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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별채 2층 계단을 오르며 후회했다.
"다음에, 다음에 해요......"
자신이 한 말이 메아리가 되어 끝도 없이 귓가를 울렸다.
‘다음이라는 말은 왜 했을까.’
그건 무언가 기약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를 피하고자 했던 의미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설명한들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늘 그렇듯 후회는 이미 늦어버렸을 때 하는 것이니까.
탁-.
여자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순식간에 닥쳐온 어둠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제 손을 잡은 남자의 희미한 온기마저 빠져나갈까 두려워 손끝을 여미는 순간,
"흐으......"
어둠에 미처 눈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입술이 먹혀들었다.
고집스럽게 세웠던 몸이 그의 무게 탓에 밀려났지만, 곧 벽이 닿았다.
차갑게 닿은 벽에 몸을 의지한 채 밀고들어오는 그를 어찌하지도 못한 채 그저 받아들였다.
갈급한 입맞춤에 질척이는 소리가 어둠의 틈새를 밀어냈다.
얼마나 빨아 먹었을까.
숨이 막히도록 파고들었던 남자가 능숙하게 허리를 잡은 남자가 끌어당겨 안았을 때 여자는 눈을 떴다.
비로소 그의 얼굴이, 그의 눈이 보였다.
그러나 바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건 숨 쉴 여력조차 주지 않는 그 때문이었다.
“하, 지…….”
하지 말라는 말은 그의 혀에 쓸려 나가고, 대신 밭은 숨이 그녀의 입안을 채웠다.
목 끝까지 닿을 듯이 파고드는 그가 버거워 발끝을 들었지만, 중심을 잃고 더 비틀거릴 뿐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부들대는 그녀의 손을 잡아 제 목을 안게 한 남자는 더 깊이 그녀 안으로 들어갔다.
젖은 혀가 엉키고 질척이는 소리 사이로 미처 감추지 못한 비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남자가 목구멍 깊은 곳에서 그르렁대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더 강하게 빨아들였다.
“흐윽……!”
그가 셔츠 위 가슴을 쥐었을 때 놀란 여자가 입을 다물었다.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에 혀를 물린 그가 쿡쿡 웃음을 터트리며 입술을 뗐다.
“경고했는데?”
“……?”
“나 변태 새끼라고.”
여자가 놀라서 동그래진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그득하게 차오른 눈물이 반짝이는 게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였다.
“물리는 거, 좋아하거든.”
여자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며 입술을 가렸다.
가득 고인 눈물이 후드득 떨어질 것만 같이 그렁하게 맺힌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단정했다.
변태 새끼 운운하며 지껄였으면서, 숨이 막히도록 입술을 빨아먹었으면서 그는 표정 하나 변함없었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는 그는 숨소리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기름한 눈 사이로 낮게 깔린 눈동자가 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며 바라보는 시선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여자는 현실을 부정이라도 하듯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차올랐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 눈을 바라보며 남자는 가슴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여자가 숨을 들이켜며 소리 없는 비명이라도 지르듯 입을 벌렸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춰 오는 그의 입술은 어쩐지 다정했다.
어르듯 부드럽게 입술을 물고 지그시 빨아들이며 잔뜩 벌어진 입안을 느리고 깊게 훑었다.
“흐윽, 흐…….”
그러면서도 가슴을 쥔 손만은 여전해서 셔츠 위로 그의 손에 뭉개지는 가슴은 그녀를 헐떡이게 했다.
“한이재 씨.”
“…….”
남자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바라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워냈다.
“다음이라고 한 거, 이제 할 거야.”
두려움에 여자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일렁였다.
‘그놈의 다음. 그 말을 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후회는 부질없었다.
그의 방에서 그에게 안긴 지금 무엇도 물릴 수 없을 것이다.
왈칵 밀려오는 두려움에 여자는 그저 몸을 떨 뿐이었다.
“뭐, 허락해 달라는 건 아니고.”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는 입꼬리를 느긋하게 올리며 웃었다.
“난 말로만 하는 사람 싫어한다고 했죠.”
그가 손으로 그녀의 젖은 속눈썹을 천천히 쓸었다.
눈을 감은 그녀의 눈두덩이를 스친 그의 손가락에 볼을 타고 내려와 귓불을 건드렸다.
“잘 주는 여자는 좋지.”
여자가 울컥하며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있던 그를 밀어 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귀 아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래서…… 한이재가 좋은 건가.”
