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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

Author: 유리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4 15:40:03

제4화. 빗속의 도박(2)

채원은 빗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도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서도진 대표님,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제안?”

도진이 핏, 하고 짧은 실소를 터뜨렸다.

“빈털터리에 맨발로 빗속을 헤매는 여자가, JS그룹 대표에게 무슨 제안을 하겠다는 건지 감이 안 잡히는데.”

“당신의 약점을 메워줄 제안입니다.”

그 말에 도진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내 약점이라. 재미있군. 계속해봐.”

“지금 서 회장님의 압박으로 결혼 상대를 찾고 계시죠? 사촌들이 당신의 자리를 넘보고 있고, 이번 달 안으로 확실한 카드를 내밀지 못하면 후계 구도가 흔들릴 테니까요.”

도진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JS 내부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이 여자가 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한 본부장, 선을 넘는군.”

“선을 넘는 게 아니라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채원은 한 걸음 더 차에 밀착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빗물이 차 문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를 이용하세요.”

“뭐?”

“나를 이용해 당신의 후계 구도를 굳히라는 말입니다.”

도진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 앞에는 정재계의 쟁쟁한 집안 영애들이 줄을 서 있어. 굳이 너처럼 몰락해 가는 한성그룹의 혼외자를 선택할 이유가 없는데.”

“그 영애들은 당신의 뒤통수를 칠 수 있지만, 저는 아닙니다. 그들은 집안의 이익을 위해 당신을 감시하겠지만, 저는 오직 당신의 방패가 될 겁니다.”

채원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게다가 그 얌전한 영애들이 당신의 그 거칠고 야심만만한 사촌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구렁이 같은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서 회장님의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며느리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습니다.”

도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채원의 눈빛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정적 속에서 빗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도진은 시계를 슬쩍 보더니, 이내 차 문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철컥-.

“타라. 차 막힌다.”

그 짧은 한마디에 채원은 안도감을 느끼며 조수석이 아닌, 도진의 옆자리인 뒷좌석 문을 열고 탑승했다.

시트가 젖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차 안의 따뜻한 온기가 피부에 닿자마자, 참았던 소름이 쫙 돋았다.

도진은 비서에게 창문을 올리라는 신호를 보낸 뒤, 차를 출발시키라고 명령했다.

부릉-.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좁고 밀폐된 차 안, 채원의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로 인해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도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수건 한 장을 채원에게 던졌다.

“일단 닦아. 내 차 더러워지는 거 싫으니까.”

“감사합니다.”

채원은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털어내고는 다시 도진을 보았다.

“방금 한 제안, 진심입니다. 서 대표님.”

“한채원 본부장. 아니, 이제 본부장이 아니지?”

도진이 냉정한 어조로 팩트를 찔렀다.

“내가 바보로 보이나? 한성그룹에서 방금 500억 원대 횡령 사건이 터졌고, 그 용의자가 너라는 소문이 이미 내 귀에도 들어왔어. 배정아가 널 완벽하게 처내려고 작정한 모양이던데.”

채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소문이 빠르다.

“그거, 조작입니다.”

“조작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넌 지금 아무런 힘도 없는, 쫓겨난 신세라는 거지. 그런 네가 내 방패가 되겠다고? 오히려 내 옷에 똥물이나 튀기지 않으면 다행이겠군.”

도진의 독설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채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인생의 바닥을 찍었다. 더 이상 잃을 체면도 없었다.

“배정아가 저를 횡령범으로 몬 건, 제가 무서워서입니다. 이번 유럽 인수합병을 성공시키면 제가 후계자가 되는 게 확실했으니까요. 제가 무능해서 쫓겨난 게 아니라, 너무 유능해서 아군에게 뒤통수를 맞은 겁니다.”

“유능한 놈은 뒤통수를 맞지 않아.”

“이번엔 제 약혼자였던 강민호가 배신을 했습니다. 제 개인 보안 코드를 넘겼더군요.”

채원의 목소리에 짙은 분노가 섞여 나왔다.

“하지만 전 한성그룹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숨겨진 지분 구조, 배정아의 비자금 세탁 경로, 그리고 한유라가 저지른 사학재단 비리까지. 제가 가진 정보만으로도 한성그룹을 뒤흔들 수 있습니다.”

도진은 담배를 꺼내려다 채원의 상태를 보고는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래서? 나한테 복수를 도와달라?”

“제 복수는 제가 합니다. 당신에게는 오직 ‘서도진의 아내’라는 완벽한 타이틀만 요구합니다. 그 대가로 저는 당신의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완벽한 손주며느리가 되어 드릴 거고, 사촌들이 감히 당신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최전방에서 싸울 겁니다.”

채원은 몸을 돌려 도진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서 대표님,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건 사랑스러운 아내가 아닙니다. 당신의 비즈니스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적들의 목을 함께 벨 수 있는 파트너죠. 안 그렇습니까?”

도진은 가만히 채원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빗물에 지워진 화장 사이로 드러난 맨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떤 보석보다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욕망과 독기.

그것은 도진 자신도 아주 잘 아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제안은 흥미롭군.”

도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난 비즈니스를 할 때 감정에 호소하는 인간을 가장 싫어해. 네가 유능하다는 걸 증명해 봐. 당장 내일 아침까지, 네가 한성그룹을 어떻게 무너뜨릴지, 그리고 내 후계 구도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 구체적인 기획서를 내 눈앞에 가져와.”

“휴대폰도, 노트북도 없습니다. 지갑도요.”

채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비서관.”

도진이 앞좌석을 향해 부르자, 비서가 얼른 태블릿 PC와 스마트폰 공기계를 뒤로 넘겼다.

“내 사저로 간다. 오늘 밤 새워봐야 할 거야. 내일 아침 7시, 내 출근 시간 전까지 네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넌 그 맨발로 다시 길바닥에 버려질 줄 알아.”

도진의 차가운 경고에도 채원의 입가에는 마침내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서 대표님.”

창밖의 빗소리는 더욱 거세졌지만, 차 안의 열기는 두 사람의 위험한 동맹을 예고하듯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한채원은 굳게 다짐했다.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자신을 짓밟은 자들에게 지옥을 선사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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