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에 찬 기운이 깃들고, 아침 서리가 온 땅에 가득했다.
며칠 전 물에 빠져 혼수상태에 빠졌던 소씨 가문의 넷째 소은이 방금 전 깨어났다.
이른 아침인데도 소국공부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소은 아씨를 물에 빠뜨린 놈이 잡혔다더군. 어제 소 대감께서 한밤중까지 심문하시고 살갗이 터지도록 매질하셨는데도 배후는 알아내지 못하셨대.”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이지. 소은 아씨께 천운이 따라 살아남으셨으니 망정이지… 그런 악독한 놈은 벌을 받아 마땅해!”
문밖에서는 말들이 분분하였으나, 방 안에 있던 소은은 마음이 복잡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뻤다.
그녀는 육 년 전으로 돌아왔다.
강준과 혼약을 맺기 전으로, 냉대와 외면을 견디지 않아도 되던 때로.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삶이 대체로 순탄했다 하나,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일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기회를 얻은 것이다.
"몸이 아직 허약한데, 어찌 겉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앉아 있는 것이냐?"
그때, 약을 들고 들어선 장명희가 소은이 내의 차림으로 침상에 기대앉아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장명희는 약을 내려놓고 곁에 걸린 흰 모피 외투를 집어 들었다. 몸을 굽혀 딸의 어깨에 걸쳐주려는데, 소은이 두 팔로 어머니를 껴안았다.
바로 그 순간, 소은은 그녀의 품에 안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아… 어머니."
그녀는 전생에 미련이 없었다.
오직 하나, 자신이 죽은 뒤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겪었을 어머니께서 또다시 딸을 잃고 비통해하실 일만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장명희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딸을 더욱 꼭 끌어안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누가 감히 너를 해쳤는지, 이 어미가 반드시 밝혀낼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거라, 소은아."
순간 소은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전생에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범인을 찾아냈었다.
범인은 아버지의 첩 우씨였다. 그러나 유일한 증인은 우씨에게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는 우씨가 또다시 소은을 해칠 것을 염려하여 증거가 부족한데도 우씨를 처단하였다.
어머니의 친정이 막강한 권세를 지닌 탓에, 소국공부도 더는 문제를 키우지 못하고 무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가 가혹하다고 원망하였고, 그로 인해 부부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단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으며, 다시 자식을 두지도 못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소은의 유일한 친 오라버니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의 몸과 마음은 점점 병들어 갔다.
딸을 마주할 적에나 잠깐 옅은 웃음을 보일 뿐, 대개는 냉랭하고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오라버니가 목숨 바쳐 쟁취한 공적은 결국 큰집 사람들에게 돌아가 버렸다.
붙잡힌 그 사내는 우씨가 소국공부에 들어오기 전 정을 나누던 자였다. 그래서 끝내 우씨를 지목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소은이 알게 된 것은 강준과 혼인한 뒤였다.
다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라, 진실을 알았다 한들, 부모님의 관계를 회복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이번 생에서는 어머니가 다시 나락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를 뵙고 싶습니다."
소은이 고개를 들어 장명희를 바라보았다.
"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 급히 돌아오는 중이시다. 곧 도착할 것이니, 우선 약부터 마시거라."
장명희는 다정하게 달래며 약을 건넸고, 소은은 말없이 그릇을 받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들이켰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 소철주가 도착한 것이다.
마흔쯤 된 그는 키가 훤칠했다.
조정에서 급히 돌아와 관복 차림이라 위엄이 느껴졌지만, 눈매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소은아."
"아버지."
소은이 그를 향해 미소 지었지만, 눈가가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많이 힘들었구나."
소철주는 소은의 야윈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칼을 맞아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강인한 사내였으나, 이번만큼은 딸 때문에 몇 번이나 눈물을 삼켜야 했다.
“이번에는 선왕부의 세자와 진씨 집안 둘째 공자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들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소철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딸을 잃을 뻔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였다.
소은은 ‘강준’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전생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가슴 한쪽이 쿡쿡 저려왔다.
강준은 그녀를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지아비라 여겼다.
그러나 진씨 가문의 둘째라는 낯선 이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에 소은은 오래 앓았다. 강준과 진씨 공자가 구해주었다는 말만 들었을 뿐, 나중에 감사 인사를 하러 갔을 때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진씨 집안 둘째 공자님이요?”
"진명우는 이달 초에야 경성으로 돌아왔으니, 네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몸이 좀 더 나아지면 어머니와 함께 선왕부와 진부에 직접 가서 감사를 표하도록 하거라."
