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재는 그의 맨몸을 볼 수 없어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몸이 이미 눈에 들어온 뒤였다.
'이런 게 남자의 몸인가?'
이재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도언은 옷을 입고 있을 때도 울룩불룩 탄탄한 몸이라는 것을 짐작할 만 했다.
그런데 벗은 몸은 짐작했던 것 이상이었다.
단단하게 뻗은 직각 어깨.
그 아래 떨어지는 기다란 팔과 알맞게 붙은 근육.
적당하게 오른 가슴은 탄탄함을 넘어 매끈한 나머지 혹시 랩이라도 씌워놓은 건 아닌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음영을 그려 넣은 것처럼 여섯 개로 쫙 갈라진 복근까지.
그쯤에서 이재는 그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왜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순간 숨이 좀 막혔달까.
그 짧은 시간에 본 것치곤 너무 선명하게 박혀버린 게 자신이 생각해도 좀 어이없긴 했다.
“셔츠 금액 알려 주시면…….”
이재는 애써 그의 몸을 지워냈다.
이 방에 온 진짜 이유로 화제를 돌려야만 했다.
빨리 해결하고 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제가 어떻게든 변상해 드리겠......"
어물거리는 이재의 눈 앞에 도언이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하얀 뭉치.
거기에 주황색 얼룩이 있는.
그러니까 김치 국물이 묻은 셔츠였다.
얼떨결에 셔츠를 받아 든 이재가 도언을 올려다보았다.
“빨아 와요.”
도언이 툭 내뱉은 말에 이재가 튕겨 나가듯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네?”
“두 번씩 말해야 알아듣는 습관이 있어요?”
도언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기울였던 머리를 조금 더 기울였다.
귀찮게 하네 정말, 이라는 표정으로.
“그게 아니라 변상 안 하고 빠, 빨아서…… 되나 싶어서요.”
빤다는 말을 하는데 왜 얼굴이 빨개지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더듬대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도언이 웃었다고 느낀 건 착각이었나.
웃었다 해도 비웃는 거였겠지만.
“빨아 와요. 내일까지.”
“내일이요?”
또 두 번 말하게 할 셈이냐는 듯 도언이 다시 눈을 찡그렸다.
이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빠, 빨아……볼게요.”
그 말을 하는 이재의 얼굴이 왜인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번호.”
도언이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재에게 내밀었다.
너무 당연하게 핸드폰 번호를 요구하는 그의 태도가 몹시 당당해서 불쾌했다.
“제 번호는 왜…….”
“도망이라도 가면 찾아야 하니까.”
도망이라는 말에 이재는 어쩐지 수치심이 밀려와 입술을 깨물었다.
‘말하는 본새하고는. 이깟 일로 누가 도망을 간다고.’
이재는 그에게서 핸드폰을 받아 제 번호를 찍고는 돌려주었다.
도언이 번호를 확인하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잉-.
이재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하자 도언이 확인되었다는 듯 픽 웃음을 내뱉었다.
“내 번호 저장해요.”
핸드폰을 소파에 휙 던지고는 도언이 이재 앞을 지나쳐 갔다.
이재는 그가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딱 벌어진 직각 어깨와 보기 좋게 올라온 등 근육이 그 와중에도 눈에 들어왔다.
도언이 코너로 이어지는 곳에서 멈춰 섰다.
그러고는 느리게 손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팬츠 허리가 느슨해졌다.
무심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따라가던 이재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느슨해진 허리춤에서 속옷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바지를 벗고 있었다.
‘미친……! 왜 저래?’
그런 이재를 도언이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나 샤워할 건데, 계속 있을 거예요?”
“네……?”
도언이 대답 대신 보란 듯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시선을 제 아래로 내렸다.
이재는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풀어진 버클과 내려간 지퍼가 보였다.
그리고 지퍼 사이로 보이는 브리프 안에 불룩하게 솟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헉!"
그게 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숨이 턱 막혀왔다.
거의 본능적으로.
“아아, 네네! 죄송…… 아니, 그만 가…… 아, 안녕히 계세요!”
뒤돌아선 이재는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휘청이는 걸음 사이로 중얼중얼 인사 아닌 인사를 하고는 황급히 방문을 열었다.
탁!
뛰다시피 방을 나와 문을 닫자 안에서 도언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간 이재는 별채 밖으로 나왔다.
헉헉대며 뛰쳐나온 이재는 2층을 올려다보았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아무래도 도경이 입에 달고 살았던 「우리 형」은 미친놈이 분명했다.
