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Penulis: 차유자
박미숙은 멍하게 있는 딸을 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착한 우리 딸, 앞으로 이 어미 없이도 스스로 잘 돌보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단다.”

말을 마친 박미숙은 지친 듯 눈을 감았고, 손도 힘없이 축 늘어졌다.

윤지후가 맥을 짚더니 낮게 읊조렸다.

“애도를 표합니다.”

강소연은 멍하니 침상 머리에 앉아 있었다. 눈은 텅 비어 빛을 잃었고, 입술은 가늘게 떨렸다. 무언가 말하려 해도 목구멍에 턱 걸려 나오지 않았다.

뒤에서는 하인들과 시녀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어머니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며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뜬 뒤였다.

강소연은 그제야 자신이 침상에 누워있는 것을 깨달았다. 두 손은 흰 헝겊으로 여러 겹 감겨 있었고, 약이 발랐는지 예전보다는 덜 아팠다.

그녀가 일어난 것을 본 조 어멈이 다가와 설명했다.

“윤 대인이 어젯밤 약을 발라주고 돌아가셨어요. 손은 절대 물에 닿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아가씨가 많이 피곤하신 듯하여, 저희끼리 별실로 옮겨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드렸습니다. 출가 전에 지어두셨던 옷이라 좀 낡았을 겁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아요.”

강소연이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

“어머니는요?”

“부인께서는 이미 관에 모셔졌고, 지금 영당에 계십니다. 아가씨께서 장례를 진행하시면 됩니다.”

조 어멈은 밤새 울었는지 두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강소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아꼈다.

간단히 세수를 마친 그녀는 어머니를 위해 준비했던 생신 선물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하여 아침도 거른 채, 서둘러 왕부로 돌아갔다.

*

정원을 지나칠 무렵, 마침 등지고 서 있는 유승헌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곁에는 흰옷을 입은 여인이 있었고, 둘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승헌은 이따금 고개를 돌려 그 여인을 바라보며, 평소엔 보기 드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강소연은 지금 그의 풍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유승헌이 그녀를 발견하고 싸늘하게 물었다.

“어젯밤 어디에 있었지?”

잠시 멈칫한 강소연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뒤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유승헌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억지로 돌려세웠다.

“대답해.”

그녀의 손에 감긴 헝겊에 시선이 닿은 그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하지만 목소리는 늘 그렇듯 거만했다.

“어찌 된 일이냐?”

강소연이 그의 손을 뿌리치며 냉소적으로 웃었다.

“작은 상처일 뿐이니, 왕야께서는 신경 쓰지 마세요.”

유승헌이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는 찰나, 뒤에 서 있던 여인이 앞으로 나와 강소연에게 큰절을 올렸다.

“왕비마마께 문안을 올립니다.”

‘이 목소리는?’

깜짝 놀란 강소연은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복순이잖아!’

복순은 어릴 적 그녀를 곁에서 모시던 시녀로, 궁에 들어가기 직전 갑자기 사라졌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유승헌이 복순을 일으켜 세우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꾸짖는 말투였지만 유난히 부드러웠다.

“왕부에서 굳이 절할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이렇게 다정한 말투를 강소연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복순의 두 눈이 붉어졌고 곧 울음이 터질 듯했다.

“왕비마마를 너무 오랜만에 뵈어 감격스러워 그런 것이니, 왕야께서는 노여워 마세요.”

“복순아, 그동안 어디에 있었니?”

강소연이 의아하게 물었다.

“그녀의 이름을 수련으로 고쳐 주었다. 더는 네 시녀가 아니다.”

강소연이 괴롭힐까 걱정이라도 된 듯, 유승헌이 복순을 품에 감싸안았다.

“수련이 몸이 불편해 수향리에서 궁까지, 그 먼 길을 갈 수 없을 듯하여 왕부로 데려왔다. 그러니 괜한 트집 잡지 말거라.”

‘수향리? 그동안 철저히 숨겼던 마음속 정인이 바로 복순이었구나!’

어릴 적부터 강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녀와 복순이 닮았다고 자주 말했었다. 주인과 시녀가 저렇게 닮을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지금 보니, 성인이 된 복순은 손짓과 표정에서도 강소연을 많이 닮았다. 오히려 더 애처롭게 보였다.

‘왕야께서 내게 뜻도 없으면서 잠자리에서는 자꾸만 나를 찾았던 것이 저것 때문이었구나.’