여자의 목에 입술을 비비적거리며 중얼거리는 그 소리는 이재의 귀에 닿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녀가 간지럽히듯 목을 깨무는 그 감촉에 몸을 비틀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몸을 번쩍 들었다.
여자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체념하고야 말았다.
호명가의 지배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폭군.
그는 별채의 주인, 차도언이기 때문이었다.
욕실로 들어온 이재는 옷을 벗었다.도언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그가 돌아오기 전에 씻을 생각이었다.요즘에는 아침에도 늦잠을 자느라 도언이 출근하는 걸 못 보기 일쑤여서 거의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 마찬가지였다.오늘은 오랜만에 컨디션이 괜찮으니 도언이 오기 전에 말끔하게 씻고 화장도 해볼 생각이었다.아무리 임신했다고 해도 그에게 여전히 예뻐 보이고 싶었다.그동안 도언에게 소홀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쏴아-.이재는 욕실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먼저 샤워기 물을 틀었다.생각 같아서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임신 초기에는 탕욕을 삼가라는 의사의 말도 있어서 샤워로 만족해야 했다.곧 뜨거운 수증기가 욕실에 차오르기 시작했다.이재는 거울에 제 나신을 들여다보았다.한동안 입덧으로 먹지 못해 가느다랗던 몸이 더 마른 느낌이었다.아랫배를 보아도 아직은 납작해서 임신한 표시가 전혀 나지 않았다.“도이야…… 잘 크고 있는 거지?”이재는 제 아랫배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아직도 제 안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아랫배가 불러오고 도이가 안에서 태동을 한다는 것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다시 눈을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몸이 마른 것과는 다르게 어쩐지 가슴은 더 커진 것 같았다.임신했기 때문일까.이재는 제 가슴의 크기를 가늠해보기라도 하듯 두 손으로 감싸보았다.확실히 더 부풀어 올라 있었다.유륜과 유두의 색도 짙어진 것 같아 조금 신경 쓰였다.“……이재야…….”문득 들린 소리에 흠칫 놀랐다.
떡볶이를 먹고 난 이후 물 한 모금 못 먹던 이재의 입덧은 급격히 사그라들었다.대신 먹고 싶은 것이 수시로 바뀌는 입덧이 시작되었다.“여사님, 저 여사님이 만들어주신 배추 된장국 먹고 싶어요.”“배추 된장국? 금방 되죠. 조금만 기다려요.”김 여사가 신이 나서 배추 된장국을 끓여주면 그 사이 입맛이 변한 이재는 두어 번 떠먹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왜, 맛이 없어요?”“아뇨, 그게 아니라…… 아까는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지금은 또 입맛이 없어졌어요.”미안함에 울상이 된 이재는 억지로라도 먹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죄송해요. 제가 괜히 일만 만들어드렸어요.”“죄송은 무슨.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요.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없어요?”“지금 생각나는 거 있긴 한데, 그건 도언 씨한테 사 오라고 하려고요.”이재의 말에 김 여사가 빙그레 웃었다.그 차갑고 어렵기만 했던 별채 주인 도언이 이재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 낯설고도 보기 좋았다.“그래요. 남편 이럴 때나 부려먹는 거지. 임신했을 때 마음껏 부려먹어요. 부회장님이 작은 사모님 말이면 껌뻑 죽잖아요.”“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니까 또 그러시네.”이재는 고용인들이 제게 ‘작은 사모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질색했다.갑자기 어렵게 대하는 것도 서운한데 그런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은 견딜 수 없었다.“작은 사모님을 작은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요.”김 여사가 놀리듯 부러 작은 사모님이라는 말을 반복했다.“그러지 마세요. 저 진짜 그렇게 부르실 때마다 숨고 싶단 말이에요. 그냥 이름 부르시면 안 돼요?”“어이구, 큰일 날 소리! 안채 사모님이 아시면 난리 나게요?”안서희 여사까지 끌어들이면 이재도 할 말은 없었다.괜히 자신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이 곤란해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이재가 울상을 짓다가 갑자기 스친 생각에 두 손을 모았다.“아! 그럼 아기 태명 붙여서 불러주세요.”“아기 태명이요?”“네, 우리 아기 태명 도이예요. 도이 엄마라고 불러주시면 어때요?”