소은은 강준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으나, 예를 다하는 일이니 마냥 거부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민 사람은 심문해보니 어떻던가요?”
“입이 꽤 무겁더구나. 하지만 이 아비에게도 입을 열게 할 방법은 있다.”
그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
소은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녀의 주저하는 모습에 소철주가 말했다.
"내 앞에서는 굳이 숨길 필요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솔직히 말해 보거라."
소은은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아버지, 그 사람은 우씨의 정인이에요. 혹시 우씨가 저를 해치려 한 게 아닐까요?”
소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절대 이번 일에 어머니가 휘말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더군다나 우씨와 그 사내가 사통한 것은 사실이니 우씨가 사주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우씨가 무사히 빠져나갈 가능성은 없었다.
소철주의 얼굴빛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증거가 있는 것이냐?"
“그 사람이 우씨와 부둥켜안고 있는 걸 보았어요.”
전생에서 소은은 그 장면을 보고도 그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사내가 ‘연아’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을 뿐이었지만 그녀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한 번 더 살아보니,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연아’는 우씨가 소국공부에 들어오기 전에 불렸던 이름이었다.
우씨는 정을 나누는 현장을 소은에게 들켰다고 생각해 그녀를 해치려 한 것이었다.
소철주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사통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딸을 죽이려 했다니!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씨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명희가 코웃음을 쳤다.
"참으로 어진 자들을 곁에 두셨군요."
우씨는 어머니의 강요로 들인 여인이었다.
소철주는 반박하지 못했고 그저 묵묵히 받아들였다.
결국 소철주는 한숨을 내쉬며 다짐했다.
"이번 일은 내가 반드시 확실하게 해결할 것이니, 당신은 걱정하지 마시오."
*
결정적인 실마리가 잡혔으니, 조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소철주의 심복은 남쪽에 있는 우씨의 고향에 내려가, 우씨와 그 사내가어린 시절부터 서로 좋아하던 사이임을 알아내었다. 훗날 우씨는 부모의 손에 팔려 나갔으나, 고금란이 그녀를 구해 곁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였고, 이후 영리한 그녀를 자신의 아들인 소철주의 첩으로 들인 것이었다.
소철주가 우씨를 빌미로 협박하자, 사내는 소철주가 이미 실정을 아는 줄로 여기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진상은 소은의 말한 것과 같았다.
우씨는 사통한 것이 드러날까 두려워 소은을 죽여 입을 막으려 한 것이다.
소철주는 자신의 곁에 이토록 독한 여인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우씨는 아직 소은의 몸이 온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장명희에게 즉시 처단되었다.
그녀가 고금란의 사람이었고 한없는 편애를 받아 왔으나, 이번만큼은 고금란 역시 이를 막지 않았다.
장명희는 딸 앞에서 그 일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씨를 입에 올리지도 않고 태연한 어머니를 보며 소은은 그 여인의 최후를 짐작했다.
장명희는 절대 억울함을 참고 넘어갈 성격이 아니었다.
찬 바람을 맞은 소은은 감기까지 걸리는 바람에 조용히 요양할 수밖에 없었다.
친오라버니 소혁은 아직 변방에 있었다. 큰집 식구들과 어머니의 친정 식구들이 몇 번 찾아온 것 말고는 다른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그 덕에 오히려 그녀는 조용한 시간을 보내며 푹 쉴 수 있었다.
그렇게 반 달이 지나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며칠 뒤면 네 잔칫날인데, 그때까지 볼살이 좀 오르려나 모르겠구나.”
장명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머님께서는 지금 저더러 못생겼다고 하시는 겁니까?"
"내 딸이 어찌 못생겼겠느냐?"
그녀는 한때 경성에서도 유명한 미인이었고 소철주 또한 젊은 시절 풍류를 아는 미남으로 둘에게서 태어난 소은 역시 당연히 미모가 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소은은 계례를 앞두고도 이제야 몸이 자라기 시작하여, 여인들 중에서도 성장이 늦은 편이었다.
게다가 몸마저 야위니 더욱 작아 보여, 장명희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음에 두었던 몇몇 가문의 사내들은 이미 정혼자까지 생겨버렸다.
선왕부의 강준과 강민은 여러 집안이 눈독을 들이는 데다 경국공부까지 나섰다. 장명희는 그런 다툼에 끼어들 생각이 없어 처음부터 후보로 삼지 않았다.