알고 보니 그녀를 통해 다른 여인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강소연은 자신이 한낱 우스운 존재로 여겨졌지만,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예.”

그녀는 대충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뒤에서 수련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유승헌이 낮은 목소리로 달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막지 않았다.

처소로 돌아온 강소연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한 시녀들은 여러 번 말을 꺼내려다가도 끝내 묻지 못했다.

그녀는 시녀를 불러 깨끗한 흰옷을 갈아입혀 달라고 했다. 그리고 옷장에서 자주색 비단옷 한 벌을 꺼냈다. 그것은 그녀가 손수 어머니를 위해 지은 것이었다. 어머니 생신에 드리려고 준비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영영 드릴 수 없게 되었다.

“왕비마마? 왕비마마?”

강소연은 생각에 잠겨, 수련이 다가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몇 번의 부름 끝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고, 급히 옷을 접어 한쪽에 넣어두었다.

강소연은 고개를 들어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수련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수련이 뒤에 있는 시녀의 손에서 찻잔을 건네받았다.

“왕비마마께 차를 올립니다.”

“무슨 뜻으로 이 차를 올리는 거니?”

강소연이 눈썹을 찌푸렸다.

“왕야께서 너에게 명분이라도 준 거니?”

“아니요.”

수련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스쳤다.

“왕야께서는 첩으로 삼기엔 제가 아깝다고 하셨어요. 아직 명분은 정해지지 않았어요.”

강소연이 손을 들어 거절했다.

“명분도 없는 차를 마실 수 없어. 그냥 왕야께 가는 게 낫겠다.”

수련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왕비마마, 저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명분은 왕야께서 안 주시는 건데, 내가 널 인정한다고 뭐가 달라지니? 내가 왕야께 너를 첩으로 삼으라고 할 순 없지 않겠니?”

웃음을 터뜨린 강소연의 두 눈에 수련의 목에 걸린 옥패가 들어왔다.

“내 옥패를, 어떻게 네가 가지고 있는 거야?”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

수련은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 옥패는 왕야를 구해 드렸을 때, 왕야께서 저에게 주신 정표예요.”

‘정표? 그래, 그렇단 말이지.’

강소연이 이를 악물며 냉소를 머금었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십이 년 전, 그녀는 시녀로 변장하고 성 밖으로 나갔다가, 자객에게 쫓기고 있던 소년을 마주쳤다. 그녀는 그 소년 대신 칼을 맞았고, 강씨 가문의 호위무사가 출동해 두 사람을 구했다.

소년은 그녀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옥패를 건넸고, 그날 이후로 둘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가 궁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 옥패는 곁에서 그녀를 모시던 시녀 복순과 함께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제 보니 그녀가 구한 사람은 유승헌이었고, 복순이 그 옥패를 훔쳐 그녀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었다.

긴 세월 동안, 모두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수련이 미소를 띠며 몸을 굽혀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모든 것은, 이 옥패처럼, 결국 내 손에 오게 될 거예요.”

말을 마친 수련이 손을 떨며 찻잔을 옆에 놓여 있던 옷 위로 쏟았다.

강소연은 어머니를 위해 마련한 옷이 더러운 물 자국으로 넓게 번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분노가 마침내 이성의 끈을 끊어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수련의 뺨을 때리기 위해 손을 들었다.

“무슨 짓이냐?”

갑자기 뛰어 들어온 유승헌이 그녀의 손목을 막아서더니, 그녀를 밀쳐내고 수련을 품 안으로 감싸안았다.

미처 피하지 못한 강소연은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단단히 평상 위로 넘어졌다.

두 손의 상처가 찢어지며 흰 헝겊 사이로 핏줄기가 스며들었다. 뼛속까지 시리게 아팠다.

“왕야, 왕비께 차를 올리려다가 제가 실수로 엎질렀어요. 저같이 쓸모없는 것은 왕비마마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이곳에서 나가는 게 낫겠어요.”

수련이 유승헌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작게 흐느꼈다.

유승헌은 차갑게 강소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작 옷 한 벌 가지고, 이 왕부를 네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여기지 마라.”

“옷 한 벌일 뿐이라니요.”

헛웃음을 터진 강소연의 눈에서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제 모든 것이, 왕야 눈에는 그저 보잘것없는 건가요?”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그 옷의 자수가 그녀가 직접 놓은 것임을 알아봤을 것이다.

