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재는 홀린 듯 도언을 보았다.
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 밑에 길게 난 눈은 도경을 향한 웃음으로 반쯤 감겨 있었다.
오뚝하게 솟은 코 아래 선이 짙은 입술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는 참 잘생긴 남자였다.
도경이 제 형이 잘생겼다고 노래를 부르는 걸 보고 그러려니 했던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차도경, 이제 컸다고 술을 마시고 다닌다, 이거지?”
“왜 이래? 나 이제 스무 살이야.”
“아, 그러세요? 스무 살?”
형제의 웃음소리가 호명 가 안채를 울렸다.
그 소리에 이재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지금 여기는 이재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이루어진 형제의 만남이었고, 어쩌면 호명 가의 단란하고도 비밀스러운 가족 모임일 수도 있었다.
이재는 조심스레 뒷걸음을 치며 물러섰다.
“그럼 전 이만…….”
아직도 안 가고 있었냐는 얼굴로 돌아보는 안서희와 너는 누구냐는 듯이 쳐다보는 차도언의 시선에 이재는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순간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건 도경이었다.
“누나.”
“어, 어?”
“여기 우리 형이야.”
눈치 없이 이재를 불러세우고는 도경은 도언을 가리키며 해맑게 웃었다.
이재는 저도 모르게 도경이 가리키는 손을 따라가다가 도언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도언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굳이 인사를 나눠야 할 사람인가 의심하는 것처럼.
너는 누구냐고 묻는 것처럼.
“안녕……하세요.”
이재가 어쩔 수 없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도언이 의례적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받았다.
예의상. 건네는 인사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듯.
“형, 내가 말한 적 있지? 과외 선생님. 이재 누나.”
어느새 이재 곁에 다가온 도경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척 올리며 도언에게 소개했다.
“우리 이재 누나 예쁘지?”
이재가 당황하며 제 어깨에 올린 도경의 팔을 밀어내고 벗어났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도언의 머리가 바로 세워졌다.
그리고 찬찬히 내려간 그의 시선이 이재의 손에 머물렀다.
도경이 건네준 지폐를 꼭 쥔 손이었다.
“한 선생, 뭐해요. 얼른 가봐요.”
생각지도 못한 인사치레에 허둥대던 이재에게 안서희가 재촉했다.
“아, 네. 그럼…….”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왠지 뒤가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덜컥.
안채 현관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이재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무래도 도경이한테 눈치부터 가르쳐야겠어.”
안서희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준 것도, 제 형에게 인사를 시킨 것도 모두 눈치 없는 짓이었다는 걸 도경이 알려나.
이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숙소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재가 나간 후 도언이 벗어 두었던 재킷을 가지고 나오며 안서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경이 그런 도언의 앞을 막아섰다.
“벌써?”
“벌써는 무슨 벌써야. 지금 시간이 몇시인지 알아? 일찍 다녀 인마.”
도언이 도경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싱긋 웃었다.
도경이 금세 시무룩해져서 현관으로 향하는 도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어디로 가는데? 그냥 여기서 자고 가면 되잖아. 응? 혀엉......”
안서희가 도언을 따라가는 도경의 팔을 잡았다.
“도언이 별채로 가는 거야. 당분간...... 당분간 거기서 지낼 거야.”
안서희는 기쁜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도경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눈빛은 어쩐지 멍하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진짜? 형 별채로 온 거야?”
여전히 눈치 없는 도경은 뛸듯이 기뻐하며 도언에게 매달렸다.
“그래. 형님 보고 싶으면 별채로 와.”
도언이 도경의 머리를 장난스레 헝클며 안서희를 보았다.
형제를 보는 그녀는 애써 미소 짓고 있었지만, 입술 끝이 떨리는 것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당분간, 이라는 말을 도언이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별채 갈래. 형이랑 같이 잘래.”
“도경아, 형 피곤해. 쉬게 둬.”
도언을 따라갈 것처럼 나서는 도경을 안서희가 다시 말렸다.
도경이 입을 삐죽 내밀며 아쉽게 도언을 보았지만, 그는 안서희를 말리지 않았다.
도경을 상대해 주기엔 너무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하자. 이제 나도 집에 돌아왔으니까.”
집에 돌아왔다, 는 말에 안서희가 흠칫 놀라며 도경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도경은 그것도 모른 채 기다리던 주인이 돌아와 기쁜 강아지처럼 도언에게 매달리며 좋아했다.