***
욕실로 들어온 도언은 샤워 물줄기 아래 서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쿡쿡댔다.
허둥지둥 뛰어나가는 이재의 뒷모습이 자꾸 생각나 웃음이 났다.
호명 가로 들어오면 웃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복병이 있었다.
말간 얼굴을 하고서 말귀도 한 번에 못 알아듣는 여자, 한이재.
순진한 건지, 모자란 건지.
타고나길 귀엽게 타고난 것 같기도 했다.
동그란 눈을 치켜뜨며 깜짝 놀라는 표정이라니.
본능적으로 남자를 동하게 만드는 묘한 느낌이 있는 여자였다.
도언은 샤워 물줄기 아래 머리를 세우는 제 아래를 내려다보며 탄식을 터트렸다.
욕실로 들어온 이재는 옷을 벗었다.도언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그가 돌아오기 전에 씻을 생각이었다.요즘에는 아침에도 늦잠을 자느라 도언이 출근하는 걸 못 보기 일쑤여서 거의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 마찬가지였다.오늘은 오랜만에 컨디션이 괜찮으니 도언이 오기 전에 말끔하게 씻고 화장도 해볼 생각이었다.아무리 임신했다고 해도 그에게 여전히 예뻐 보이고 싶었다.그동안 도언에게 소홀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쏴아-.이재는 욕실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먼저 샤워기 물을 틀었다.생각 같아서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임신 초기에는 탕욕을 삼가라는 의사의 말도 있어서 샤워로 만족해야 했다.곧 뜨거운 수증기가 욕실에 차오르기 시작했다.이재는 거울에 제 나신을 들여다보았다.한동안 입덧으로 먹지 못해 가느다랗던 몸이 더 마른 느낌이었다.아랫배를 보아도 아직은 납작해서 임신한 표시가 전혀 나지 않았다.“도이야…… 잘 크고 있는 거지?”이재는 제 아랫배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아직도 제 안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아랫배가 불러오고 도이가 안에서 태동을 한다는 것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다시 눈을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몸이 마른 것과는 다르게 어쩐지 가슴은 더 커진 것 같았다.임신했기 때문일까.이재는 제 가슴의 크기를 가늠해보기라도 하듯 두 손으로 감싸보았다.확실히 더 부풀어 올라 있었다.유륜과 유두의 색도 짙어진 것 같아 조금 신경 쓰였다.“……이재야…….”문득 들린 소리에 흠칫 놀랐다.
떡볶이를 먹고 난 이후 물 한 모금 못 먹던 이재의 입덧은 급격히 사그라들었다.대신 먹고 싶은 것이 수시로 바뀌는 입덧이 시작되었다.“여사님, 저 여사님이 만들어주신 배추 된장국 먹고 싶어요.”“배추 된장국? 금방 되죠. 조금만 기다려요.”김 여사가 신이 나서 배추 된장국을 끓여주면 그 사이 입맛이 변한 이재는 두어 번 떠먹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왜, 맛이 없어요?”“아뇨, 그게 아니라…… 아까는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지금은 또 입맛이 없어졌어요.”미안함에 울상이 된 이재는 억지로라도 먹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죄송해요. 제가 괜히 일만 만들어드렸어요.”“죄송은 무슨.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요.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없어요?”“지금 생각나는 거 있긴 한데, 그건 도언 씨한테 사 오라고 하려고요.”이재의 말에 김 여사가 빙그레 웃었다.그 차갑고 어렵기만 했던 별채 주인 도언이 이재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 낯설고도 보기 좋았다.“그래요. 남편 이럴 때나 부려먹는 거지. 임신했을 때 마음껏 부려먹어요. 부회장님이 작은 사모님 말이면 껌뻑 죽잖아요.”“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니까 또 그러시네.”이재는 고용인들이 제게 ‘작은 사모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질색했다.갑자기 어렵게 대하는 것도 서운한데 그런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은 견딜 수 없었다.“작은 사모님을 작은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요.”김 여사가 놀리듯 부러 작은 사모님이라는 말을 반복했다.“그러지 마세요. 저 진짜 그렇게 부르실 때마다 숨고 싶단 말이에요. 그냥 이름 부르시면 안 돼요?”“어이구, 큰일 날 소리! 안채 사모님이 아시면 난리 나게요?”안서희 여사까지 끌어들이면 이재도 할 말은 없었다.괜히 자신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이 곤란해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이재가 울상을 짓다가 갑자기 스친 생각에 두 손을 모았다.“아! 그럼 아기 태명 붙여서 불러주세요.”“아기 태명이요?”“네, 우리 아기 태명 도이예요. 도이 엄마라고 불러주시면 어때요?”
