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도경을 모른 체하며 이재는 손을 내밀었다.
“차 키."
도경의 시선이 느리게 이재의 손으로 내려왔다.
대답 없이 멍하니 바라보는 도경에게 이재가 재촉했다.
"차 키 내놓으라고."
"......차 키?"
도경이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중얼대며 물끄러미 이재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재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삼키며 다시 말했다.
"차 키, 어디 있어?"
“아아...... 차 키.”
뭐가 재밌는지 킥킥대던 도경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주차 해준다고, 가져갔지. 누구더라? 그 형이......"
발렛을 맡겼다는 뜻이었다.
이재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도경의 말을 끊었다.
“알았으니까 이제 일어나.”
평소와 다르게 쌀쌀맞은 이재에게 기가 죽은 도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른."
이재의 재촉에 도경이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 달라는 뜻이었다.
이재는 기막힌 듯이 도경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씨발, 차도경, 갈 거면 빨리 가라고! 분위기 깨지 말고!”
누군가 성마르게 짜증을 내자 민망해진 건 이재였다.
도경은 그것 보라는 듯 내민 손을 거두지 않고 어서 잡으라고 흔들었다.
할 수 없이 그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재의 손을 잡고 일어난 도경은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기댄 채 어깨를 감쌌다.
“가자, 누나.”
저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도경을 끌고 나오는데 홍주가 그런 이재에게 손을 흔들었다.
“누나아 안녕히 가세요. 됴경이는 조케따. 첫사랑 누나가 데리러도 오고.”
이재가 째려보자 홍주가 낄낄댔다.
한 손으로는 제 허벅지 위에 앉은 여자애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면서 나불대는 꼬락서니가 한심했다.
이재는 말을 섞기도 싫어 빠르게 VIP 룸을 나왔다.
***
주차장에 세워진 차 뒷자리에 도경을 겨우 밀어 넣은 이재는 준비해온 수표 몇 장을 웨이터에게 건넸다.
취한 도경을 차까지 같이 데려다준 값이라기엔 제법 많은 액수였지만 어차피 제 돈도 아니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도경님은 저희 VIP 손님이신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그럼요, 그럼요. 도경님 취하신다 싶으면 바로 콜! 드리겠습니다.”
이재는 과하게 너스레를 떠는 웨이터에게 짧게 고개를 숙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출발하면서 보니 웨이터는 떠나는 차를 향해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먹고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네.”
새파랗게 어린 도경에게 VIP라며 조아리는 웨이터나 새파랗게 어린 녀석 뒷치다꺼리 하는 저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복잡한 클럽 앞을 빠져나와 큰 도로로 접어들자 그제야 속도가 났다.
도착하면 11시는 안 될 것이다.
그럼 오늘 밤은 편하게 잘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이왕 퍼마실 거면 초저녁에 마셔라. 나도 새벽에 편하게 잠 좀 자게.
룸 미러로 슬쩍 뒷자리를 보니 어느새 깨어난 도경이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어? 언제 일어났어?”
“지금.”
“괜찮아? 속 안 좋은 거 아니야?”
“괜찮아.”
언제 인사불성이었나 싶게 도경은 멀쩡하게 말을 했다.
“근데 누나, 나 샤워했어?”
“뭔 소리야?”
“나 왜 젖었지? 머리도 그렇고 옷도 축축한데?”
그럼 그렇지.
이재는 헛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헛소리를 해대니 아직도 이 모양 이 꼴로 저 녀석 옆에 있는 건가 싶었다.
저 해맑은 녀석을 어쩌면 좋을까.
“아 그거? 아까 클럽에서 어떤 못돼 처먹은 애가 너한테 물을 뿌리더라?”
잠든 도경을 깨우려 물을 뿌린 건 자신이었지만 이재는 시치미를 뗐다.
“어? 누가?”
도경이 상체를 벌떡 세우며 운전석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이재에게 닿았다.
“누군지 나는 모르지. 어떤 애가 너한테 일어나라고 막 물을 뿌리길래 내가 말리느라 혼났다니까.”
“어떤 새끼야? 홍주 그 새끼가 그런 거 아니야?”
“거기 하도 어두워서 얼굴이 잘 안 보이더라고.”
이재도 도경을 대하는 데는 도가 텄다.
뻔뻔하게 이어지는 이재의 말에 도경이 버럭 화를 냈다.
“이홍주 이 새끼, 가만 안 둬!”
당장이라도 클럽으로 돌아가 홍주를 어쩌기라도 할 듯 씩씩대는 도경을 보며 이재는 웃음을 참았다.
“그러니까 그런 애들이랑 놀지 마. 애들 질이 안 좋아 보이더라.”
“나는 뭐 질이 좋나?”