“가보겠습니다. 어머니.”
도언이 덧붙인 「어머니」라는 말에 안서희가 퍼뜩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입술을 올려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얼굴을 만들기 위해서.
“그래, 얼른 가서 쉬어라.”
“형, 잘 자.”
손을 흔드는 도경에게 씩 웃어 보이는 도언의 모습은 퍽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래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주인처럼 여유가 넘쳤고, 피곤하지만 곧 안락해질 걸 안다는 듯 조급하지 않았다.
정작 조급함을 감추지 못한 건 호명 가의 안주인 안서희였다.
욕실로 들어온 이재는 옷을 벗었다.도언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그가 돌아오기 전에 씻을 생각이었다.요즘에는 아침에도 늦잠을 자느라 도언이 출근하는 걸 못 보기 일쑤여서 거의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 마찬가지였다.오늘은 오랜만에 컨디션이 괜찮으니 도언이 오기 전에 말끔하게 씻고 화장도 해볼 생각이었다.아무리 임신했다고 해도 그에게 여전히 예뻐 보이고 싶었다.그동안 도언에게 소홀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쏴아-.이재는 욕실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먼저 샤워기 물을 틀었다.생각 같아서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임신 초기에는 탕욕을 삼가라는 의사의 말도 있어서 샤워로 만족해야 했다.곧 뜨거운 수증기가 욕실에 차오르기 시작했다.이재는 거울에 제 나신을 들여다보았다.한동안 입덧으로 먹지 못해 가느다랗던 몸이 더 마른 느낌이었다.아랫배를 보아도 아직은 납작해서 임신한 표시가 전혀 나지 않았다.“도이야…… 잘 크고 있는 거지?”이재는 제 아랫배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아직도 제 안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아랫배가 불러오고 도이가 안에서 태동을 한다는 것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다시 눈을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몸이 마른 것과는 다르게 어쩐지 가슴은 더 커진 것 같았다.임신했기 때문일까.이재는 제 가슴의 크기를 가늠해보기라도 하듯 두 손으로 감싸보았다.확실히 더 부풀어 올라 있었다.유륜과 유두의 색도 짙어진 것 같아 조금 신경 쓰였다.“……이재야…….”문득 들린 소리에 흠칫 놀랐다.
떡볶이를 먹고 난 이후 물 한 모금 못 먹던 이재의 입덧은 급격히 사그라들었다.대신 먹고 싶은 것이 수시로 바뀌는 입덧이 시작되었다.“여사님, 저 여사님이 만들어주신 배추 된장국 먹고 싶어요.”“배추 된장국? 금방 되죠. 조금만 기다려요.”김 여사가 신이 나서 배추 된장국을 끓여주면 그 사이 입맛이 변한 이재는 두어 번 떠먹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왜, 맛이 없어요?”“아뇨, 그게 아니라…… 아까는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지금은 또 입맛이 없어졌어요.”미안함에 울상이 된 이재는 억지로라도 먹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죄송해요. 제가 괜히 일만 만들어드렸어요.”“죄송은 무슨.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요.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없어요?”“지금 생각나는 거 있긴 한데, 그건 도언 씨한테 사 오라고 하려고요.”이재의 말에 김 여사가 빙그레 웃었다.그 차갑고 어렵기만 했던 별채 주인 도언이 이재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 낯설고도 보기 좋았다.“그래요. 남편 이럴 때나 부려먹는 거지. 임신했을 때 마음껏 부려먹어요. 부회장님이 작은 사모님 말이면 껌뻑 죽잖아요.”“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니까 또 그러시네.”이재는 고용인들이 제게 ‘작은 사모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질색했다.갑자기 어렵게 대하는 것도 서운한데 그런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은 견딜 수 없었다.“작은 사모님을 작은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요.”김 여사가 놀리듯 부러 작은 사모님이라는 말을 반복했다.“그러지 마세요. 저 진짜 그렇게 부르실 때마다 숨고 싶단 말이에요. 그냥 이름 부르시면 안 돼요?”“어이구, 큰일 날 소리! 안채 사모님이 아시면 난리 나게요?”안서희 여사까지 끌어들이면 이재도 할 말은 없었다.괜히 자신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이 곤란해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이재가 울상을 짓다가 갑자기 스친 생각에 두 손을 모았다.“아! 그럼 아기 태명 붙여서 불러주세요.”“아기 태명이요?”“네, 우리 아기 태명 도이예요. 도이 엄마라고 불러주시면 어때요?”
