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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

last update Veröffentlichungsdatum: 24.06.2026 15:39:54

제3화. 빗속의 도박(1)

차가운 빗방울이 온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청담동의 외진 길가. 한채원은 젖은 생쥐 꼴로 터덜터덜 걸었다.

얇은 블라우스는 이미 살죽에 들러붙어 체온을 사정없이 빼앗아 갔고, 치마 밑단에서는 연신 더러운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구두조차 빼앗긴 맨발은 이미 감각이 마비된 지 오래였다. 아스팔트 바닥에 긁혀 피가 흐르는지도 몰랐다.

“하…….”

입을 열 때마다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휴대폰도, 지갑도, 심지어 입고 있던 코트마저 배정아의 손에 빼앗겼다.

지금 당장 공중전화가 보인다고 해도 누구에게 전화를 걸 수 있을까.

친한 친구들?

그들은 모두 한성그룹의 권력 아래에 있는 이들이었다. 내일 아침, 한채원이 500억 원을 횡령하고 쫓겨났다는 뉴스가 도배되면 그들 중 누구도 제 전화를 받지 않을 터였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채원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배정아와 한유라의 뜻대로 되는 것이다. 친어머니의 묘소는 파헤쳐질 것이고, 자신은 평생 횡령범이라는 낙인을 찍힌 채 밑바닥을 전전하게 되겠지.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한강에 뛰어드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채원은 죽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죽어야 할 인간들은 자신이 아니라, 제 침대를 더럽힌 강민호와 제 인생을 통째로 훔쳐 간 한유라, 그리고 배정아였으니까.

‘방법을 찾아야 해. 내가 가진 카드가 뭐가 있지?’

걸음을 옮기며 채원은 머리를 미친 듯이 굴렸다.

돈도 없고, 백도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난 10년간 한성그룹의 핵심부에서 일하며 쌓아온 지식과 비즈니스 감각이 있었다.

그리고 상류층의 은밀한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채원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서도진.’

국내 재계 서열 1위인 JS그룹의 핵심, 그리고 냉혈한이라고 소문난 젊은 대표.

채원은 지난달 유럽 지사 인수합병 건을 추진하면서 비공식 라인을 통해 JS그룹 내부의 극비 정보를 접한 적이 있었다.

JS그룹의 창업주인 서 회장이 최근 지병이 악화되면서 후계 구도를 확실히 하라는 압박을 넣고 있다는 정보였다.

조건은 단 하나.

올해 안으로 결혼을 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것.

서도진에게는 야심 가득한 사촌 형제들이 줄을 서서 그의 실각을 노리고 있었다. 만약 그가 기한 내에 결혼하지 못하거나, 후계자로서의 흠집이 잡힌다면 JS그룹의 왕좌는 그의 사촌들에게 넘어갈 판국이었다.

‘서도진도 지금 코너에 몰려 있어.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당장 쓸 수 있는 확실한 패가 필요할 거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채원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미친 짓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한채원에게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지옥 밑바닥에서 동아줄을 잡으려면, 그 줄이 썩은 줄이든 불타는 줄이든 일단 손을 뻗어야 했다.

쿠우우웅-.

멀리서 고급 대형 세단의 엔진음이 들려왔다.

왕복 2차선의 어두운 도로, 빗줄기를 뚫고 다가오는 차량의 전조등이 채원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차량 번호판의 앞자리. 그리고 독특한 엠블럼.

유럽 지사 미팅 때 얼핏 보았던 서도진의 개인 차량이 분명했다. 그가 청담동의 한 프라이빗 바에서 정계 인사들과 미팅을 가진다는 첩보를 들었던 게 떠올랐다.

“오 마이 갓…….”

채원은 헛웃음을 삼켰다. 하늘이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키이이이익-!!

빗길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요한 도로를 뒤흔들었다.

블랙 세단의 거대한 차체가 채원의 코앞, 불과 몇 센티미터 거리를 두고 거칠게 멈춰 섰다. 헤드라이트의 강한 불빛이 빗물에 젖은 채원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차 안에서는 급정거의 충격으로 거친 대화가 오가는 듯했다.

곧이어 운전석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경호원 겸 비서가 우산을 받쳐 들며 허둥지둥 내렸다.

“이봐요! 미쳤습니까?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비서의 날카로운 고함이 빗소리에 묻혀 들려왔다.

채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비서가 아니라, 짙게 틴팅된 세단의 뒷좌석 유리창을 향해 있었다.

“비켜요! 당장 비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비서가 채원의 팔을 붙잡으려 다가왔다.

채원은 비서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그대로 뒷좌석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젖은 손으로 창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똑, 똑, 똑!

“서도진 대표님! 안에 계신 거 압니다! 잠시 문 좀 열어주십시오!”

“이 여자가 진짜 왜 이래? 김 형사님, 이 여자 좀 떼어내요!”

운전석에 있던 다른 경호원까지 내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지이잉-.

무거우면서도 매끄러운 기계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뒷좌석의 유리창이 천천히 내려갔다.

어두운 차 내부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완벽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칼,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동자.

JS그룹 대표, 서도진이었다.

도진은 젖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채원을 향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채원의 흐트러진 머리칼, 얇은 블라우스, 그리고 피가 흐르는 맨발에 차례로 머물렀다.

“한성그룹의 한채원 본부장 맞군.”

도진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빗소리마저 얼려버릴 것 같은 서늘함이었다.

“나를 압니까?”

채원은 이를 부딪치며 물었다. 추위 때문에 턱이 덜덜 떨렸지만, 목소리만큼은 단단하게 내려고 애썼다.

“모르면 바보지. 유럽 지사 건으로 업계가 시끄럽던데. 그런데 그 대단하신 본부장님이 왜 이 밤중에 내 차 앞을 가로막고 로드킬을 당하려 하는 거지?”

도진의 말투에는 은근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

비서가 우산을 도진의 창문 쪽으로 받쳐 들며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이 여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저로 가는 길에 이런 소란이 생겨 죄송합니다. 당장 치우겠습니다.”

“잠깐.”

도진이 손을 들어 비서를 제지했다. 그의 흥미로운 시선이 채원의 눈에 머물렀다.

보통 이 정도 상황에 처한 여자라면 겁을 먹거나 울부짖기 마련인데, 채원의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말해봐. 내 차를 부수기 전에 무슨 용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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