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6 화

Author: 유리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4 15:40:21

제5화. 증명된 가치, 그리고 내밀어진 계약서(1)

새벽 3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JS 타워 펜트하우스.

게스트룸의 두꺼운 암막 커튼 밖으로는 여전히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방 안을 채우는 것은 오직 태블릿 PC 화면을 두드리는 건조하고도 빠른 마찰음뿐이었다.

탁, 탁, 타닥. 탁.

한채원은 젖은 몸을 씻어내고 펜트하우스 전담 메이드가 내어준 넉넉한 사이즈의 남성용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메이드가 구급상자를 가져와 피투성이가 된 맨발을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었지만, 그녀는 상처를 내려다볼 여유조차 없었다.

'시간이 없어.'

도진이 준 시간은 아침 7시까지. 단 4시간.

그 안에 자신이 왜 JS그룹 후계자의 완벽한 아내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한성그룹을 어떻게 뒤흔들어 서도진의 적들에게 타격을 줄 것인지 완벽한 기획안을 짜내야 했다.

화면을 노려보는 채원의 눈동자에 시퍼런 핏발이 섰다.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명석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성그룹의 숨겨진 지분 구조, 계모 배정아가 관리하는 페이퍼 컴퍼니의 자금 흐름, 그리고 JS그룹 내에서 서도진의 사촌들이 벌이고 있는 권력 암투까지.

지난 수년간 전략기획실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머릿속에 구겨 넣었던 정보들이, 지금 이 순간 생존을 위한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화면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배정아, 네가 날 쫓아내며 완벽하게 이겼다고 생각했겠지.”

채원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서늘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넌 가장 큰 실수를 한 거야. 내 머릿속에 있는 폭탄을 제거하지 않고 날 밖으로 내던졌으니까.”

화면 위로 복잡한 마인드맵과 자금 추적표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피로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배신감과 증오, 그리고 억울함이 지독한 아드레날린이 되어 온몸을 태우고 있었다.

반드시 살아남아, 그들을 찢어발길 것이다.

같은 시각. 펜트하우스 반대편에 위치한 서도진의 개인 서재.

최고급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은 도진은, 한 손에 크리스탈 글라스를 든 채 김 비서가 건넨 태블릿 화면을 무심하게 넘기고 있었다.

글라스 안의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고요한 서재를 울렸다.

“보고해.”

도진의 짧은 지시에, 김 비서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반듯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한성그룹 전략기획실 한채원 본부장. 아니, 자정부로 전 본부장입니다. 조금 전 한성그룹 사내 게시판과 언론사에 보도자료가 뿌려졌습니다. 혐의는 500억 원대 회사 자금 횡령 및 배임입니다.”

“소문이 아니라 진짜였군. 배정아의 작품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김 비서가 리모컨을 조작하자, 서재 벽면의 대형 스크린에 몇 장의 사진과 문서가 떠올랐다.

“오늘 밤, 한성그룹 본가에서 한채원 씨가 쫓겨나기 직전… 그녀의 약혼자였던 강민호와 이복동생 한유라가 불륜 관계였다는 정황이 확인되었습니다.”

도진의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위로 치솟았다.

“약혼자와 이복동생의 불륜이라.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군. 횡령 건은?”

“완벽하게 조작된 덫입니다. 한채원 씨가 유럽 출장을 간 사이, 강민호가 그녀의 개인 보안 토큰을 배정아 측에 넘긴 것으로 파악됩니다. 횡령 자금이 흘러 들어간 페이퍼 컴퍼니의 실소유주는 배정아의 친동생입니다.”

도진은 글라스를 입가로 가져가며 스크린 속 채원의 이력서를 응시했다.

한성그룹 회장의 혼외자.

10살 때 본가로 들어와 온갖 멸시와 핍박을 받으며 자람.

그러나 악착같이 공부해 수석으로 입사, 지난 5년간 한성그룹의 핵심 사업들을 모조리 흑자로 전환시키며 주가를 300% 이상 끌어올린 장본인.

“능력 하나는 괴물 같군요.”

김 비서가 혀를 내두르며 덧붙였다.

“배정아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을 겁니다. 이번 유럽 지사 건까지 성공시키면 회장님이 그녀를 정식 후계자로 지목할 확률이 높았으니까요. 그래서 아예 뿌리까지 뽑아버리려고 작정한 듯합니다.”