도경이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차 싶어 이재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도경이 네가 어때서?”
“끼리끼리 노는 거지.”
알긴 아는구나, 싶다가도 어쩐지 풀이 죽은 도경이 짠해서 이재가 말을 덧붙였다.
“도경이 넌 다르지.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공부 좀 하고…….”
“아아, 그런 얘기 할 거면 그만해.”
도경이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말을 안 듣자 이재도 참지 못하고 성질을 내고야 말았다.
“네가 어디라도 대학에 가야 나도 이 신세 면하지! 내가 언제까지 네 과외 선생이나 해야겠어?”
“왜? 월급이 적어? 내가 엄마한테 누나 월급 올려 주라고 말할까?”
금세 처진 눈으로 이재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도경이 기가 막혔다.
“말이 과외 선생이지. 이건 거의 보모 아니니? 네 뒤치다꺼리 하다가 내 인생 다 보내게 생겼다고.”
“그럼 나한테 시집오면 되지.”
“이 새ㄲ…….”
핸들을 잡은 이재의 손이 부들거렸다.
도경을 째려보아도 그는 헤헤 웃을 뿐이었다.
“어어, 누나 앞을 봐야지. 나 이제 겨우 스무 살 됐는데 죽기는 아깝잖아.”
“차도경, 경고하는데 까불지 마라.”
“까부는 거 아닌데. 결혼하자는 거 진짠데. ”
뒤에서 도경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재는 못 들은 척했다.
그건 저 녀석이 15살 때부터 하던 지겨운 레퍼토리였으니까.
도경의 수업이 시작되는 걸 확인하고 이재가 1층으로 내려갔다.계단 앞을 서성이던 고용인이 다가왔다.“사모님이 기다리고 계세요.”“네.”예상했던 일이었다.안서희가 기다리지 않아도 만나자고 청하려 했다.이재는 마음을 다지기 위해 숨을 크게 내쉬었다.이렇게 된 이상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안녕하세요, 사모님.”이재가 온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보지 않는 안서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자, 안서희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어어……. 그래요.”여기는 왜 왔냐고, 당장 나가라는 말 못 들었냐고 패악을 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안서희는 예상과 달리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안서희 건너편에 앉으며 이재는 허리를 세웠다.고개를 들었다.머리로 가렸던 뺨이 드러났지만 그대로 두었다.안서희의 시선이 이재의 뺨에 난 상처에 잠시 머물렀다가 황급히 지나갔다.“사모님.”“한 선생.”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시작했다.안서희가 먼저 말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이재는 주눅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어제 말씀하신 대로, 그만두겠습니다.”“어……?”안서희가 뜻밖이라는 듯 잠시 놀랐다가 아닌 척 눈을 돌렸다.이재는 생각했던 말을 잊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대신 시간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얼마나?”“일주일이면, 될 것 같습니다.”“흐음.”이마를 잔뜩 찡그린 안서희가 잠시 생각하다가 자비라도 베풀 듯 툭 다음 말을 내뱉었다.“그래요 그럼.”고맙다고 고개라도 숙일 줄 알았던지 안서희는 이재를 보았다.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이재는 감정을 삼키며 차분하게 설명하려 노력했다.“도경이가 저한테도 그런 말 한 적은 있습니다. 저도 그냥 하는 말이고 생각했는데 사모님한테 말씀드렸으면 진지하게 생각해…….”짝!눈앞에 번쩍 불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뺨이 후끈거렸다.이재는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바로 잡았다.“이게 건방지게 어디서! 선생님, 선생님 해주니까 진짜 선생인 줄 아네? 뭐? 진지하게 생각해? 너 도경이가 누군지 몰라? 몰라서 그딴 헛소리야?”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통증도 통증이었지만 그보다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아, 알았다. 도언이가 그러라고 시키디?”뜻밖에 나온 그 이름에 이재가 멈칫 그녀를 보았다.까맣게 아이라인을 칠한 안서희가 눈꼬리를 올리며 조소를 머금었다.“도언이 꼬시더니 둘이 작전이라도 짰어?”“사, 사모님.”이재가 떨어지지 않은 입을 열어 겨우 말을 뱉었지만 안서희는 들을 생각이 없는 듯 몰아붙였다.“그런다고 도언이가 너한테 뭐라도 될 줄 알아?”“아뇨, 그런 거…….”“너도 참 순진하다. 몸이나 주고 놀아나는 것도 모르고. 쯧.”안서희가 이재를 보며 경멸을 감추지 않았다.더러운 것을 보는 듯 눈을 잔뜩 찡그리며 닿을까 두려워하는 듯 상체를 뒤로했다.이재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꼴에 자존심은.”안서희가 픽 웃음을 뱉었다.이재는 물고 있는 입술에서 피 맛이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아무리 애를 써도 턱이 덜덜 떨렸다.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그러나 이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안서희가 말을 이었다.“됐고
