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도언은 별채로 가는 정원 모퉁이에 서서 담배를 물었다.
“후우…….”
길게 빨아들였다가 내뱉는 연기가 갈증을 풀기라도 하는 듯 길게 이어졌다.
도언이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고개를 들었을 때 멀리서 반짝하고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호명가 고용인들이 머무는 숙소동이었다.
1층, 2층, 3층…….
3층.
도언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숙소동을 보며 불이 켜진 방의 층수를 헤아렸다.
지금 막 불이 켜진 방은 그녀의 방일 것이다.
“한이재.”
도언은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며 풀썩 웃음을 내뱉었다.
아직도 그녀가 호명 가에 있는 줄은 몰랐다.
도경이 중학생일 때부터 가르쳤다는 과외 선생 한이재.
도경이 만날 때마다 떠들어댄 탓에 그 이름을 기억했다.
"형, 이재 누나 서울대 다녀. 나도 이재 누나처럼 서울대 갈 거야."
중학생이던 도경은 제 딴엔 결의에 차서 그런 말을 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도경은 지금 서울대는커녕 대학에 다 떨어진 재수생이었다.
5년을 가르치고도 대학에 못 보냈으면 그 실력 뻔한 거 아닌가.
모르긴 몰라도 안서희가 아들 도경을 위해 한이재 말고도 수많은 과외 선생을 붙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학에 떨어진 걸 보면 그게 꼭 선생 탓을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도언은 남은 담배를 다시 깊게 빨아들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숙소동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이재의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 * *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른 아침, 이재가 숙소동 1층에 있는 공용 공간에 들어서며 조 여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 여사는 호명가 살림을 맡고 있는 고용인이었다.
고용인 중에서는 가장 베테랑으로 들리는 소문으로는 안서희보다, 심지어 도언이 태어나기 전부터 호명가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어제도 도경이 데리러 갔었다면서요?”
잰걸음으로 공용 공간 옆 창고를 왔다 갔다 하던 그녀가 돌아보며 이재의 인사를 받았다.
“네. 며칠 뜸하다 했더니 또 시작했나 봐요.”
“잠도 못 잤겠네?”
“어젠 초저녁부터 시작했는지 일찍 연락이 왔더라고요. 데리고 왔더니 11시쯤 됐나? 암튼 잠은 충분히 잘 잤어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쯧.”
조 여사가 골칫덩이 손자를 걱정하듯 말끝에 혀를 찼다.
이번에는 대학 꼭 붙어야 할 텐데,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재는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도경이 대학 못 간 게 제 탓이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한 선생, 미안하지만 이거 별채에 좀 가져다줄래요?”
조 여사가 묵은지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소복하게 담긴 묵은지는 뚜껑이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었다.
“그릇에 맞는 뚜껑을 아무리 찾아도 없네. 급하다니까 그냥 이대로 가져다줘야지 뭐.”
“네, 조심해서 가져다드릴게요.”
묵은지 그릇을 익숙하게 받아 든 이재는 잰걸음으로 별채로 향했다.
집안일을 하는 고용인들을 도와 가끔 이런 심부름을 하는 건 이재에게도 낯선 일은 아니었다.
별채로 들어선 이재는 조심스레 안쪽을 살폈다.
“김 여사님.”
그러나 안에는 아무도 없는지 인기척이 없었다.
이재는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별채 살림 담당 김 여사를 찾았다.
이 시간에 별채를 비울 리는 없고 아마 주방 안쪽에 있는 펜트리에 있을 것 같아 그쪽으로 향했다.
“어엇!”
두리번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재는 갑자기 나타난 벽에 부딪힌 듯한 충격에 걸음을 멈추었다.
슬쩍 본 시야에 부딪힌 하얀 벽면에 묵은지 국물이 번지고 있었다.
“헙!”
고개를 번쩍 들자 뜨악한 표정을 지은 채 내려다보고 있는 눈과 마주쳤다.
차도언.
부딪힌 벽은 차도언의 셔츠 입은 가슴팍이었다.
도언의 셔츠에 묻은 김치 국물을 보고 이재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방금 갈아입은 듯 주름 하나 없이 새하얀 셔츠에 주황색 김치 국물이 지도를 그린 듯 번지고 있었다.
도언은 미동도 없이 제 셔츠를 내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재를 보았다.
그리고 안채에서 처음 보았을 때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건 뭐지, 하는 것처럼.
“죄송합니다. 갑자기 나오셔서…… 아니, 계신 줄 모르고 제가…….”
“하, 씨…….”