몸을 일으킨 도언이 반색하며 이재에게 물었다.“먹고 싶은 거?”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이보다 더 반가운 말이 없었다.입덧을 시작한 이후 제대로 뭘 먹은 게 없는 이재였다.“뭔데? 뭐가 먹고 싶은데?”도언이 당장 이재 앞으로 대령해 놓을 기세로 물었다.“그게…….”이재가 머뭇거렸다.“말 해봐. 뭐든 괜찮으니까.”도언의 재촉에 이재가 침을 꿀꺽 삼켰다.먹고 싶은 걸 생각하니 침이 고이는 모양이었다.“떡볶이.”“……어?”“나 떡볶이 먹고 싶어요.”뜻밖의 메뉴에 도언이 잠시 버벅거렸다.오늘도 죽 몇 숟가락 먹은 게 다라고 하더니 갑자기 떡볶이 먹고 싶다고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떡볶이가 먹고 싶다고?”“응.”“그래? 그럼 김 여사님에게 말을…….”“아니, 그러지 마요.”핸드폰을 집어 드는 도언을 이재가 말렸다.“그럼? 배달이라도 시킬까?”이재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그런 거 말고요. 거기 있잖아요.”“……?”“우리 같이 먹었던 떡볶이, 기억나요? 나 거기 떡볶이 먹고 싶어요.”같이 먹었던 떡볶이?도언에게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결혼식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이재의 배가 많이 불러오기 전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두 달 후로 결정했다.두 달 후면 여름의 초입으로 결혼식을 치르기엔 아주 좋은 시기였다.결혼식 장소는 호명 가 정원에서 하기로 했다.계절에 맞게 야외 결혼식을 치르기엔 안성맞춤이었다.벌서부터 고용인들은 결혼식에 쓰일 정원을 정돈하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호명 가 안팎이 바빴다.그런데 문제는 이재였다.결혼식을 준비하느라 제일 바빠야 할 당사자였지만 곧바로 입덧이 시작된 탓이었다.“못 먹겠어요. 죄송해요.”먹고 싶다고 해서 준비한 음식 앞에서도 헛구역질하기 일쑤였고, 먹은 것도 없는데 토해내느라 기진맥진이었다.기운이 없어 결혼준비고 뭐고 누워있기만 했다.별채 살림을 맡은 김 여사에 안채에서 조 여사까지 내려와 이재를 돌봤지만 입덧을 가라앉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뭐라도 먹어야 해요. 아기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먹어요.”조 여사가 먹을 만한 것들을 수시로 챙겨주었지만 이재는 한 입 뜨는 것도 힘겨워했다.“저도 그러고 싶은데......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아요.”이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괴로워 눈물을 뚝뚝 흘렸다.“아이고, 기운도 없는데 울지 말아요.”조 여사 역시 그런 이재가 안쓰러워서 눈물이 그렁해지곤 했다.웨딩드레스를 골라야 하는데 외출이 힘들어 집으로 드레스를 가져오게 했지만 그마저도 입어보지 못하고 있었다.결혼식을 앞두고 다른 신부들은 피부관리에 뭐에 다 한다는데 이재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오늘도 이재 많이 힘들어했나요?”퇴근
“우왁! 정말?”도경이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이재의 임신 소식을 알린 자리였다.누구보다 가장 놀란 건 도경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도경은 이재를 빤히 바라보았다.도언이 한 말이 정말이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에 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와 씨…… 말도 안 돼.”도경은 놀람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낭패감까지 뒤섞인 감정이 밀려왔다.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도언이 이재와 결혼한 것도 겨우 받아들였는데 임신이라니 이건 상상도 못 했다.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고, 당연한 건데도 그랬다.“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도언이 핀잔을 주자 도경이 얼굴을 구겼다.알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된 것만 같았다.“너 삼촌 되는 거야. 조카 생기는 거라고.”“삼촌……? 와…… 씨…….”안서희가 여전히 선 채 중얼대는 도경의 팔을 잡아끌었다.“도경아, 좀 앉아.”엄마가 잡아당기는 대로 도경은 털썩 주저앉았다.“축하한다.”차 회장이 건네는 축하에 이재가 고개를 숙였다.오랜만에 차 회장이 미소를 지었다.이재는 그의 미소에 안심이 되었다.“컨디션은 괜찮고?”“네, 좋습니다.”“다행이구나. 병원에 갔더니 뭐라고 하더냐.”“10주 차라고 합니다. 안정기에 들 때까지는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데 위치나 크기가 좋다고 하더라고요.”도언이 병원에 가서 확인한 내용을 전하며 이재의 손을 잡았다.이재는 도언과 함께 병원에서 들었던 아기의 심장 소리를 떠올렸다.아직 한없이 작은 아기인데 그렇게 힘차게 심장 소리를 내는 것에 감격해 이재는 또 울고 말았다.도언은 울보 엄마라고 놀렸지만, 솔직히 그 순간 본인도 가슴이 벅차올랐다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그래서 말인데요.”도언이 임신 소식과 더불어 전할 중요한 말을 꺼냈다.“결혼식을 하려고요.”“결혼식? 언제?”이제껏 아무 말도 없었던 안서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아기 낳기 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안서희가 날짜를 가늠하기라도 하듯 눈동자를
