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도언이 이재를 데려간 곳은 지난번 그녀를 기다리던 레스토랑이었다.
오지 않을 그녀를 기다리며 수많은 상상을 하고, 먹지도 않은 음식값을 지불했던 바로 그곳에 기어이 다시 왔다.
“맛이 없어요?”
이재는 스테이크를 먹지도 않고 잘게 조각내더니 와인만 몇 모금 홀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모르겠어요, 맛이 없는 건지 입맛이 없는 건지.”
아예 포크도 내려놓은 채 이재는 의자에 깊숙이 등을 대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다른 거 시켜 줄까요?”
“아뇨. 전 됐어요. 많이 드세요.”
빈정거림이 섞인 그녀의 말에 도언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내가 뭐 또 잘못한 건가?”
“그럴 리가요.”
“그럼 왜 그래요?”
“제가 뭘요?”
“화내고 있잖아.”
이재가 그제야 도언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눈을 맞추었다.
이재의 그 말간 눈이 도언을 건드리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밑바닥 어딘가가 간지러웠다.“그래서, 맛있는 건 가지고 왔어요?”이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다가 그에게 잡힌 손을 들어 보였다.놓을 생각 없이 꽉 쥔 탓에 진득하게 땀이 배어났다.“이거 놔야 주죠.”도언이 이마를 찡그리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재를 보다가 툭 손을 놓았다.뜨겁게 맞잡았던 손이 떨어지며 저녁의 한기가 스며들었다.이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도언에게 내밀었다.조그맣게 포장된 조각이 두 개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었다.“이게 뭐예요?”“초콜릿이요.”도언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애초에 맛있는 걸 운운한 건 이재를 보고 싶어 한 말이었다.뭘 가져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그랬다면 오히려 실없는 말이나 한 번 더 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그녀가 정말 맛있는 걸 가지고 나왔다.“초콜릿 싫어하세요?”이재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손을 내리자 도언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아니, 그럴 리가.”도언이 이재의 손바닥 위에 있던 초콜릿을 하나 집어 들었다.그리고 포장지를 까 입에 넣었다.단단한 초콜릿이 그의 입에서 뭉개지듯 녹기 시작했다.“저녁은 드셨다고 해서요. 그리고 맛있는 게 딱히 없어서…….”“맛있네요.”도언이 그녀의 손에 아직 남아 있는 초콜릿을 들어 포장을 벗겼다.그리고 제 입에 넣는 대신 이번엔 이재의 입에 가까이 댔다.“먹어봐요. 얼마나 맛있는지.”“아뇨, 전…….”이재가 고개를 저었지만 도언은 그녀의 입안으로 초콜릿을 밀어 넣었다.이재는 초
“너니? 네가 도경이 유학 가라고 바람 넣었어?”안서희가 흥분에 겨워 도언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어머니.”“왜! 도경이 나한테서 떼어 내려고 네가 그런 거야?”“하.”마른 웃음이 풀썩 터져버리고 말았다.도경에게 놀란 건 도언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러나 안서희의 히스테리가 그런 식으로 튈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도언이 안서희를 말리는 듯 뒤로 슬쩍 물러서게 하며 고개를 숙였다.“그러게요,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미처 몰랐네요.”도언이 안서희에게만 들리게 중얼댔다.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며 차 회장 앞에 풀썩 엎드려 쓰러졌다.“여보, 도경이가 지금 공부가 힘들어서 그런 거예요. 유학은 무슨 유학이에요. 절대 안 돼요.”거의 읍소하듯 엎드린 안서희가 차 회장에게 매달렸다.차 회장이 지팡이를 들어 짚고 일어섰다.“그만들 가거라.”“여보!”“자네도 일어나. 좀 진정하고. 천천히 얘기하면 될 일을.”차 회장이 발을 내디딜 때 도언이 부축하려 가까이 다가서자 차 회장이 손을 저었다.“됐다. 들어가라.”차 회장이 다이닝 룸 밖으로 나갔다.남은 건 아직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안서희와 식탁에 멍하게 앉은 도경 그리고 도언이었다.그 모습을 관망하던 도언은 쓴웃음 삼켰다.고작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먹는 가족이라니 참 뭣 같다고, 생각했다.* * *[저녁 뭐 먹었어요?]이재는 도언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이 남자는 대체 뭘 먹었는지가 왜 그렇게 궁금한 걸까.아침
