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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레비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0 22:48:40

도언은 별채로 가는 정원 모퉁이에 서서 담배를 물었다.

“후우…….”

길게 빨아들였다가 내뱉는 연기가 갈증을 풀기라도 하는 듯 길게 이어졌다.

도언이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고개를 들었을 때 멀리서 반짝하고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호명가 고용인들이 머무는 숙소동이었다.

1층, 2층, 3층…….

3층.

도언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숙소동을 보며 불이 켜진 방의 층수를 헤아렸다.

지금 막 불이 켜진 방은 그녀의 방일 것이다.

“한이재.”

도언은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며 풀썩 웃음을 내뱉었다.

아직도 그녀가 호명 가에 있는 줄은 몰랐다.

도경이 중학생일 때부터 가르쳤다는 과외 선생 한이재.

도경이 만날 때마다 떠들어댄 탓에 그 이름을 기억했다.

"형, 이재 누나 서울대 다녀. 나도 이재 누나처럼 서울대 갈 거야."

중학생이던 도경은 제 딴엔 결의에 차서 그런 말을 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도경은 지금 서울대는커녕 대학에 다 떨어진 재수생이었다.

5년을 가르치고도 대학에 못 보냈으면 그 실력 뻔한 거 아닌가.

모르긴 몰라도 안서희가 아들 도경을 위해 한이재 말고도 수많은 과외 선생을 붙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학에 떨어진 걸 보면 그게 꼭 선생 탓을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도언은 남은 담배를 다시 깊게 빨아들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숙소동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이재의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 * *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른 아침, 이재가 숙소동 1층에 있는 공용 공간에 들어서며 조 여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 여사는 호명가 살림을 맡고 있는 고용인이었다.

고용인 중에서는 가장 베테랑으로 들리는 소문으로는 안서희보다, 심지어 도언이 태어나기 전부터 호명가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어제도 도경이 데리러 갔었다면서요?”

잰걸음으로 공용 공간 옆 창고를 왔다 갔다 하던 그녀가 돌아보며 이재의 인사를 받았다.

“네. 며칠 뜸하다 했더니 또 시작했나 봐요.”

“잠도 못 잤겠네?”

“어젠 초저녁부터 시작했는지 일찍 연락이 왔더라고요. 데리고 왔더니 11시쯤 됐나? 암튼 잠은 충분히 잘 잤어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쯧.”

조 여사가 골칫덩이 손자를 걱정하듯 말끝에 혀를 찼다.

이번에는 대학 꼭 붙어야 할 텐데,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재는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도경이 대학 못 간 게 제 탓이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한 선생, 미안하지만 이거 별채에 좀 가져다줄래요?”

조 여사가 묵은지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소복하게 담긴 묵은지는 뚜껑이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었다.

“그릇에 맞는 뚜껑을 아무리 찾아도 없네. 급하다니까 그냥 이대로 가져다줘야지 뭐.”

“네, 조심해서 가져다드릴게요.”

묵은지 그릇을 익숙하게 받아 든 이재는 잰걸음으로 별채로 향했다.

집안일을 하는 고용인들을 도와 가끔 이런 심부름을 하는 건 이재에게도 낯선 일은 아니었다. 

별채로 들어선 이재는 조심스레 안쪽을 살폈다. 

“김 여사님.”

그러나 안에는 아무도 없는지 인기척이 없었다.

이재는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별채 살림 담당 김 여사를 찾았다. 

이 시간에 별채를 비울 리는 없고 아마 주방 안쪽에 있는 펜트리에 있을 것 같아 그쪽으로 향했다. 

“어엇!”

두리번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재는 갑자기 나타난 벽에 부딪힌 듯한 충격에 걸음을 멈추었다.

슬쩍 본 시야에 부딪힌 하얀 벽면에 묵은지 국물이 번지고 있었다.

“헙!”

고개를 번쩍 들자 뜨악한 표정을 지은 채 내려다보고 있는 눈과 마주쳤다.

차도언.

부딪힌 벽은 차도언의 셔츠 입은 가슴팍이었다.

도언의 셔츠에 묻은 김치 국물을 보고 이재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방금 갈아입은 듯 주름 하나 없이 새하얀 셔츠에 주황색 김치 국물이 지도를 그린 듯 번지고 있었다.

도언은 미동도 없이 제 셔츠를 내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재를 보았다.

그리고 안채에서 처음 보았을 때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건 뭐지, 하는 것처럼.

“죄송합니다. 갑자기 나오셔서…… 아니, 계신 줄 모르고 제가…….”

“하, 씨…….”

김치 국물이 흘러넘친 접시를 든 채 이재가 당황하여 횡설수설했다.

도언이 한숨인지 욕인지 그것도 아니면 웃음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이재의 입이 다물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변상해…….”

변상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이재는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저 셔츠가 얼마짜린지 감도 잡히지 않아서였다.

이 집안 식구들이 신는 양말 쪼가리 하나조차 제가 큰맘 먹고 사는 옷보다 비싸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세탁해 준다고 할 걸 그랬나.’

잠시 머뭇거리던 이재가 눈을 질끈 감고 하던 말을 이었다.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부족하면 적금이라도 깨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데 이거 백 퍼센트 내 잘못이라고 할 수 있나? 하물며 교통사고가 나도 쌍방인데 이것도 쌍방 아니야? 갑자기 확 튀어나온 저 사람도 잘못한 거 아닌가?’

불끈 화가 난 이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 들이마시던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차도언이 아까 그 자세와 그 표정 그대로 이재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셔츠에 묻은 김치 국물은 수묵화의 농담 효과처럼 완전히 번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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