도언은 이재의 말을 듣고도 믿기지 않아 바라보았다.가까이 대고 있던 얼굴을 뒤로 물려 이재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렁하게 눈물이 맺힌 그녀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뭐라고 했어?”이재가 눈을 깜빡이자 맺혀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임신했다고…… 아기 생겼다고요.”“허.”도언은 울고 있는 이재를 들여다보았다.“그런데 왜 울어?”“몰라, 눈물이 나.”도언이 웃음을 터트리며 이재를 끌어안았다.“너무 좋아서 우는 건가?”“몰라…… 모르겠어.”도언의 품에 안긴 이재가 훌쩍거리자 도언은 어이가 없는 듯 계속 웃었다.“이재야, 나 봐.”이재가 훌쩍거림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도언이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우리 아기 생긴 거야?”“으응.”“나 기뻐해도 되는 거지?”울고 있는 이재를 달래듯 도언이 물었다.“자기, 아기 생긴 거…… 기뻐요?”“당연하지.”“히잉…… 나도 기뻐요.”“그런데 왜 울어?”“몰라…… 좋은데…… 그냥 좀 무섭고…… 겁도 나고…
셔츠에 번진 김치 국물을 보니 쌍방 과실 같은 말은 꺼낼 수도 없었다. 명백한 자신의 과실이 맞았다.이재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죄송합니다.”“따라와요.”“네……. 네?”이재가 고개를 번쩍 들자 이미 돌아선 도언이 2층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이재가 허둥대며 그의 뒤를 따라가자 도언이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보았다.“그건 두고.”도언이 이재가 들고 있던 김치 그릇을 턱짓으로 가리켰다.“아.”이재는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 테이블 조리대 위에 접시를 올려두었다. 나가려고 보니 접시를 들고 있던 손이 김
도언은 별채로 가는 정원 모퉁이에 서서 담배를 물었다.“후우…….”길게 빨아들였다가 내뱉는 연기가 갈증을 풀기라도 하는 듯 길게 이어졌다.도언이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고개를 들었을 때 멀리서 반짝하고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호명가 고용인들이 머무는 숙소동이었다.1층, 2층, 3층…….3층.도언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숙소동을 보며 불이 켜진 방의 층수를 헤아렸다.지금 막 불이 켜진 방은 그녀의 방일 것이다.“한이재.”도언은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며 풀썩 웃음을 내뱉었다.아직도 그녀가 호명 가에 있
이재는 홀린 듯 도언을 보았다.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 밑에 길게 난 눈은 도경을 향한 웃음으로 반쯤 감겨 있었다.오뚝하게 솟은 코 아래 선이 짙은 입술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는 참 잘생긴 남자였다.도경이 제 형이 잘생겼다고 노래를 부르는 걸 보고 그러려니 했던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차도경, 이제 컸다고 술을 마시고 다닌다, 이거지?”“왜 이래? 나 이제 스무 살이야.”“아, 그러세요? 스무 살?”형제의 웃음소리가 호명 가 안채를 울렸다.그 소리에 이재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지금
대한민국에서 알 만한 사람은 모두가 다 아는 건설 그룹 호명,호명의 가족이 거주하는 그들만의 성채 호명가에 도착한 이재는 뒷자석에 앉은 도경을 돌아봤다."술 다 깬 거지?""집에 가기 싫은데."엉뚱한 대답을 하는 도경은 차에서 내릴 생각도 없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집에 안 가면, 어딜 가려고?"그제야 도경이 이재를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누나, 우리 어디 가서 딱 한 잔만 더 마실래?""야! 차도경!"이재가 인상을 팍 쓰자 움찔 놀란 도경이 싫으면 말고,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