“치료는 다 끝나신 거죠?”도언이 자리에 앉으며 묻자 차 회장이 의자에 세워 두었던 지팡이를 들어 보였다.“이거 짚고 다니란다. 누굴 아주 절름발이로 만들어 놨어.”“무리하실까 봐 그러는 거죠.”안서희가 차 회장을 달래듯 야살스럽게 굴며 말을 거들었다.차 회장이 이내 껄껄 웃으며 안서희의 허벅지를 토닥였다.“자네가 힘들까 봐 그러지. 늙은 남편 수발이나 시키게 생겼구먼.”“당신도 참, 그런 말이 어딨어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얼른 회복하셔서 복귀하셔야죠. 다들 회장님만 기다리고 있을 텐데.”도언은 안서희가 그 말을 하며 자신을 흘낏 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도언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아휴, 그래도 회장님이 계신 거랑 같아요? 안 그러니, 도언아?”안서희가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도언을 보았다.도언 역시 그녀의 눈을 빤히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얼른 복귀하셔야죠.”안서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자 도언은 보이지 않게 조소하며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만들었다.왠지 욕지기가 올라올 것 같아서였다.“형 왔어?”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도경이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섰다.도언은 옆에 의자를 밀어주며 대답을 대신했다.“도경이, 공부는 잘하고 있냐?”차 회장의 물음에 도경이 쭈뼛거리며 도언이 내어준 의자에 앉았다.“……네.”“올해는 대학 가야 할 거 아니냐.”도경이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 참에 안서희가 끼어들었다.“그럼요. 올해는 가야죠. 우리 도경이 요즘 얼마나 공부 열심히 하는데요.”“엄마…….”그
안서희는 너무 바빠서 피부과에 못 들린 게 마음에 걸렸다.“사모님은 이목구비가 워낙 화려하셔서 조금만 메이크업해도 확 살잖아요. 화려하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다니까요.”“아휴, 자기는 진짜 솜씨도 좋지만 그 말이 청산유수야.”기분이 좋아진 안서희가 화장대 위에 놓인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안 주셔도 되는데…….”“받아요. 내가 회장님 퇴원하셔서 기분 좋아서 주는 거니까.”“감사합니다, 사모님.”“예쁘게나 만들어줘. 회장님이 보고 좋아하시게.”안서희의 야살스러운 웃음소리가 문밖에서도 들렸다.오랜만에 들리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안채 고용인들이 불안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 *“도착했습니다, 부회장님.”김 비서의 알림에 도언은 패드를 덮고 눈을 들었다.“수고하셨습니다.”아버지 차 회장의 퇴원으로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다.호명으로 돌아와 다 같이 함께하는 첫 식사였다.“아, 김 비서님.”차에서 내리려던 도언이 뭔가 생각난 듯 김 비서에게 말을 건넸다.“네, 부회장님.”“그 레지던스 아직 비어 있나요?”“도곡동에 있는 레지던스 말씀이십니까?”“네, 맞습니다.”“아직 비어 있습니다. 지난번 세입자가 나간 이후에 아직 새로운 세입자가 안 구해진 모양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부동산에 알아보겠습니다.”독촉으로 알아들은 김 비서가 말하자 도언이 고개를 저었다.“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그럼 어떻게 처분하실 건지…….”“제가 쓰겠습니다.”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김 비서가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
안채가 종일 분주했다.고용인들이 쉴 새 없이 집 안팎을 오가며 쓸고 닦았다.매일 하는 일인데도 오늘따라 유난한 이유는 차 회장이 퇴원해 호명 가로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었다.“베개 그거 말고 새로 들인 거 있잖아요. 그거 가져오세요.”안서희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곳은 침실이었다.차 회장이 퇴원하기 며칠 전부터 침대 시트와 베개를 새로 구비했다.매장에 직접 가서 골랐을 정도로 신경을 썼다.“거기서는 괜찮아 보이더니 집에 오니까 색이 칙칙하네. 조명 탓인가.”고용인이 새로 깔아 둔 시트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안서희는 침실 조명을 올려다보며 못마땅한 기색이었다.“안 되겠다. 이거 다시 벗기세요.”“예? 다시 말씀이세요?”고용인이 되묻자 안서희가 대답 대신 손을 휘저으며 재촉했다.“하얀색인 줄 알았더니 누렇잖아. 차라리 진한 색으로 하는 게 낫겠어. 그레이 있죠? 그걸로 가져와요.”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시트를 벗겨낸 고용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안서희는 시간을 확인하며 서두르라고 재촉했다.안서희는 차 회장이 하루빨리 돌아오길 기다렸다.차 회장이 없는 사이 호명 가에 주인 행세를 하는 도언을 참아주는 데에도 한계가 왔기 때문이었다.“네까짓 게 감히.”말끝마다 어머니를 붙이며 이죽대는 도언의 꼴을 더는 참아줄 수 없었다.감출 생각도 없이 내리깔고 보는 그 눈에 담긴 경멸도 마찬가지였다.그건 도언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변하지 않았다.이미 다 자란 것 같았던 어린 도언은 처음부터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았다.아버지의 새 여자, 제 엄마의 자리를 차지한 불청객.도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그런 도언에게 어머니, 라고 불릴 때마다 소름 끼치도
