 해박하고 치밀하다. 도대체 이런 지식을 어디서 배운 것일까?'공주는 진우에게 가까이 다가앉으며 말했다."나도 돕겠다. 무엇을 하면 되겠느냐?""공주님께서 진흙을 갰다간 고운 손이 다 망가집니다. 저쪽에 있는 노모를 도와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십시오.""아니다. 나는 더 이상 궁궐의 귀한 공주가 아니다. 너의 아내로서, 이 집의 사람으로서 내 몫을 할 것이다. 진흙을 개는 일이든 돌을 나르는 일이든 가리지 않겠다."공주는 소매를 야무지게 걷어붙였다. 백옥 같은 팔뚝이 드러났다. 진우는 단호한 공주의 눈빛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고집이 보통이 아니시군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황토와 짚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 반죽을 만들어 주십시오. 짚의 섬유질이 황토의 균열을 막아주는 단열재 역할을 할 겁니다."두 사람은 마당에 둘러앉아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했다. 공주는 황토에 물을 붓고 짚을 넣어 손으로 치대기 시작했다. 고귀한 왕족의 손에
"그렇다. 나는 아바마마께서 어릴 적부터 '너는 자라면 온달에게 시집 보내겠다' 하신 말씀을 잊지 않았다. 국왕의 말은 한 입으로 두말할 수 없는 법. 아바마마께서 나를 상부 고씨 가문으로 시집보내려 하시기에, 나는 맹세를 지키고자 궁을 나왔다. 나는 너의 아내가 될 것이다."진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지독한 고집이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배짱이었다. 권력의 중심인 궁궐과 공주의 신분을 던져버리고 스스로 야인(野人)의 삶을 선택한 여인. 진우의 마음 한구석에서 깊은 울림이 일었다.'대단한 여자다. 단순한 철부지 공주가 아니야.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졌어.'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좋습니다. 그렇다면 몇 가지 조건을 걸겠습니다. 첫째, 품속의 금은 절대로 함부로 시장에 풀지 않습니다. 갑작스러운 대량의 금 유입은 지역 경제의 화폐 가치를 폭락시키고 타깃이 되기 쉽습니다. 자금은 아주 조금씩, 필요한 자재를 구입할 때만 환전하여 사용할 겁니다.""화... 화폐 가치? 환전?"공주는 눈을 번뜩이며 온달을 주시했다. 도대체 이 사내가 쓰는 언어는 어느 나라의 언어란 말인가? 하지만 그 어조에는 이상할 정도로 듣는 이를 설득하는 논리와 힘이 실려 있었다."둘째, 이 집의 열효율과 위생 상태가 최악입니다. 당장 내일부터 주거 환경 개선 공사에 들어갈 겁니다. 온돌 구조를 재설계하고 배수 시설을 확충해야 합니다. 공주님께서도 놀고 계실 수는 없습니다. 노동의 효율적인 분업이 필요합니다.""노동의 분업...?""예. 저는 토목과 기술 개량을 담당할 테니, 공주님께서는 노모 봉양과 가사 노동의 시스템화를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다음 단계인 부국강병이든 영지 개발이든 할 것 아닙니까?"평강공주는 순간 멍하니 진우를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마치 봄날의 꽃봉오리가 터지는 것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웠다."마을 사람들은 너를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라 부르더구나. 허나
가마의 문이 열리고, 눈이 부실 정도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여인이 내려섰다. 얇은 비단 옷을 휘날리며 허리를 곧게 편 여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와 물었다."혹시 이 마을에 온달이라 불리는 사내의 집이 어디에 있습니까?"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산기슭 끝자락에 있는 허름한 흙집을 가리켰다. 공주의 시선이 산기슭 위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덩치 큰 사내, 즉 강진우에게로 향했다.바람이 불어와 공주의 비단 옷자락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지독하게 얽혀 들었다.'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역사적 운명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진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굳건한 표정으로 공주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공주님과 바보의 기묘한 동거마을 어귀를 메운 흙먼지 사이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화려한 비단옷을 펄럭이며 걸어오는 여인의 걸음걸이는 거친 흙길 위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궁궐에서 자란 이 특유의 기품은 짚신을 신은 마을 사람들의 초라한 차림새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진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산지게의 거친 나무 감촉과 코끝을 스치는 진흙 냄새가 이것이 꿈이 아님을 실시간으로 증명하고 있었다.'진짜 평강공주다. 삼국사기 온달전에 나오던 그 공주가 내 눈앞에 서 있다.'공주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진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먼 길을 걸어온 듯 비단 옷자락 끝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고, 여린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진우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그 눈빛만큼은 밤하늘의 창공처럼 투명하고 흔들림이 없었다."네가 온달이냐?"맑고 차분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진우는 허리를 곧게 펴고 공주를 내려다보았다. 현대 대학원생 시절, 밤샘 학회 발표와 까탈스러운 지도교수의 압박 질문 앞에서도 떨지 않았던 배짱이 요동치기 시작했다."그 그렇습니다만... 공주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진우의 입에서 나온 말에 마을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그
* 눈을 떠보니 바보라고?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지독한 만성 피로와 독서실 특유의 탁한 공기 대신, 코끝을 찔러오는 것은 지독한 흙냄새와 진한 짚 풀 냄새였다.강진우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방이 트인 모니터와 겹겹이 쌓인 논문 더미는 보이지 않았다.대신 보이는 것은 흙으로 대충 덧칠한 벽과 구멍이 숭숭 뚫린 창창한 창문, 그리고 다 쓰러져가는 짚신 몇 겨루 뿐이었다.'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내가 밤샘 연구를 하다가 드디어 환각을 보는 건가?'진우는 차가운 세숫물이 담긴 목기와 바가지 앞으로 다가갔다.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는 억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거친 턱선, 굵직한 골격, 그리고 현대의 세련된 체구와는 차원이 다른 무지막지한 덩치의 사내가 거울 같은 물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온달아, 잘 잤느냐? 날이 밝았으니 오늘도 산에 올라 땔감을 주워 와야 하지 않겠느냐?"구석에서 눈이 어두운 노파가 더듬거리며 베개를 거두었다. 노파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진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온달? 온달이라고? 설마 삼국시대 고구려의 그 바보 온달이란 말인가?'머릿속에서 일제히 벼락이 쳤다. 진우는 차가운 물로 얼굴을 몇 번이고 씻어내 보았지만, 이 얼토당토않은 현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그는 카이스트에서 유기화학과 물리공학을 복수 전공하며 밤낮없이 실험실을 구르던 명문대 대학원생이었다. 석사 학위 논문 패스를 불과 석 달 앞두고 밤샘 실험을 하던 중 정신을 잃었을 뿐인데, 눈을 떠보니 고구려의 전설적인 인물인 ‘바보 온달’의 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어머니, 혹시 오늘이 몇 년입니까? 아니, 지금 왕위에 계신 임금이 누구이십니까?"진우의 허둥지둥한 물음에 노파는 혀를 차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에휴,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평원왕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리신 지가 언젠데 그런 걸 묻느냐? 불쌍한 내 자식, 머리가 아파서 또 이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