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한민국에서 알 만한 사람은 모두가 다 아는 건설 그룹 호명,
호명의 가족이 거주하는 그들만의 성채 호명가에 도착한 이재는 뒷자석에 앉은 도경을 돌아봤다.
"술 다 깬 거지?"
"집에 가기 싫은데."
엉뚱한 대답을 하는 도경은 차에서 내릴 생각도 없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안 가면, 어딜 가려고?"
그제야 도경이 이재를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누나, 우리 어디 가서 딱 한 잔만 더 마실래?"
"야! 차도경!"
이재가 인상을 팍 쓰자 움찔 놀란 도경이 싫으면 말고,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긴 다리를 휘적이며 걷는 도경의 따라가며 이재는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호명의 둘째이자 막내인 차도경.
재벌가 귀한 도련님이지만 동시에 골칫덩어리이기도 했다.
가뜩이나 재수까지 하는데 이런 식이면 올해도 대학 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번에도 대학에 못 가는 건 과외 선생인 이재에겐 이보다 더 큰 재앙은 없었다.
제 목숨을 쥐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엇나가고 있으니 이재는 도경이 미워지려 했다.
***
“엄마아…….”
멀쩡하게 걸어 들어온 도경이 현관에서 갑자기 비틀거리는 척하더니 제 엄마를 보고선 혀짧은소리를 내며 안겼다.
“아휴, 얼마나 마신 거야!”
헤헤거리며 안기는 아들을 안쓰럽게 토닥거렸다.
“쪼오금 마셨어. 주환이 유학 간다고 송별회 하는데 안 마실 수 없잖아요.”
이재에게 도경을 데리고 오라고 할 때는 노발대발이더니 정작 아들에게는 콧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도경을 토닥이던 안서희는 문득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이재를 발견했다.
“한 선생,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그만 가 봐요.”
“네.”
“누나, 잠깐만.”
돌아서는 이재를 불러세운 건 도경이었다.
이재가 돌아보자 도경이 기다리라는 듯 손을 들어 보이더니 안서희에게 말했다.
“엄마, 나 돈 좀 줘요.”
“돈? 돈은 왜?”
“빨리.”
안서희가 미심쩍은 얼굴로 지갑을 꺼내 열자, 도경이 성급하게 지갑 안에서 현금 뭉치를 덥석 집어 꺼냈다.
그러고는 얼마인지 세보지도 않고 이재에게 건넸다.
“누나, 이거.”
“아니야. 이걸 왜 날 줘.”
이재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보너스.”
“어?”
“나 데리고 오느라 고생했잖아.”
“아니야, 됐다니까.”
도경이 건넨 돈을 한사코 밀어내는데 안서희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을 섞었다.
“그냥 받아요. 우리 도경이가 이렇게 한 선생을 생각한다니까.”
“그래도 너무 많…….”
도경이 이재의 손에 돈을 쥐여주며 말을 막았다.
“누나, 오늘 고마워.”
한쪽 눈을 찡끗하며 웃는 그 얼굴이 얄밉게도 멀쩡해 보였다.
손에 들린 돈을 내려다보던 이재는 왠지 모를 자괴감에 한숨을 쉬었다.
“어? 형! 언제 왔어?”
도경의 소리에 고개를 들자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그러나 이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도경이 입이 닳도록 말하던 「우리형」, 호명그룹 회장의 큰아들이자 도경의 배다른 형, 차도언이었다.
* * *
"누나, 우리 형 진짜 멋있어요."
"우리 형 키도 엄청 크고 공부도 되게 잘해요."
"우리 형이 방학 때 미국 가면 야구장 데려가 준대요."
도경이 입에 달고 살던 「우리 형」.
호명그룹의 차재성 회장의 늦둥이 아들인 도경은 천진하기만 했다.
이재를 처음 만났던 열다섯 살 때부터 제 집안 얘기를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곤 했다.
형의 이름이 차도언이라는 것과 미국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다는 것.
이번에 만났을 때 보니 여자친구가 또 바뀌었다는 것까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조잘댔다.
도경은 형과 나이 차가 열두 살이라고 했다.
형제간의 나이 차가 큰 게 놀랍긴 했지만, 그 이유는 전 국민이 알고 있었다.
물론 도경이 제 입으로 다시 설명해 주기도 했다.
"우리 형 엄마가 돌아가시고 우리 엄마가 아빠랑 결혼한 거래요."
도경이 그러는 건 쓸데없는 얘기로 어떻게든 과외 시간 동안 공부를 덜 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건 마음 붙일 곳 없는 아이가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 큰 집에 도경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이재뿐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재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도경의 형 이야기가 지겨웠다.