위씨 가문 작은 아들은 나쁘지 않으나 위 마님의 기가 너무 강했기에 장명희는 사랑스러운 딸을 그런 집에 시집보낼 수 없었다.
진씨 집안은 형편이 조금 기울어, 귀한 딸을 시집보내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냥 넘기려던 장명희의 머릿속에 그날 소은을 구해준 둘째 공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들리는 말로는 학문도 뛰어나고 용모도 반듯했다. 마음가짐엔 명문가 자제 특유의 거만함도 없었다. 다정하고 예의 바르다 하니 아마도 함께 지내기 편한 이일 것이다.
장명희는 마음속으로 진명우를 점찍어 두었으나, 소은에게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먼저 딸을 대신하여 사람됨을 살펴보고, 그 뒤에 알릴지 말지를 정할 생각이었다. 만약 마땅치 않으면 이 일은 조용히 덮어 둘 생각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어느덧 소국공부에서 연회를 여는 날이 다가왔다.
죽을 고비를 넘긴 소은을 위해 고금란이 일부러 흥겨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는 소은이 물에 빠진 뒤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자리였다.
비록 예전보다 살이 빠져 앙상했지만 피부는 백옥처럼 맑고 고왔고 키는 늘씬하고 이목구비는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웃을 때면 두 눈이 맑은 샘물처럼 깨끗했다. 연둣빛 무늬가 있는 치마가 유난히 잘 어울려, 막 피어나려는 연꽃처럼 화사했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소은은 할머니와 어머니와 함께 손님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야 또래 아씨들이 모인 자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경성 여러 집안의 아씨들은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지녀, 온갖 꽃이 한꺼번에 피어난 듯했다.
"요즘 들어 미모에 아주 물이 올랐군. 구혼자들 때문에 소국공부 문턱이 닳겠어."
그녀가 자리에 앉자, 위씨 집안 셋째 아씨 위경화가 농을 던졌다.
그녀는 소은의 큰 오라버니, 소준과 혼약이 정해진 사이로, 소은과도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심심하면 꼭 나를 놀리더라.”
위경화는 그녀 곁으로 몸을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강준이 너를 구해줬을 때 느낌이 어땠어? 마음이 더 기운 거 아니야?"
잠시 멈칫하던 소은은 이내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강준을 마음에 둔 것을 오직 위경화만 알고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전생에서 강준이 그녀를 구해줬을 때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마음속으로 오래도록 기뻐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이 무겁고 복잡하기만 하였다.
소은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은 한 여인에게로 향했다.
눈웃음이 온화하고 단아한 그 여인은 경국공부의 둘째 아씨 심지연, 강준이 마음에 둔 사람이었다.
경성에서 이름난 재녀로 용모도 뛰어났고, 육예 어느 하나 못하는 것이 없었다.
소은 역시 그 여인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연회는 그리 엄격한 편은 아니었지만 남녀는 늘 따로 앉는 것이 예법이었다.
소은은 무의식중에 사내들이 앉은 쪽을 바라보았고 단번에 너무도 익숙한 한 사람을 찾아냈다.
삼 년 동안 그녀의 지아비였던 강준이었다.
그와 삼 년을 함께했고, 같은 이불을 덮고 수없이 많은 밤을 보냈었다.
지금의 강준은 갓 약관례를 마친 터라 훗날보다 체격이 다소 덜 잡힌 상태였지만 소은은 단번에 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검은 비단 도포를 입은 강준은 오똑한 콧대와 잘생긴 이목구비에 강한 인상이 더해져, 서늘하면서도 고귀한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무심하게 여인들 쪽을 향하는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단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존재하는 듯, 그 눈은 오직 심지연만 담고 있었다.
전생의 이 무렵에는 강준이 심지연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심지연의 바로 뒤에 앉아 있었던 소은은 강준이 자신을 바라보는 줄로만 믿고 있었다.
지금 소은은 마음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아직 강준의 부인였던 신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터라, 제 남편이 외도를 한 것만 같았다.
소은은 또다시 그들의 첫날 밤을 떠올렸다.
그날 강준은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다. 혼인한 지 석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
정사를 나눈 뒤 그녀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낭군이라 불렀으나,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강준이 너를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위경화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소은은 마치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생에서의 온갖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마음이 얼어붙는 듯했지만, 그녀는 애써 미소 지으며 나지막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화 언니, 선왕부에 시집가고 싶은 사람은 많아도 나는 아니야. 이제 그런 일로 놀리지 마.”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는 혼인하겠다고 제 처지를 낮추며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널리고 깔린 것이 사내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