도진은 스크린 속, 당당하고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과거의 한채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몇 시간 전, 빗속에서 처참하게 젖어 있던, 그러나 절대 굴복하지 않던 그 독기 어린 눈동자가 겹쳐 보였다.

‘유능한 놈은 뒤통수를 맞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믿었던 가족과 사랑했던 연인이 완벽하게 합심하여 등 뒤에서 칼을 꽂은 것이다.

도진은 픽,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멍청한 것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것도 모자라, 그 거위를 내 발밑에 던져줬군.”

“대표님, 설마 아까 그 여자가 한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김 비서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현재 정계 거물인 박 의원 측에서도 대표님과의 혼담을 적극적으로 추진 중입니다. 굳이 횡령범 낙인이 찍힌, 그것도 몰락한 집안의 혼외자를 들이실 이유가 없습니다. 사촌분들에게 공격당할 빌미만 제공하는 꼴입니다.”

도진은 잔에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뜨겁게 내려갔다.

“박 의원의 딸? 그 멍청하고 온실 속 화초 같은 여자가 내 옆에서 사촌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나? 오히려 내 등에 칼을 꽂지 않으면 다행이지.”

도진의 눈빛이 포식자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건 ‘말 잘 듣는 인형’이 아니야. 나와 함께 진흙탕을 구르며 JS그룹을 장악할 수 있는 ‘미친 사냥개’지. 게다가 한채원 정도의 머리와 독기라면, 내 사촌들의 목줄을 물어뜯기엔 아주 제격일 것 같은데.”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잃을 게 없는 상태입니다. 통제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잃을 게 없는 인간이 가장 통제하기 쉬운 법이야. 내가 그녀의 유일한 구명줄이 되어주면 되니까.”

도진은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머릿속으로 이미 거대한 체스판이 그려지고 있었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 내민 손.

한채원은 분명 무슨 짓을 해서든 그 손을 꽉 잡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짖고, 물어뜯겠지.

“기대되는군. 과연 7시까지 어떤 답안지를 들고 올지.”

도진의 입가에 짙은 흥미가 번졌다.

오랜만에 심장이 기분 좋게 뛰고 있었다.

아침 7시 정각.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159 화

    제100화(최종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해피엔딩(2)채원이 나서서 중재하자, 으르렁거리던 두 남자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입을 닫았다. 서열 최하위 도진과 그 윗선 서 회장마저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이 집안의 진정한 실세는 단연 한채원이었다.채원이 서하를 안아 들고 토닥이자, 서하가 채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금세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채원은 서하를 아기 침대에 눕히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왔다. 서 회장은 아쉬운 듯 침실 문을 한참 쳐다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돌아갔다.거실에는 다시 도진과 채원, 두 사람만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158 화

    그로부터 1년 후. 서울 외곽에 위치한 JS그룹 총수 일가의 대저택.햇살이 쏟아지는 넓은 거실 바닥에는 형형색색의 장난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JS그룹의 차기 회장 서도진이 토끼 귀 모양의 머리띠를 쓴 채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서하야! 이리 와! 아빠한테 오세요!"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1살짜리 딸, 서하. 도진은 서하의 관심을 끌기 위해 딸랑이를 미친 듯이 흔들며 온갖 재롱을 피웠다."꺄아아!"서하가 도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까르르 웃으며 짧은 다리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157 화

    제99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해피엔딩(1)"아아악! 도진 씨! 나 진짜 죽을 것 같아!"새벽 3시, 서울 최고급 VVIP 전용 산부인과 특실. 채원의 고통스러운 비명에 도진은 문자 그대로 이성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의사! 의사 어디 있어! 무통 주사 놔달라니까 왜 안 놔주는 거야! 당장 원장 데려와!"천하의 JS그룹 본부장 서도진의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자신의 손이 부서져라 꽉 쥐고 비명을 지르는 채원의 땀범벅이 된 얼굴을 보며, 도진은 당장이라도 병원을 다 부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본부장님, 이미 무통 주사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156 화