몸을 일으킨 도언이 반색하며 이재에게 물었다.“먹고 싶은 거?”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이보다 더 반가운 말이 없었다.입덧을 시작한 이후 제대로 뭘 먹은 게 없는 이재였다.“뭔데? 뭐가 먹고 싶은데?”도언이 당장 이재 앞으로 대령해 놓을 기세로 물었다.“그게…….”이재가 머뭇거렸다.“말 해봐. 뭐든 괜찮으니까.”도언의 재촉에 이재가 침을 꿀꺽 삼켰다.먹고 싶은 걸 생각하니 침이 고이는 모양이었다.“떡볶이.”“……어?”“나 떡볶이 먹고 싶어요.”뜻밖의 메뉴에 도언이 잠시 버벅거렸다.오늘도 죽 몇 숟가락 먹은 게 다라고 하더니 갑자기 떡볶이 먹고 싶다고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떡볶이가 먹고 싶다고?”“응.”“그래? 그럼 김 여사님에게 말을…….”“아니, 그러지 마요.”핸드폰을 집어 드는 도언을 이재가 말렸다.“그럼? 배달이라도 시킬까?”이재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그런 거 말고요. 거기 있잖아요.”“……?”“우리 같이 먹었던 떡볶이, 기억나요? 나 거기 떡볶이 먹고 싶어요.”같이 먹었던 떡볶이?도언에게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결혼식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이재의 배가 많이 불러오기 전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두 달 후로 결정했다.두 달 후면 여름의 초입으로 결혼식을 치르기엔 아주 좋은 시기였다.결혼식 장소는 호명 가 정원에서 하기로 했다.계절에 맞게 야외 결혼식을 치르기엔 안성맞춤이었다.벌서부터 고용인들은 결혼식에 쓰일 정원을 정돈하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호명 가 안팎이 바빴다.그런데 문제는 이재였다.결혼식을 준비하느라 제일 바빠야 할 당사자였지만 곧바로 입덧이 시작된 탓이었다.“못 먹겠어요. 죄송해요.”먹고 싶다고 해서 준비한 음식 앞에서도 헛구역질하기 일쑤였고, 먹은 것도 없는데 토해내느라 기진맥진이었다.기운이 없어 결혼준비고 뭐고 누워있기만 했다.별채 살림을 맡은 김 여사에 안채에서 조 여사까지 내려와 이재를 돌봤지만 입덧을 가라앉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뭐라도 먹어야 해요. 아기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먹어요.”조 여사가 먹을 만한 것들을 수시로 챙겨주었지만 이재는 한 입 뜨는 것도 힘겨워했다.“저도 그러고 싶은데......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아요.”이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괴로워 눈물을 뚝뚝 흘렸다.“아이고, 기운도 없는데 울지 말아요.”조 여사 역시 그런 이재가 안쓰러워서 눈물이 그렁해지곤 했다.웨딩드레스를 골라야 하는데 외출이 힘들어 집으로 드레스를 가져오게 했지만 그마저도 입어보지 못하고 있었다.결혼식을 앞두고 다른 신부들은 피부관리에 뭐에 다 한다는데 이재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오늘도 이재 많이 힘들어했나요?”퇴근
“우왁! 정말?”도경이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이재의 임신 소식을 알린 자리였다.누구보다 가장 놀란 건 도경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도경은 이재를 빤히 바라보았다.도언이 한 말이 정말이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에 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와 씨…… 말도 안 돼.”도경은 놀람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낭패감까지 뒤섞인 감정이 밀려왔다.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도언이 이재와 결혼한 것도 겨우 받아들였는데 임신이라니 이건 상상도 못 했다.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고, 당연한 건데도 그랬다.“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도언이 핀잔을 주자 도경이 얼굴을 구겼다.알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된 것만 같았다.“너 삼촌 되는 거야. 조카 생기는 거라고.”“삼촌……? 와…… 씨…….”안서희가 여전히 선 채 중얼대는 도경의 팔을 잡아끌었다.“도경아, 좀 앉아.”엄마가 잡아당기는 대로 도경은 털썩 주저앉았다.“축하한다.”차 회장이 건네는 축하에 이재가 고개를 숙였다.오랜만에 차 회장이 미소를 지었다.이재는 그의 미소에 안심이 되었다.“컨디션은 괜찮고?”“네, 좋습니다.”“다행이구나. 병원에 갔더니 뭐라고 하더냐.”“10주 차라고 합니다. 안정기에 들 때까지는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데 위치나 크기가 좋다고 하더라고요.”도언이 병원에 가서 확인한 내용을 전하며 이재의 손을 잡았다.이재는 도언과 함께 병원에서 들었던 아기의 심장 소리를 떠올렸다.아직 한없이 작은 아기인데 그렇게 힘차게 심장 소리를 내는 것에 감격해 이재는 또 울고 말았다.도언은 울보 엄마라고 놀렸지만, 솔직히 그 순간 본인도 가슴이 벅차올랐다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그래서 말인데요.”도언이 임신 소식과 더불어 전할 중요한 말을 꺼냈다.“결혼식을 하려고요.”“결혼식? 언제?”이제껏 아무 말도 없었던 안서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아기 낳기 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안서희가 날짜를 가늠하기라도 하듯 눈동자를