처음엔 잠자코 들어주었지만 나중엔 너도 형처럼 멋진 사람 되려면 지금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한다며 화제를 전환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도경은 입을 삐죽이며 금세 수업을 싫증 내기 일쑤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재는 호명 가에서 일하는 5년 동안 한 번도 도경의 형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미국에 있다는 그 형은 좀처럼 한국에 오는 일이 없었다.
방학이면 도경이 미국에 가서 더러 만나기도 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마저도 도경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게 전부였다.
때때로 도경이 말하는 그 형이 실존 인물이기는 한 걸까 의심도 했다.
도경은 그런 거짓말을 하고도 남을 만큼 엉뚱한 녀석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도경이 말하던 그 「우리 형」이 눈앞에 있었다.
“형! 온다는 말 없었잖아.”
“내가 집에 오는데 너한테 보고해야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놀라서 그렇지.”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도경의 머리를 쓰다듬는 도언의 손길은 사뭇 다정했다.
그는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도경보다 키가 컸다.
깡말라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도경과 달랐다.
두툼하게 벌어진 어깨와 걷어 올린 셔츠 아래 드러난 팔 근육까지, 도경과 나이 차가 여실하게 드러나 보였다.
겉으로만 보아도 도언은 완벽한 어른 남자였다.
도경의 수업이 시작되는 걸 확인하고 이재가 1층으로 내려갔다.계단 앞을 서성이던 고용인이 다가왔다.“사모님이 기다리고 계세요.”“네.”예상했던 일이었다.안서희가 기다리지 않아도 만나자고 청하려 했다.이재는 마음을 다지기 위해 숨을 크게 내쉬었다.이렇게 된 이상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안녕하세요, 사모님.”이재가 온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보지 않는 안서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자, 안서희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어어……. 그래요.”여기는 왜 왔냐고, 당장 나가라는 말 못 들었냐고 패악을 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안서희는 예상과 달리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안서희 건너편에 앉으며 이재는 허리를 세웠다.고개를 들었다.머리로 가렸던 뺨이 드러났지만 그대로 두었다.안서희의 시선이 이재의 뺨에 난 상처에 잠시 머물렀다가 황급히 지나갔다.“사모님.”“한 선생.”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시작했다.안서희가 먼저 말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이재는 주눅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어제 말씀하신 대로, 그만두겠습니다.”“어……?”안서희가 뜻밖이라는 듯 잠시 놀랐다가 아닌 척 눈을 돌렸다.이재는 생각했던 말을 잊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대신 시간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얼마나?”“일주일이면, 될 것 같습니다.”“흐음.”이마를 잔뜩 찡그린 안서희가 잠시 생각하다가 자비라도 베풀 듯 툭 다음 말을 내뱉었다.“그래요 그럼.”고맙다고 고개라도 숙일 줄 알았던지 안서희는 이재를 보았다.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이재는 감정을 삼키며 차분하게 설명하려 노력했다.“도경이가 저한테도 그런 말 한 적은 있습니다. 저도 그냥 하는 말이고 생각했는데 사모님한테 말씀드렸으면 진지하게 생각해…….”짝!눈앞에 번쩍 불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뺨이 후끈거렸다.이재는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바로 잡았다.“이게 건방지게 어디서! 선생님, 선생님 해주니까 진짜 선생인 줄 아네? 뭐? 진지하게 생각해? 너 도경이가 누군지 몰라? 몰라서 그딴 헛소리야?”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통증도 통증이었지만 그보다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아, 알았다. 도언이가 그러라고 시키디?”뜻밖에 나온 그 이름에 이재가 멈칫 그녀를 보았다.까맣게 아이라인을 칠한 안서희가 눈꼬리를 올리며 조소를 머금었다.“도언이 꼬시더니 둘이 작전이라도 짰어?”“사, 사모님.”이재가 떨어지지 않은 입을 열어 겨우 말을 뱉었지만 안서희는 들을 생각이 없는 듯 몰아붙였다.“그런다고 도언이가 너한테 뭐라도 될 줄 알아?”“아뇨, 그런 거…….”“너도 참 순진하다. 몸이나 주고 놀아나는 것도 모르고. 쯧.”안서희가 이재를 보며 경멸을 감추지 않았다.더러운 것을 보는 듯 눈을 잔뜩 찡그리며 닿을까 두려워하는 듯 상체를 뒤로했다.이재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꼴에 자존심은.”안서희가 픽 웃음을 뱉었다.이재는 물고 있는 입술에서 피 맛이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아무리 애를 써도 턱이 덜덜 떨렸다.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그러나 이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안서희가 말을 이었다.“됐고