“아직 맛있는 거 남았는데.”숙소동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재의 손을 놓지 않고 도언이 장난스레 말을 덧붙였다.그가 말한 맛있는 건 초콜릿 따위가 아니라는 건 알기에 이재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들어가야 해요.”도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긴 입맞춤을 나누고도 채워지지 않은 듯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 이재는 홧홧해지는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다.다른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 버리면 어떨까, 그가 하는 말을 믿어버리면 어떨까 기울어져 버리는 마음을 잡기 어려웠다.“데이트 언제 할까요?”“데이트……?”도언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애하기로 했잖아. 그럼 데이트도 해야지.”마치 연애를 약속한 것처럼 말하는 도언에게, 이재는 그런 적 없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이미 잡은 손은 놓고 싶지 않았으며, 그와 나눈 입맞춤은 달았고, 함께 보낸 밤은 깊고 뜨거웠으니까.이런 게 연애가 아니라면 무엇일까.아니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그에게 기울어져 있는 걸까.그 끝이 두렵더라도, 나는 이 마음을 인정해야 하는 걸까.“바쁘신데 괜히 무리하지 마세요.”이재가 그에게 잡힌 손을 비틀어 빼내며 퉁퉁거리듯 말했다.“너는 좀 무리해 주세요.”이재의 말투를 따라 하며 도언이 싱긋 웃었다.놀리는 것 같아 이재가 노려보자 그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내일 전화할게요. 꼭 받아.”“……네.”이재는 돌아섰다.혹시나 그가 다시 손을 잡을까 빠른 걸음으로 숙소동으로 향했다.이번엔 뿌리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숙소
이재의 그 말간 눈이 도언을 건드리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밑바닥 어딘가가 간지러웠다.“그래서, 맛있는 건 가지고 왔어요?”이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다가 그에게 잡힌 손을 들어 보였다.놓을 생각 없이 꽉 쥔 탓에 진득하게 땀이 배어났다.“이거 놔야 주죠.”도언이 이마를 찡그리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재를 보다가 툭 손을 놓았다.뜨겁게 맞잡았던 손이 떨어지며 저녁의 한기가 스며들었다.이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도언에게 내밀었다.조그맣게 포장된 조각이 두 개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었다.“이게 뭐예요?”“초콜릿이요.”도언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애초에 맛있는 걸 운운한 건 이재를 보고 싶어 한 말이었다.뭘 가져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그랬다면 오히려 실없는 말이나 한 번 더 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그녀가 정말 맛있는 걸 가지고 나왔다.“초콜릿 싫어하세요?”이재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손을 내리자 도언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아니, 그럴 리가.”도언이 이재의 손바닥 위에 있던 초콜릿을 하나 집어 들었다.그리고 포장지를 까 입에 넣었다.단단한 초콜릿이 그의 입에서 뭉개지듯 녹기 시작했다.“저녁은 드셨다고 해서요. 그리고 맛있는 게 딱히 없어서…….”“맛있네요.”도언이 그녀의 손에 아직 남아 있는 초콜릿을 들어 포장을 벗겼다.그리고 제 입에 넣는 대신 이번엔 이재의 입에 가까이 댔다.“먹어봐요. 얼마나 맛있는지.”“아뇨, 전…….”이재가 고개를 저었지만 도언은 그녀의 입안으로 초콜릿을 밀어 넣었다.이재는 초
“너니? 네가 도경이 유학 가라고 바람 넣었어?”안서희가 흥분에 겨워 도언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어머니.”“왜! 도경이 나한테서 떼어 내려고 네가 그런 거야?”“하.”마른 웃음이 풀썩 터져버리고 말았다.도경에게 놀란 건 도언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러나 안서희의 히스테리가 그런 식으로 튈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도언이 안서희를 말리는 듯 뒤로 슬쩍 물러서게 하며 고개를 숙였다.“그러게요,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미처 몰랐네요.”도언이 안서희에게만 들리게 중얼댔다.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며 차 회장 앞에 풀썩 엎드려 쓰러졌다.“여보, 도경이가 지금 공부가 힘들어서 그런 거예요. 유학은 무슨 유학이에요. 절대 안 돼요.”거의 읍소하듯 엎드린 안서희가 차 회장에게 매달렸다.차 회장이 지팡이를 들어 짚고 일어섰다.“그만들 가거라.”“여보!”“자네도 일어나. 좀 진정하고. 천천히 얘기하면 될 일을.”차 회장이 발을 내디딜 때 도언이 부축하려 가까이 다가서자 차 회장이 손을 저었다.“됐다. 들어가라.”차 회장이 다이닝 룸 밖으로 나갔다.남은 건 아직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안서희와 식탁에 멍하게 앉은 도경 그리고 도언이었다.그 모습을 관망하던 도언은 쓴웃음 삼켰다.고작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먹는 가족이라니 참 뭣 같다고, 생각했다.* * *[저녁 뭐 먹었어요?]이재는 도언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이 남자는 대체 뭘 먹었는지가 왜 그렇게 궁금한 걸까.아침