몸을 일으킨 도언이 반색하며 이재에게 물었다.“먹고 싶은 거?”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이보다 더 반가운 말이 없었다.입덧을 시작한 이후 제대로 뭘 먹은 게 없는 이재였다.“뭔데? 뭐가 먹고 싶은데?”도언이 당장 이재 앞으로 대령해 놓을 기세로 물었다.“그게…….”이재가 머뭇거렸다.“말 해봐. 뭐든 괜찮으니까.”도언의 재촉에 이재가 침을 꿀꺽 삼켰다.먹고 싶은 걸 생각하니 침이 고이는 모양이었다.“떡볶이.”“……어?”“나 떡볶이 먹고 싶어요.”뜻밖의 메뉴에 도언이 잠시 버벅거렸다.오늘도 죽 몇 숟가락 먹은 게 다라고 하더니 갑자기 떡볶이 먹고 싶다고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떡볶이가 먹고 싶다고?”“응.”“그래? 그럼 김 여사님에게 말을…….”“아니, 그러지 마요.”핸드폰을 집어 드는 도언을 이재가 말렸다.“그럼? 배달이라도 시킬까?”이재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그런 거 말고요. 거기 있잖아요.”“……?”“우리 같이 먹었던 떡볶이, 기억나요? 나 거기 떡볶이 먹고 싶어요.”같이 먹었던 떡볶이?도언에게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결혼식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이재의 배가 많이 불러오기 전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두 달 후로 결정했다.두 달 후면 여름의 초입으로 결혼식을 치르기엔 아주 좋은 시기였다.결혼식 장소는 호명 가 정원에서 하기로 했다.계절에 맞게 야외 결혼식을 치르기엔 안성맞춤이었다.벌서부터 고용인들은 결혼식에 쓰일 정원을 정돈하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호명 가 안팎이 바빴다.그런데 문제는 이재였다.결혼식을 준비하느라 제일 바빠야 할 당사자였지만 곧바로 입덧이 시작된 탓이었다.“못 먹겠어요. 죄송해요.”먹고 싶다고 해서 준비한 음식 앞에서도 헛구역질하기 일쑤였고, 먹은 것도 없는데 토해내느라 기진맥진이었다.기운이 없어 결혼준비고 뭐고 누워있기만 했다.별채 살림을 맡은 김 여사에 안채에서 조 여사까지 내려와 이재를 돌봤지만 입덧을 가라앉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뭐라도 먹어야 해요. 아기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먹어요.”조 여사가 먹을 만한 것들을 수시로 챙겨주었지만 이재는 한 입 뜨는 것도 힘겨워했다.“저도 그러고 싶은데......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아요.”이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괴로워 눈물을 뚝뚝 흘렸다.“아이고, 기운도 없는데 울지 말아요.”조 여사 역시 그런 이재가 안쓰러워서 눈물이 그렁해지곤 했다.웨딩드레스를 골라야 하는데 외출이 힘들어 집으로 드레스를 가져오게 했지만 그마저도 입어보지 못하고 있었다.결혼식을 앞두고 다른 신부들은 피부관리에 뭐에 다 한다는데 이재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오늘도 이재 많이 힘들어했나요?”퇴근
“우왁! 정말?”도경이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이재의 임신 소식을 알린 자리였다.누구보다 가장 놀란 건 도경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도경은 이재를 빤히 바라보았다.도언이 한 말이 정말이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에 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와 씨…… 말도 안 돼.”도경은 놀람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낭패감까지 뒤섞인 감정이 밀려왔다.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도언이 이재와 결혼한 것도 겨우 받아들였는데 임신이라니 이건 상상도 못 했다.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고, 당연한 건데도 그랬다.“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도언이 핀잔을 주자 도경이 얼굴을 구겼다.알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된 것만 같았다.“너 삼촌 되는 거야. 조카 생기는 거라고.”“삼촌……? 와…… 씨…….”안서희가 여전히 선 채 중얼대는 도경의 팔을 잡아끌었다.“도경아, 좀 앉아.”엄마가 잡아당기는 대로 도경은 털썩 주저앉았다.“축하한다.”차 회장이 건네는 축하에 이재가 고개를 숙였다.오랜만에 차 회장이 미소를 지었다.이재는 그의 미소에 안심이 되었다.“컨디션은 괜찮고?”“네, 좋습니다.”“다행이구나. 병원에 갔더니 뭐라고 하더냐.”“10주 차라고 합니다. 안정기에 들 때까지는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데 위치나 크기가 좋다고 하더라고요.”도언이 병원에 가서 확인한 내용을 전하며 이재의 손을 잡았다.이재는 도언과 함께 병원에서 들었던 아기의 심장 소리를 떠올렸다.아직 한없이 작은 아기인데 그렇게 힘차게 심장 소리를 내는 것에 감격해 이재는 또 울고 말았다.도언은 울보 엄마라고 놀렸지만, 솔직히 그 순간 본인도 가슴이 벅차올랐다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그래서 말인데요.”도언이 임신 소식과 더불어 전할 중요한 말을 꺼냈다.“결혼식을 하려고요.”“결혼식? 언제?”이제껏 아무 말도 없었던 안서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아기 낳기 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안서희가 날짜를 가늠하기라도 하듯 눈동자를