그 바람에 헛기침이 새어 나왔다.물잔을 건네는 도언에게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대답했다.“혼자 먹어요.”어쩌다 시간이 맞는 고용인들과 먹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혼자였다.그래서 언젠가부터는 따로 차려놓지 말라고 부탁했다.간단하게 챙겨 먹는 게 마음이 편했다.“나랑 같네요.”“……?”“나도 혼자 먹거든.”이재가 잠시 마주친 눈을 내리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점심엔 뭘 먹어요?”“그냥…… 대충, 되는대로 먹어요.”성의 없는 대답처럼 했지만 사실이었다.샐러드나 요거트 같은 걸 먹을 때도 있었고 라면이 먹고 싶을 때는 라면을 먹었다.고용인들의 식사와 시간이 겹치면 그들이 먹는 걸 먹었다.그러고 보니 점심 메뉴를 딱히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대충이라…….”도언은 이재의 대답이 못마땅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이재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그래서 오늘은 뭘 먹을 건데요?”이재는 그 질문이 의아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이제 아침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점심으로 뭘 먹을 건지 대답하라는 도언이 질문이 이상했다.그래도 기어이 이재의 대답을 듣겠다는 듯 보는 그의 시선에 못 이겨 이재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아직 모르겠어요.”“그럼 정해지면 알려줘요.”“그걸 왜…….”도통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이 계속 이어지는 통에 이재가 참지 못하고 되묻고 말았다.“궁금해서. 한이재가 오늘은 뭘 먹는지 알고 싶으니까 알려 달라고.”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그러는가 싶었던 이재는 뜻밖의 말에 감출 새도 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이재는 못 들은 척 젓가락을 들어
이재는 홀린 듯 도언을 보았다.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 밑에 길게 난 눈은 도경을 향한 웃음으로 반쯤 감겨 있었다.오뚝하게 솟은 코 아래 선이 짙은 입술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는 참 잘생긴 남자였다.도경이 제 형이 잘생겼다고 노래를 부르는 걸 보고 그러려니 했던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차도경, 이제 컸다고 술을 마시고 다닌다, 이거지?”“왜 이래? 나 이제 스무 살이야.”“아, 그러세요? 스무 살?”형제의 웃음소리가 호명 가 안채를 울렸다.그 소리에 이재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지금
대한민국에서 알 만한 사람은 모두가 다 아는 건설 그룹 호명,호명의 가족이 거주하는 그들만의 성채 호명가에 도착한 이재는 뒷자석에 앉은 도경을 돌아봤다."술 다 깬 거지?""집에 가기 싫은데."엉뚱한 대답을 하는 도경은 차에서 내릴 생각도 없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집에 안 가면, 어딜 가려고?"그제야 도경이 이재를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누나, 우리 어디 가서 딱 한 잔만 더 마실래?""야! 차도경!"이재가 인상을 팍 쓰자 움찔 놀란 도경이 싫으면 말고,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도경을 모른 체하며 이재는 손을 내밀었다.“차 키."도경의 시선이 느리게 이재의 손으로 내려왔다. 대답 없이 멍하니 바라보는 도경에게 이재가 재촉했다. "차 키 내놓으라고.""......차 키?"도경이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중얼대며 물끄러미 이재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재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삼키며 다시 말했다."차 키, 어디 있어?" “아아...... 차 키.”뭐가 재밌는지 킥킥대던 도경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주차 해준다고, 가져갔지. 누구더라? 그 형이......
“하아.”택시에서 내린 이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여름의 끝자락, 후텁지근한 공기가 달라붙어 금세 이마에 끈적한 땀이 배었다.“뭔 술을 언제부터 처마셨길래.”이재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고작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그동안 새벽 시간에 무수히 불려 다녔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은 또 처음이었다.늦은 시간이 아니니 오늘 밤은 그래도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었다.차라리 잘 된 건가 싶다가도 대기조처럼 불려다니는 제 처지에 화가 치밀었다. “어쩌겠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지.”그러다 이내 이렇게 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