“치료는 다 끝나신 거죠?”도언이 자리에 앉으며 묻자 차 회장이 의자에 세워 두었던 지팡이를 들어 보였다.“이거 짚고 다니란다. 누굴 아주 절름발이로 만들어 놨어.”“무리하실까 봐 그러는 거죠.”안서희가 차 회장을 달래듯 야살스럽게 굴며 말을 거들었다.차 회장이 이내 껄껄 웃으며 안서희의 허벅지를 토닥였다.“자네가 힘들까 봐 그러지. 늙은 남편 수발이나 시키게 생겼구먼.”“당신도 참, 그런 말이 어딨어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얼른 회복하셔서 복귀하셔야죠. 다들 회장님만 기다리고 있을 텐데.”도언은 안서희가 그 말을 하며 자신을 흘낏 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도언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아휴, 그래도 회장님이 계신 거랑 같아요? 안 그러니, 도언아?”안서희가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도언을 보았다.도언 역시 그녀의 눈을 빤히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얼른 복귀하셔야죠.”안서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자 도언은 보이지 않게 조소하며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만들었다.왠지 욕지기가 올라올 것 같아서였다.“형 왔어?”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도경이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섰다.도언은 옆에 의자를 밀어주며 대답을 대신했다.“도경이, 공부는 잘하고 있냐?”차 회장의 물음에 도경이 쭈뼛거리며 도언이 내어준 의자에 앉았다.“……네.”“올해는 대학 가야 할 거 아니냐.”도경이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 참에 안서희가 끼어들었다.“그럼요. 올해는 가야죠. 우리 도경이 요즘 얼마나 공부 열심히 하는데요.”“엄마…….”그
이재는 그의 맨몸을 볼 수 없어 눈을 돌렸다.하지만 그의 몸이 이미 눈에 들어온 뒤였다.'이런 게 남자의 몸인가?'이재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도언은 옷을 입고 있을 때도 울룩불룩 탄탄한 몸이라는 것을 짐작할 만 했다.그런데 벗은 몸은 짐작했던 것 이상이었다.단단하게 뻗은 직각 어깨.그 아래 떨어지는 기다란 팔과 알맞게 붙은 근육.적당하게 오른 가슴은 탄탄함을 넘어 매끈한 나머지 혹시 랩이라도 씌워놓은 건 아닌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그리고 음영을 그려 넣은 것처럼 여섯 개로 쫙 갈라진
셔츠에 번진 김치 국물을 보니 쌍방 과실 같은 말은 꺼낼 수도 없었다. 명백한 자신의 과실이 맞았다.이재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죄송합니다.”“따라와요.”“네……. 네?”이재가 고개를 번쩍 들자 이미 돌아선 도언이 2층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이재가 허둥대며 그의 뒤를 따라가자 도언이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보았다.“그건 두고.”도언이 이재가 들고 있던 김치 그릇을 턱짓으로 가리켰다.“아.”이재는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 테이블 조리대 위에 접시를 올려두었다. 나가려고 보니 접시를 들고 있던 손이 김
도언은 별채로 가는 정원 모퉁이에 서서 담배를 물었다.“후우…….”길게 빨아들였다가 내뱉는 연기가 갈증을 풀기라도 하는 듯 길게 이어졌다.도언이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고개를 들었을 때 멀리서 반짝하고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호명가 고용인들이 머무는 숙소동이었다.1층, 2층, 3층…….3층.도언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숙소동을 보며 불이 켜진 방의 층수를 헤아렸다.지금 막 불이 켜진 방은 그녀의 방일 것이다.“한이재.”도언은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며 풀썩 웃음을 내뱉었다.아직도 그녀가 호명 가에 있
이재는 홀린 듯 도언을 보았다.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 밑에 길게 난 눈은 도경을 향한 웃음으로 반쯤 감겨 있었다.오뚝하게 솟은 코 아래 선이 짙은 입술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는 참 잘생긴 남자였다.도경이 제 형이 잘생겼다고 노래를 부르는 걸 보고 그러려니 했던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차도경, 이제 컸다고 술을 마시고 다닌다, 이거지?”“왜 이래? 나 이제 스무 살이야.”“아, 그러세요? 스무 살?”형제의 웃음소리가 호명 가 안채를 울렸다.그 소리에 이재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