조금만 알아보려 했더라면, 그녀가 어젯밤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튿날 돌아온 그녀에게 어디에 있었는지를 따져 물을 뿐이었다.

결국, 그녀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떼쓰지 마라.”

유승헌이 냉담하게 내뱉었다.

“왕야께서 어젯밤 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물으셨지요?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소연이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 수향리에서 수련의 곁을 지키실 때, 저는 궁문 앞에 무릎을 꿇고 태의 한 명을 청할 수 없어, 어머니가 눈을 감으시는 것을 그대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시 멈칫한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왕야, 그만 화리해요.”

Lanjutkan membaca buku ini secara gratis
Pindai kode untuk mengunduh Aplikasi

Bab terbaru

  • 왕비 자리, 이제 관심 없어요   제30화

    “여기가… 어디예요?”강소연이 발길을 돌리려 했다.그러나 유문인은 말릴 틈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안으로 걸어갔다. 물러설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문턱을 넘는 순간, 강소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얼굴로 몰려드는 듯했다.아래 대청 한가운데 무대 위에서, 하얀 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검무를 추고 있었다.검술이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옷고름을 제대로 매지 않아, 동작을 할 때마다 가슴과 배의 근육이 은근히 드러날 뿐이었다. 반쯤 드러나고 반쯤 가려진 그 은근한 모습이, 오히려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예전에 경성에 귀족 부인들의 소일거리를 위한 기루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직접 발을 들인 적은 없었다. 더구나 뼛속까지 보수적인 그녀는, 남색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당장 도망치고 싶었다.“어머, 공주마마 아니신가요?”가늘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남자가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다가와, 교태를 부리듯 말을 건넸다.“오랜만에 오셨네요.”남자는 강소연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이 아가씨는 처음 뵙는데, 어느 가문 따님인지요?”유문인이 그를 흘겨보았다.“쓸데없는 거 그만 묻고 길이나 안내해라.”강소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었을 것이다.남자가 두 사람을 위층 정중앙의 아담한 방으로 안내했다. 참으로 좋은 자리였다. 생각보다 공간은 넓었고, 아래에서 하는 공연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예쁜 소년 몇이 술과 다과를 들고 들어와, 자연스럽게 유문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술을 따르고 포도를 까 주었다.그중 연두색 얇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강소연 앞에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술잔을 그녀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겨우 열다섯 여섯쯤 되어 보인 소년의 큰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하여, 여느 여인보다 더 애처로웠다.강소연은 남자도 이렇게 교태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 왕비 자리, 이제 관심 없어요   제29화

    강소연이 화제를 돌렸다.“그런데 왕야께서는 제 그림을 보신 적이 없으시니, 제가 수묵화를 그리지 않는 것을 모르신 모양입니다. 서예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이 벼루는 아마 쓸 일이 없을 듯합니다.”유승헌은 무어라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들썩였다.강소연이 말을 이었다.“쓸데없는 벼루에, 시기를 놓친 선물까지. 왕야께서는 저를 고작 이런 것밖에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시는 모양이군요.”수척해진 그녀는 한 줄기 바람에도 쓰러질 듯 가냘팠지만, 등을 꼿꼿이 세우고,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유승헌은 무어라 반박하려 했으나, 어디서부터 입을 떼야 할지 알 수 없었다.“왕야께서 이리 주셨으니, 물건은 쓸모 있게 써야겠지요.”강소연이 상자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실로 걸어갔다.“왕야께서 주신 귀한 벼루보다는 제가 가지고 있던 벼루를 쓰는 편이 낫겠습니다.”그녀는 종이를 창가 아래의 탁자 위에 펼치고, 이화에게 먹을 갈게 한 뒤 붓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두 사람의 연분이 여기서 다하였으니, 화리하고자 이 글을 씁니다. 삼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였으나, 부부 사이 어긋남이 쌓여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고심 끝에, 서로 얽매여 고생하기보다는 이쯤에서 놓아주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라 여깁니다. 이 글을 증거로 남기니, 이후로는 서로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손에 힘을 줄 때마다 살을 에는 듯 아팠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종이 한 장을 다 써 내려갔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강소연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 종이 오른쪽 아래에 ‘강소연’ 석 자를 반듯하게 적은 뒤 유승헌에게 건넸다.분노한 유승헌이 화리장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예전처럼 자신에게 고함을 지를 줄 알았건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오히려 종이 위의 글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속을 알 수 없었다.그러던 그가, 한참 만에 종이를 구겨 쥐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구겨