도언은 이재의 말을 듣고도 믿기지 않아 바라보았다.가까이 대고 있던 얼굴을 뒤로 물려 이재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렁하게 눈물이 맺힌 그녀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뭐라고 했어?”이재가 눈을 깜빡이자 맺혀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임신했다고…… 아기 생겼다고요.”“허.”도언은 울고 있는 이재를 들여다보았다.“그런데 왜 울어?”“몰라, 눈물이 나.”도언이 웃음을 터트리며 이재를 끌어안았다.“너무 좋아서 우는 건가?”“몰라…… 모르겠어.”도언의 품에 안긴 이재가 훌쩍거리자 도언은 어이가 없는 듯 계속 웃었다.“이재야, 나 봐.”이재가 훌쩍거림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도언이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우리 아기 생긴 거야?”“으응.”“나 기뻐해도 되는 거지?”울고 있는 이재를 달래듯 도언이 물었다.“자기, 아기 생긴 거…… 기뻐요?”“당연하지.”“히잉…… 나도 기뻐요.”“그런데 왜 울어?”“몰라…… 좋은데…… 그냥 좀 무섭고…… 겁도 나고…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도경을 모른 체하며 이재는 손을 내밀었다.“차 키."도경의 시선이 느리게 이재의 손으로 내려왔다. 대답 없이 멍하니 바라보는 도경에게 이재가 재촉했다. "차 키 내놓으라고.""......차 키?"도경이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중얼대며 물끄러미 이재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재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삼키며 다시 말했다."차 키, 어디 있어?" “아아...... 차 키.”뭐가 재밌는지 킥킥대던 도경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주차 해준다고, 가져갔지. 누구더라? 그 형이......
“하아.”택시에서 내린 이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여름의 끝자락, 후텁지근한 공기가 달라붙어 금세 이마에 끈적한 땀이 배었다.“뭔 술을 언제부터 처마셨길래.”이재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고작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그동안 새벽 시간에 무수히 불려 다녔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은 또 처음이었다.늦은 시간이 아니니 오늘 밤은 그래도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었다.차라리 잘 된 건가 싶다가도 대기조처럼 불려다니는 제 처지에 화가 치밀었다. “어쩌겠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지.”그러다 이내 이렇게 체
여자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별채 2층 계단을 오르며 후회했다."다음에, 다음에 해요......"자신이 한 말이 메아리가 되어 끝도 없이 귓가를 울렸다.‘다음이라는 말은 왜 했을까.’그건 무언가 기약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그를 피하고자 했던 의미 없는 말이었다.하지만 이제 와 설명한들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늘 그렇듯 후회는 이미 늦어버렸을 때 하는 것이니까.탁-.여자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순식간에 닥쳐온 어둠에 두려움이 밀려왔다.제 손을 잡은 남자의 희미한 온기마저 빠져나갈까 두려워
이재는 그의 맨몸을 볼 수 없어 눈을 돌렸다.하지만 그의 몸이 이미 눈에 들어온 뒤였다.'이런 게 남자의 몸인가?'이재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도언은 옷을 입고 있을 때도 울룩불룩 탄탄한 몸이라는 것을 짐작할 만 했다.그런데 벗은 몸은 짐작했던 것 이상이었다.단단하게 뻗은 직각 어깨.그 아래 떨어지는 기다란 팔과 알맞게 붙은 근육.적당하게 오른 가슴은 탄탄함을 넘어 매끈한 나머지 혹시 랩이라도 씌워놓은 건 아닌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그리고 음영을 그려 넣은 것처럼 여섯 개로 쫙 갈라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