김치 국물이 흘러넘친 접시를 든 채 이재가 당황하여 횡설수설했다.
도언이 한숨인지 욕인지 그것도 아니면 웃음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이재의 입이 다물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변상해…….”
변상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이재는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저 셔츠가 얼마짜린지 감도 잡히지 않아서였다.
이 집안 식구들이 신는 양말 쪼가리 하나조차 제가 큰맘 먹고 사는 옷보다 비싸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세탁해 준다고 할 걸 그랬나.’
잠시 머뭇거리던 이재가 눈을 질끈 감고 하던 말을 이었다.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부족하면 적금이라도 깨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데 이거 백 퍼센트 내 잘못이라고 할 수 있나? 하물며 교통사고가 나도 쌍방인데 이것도 쌍방 아니야? 갑자기 확 튀어나온 저 사람도 잘못한 거 아닌가?’
불끈 화가 난 이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 들이마시던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차도언이 아까 그 자세와 그 표정 그대로 이재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셔츠에 묻은 김치 국물은 수묵화의 농담 효과처럼 완전히 번져 있었다.
떡볶이를 먹고 난 이후 물 한 모금 못 먹던 이재의 입덧은 급격히 사그라들었다.대신 먹고 싶은 것이 수시로 바뀌는 입덧이 시작되었다.“여사님, 저 여사님이 만들어주신 배추 된장국 먹고 싶어요.”“배추 된장국? 금방 되죠. 조금만 기다려요.”김 여사가 신이 나서 배추 된장국을 끓여주면 그 사이 입맛이 변한 이재는 두어 번 떠먹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왜, 맛이 없어요?”“아뇨, 그게 아니라…… 아까는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지금은 또 입맛이 없어졌어요.”미안함에 울상이 된 이재는 억지로라도 먹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죄송해요. 제가 괜히 일만 만들어드렸어요.”“죄송은 무슨.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요.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없어요?”“지금 생각나는 거 있긴 한데, 그건 도언 씨한테 사 오라고 하려고요.”이재의 말에 김 여사가 빙그레 웃었다.그 차갑고 어렵기만 했던 별채 주인 도언이 이재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 낯설고도 보기 좋았다.“그래요. 남편 이럴 때나 부려먹는 거지. 임신했을 때 마음껏 부려먹어요. 부회장님이 작은 사모님 말이면 껌뻑 죽잖아요.”“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니까 또 그러시네.”이재는 고용인들이 제게 ‘작은 사모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질색했다.갑자기 어렵게 대하는 것도 서운한데 그런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은 견딜 수 없었다.“작은 사모님을 작은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요.”김 여사가 놀리듯 부러 작은 사모님이라는 말을 반복했다.“그러지 마세요. 저 진짜 그렇게 부르실 때마다 숨고 싶단 말이에요. 그냥 이름 부르시면 안 돼요?”“어이구, 큰일 날 소리! 안채 사모님이 아시면 난리 나게요?”안서희 여사까지 끌어들이면 이재도 할 말은 없었다.괜히 자신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이 곤란해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이재가 울상을 짓다가 갑자기 스친 생각에 두 손을 모았다.“아! 그럼 아기 태명 붙여서 불러주세요.”“아기 태명이요?”“네, 우리 아기 태명 도이예요. 도이 엄마라고 불러주시면 어때요?”