도언은 이재의 말을 듣고도 믿기지 않아 바라보았다.가까이 대고 있던 얼굴을 뒤로 물려 이재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렁하게 눈물이 맺힌 그녀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뭐라고 했어?”이재가 눈을 깜빡이자 맺혀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임신했다고…… 아기 생겼다고요.”“허.”도언은 울고 있는 이재를 들여다보았다.“그런데 왜 울어?”“몰라, 눈물이 나.”도언이 웃음을 터트리며 이재를 끌어안았다.“너무 좋아서 우는 건가?”“몰라…… 모르겠어.”도언의 품에 안긴 이재가 훌쩍거리자 도언은 어이가 없는 듯 계속 웃었다.“이재야, 나 봐.”이재가 훌쩍거림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도언이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우리 아기 생긴 거야?”“으응.”“나 기뻐해도 되는 거지?”울고 있는 이재를 달래듯 도언이 물었다.“자기, 아기 생긴 거…… 기뻐요?”“당연하지.”“히잉…… 나도 기뻐요.”“그런데 왜 울어?”“몰라…… 좋은데…… 그냥 좀 무섭고…… 겁도 나고…
도언은 별채로 가는 정원 모퉁이에 서서 담배를 물었다.“후우…….”길게 빨아들였다가 내뱉는 연기가 갈증을 풀기라도 하는 듯 길게 이어졌다.도언이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고개를 들었을 때 멀리서 반짝하고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호명가 고용인들이 머무는 숙소동이었다.1층, 2층, 3층…….3층.도언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숙소동을 보며 불이 켜진 방의 층수를 헤아렸다.지금 막 불이 켜진 방은 그녀의 방일 것이다.“한이재.”도언은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며 풀썩 웃음을 내뱉었다.아직도 그녀가 호명 가에 있
이재는 홀린 듯 도언을 보았다.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 밑에 길게 난 눈은 도경을 향한 웃음으로 반쯤 감겨 있었다.오뚝하게 솟은 코 아래 선이 짙은 입술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는 참 잘생긴 남자였다.도경이 제 형이 잘생겼다고 노래를 부르는 걸 보고 그러려니 했던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차도경, 이제 컸다고 술을 마시고 다닌다, 이거지?”“왜 이래? 나 이제 스무 살이야.”“아, 그러세요? 스무 살?”형제의 웃음소리가 호명 가 안채를 울렸다.그 소리에 이재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지금
대한민국에서 알 만한 사람은 모두가 다 아는 건설 그룹 호명,호명의 가족이 거주하는 그들만의 성채 호명가에 도착한 이재는 뒷자석에 앉은 도경을 돌아봤다."술 다 깬 거지?""집에 가기 싫은데."엉뚱한 대답을 하는 도경은 차에서 내릴 생각도 없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집에 안 가면, 어딜 가려고?"그제야 도경이 이재를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누나, 우리 어디 가서 딱 한 잔만 더 마실래?""야! 차도경!"이재가 인상을 팍 쓰자 움찔 놀란 도경이 싫으면 말고,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도경을 모른 체하며 이재는 손을 내밀었다.“차 키."도경의 시선이 느리게 이재의 손으로 내려왔다. 대답 없이 멍하니 바라보는 도경에게 이재가 재촉했다. "차 키 내놓으라고.""......차 키?"도경이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중얼대며 물끄러미 이재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재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삼키며 다시 말했다."차 키, 어디 있어?" “아아...... 차 키.”뭐가 재밌는지 킥킥대던 도경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주차 해준다고, 가져갔지. 누구더라? 그 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