“아직 맛있는 거 남았는데.”숙소동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재의 손을 놓지 않고 도언이 장난스레 말을 덧붙였다.그가 말한 맛있는 건 초콜릿 따위가 아니라는 건 알기에 이재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들어가야 해요.”도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긴 입맞춤을 나누고도 채워지지 않은 듯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 이재는 홧홧해지는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다.다른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 버리면 어떨까, 그가 하는 말을 믿어버리면 어떨까 기울어져 버리는 마음을 잡기 어려웠다.“데이트 언제 할까요?”“데이트……?”도언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애하기로 했잖아. 그럼 데이트도 해야지.”마치 연애를 약속한 것처럼 말하는 도언에게, 이재는 그런 적 없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이미 잡은 손은 놓고 싶지 않았으며, 그와 나눈 입맞춤은 달았고, 함께 보낸 밤은 깊고 뜨거웠으니까.이런 게 연애가 아니라면 무엇일까.아니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그에게 기울어져 있는 걸까.그 끝이 두렵더라도, 나는 이 마음을 인정해야 하는 걸까.“바쁘신데 괜히 무리하지 마세요.”이재가 그에게 잡힌 손을 비틀어 빼내며 퉁퉁거리듯 말했다.“너는 좀 무리해 주세요.”이재의 말투를 따라 하며 도언이 싱긋 웃었다.놀리는 것 같아 이재가 노려보자 그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내일 전화할게요. 꼭 받아.”“……네.”이재는 돌아섰다.혹시나 그가 다시 손을 잡을까 빠른 걸음으로 숙소동으로 향했다.이번엔 뿌리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숙소
이재의 그 말간 눈이 도언을 건드리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밑바닥 어딘가가 간지러웠다.“그래서, 맛있는 건 가지고 왔어요?”이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다가 그에게 잡힌 손을 들어 보였다.놓을 생각 없이 꽉 쥔 탓에 진득하게 땀이 배어났다.“이거 놔야 주죠.”도언이 이마를 찡그리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재를 보다가 툭 손을 놓았다.뜨겁게 맞잡았던 손이 떨어지며 저녁의 한기가 스며들었다.이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도언에게 내밀었다.조그맣게 포장된 조각이 두 개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었다.“이게 뭐예요?”“초콜릿이요.”도언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애초에 맛있는 걸 운운한 건 이재를 보고 싶어 한 말이었다.뭘 가져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그랬다면 오히려 실없는 말이나 한 번 더 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그녀가 정말 맛있는 걸 가지고 나왔다.“초콜릿 싫어하세요?”이재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손을 내리자 도언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아니, 그럴 리가.”도언이 이재의 손바닥 위에 있던 초콜릿을 하나 집어 들었다.그리고 포장지를 까 입에 넣었다.단단한 초콜릿이 그의 입에서 뭉개지듯 녹기 시작했다.“저녁은 드셨다고 해서요. 그리고 맛있는 게 딱히 없어서…….”“맛있네요.”도언이 그녀의 손에 아직 남아 있는 초콜릿을 들어 포장을 벗겼다.그리고 제 입에 넣는 대신 이번엔 이재의 입에 가까이 댔다.“먹어봐요. 얼마나 맛있는지.”“아뇨, 전…….”이재가 고개를 저었지만 도언은 그녀의 입안으로 초콜릿을 밀어 넣었다.이재는 초
“너니? 네가 도경이 유학 가라고 바람 넣었어?”안서희가 흥분에 겨워 도언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어머니.”“왜! 도경이 나한테서 떼어 내려고 네가 그런 거야?”“하.”마른 웃음이 풀썩 터져버리고 말았다.도경에게 놀란 건 도언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러나 안서희의 히스테리가 그런 식으로 튈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도언이 안서희를 말리는 듯 뒤로 슬쩍 물러서게 하며 고개를 숙였다.“그러게요,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미처 몰랐네요.”도언이 안서희에게만 들리게 중얼댔다.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며 차 회장 앞에 풀썩 엎드려 쓰러졌다.“여보, 도경이가 지금 공부가 힘들어서 그런 거예요. 유학은 무슨 유학이에요. 절대 안 돼요.”거의 읍소하듯 엎드린 안서희가 차 회장에게 매달렸다.차 회장이 지팡이를 들어 짚고 일어섰다.“그만들 가거라.”“여보!”“자네도 일어나. 좀 진정하고. 천천히 얘기하면 될 일을.”차 회장이 발을 내디딜 때 도언이 부축하려 가까이 다가서자 차 회장이 손을 저었다.“됐다. 들어가라.”차 회장이 다이닝 룸 밖으로 나갔다.남은 건 아직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안서희와 식탁에 멍하게 앉은 도경 그리고 도언이었다.그 모습을 관망하던 도언은 쓴웃음 삼켰다.고작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먹는 가족이라니 참 뭣 같다고, 생각했다.* * *[저녁 뭐 먹었어요?]이재는 도언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이 남자는 대체 뭘 먹었는지가 왜 그렇게 궁금한 걸까.아침