몸을 일으킨 도언이 반색하며 이재에게 물었다.“먹고 싶은 거?”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이보다 더 반가운 말이 없었다.입덧을 시작한 이후 제대로 뭘 먹은 게 없는 이재였다.“뭔데? 뭐가 먹고 싶은데?”도언이 당장 이재 앞으로 대령해 놓을 기세로 물었다.“그게…….”이재가 머뭇거렸다.“말 해봐. 뭐든 괜찮으니까.”도언의 재촉에 이재가 침을 꿀꺽 삼켰다.먹고 싶은 걸 생각하니 침이 고이는 모양이었다.“떡볶이.”“……어?”“나 떡볶이 먹고 싶어요.”뜻밖의 메뉴에 도언이 잠시 버벅거렸다.오늘도 죽 몇 숟가락 먹은 게 다라고 하더니 갑자기 떡볶이 먹고 싶다고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떡볶이가 먹고 싶다고?”“응.”“그래? 그럼 김 여사님에게 말을…….”“아니, 그러지 마요.”핸드폰을 집어 드는 도언을 이재가 말렸다.“그럼? 배달이라도 시킬까?”이재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그런 거 말고요. 거기 있잖아요.”“……?”“우리 같이 먹었던 떡볶이, 기억나요? 나 거기 떡볶이 먹고 싶어요.”같이 먹었던 떡볶이?도언에게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결혼식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이재의 배가 많이 불러오기 전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두 달 후로 결정했다.두 달 후면 여름의 초입으로 결혼식을 치르기엔 아주 좋은 시기였다.결혼식 장소는 호명 가 정원에서 하기로 했다.계절에 맞게 야외 결혼식을 치르기엔 안성맞춤이었다.벌서부터 고용인들은 결혼식에 쓰일 정원을 정돈하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호명 가 안팎이 바빴다.그런데 문제는 이재였다.결혼식을 준비하느라 제일 바빠야 할 당사자였지만 곧바로 입덧이 시작된 탓이었다.“못 먹겠어요. 죄송해요.”먹고 싶다고 해서 준비한 음식 앞에서도 헛구역질하기 일쑤였고, 먹은 것도 없는데 토해내느라 기진맥진이었다.기운이 없어 결혼준비고 뭐고 누워있기만 했다.별채 살림을 맡은 김 여사에 안채에서 조 여사까지 내려와 이재를 돌봤지만 입덧을 가라앉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뭐라도 먹어야 해요. 아기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먹어요.”조 여사가 먹을 만한 것들을 수시로 챙겨주었지만 이재는 한 입 뜨는 것도 힘겨워했다.“저도 그러고 싶은데......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아요.”이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괴로워 눈물을 뚝뚝 흘렸다.“아이고, 기운도 없는데 울지 말아요.”조 여사 역시 그런 이재가 안쓰러워서 눈물이 그렁해지곤 했다.웨딩드레스를 골라야 하는데 외출이 힘들어 집으로 드레스를 가져오게 했지만 그마저도 입어보지 못하고 있었다.결혼식을 앞두고 다른 신부들은 피부관리에 뭐에 다 한다는데 이재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오늘도 이재 많이 힘들어했나요?”퇴근
“우왁! 정말?”도경이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이재의 임신 소식을 알린 자리였다.누구보다 가장 놀란 건 도경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도경은 이재를 빤히 바라보았다.도언이 한 말이 정말이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에 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와 씨…… 말도 안 돼.”도경은 놀람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낭패감까지 뒤섞인 감정이 밀려왔다.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도언이 이재와 결혼한 것도 겨우 받아들였는데 임신이라니 이건 상상도 못 했다.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고, 당연한 건데도 그랬다.“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도언이 핀잔을 주자 도경이 얼굴을 구겼다.알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된 것만 같았다.“너 삼촌 되는 거야. 조카 생기는 거라고.”“삼촌……? 와…… 씨…….”안서희가 여전히 선 채 중얼대는 도경의 팔을 잡아끌었다.“도경아, 좀 앉아.”엄마가 잡아당기는 대로 도경은 털썩 주저앉았다.“축하한다.”차 회장이 건네는 축하에 이재가 고개를 숙였다.오랜만에 차 회장이 미소를 지었다.이재는 그의 미소에 안심이 되었다.“컨디션은 괜찮고?”“네, 좋습니다.”“다행이구나. 병원에 갔더니 뭐라고 하더냐.”“10주 차라고 합니다. 안정기에 들 때까지는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데 위치나 크기가 좋다고 하더라고요.”도언이 병원에 가서 확인한 내용을 전하며 이재의 손을 잡았다.이재는 도언과 함께 병원에서 들었던 아기의 심장 소리를 떠올렸다.아직 한없이 작은 아기인데 그렇게 힘차게 심장 소리를 내는 것에 감격해 이재는 또 울고 말았다.도언은 울보 엄마라고 놀렸지만, 솔직히 그 순간 본인도 가슴이 벅차올랐다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그래서 말인데요.”도언이 임신 소식과 더불어 전할 중요한 말을 꺼냈다.“결혼식을 하려고요.”“결혼식? 언제?”이제껏 아무 말도 없었던 안서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아기 낳기 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안서희가 날짜를 가늠하기라도 하듯 눈동자를