    제98화. 기적 같은 선물,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바쁜 아빠(2)도진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그는 이미 '딸 바보', '아들 바보' 예약 완료 상태였다."도진 씨, 진정해. 이제 겨우 몇 주 됐어. 10달 남았어." "10달? 에이, 금방 가겠지. 벌써부터 이름 고민되는데. 아들이면 나 닮아서 키 크고 잘생겨야 할 텐데, 딸이면 우리 채원 씨 닮아서 인형같이 예뻐야 할 텐데... 아, 벌써부터 대학 어디 보낼지 고민이다."도진은 벌써 20년 뒤의 미래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채원은 창밖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계약 연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155 화

    "생리... 늦어?" "어... 혹시나 해서."도진은 그대로 채원을 안아 들고 안방으로 직행했다."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약국 가서 다 사 올게." "아니, 지금 이 시간에?" "기다려!"도진은 채원이 말릴 틈도 없이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10분 후, 현관문이 다시 열리고 도진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편의점에서 쓸어 담아온 듯한 임신 테스트기가 종류별로 다섯 개나 들려 있었다."이거... 이거 다 해봐."도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채원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테스트기 상자들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154 화

    제97화. 기적 같은 선물,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바쁜 아빠(1)결혼식은 끝났지만, 두 사람의 진짜 삶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대한민국 정재계를 쥐락펴락하는 JS그룹과 한성그룹의 전략적 제휴는 그야말로 '태풍의 눈'이었다. 주가 총액은 연일 상한가를 기록했고, 두 사람이 발표하는 신사업 프로젝트마다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하지만 대중에게 비치는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두 사람의 신혼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달달했다."한 회장님, 결재 서류 확인하시죠." "벌써 다 했어요. 도진 씨, 회의는 어떻게 됐어?"채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42 화

    “아프면 말해. 멈추진 않겠지만, 살살은 해볼 테니까.”“……나쁜 놈.”채원이 눈물이 고인 채로 픽 웃으며 도진의 목을 끌어안았다.“안 멈춰도 되니까…… 그냥 꽉 안아줘요.”그녀의 도발적이고 진심 어린 한마디가 도진의 남은 이성을 완벽하게 끊어버렸다.“하아…… 미치겠군, 진짜.”도진이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채원의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흐앗……!!”순식간에 밀려드는 낯설고도 거대한 부피감에 채원의 허리가 붕 튀어 올랐다. 처음 겪어보는 고통과 아찔함에 그녀의 열 손가락이 매트리스 시트를 찢어질 듯 꽉 움켜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35 화

    유라의 조롱은 정확히 채원의 약점을 찌르고 있었다.배정아가 곁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채원아. 넌 죽었다 깨어나도 내 손바닥 안이야. 네 애미가 흘린 피눈물, 오늘 네가 똑같이 흘리게 해주마. 서도진이라는 방패가 언제까지 널 지켜줄 수 있을지, 오늘 밤 경매장에서 똑똑히 확인해 보렴.]뚜- 뚜- 뚜-.일방적으로 끊긴 전화기 너머로 기계음만이 공허하게 울렸다.채원은 전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눈앞이 새하얘질 정도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심장이 찢겨 나가는 것 같은 고통과 모멸감.어제 파티장에서 자신이 그들을 짓눌렀다고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34 화

    제21화. 폭풍 전야의 아침, 그리고 발작하는 독사(2)[회장님이 어제 파티에서 아가씨가 차고 오신 블루 다이아몬드를 보고 완전히 꼭지가 돌았습니다. 그래서 아가씨 멘탈을 흔들어놓으려고, 사모님 유품을 경매에 올려버린 겁니다. 심지어 그 브로치를…… 한유라 상무가 낙찰받아서 내일 신제품 발표회에 차고 나가게 하겠다고…….]“이 미친년이……!”채원의 입에서 저절로 험악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쥐고 있던 마우스가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눈물의 여왕. 그 사파이어 브로치는 단순한 보석이 아니었다. 채원의 친어머니가 생전에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32 화

    제20화. 폭풍 전야의 아침, 그리고 발작하는 독사(1)아침 햇살이 펜트하우스의 통유리창을 뚫고 쏟아져 내렸다.“흐읍……!”침대 위에서 번쩍 눈을 뜬 채원이 거친 숨을 들이켰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악몽을 꾼 것은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 터였다.채원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낯설었다. 어젯밤 서도진이 남긴 폭력적인 키스의 흔적. 여전히 입술은 퉁퉁 부어올라 미세한 열감을 내뿜고 있었고, 점막은 얼얼할 정도로 쓰라렸다.‘……미쳤지. 단단히 미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