“치료는 다 끝나신 거죠?”도언이 자리에 앉으며 묻자 차 회장이 의자에 세워 두었던 지팡이를 들어 보였다.“이거 짚고 다니란다. 누굴 아주 절름발이로 만들어 놨어.”“무리하실까 봐 그러는 거죠.”안서희가 차 회장을 달래듯 야살스럽게 굴며 말을 거들었다.차 회장이 이내 껄껄 웃으며 안서희의 허벅지를 토닥였다.“자네가 힘들까 봐 그러지. 늙은 남편 수발이나 시키게 생겼구먼.”“당신도 참, 그런 말이 어딨어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얼른 회복하셔서 복귀하셔야죠. 다들 회장님만 기다리고 있을 텐데.”도언은 안서희가 그 말을 하며 자신을 흘낏 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도언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아휴, 그래도 회장님이 계신 거랑 같아요? 안 그러니, 도언아?”안서희가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도언을 보았다.도언 역시 그녀의 눈을 빤히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얼른 복귀하셔야죠.”안서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자 도언은 보이지 않게 조소하며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만들었다.왠지 욕지기가 올라올 것 같아서였다.“형 왔어?”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도경이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섰다.도언은 옆에 의자를 밀어주며 대답을 대신했다.“도경이, 공부는 잘하고 있냐?”차 회장의 물음에 도경이 쭈뼛거리며 도언이 내어준 의자에 앉았다.“……네.”“올해는 대학 가야 할 거 아니냐.”도경이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 참에 안서희가 끼어들었다.“그럼요. 올해는 가야죠. 우리 도경이 요즘 얼마나 공부 열심히 하는데요.”“엄마…….”그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도경을 모른 체하며 이재는 손을 내밀었다.“차 키."도경의 시선이 느리게 이재의 손으로 내려왔다. 대답 없이 멍하니 바라보는 도경에게 이재가 재촉했다. "차 키 내놓으라고.""......차 키?"도경이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중얼대며 물끄러미 이재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재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삼키며 다시 말했다."차 키, 어디 있어?" “아아...... 차 키.”뭐가 재밌는지 킥킥대던 도경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주차 해준다고, 가져갔지. 누구더라? 그 형이......
“하아.”택시에서 내린 이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여름의 끝자락, 후텁지근한 공기가 달라붙어 금세 이마에 끈적한 땀이 배었다.“뭔 술을 언제부터 처마셨길래.”이재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고작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그동안 새벽 시간에 무수히 불려 다녔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은 또 처음이었다.늦은 시간이 아니니 오늘 밤은 그래도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었다.차라리 잘 된 건가 싶다가도 대기조처럼 불려다니는 제 처지에 화가 치밀었다. “어쩌겠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지.”그러다 이내 이렇게 체
여자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별채 2층 계단을 오르며 후회했다."다음에, 다음에 해요......"자신이 한 말이 메아리가 되어 끝도 없이 귓가를 울렸다.‘다음이라는 말은 왜 했을까.’그건 무언가 기약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그를 피하고자 했던 의미 없는 말이었다.하지만 이제 와 설명한들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늘 그렇듯 후회는 이미 늦어버렸을 때 하는 것이니까.탁-.여자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순식간에 닥쳐온 어둠에 두려움이 밀려왔다.제 손을 잡은 남자의 희미한 온기마저 빠져나갈까 두려워
이재는 그의 맨몸을 볼 수 없어 눈을 돌렸다.하지만 그의 몸이 이미 눈에 들어온 뒤였다.'이런 게 남자의 몸인가?'이재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도언은 옷을 입고 있을 때도 울룩불룩 탄탄한 몸이라는 것을 짐작할 만 했다.그런데 벗은 몸은 짐작했던 것 이상이었다.단단하게 뻗은 직각 어깨.그 아래 떨어지는 기다란 팔과 알맞게 붙은 근육.적당하게 오른 가슴은 탄탄함을 넘어 매끈한 나머지 혹시 랩이라도 씌워놓은 건 아닌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그리고 음영을 그려 넣은 것처럼 여섯 개로 쫙 갈라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