도언은 이재의 말을 듣고도 믿기지 않아 바라보았다.가까이 대고 있던 얼굴을 뒤로 물려 이재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렁하게 눈물이 맺힌 그녀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뭐라고 했어?”이재가 눈을 깜빡이자 맺혀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임신했다고…… 아기 생겼다고요.”“허.”도언은 울고 있는 이재를 들여다보았다.“그런데 왜 울어?”“몰라, 눈물이 나.”도언이 웃음을 터트리며 이재를 끌어안았다.“너무 좋아서 우는 건가?”“몰라…… 모르겠어.”도언의 품에 안긴 이재가 훌쩍거리자 도언은 어이가 없는 듯 계속 웃었다.“이재야, 나 봐.”이재가 훌쩍거림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도언이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우리 아기 생긴 거야?”“으응.”“나 기뻐해도 되는 거지?”울고 있는 이재를 달래듯 도언이 물었다.“자기, 아기 생긴 거…… 기뻐요?”“당연하지.”“히잉…… 나도 기뻐요.”“그런데 왜 울어?”“몰라…… 좋은데…… 그냥 좀 무섭고…… 겁도 나고…
이재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손에 든 것을 보고 또 보았다.선명한 두 줄이 그어진 임신 테스트기였다.“어떻게 몰랐지…….”오전에 찾아온 김 박사는 진찰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물었다.마지막 생리일과 생리 주기 같은 것을 물었을 때는 으레 하는 문진이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가벼운 감기몸살일 거라 생각했던 이재는 김 박사의 진단에 놀랐다.“임신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먼저 테스트를 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임신…… 이요?”“임신 초기에는 감기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김 박사는 진단과 처방은 그 후에 내리겠다고 했다.그리고 결과는 임신이었다.“축하드립니다. 일단 안정을 취하시고 자세한 건 조만간 병원에 나오셔서 확인하시죠.”김 박사의 축하에도 이재는 얼떨떨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임신이라니.이상한 일도 아닌데 이것까지 미처 생각 못 하고 있던 자신이 더 의아하기는 했다.생각해보면 임신이 이제야 된 것이 더 이상하기는 했다.도언과 함께 한 이후로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안았다.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도언은 이재를 안았다.그러나 런던에서 지낼 때 이재는 바뀐 환경에 자주 생리가 불규칙했고, 도언 역시 피임에 신경을 쓰기도 했다.물론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이 더 많았지만.그래도 용케 임신이 되지 않았다.그게 나름의 피임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이재는 한국에 돌아와 호명 가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본인의 컨디션이 돌아왔다는 걸 미처
여자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별채 2층 계단을 오르며 후회했다."다음에, 다음에 해요......"자신이 한 말이 메아리가 되어 끝도 없이 귓가를 울렸다.‘다음이라는 말은 왜 했을까.’그건 무언가 기약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그를 피하고자 했던 의미 없는 말이었다.하지만 이제 와 설명한들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늘 그렇듯 후회는 이미 늦어버렸을 때 하는 것이니까.탁-.여자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순식간에 닥쳐온 어둠에 두려움이 밀려왔다.제 손을 잡은 남자의 희미한 온기마저 빠져나갈까 두려워
이재는 그의 맨몸을 볼 수 없어 눈을 돌렸다.하지만 그의 몸이 이미 눈에 들어온 뒤였다.'이런 게 남자의 몸인가?'이재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도언은 옷을 입고 있을 때도 울룩불룩 탄탄한 몸이라는 것을 짐작할 만 했다.그런데 벗은 몸은 짐작했던 것 이상이었다.단단하게 뻗은 직각 어깨.그 아래 떨어지는 기다란 팔과 알맞게 붙은 근육.적당하게 오른 가슴은 탄탄함을 넘어 매끈한 나머지 혹시 랩이라도 씌워놓은 건 아닌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그리고 음영을 그려 넣은 것처럼 여섯 개로 쫙 갈라진
셔츠에 번진 김치 국물을 보니 쌍방 과실 같은 말은 꺼낼 수도 없었다. 명백한 자신의 과실이 맞았다.이재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죄송합니다.”“따라와요.”“네……. 네?”이재가 고개를 번쩍 들자 이미 돌아선 도언이 2층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이재가 허둥대며 그의 뒤를 따라가자 도언이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보았다.“그건 두고.”도언이 이재가 들고 있던 김치 그릇을 턱짓으로 가리켰다.“아.”이재는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 테이블 조리대 위에 접시를 올려두었다. 나가려고 보니 접시를 들고 있던 손이 김
이재는 홀린 듯 도언을 보았다.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 밑에 길게 난 눈은 도경을 향한 웃음으로 반쯤 감겨 있었다.오뚝하게 솟은 코 아래 선이 짙은 입술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는 참 잘생긴 남자였다.도경이 제 형이 잘생겼다고 노래를 부르는 걸 보고 그러려니 했던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차도경, 이제 컸다고 술을 마시고 다닌다, 이거지?”“왜 이래? 나 이제 스무 살이야.”“아, 그러세요? 스무 살?”형제의 웃음소리가 호명 가 안채를 울렸다.그 소리에 이재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