  • 왕비 자리, 이제 관심 없어요   제28화

    왕부로 돌아온 유승헌은 창고를 빠짐없이 뒤졌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 하나 찾지 못했다.그는 강소연의 방에 있던 시녀를 불러 물었다.“왕비는 평소에 무엇을 좋아하느냐?”시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왕비마마께서는 평소 집안일을 돌보시는 것 외에, 가장 오래 머무시는 곳이 화실입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시는 듯합니다.”‘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유승헌은 그녀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는 사실도 몰랐다.심지어 자신의 왕부에 화실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그러나 한가하게 화실이나 구경할 수 없었다. 탁자 위를 훑던 그의 시선이, 마침내 벼루 하나에 멈췄다.그 벼루는 몇 년 전 강남에서 사들인 것으로, 조그마한 한 조각이 만금이나 하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먹을 가까이하지 않던 그는 한 번도 그것을 쓰지 않았다.호위에게 벼루를 들게 한 그는 최상급 화선지 한 묶음을 골라 함께 상자에 담아 강씨 가문으로 향했다.때마침 강소연은 사당에 무릎 꿇고 경문을 외고 있었다.“아가씨, 혜왕께서 아가씨의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씨 가문의 하인들은 조 어멈의 분부에 따라 그녀를 부르는 호칭을 바꾸었다. 더 이상 혜왕을 친근하게 부르지 않았다.자리에서 일어난 강소연은 시큰거리는 무릎을 주무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승헌 때문에 그녀는 어제 생에서 가장 처참한 장면을 목격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밤새 경문을 외울 지경이었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는데, 또 무슨 일로 온 것인가. 내가 얼마나 우스운 꼴인지 구경이라도 온 것인가.’“아가씨, 뵙기가 거북하시면 사람을 시켜 쫓아내겠습니다!”이화가 분을 못 이겨 말했다.강소연이 웃으며 대꾸했다.“어디 그렇게 쉽게 쫓겨날 사람이냐?”이화는 말없이 볼을 부풀린 채 조용히 그녀를 부축해 안채로 걸어갔다.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던 강소연이 돌연 멈춰 섰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담담히 물었다.“왕야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빛을 등지고 서 있던 그녀

  • 왕비 자리, 이제 관심 없어요   제27화

    “뭐라고?”한참을 벙쪄 있던 유승헌이 입을 열었다.유문인이 분에 못 이겨 손에 쥐고 있던 옥팔찌를 그에게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옥팔찌는 딸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어찌 언니의 생신날에 다른 여인을 위한 연화를 준비하실 수 있단 말이에요? 오라버니, 정말 실망했습니다.”유문인의 눈에는 짙은 실망과 경멸이 서려 있었다.유승헌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그녀의 생일인 줄 몰랐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수련의 소원을 이뤄 주는 게 그리 잘못이냐?”‘내가 왜 강소연의 생일까지 알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시집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가 누구에게 잘해주든, 남들이 참견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이렇게 자신을 설득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눈빛도 차가워졌다.그러나 가슴 한켠은 여전히 아팠다. 마치 가시 하나가 깊숙이 박혀, 숨을 쉴 때마다 살을 파고드는 듯했다.“무슨 잘못이냐고요? 오라버니, 오라버니에게 마음이라는 게 있긴 해요?”자리에서 일어난 유문인이 허리에 손을 얹고 따져 물었다.그녀는 손가락으로 유승헌의 가슴을 가리키며 화를 냈다.“어제 언니께서 제게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오라버니의 생신을 매년 정성스레 준비했는데도, 오라버니께서 눈길도 주지 않으셨다더군요. 게다가 형님의 생신이 언제인지 한 번도 묻지 않으셨고, 아무것도 주시지 않으셨다지요?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형님께서 이미 익숙해지셨답니다. 오라버니께서는 이렇게 부군 노릇을 하신 겁니까?”유문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고, 무어라 반박할 수 없었던 유승헌은 그저 퉁명스럽게 말했다.“내가 시집오라고 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사실 유승헌은 생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해마다 생일이면 관리들이 아부하려고 온갖 잔치를 벌였고, 술을 마시다 보면 항상 잔뜩 취한 채로 집에 돌아와 잠만 자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강소연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었다.“예, 오라버니께서 시집오라 한 적은 없으니, 모두 언니께서 자초한 일이겠네

  • 왕비 자리, 이제 관심 없어요   제26화

    유승헌이 수련을 부축해 성벽 위로 올라, 정성껏 준비한 연화를 함께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왕야께서 이렇게 애써 주시니, 참으로 기쁩니다.”수련이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허약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지난번에 이마를 다친 이후로, 그녀의 병은 갈수록 깊어졌다. 태의는 천 년 묵은 산삼을 약재로 쓰지 않으면 이번 겨울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그날, 수련이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꿈 하나를 들려주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성루 위에 서서 서하를 아득히 바라보았고, 그 뒤로 밤하늘을 뒤덮은 연화가 빛나고 있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유승헌은 경성의 모든 연화 장인을 불러 밤낮으로 작업하게 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를 위해, 그 꿈을 그대로 되살려 주기로 했다. “또 무슨 소원이 있느냐? 전부 이뤄 주마.”유승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물었다.수련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제 신분이 미천하여 왕야와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왕야를 흠모하는 마음이 깊어, 비록 첩의 자리일지라도 왕야 곁에 머물 수 있다면 이생에 여한이 없겠습니다.”수련의 요구에 유승헌은 처음으로 망설였고, 이내 화제를 돌렸다. “어떻게든 너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 걱정하지 마라.”“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왕야…”수련이 입을 열려는 순간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고, 그녀는 기침을 쏟아냈다. 유승헌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겉옷을 여며 주었다. “몸이 약한 네가 이 바람을 견디기 어렵다. 먼저 내려가 있거라.”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의 시야에 성벽 아래로 멀어져 가는 마차 한 대가 들어왔다.한눈에 봐도 유문인의 마차임을 알 수 있었다.‘설마 유문인이 강소연을 데리고 온 것인가, 이 대체 무슨 짓인가.’그 순간, 유승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처음으로 당혹이란 감정이 생겨났다.어릴 적 자객에게 쫓길 때도, 자라서 조정에서 천자의 위엄을 마주

  • 왕비 자리, 이제 관심 없어요   제25화

    유문인이 하얀 비단으로 만든 꽃 모양의 장신구를 강소연의 머리에 꽂아 주더니, 동경 속에 비친 그녀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강소연이 살짝 미소 지었다.“그만 놀리고 이제 가요.”유문인이 천 조각을 꺼내더니, 장난스레 웃으며 그녀의 눈을 가렸다.“언니, 저만 따라오세요. 분명 깜짝 놀랄 선물이 있을 거예요!”눈앞이 캄캄해진 강소연은 유문인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가, 마차에 올랐다.꽤 먼 길을 달린 듯, 시냇물 흐르는 소리까지 들렸고, 마차가 이내 멈추었다.“여기가 어디예요?”강소연이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리며 눈썹을 찌푸렸다.유문인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조급해 마세요. 곧 아실 거예요.”강소연이 눈을 가린 천을 벗기려 하자, 유문인이 그녀의 손을 막았다.“조금만 참아 주세요. 미리 보면 깜짝선물이 아니잖아요.”무엇을 기다리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강소연은, 그저 그녀를 따라 한 계단 한 계단 높은 곳으로 올랐다.마침내 맨 위층에 닿자, 귀에 연화가 하늘로 솟는 소리가 들려왔다.유문인이 마침내 그녀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천을 풀어 주었다. 강소연은 그제야 자신들이 성벽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성의 번화함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짙은 밤하늘에는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그 순간 연화가 유성처럼 밤하늘을 가르며 피어올랐다. 별빛보다 더욱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하늘 가득 화려하게 펼쳐졌다.“언니, 어떠세요? 이 정도면 깜짝선물이라 할 만하죠?”유문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연화가 그녀의 눈동자에 비쳐 은은히 빛났다.강소연이 대답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던 찰나, 멀지 않은 층계 위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그녀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왜 그러세요, 언니?”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린 유문인의 얼굴도 이내 굳었다.저쪽에서 수련이 유승헌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이마에는 하얀 헝겊이 감겨 있었지만

Bab Lainnya
Jelajahi dan baca novel bagus secara gratis
Akses gratis ke berbagai novel bagus di aplikasi GoodNovel. Unduh buku yang kamu suka dan baca di mana saja & kapan saja.
Baca buku gratis di Aplikasi
Pindai kode untuk membaca di Aplikasi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