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레티는 등불 아래에서 유리엘의 얼굴을 살폈다.
“황실에서 무르라고 하셔도요?”
“내가 무르라고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실 수는 있다는 말씀이네요.”
“그래.”
등불 손잡이를 쥔 장갑이 조금 움직였다. 레티는 어깨에 걸친 에런의 외투를 여몄다.
“왜 안 하시는데요?”
유리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뒤에서 문이 열리고 공작이 나왔다. 한 손에는 법전이, 다른 손에는 접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전하.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가 앞서 걸으려 하자 에런이 외투 끝을 받아 들었다.
“안은 따뜻합니다.”
“고마워요.”
외투를 벗자 유리엘이 든 등불의 빛이 복도 앞으로 옮겨 갔다. 에런은 외투를 접어 팔에 걸치고 레티 곁을 따라왔다.
‘등불 하나에 외투 하나.’
레티는 응접실 문을 직접 열었다. 그 정도는 누구에게도 맡기고 싶지 않았다.
▽
탁자에는 여전히 칙서와 신전 확인서가 놓여 있었다.
유리엘은 등불을 내려놓고 서류를 보았다. 레티는 확인서를 펼쳐 신전 인장이 보이게 했다.
“제가 먼저 부탁드렸어요.”
“들었다.”
“에런 경이 저를 설득한 게 아니에요.”
“그것도 들었다.”
공작이 법전을 탁자에 놓았다.
“전하께서 이 법을 알고 오셨습니까?”
“확인하고 왔습니다.”
“황궁에도 그 조문이 남아 있군요.”
“예.”
공작은 펼치려던 법전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종일 붙잡고 있던 책을 놓자 손가락에 묻은 잉크가 보였다.
유리엘이 레티를 보았다.
“앉지.”
에런이 가장 가까운 의자를 당겼다. 유리엘은 그 의자 앞에 서 있다가 옆으로 비켰다.
레티는 앉지 않고 의자 등을 잡았다.
“먼저 답을 듣고 싶어요.”
“무엇을.”
“서약을 깨지 않겠다고 하신 이유요.”
공작이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레티는 의자 등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유리엘이 말했다.
“네 뜻으로 맺었다고 했지.”
“네.”
“그것을 내가 없애면 네가 고른 것은 무엇이 되나.”
레티의 손끝이 멎었다.
전생에도 제 뜻을 말할 기회는 있었다. 함께 식사하고 싶다고, 혼자 참석하는 연회는 싫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었다.
유리엘은 늘 바쁘다고 했다. 그 뒤로는 묻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지금은 레티가 골랐다는 이유를 대고 있었다.
“칙서도 제 뜻으로 받은 건 아니에요.”
“안다.”
“그런데 칙서는 그대로 두실 건가요?”
“황실 혼인을 내 마음대로 거둘 수는 없다. 네가 따를 법은 있다.”
유리엘이 법전 위에 손을 놓았다.
“봄꽃 축일에 네가 고르게 하겠다. 그때까지는 법대로 이 집에 살지.”
레티는 그 손을 보았다. 검은 장갑은 손목까지 빈틈없이 가리고 있었다.
“그날 제가 누구 이름을 말해도요?”
“그래.”
“에런 경을 고르더라도요?”
“같은 대답을 두 번 하게 할 건가.”
말은 짧았지만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다.
레티는 의자에 앉았다. 에런이 의자를 조금 밀어 주고 손을 뗐다.
유리엘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황궁에서라면 누구도 먼저 앉지 않았을 텐데, 공작은 아직 서서 법전 모서리만 눌렀다.
“전하께 불편한 집이 될 겁니다.”
“방이면 됩니다.”
“황궁과 오가는 거리도 있고요.”
“감수하겠습니다.”
공작이 안경을 벗었다. 렌즈를 닦지도 않고 한동안 손에 쥐고 있었다.
레티는 에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경도 여기서 지내시겠어요?”
“네, 아가씨.”
“아까는 전하가 오시기 전이었어요. 다시 생각하셔도 돼요.”
에런은 팔에 걸친 외투를 옆 의자에 놓았다.
“서약을 맺은 뒤에 돌아갈 곳이 달라진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유리엘의 시선이 에런에게 옮겨 갔다.
“브리그 경.”
“말씀하십시오, 전하.”
“근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겠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아가씨를 모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리엘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런은 레티에게 다시 말했다.
“아가씨가 그날 제 이름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 전에 제가 먼저 물러날 생각은 없습니다.”
레티는 무릎 위에서 손을 폈다.
한 사람은 법대로 기다리겠다고 했다. 다른 한 사람은 먼저 물러나지 않겠다고 했다.
‘방이 둘 남아 있기는 한가.’
마침 문가에 선 그레고리가 입을 열었다.
“방 배정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그레고리는 작은 열쇠 두 개를 쟁반에 놓았다.
“동쪽 물푸레관은 전하께서, 서쪽 느릅관은 브리그 경께서 쓰시면 됩니다.”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물푸레관은 지난달에 창틀을 손봤지?”
“그렇습니다. 느릅관도 침구를 바꿨습니다.”
“두 곳 다 사람이 살 만한가?”
“살지 못하는 방을 손님께 드리지는 않습니다.”
공작은 더 묻지 않았다.
레티가 열쇠를 보았다. 열쇠 고리에 묶인 끈의 색만 달랐다.
“어느 쪽이 본관에 더 가까워요?”
“각각 100미터입니다.”
유리엘이 물었다.
“출입문 기준인가.”
“장미 정원을 지나는 길 기준입니다.”
에런이 열쇠 하나를 집었다.
“부엌에는 어느 길로 가면 됩니까?”
“서쪽 통로를 쓰시면 됩니다.”
유리엘의 시선이 잠깐 올라갔다.
“본관까지는 같고 부엌까지는 다른가.”
“식사는 한 식당에서 하십니다.”
그레고리는 아무 표정 없이 대답했다.
레티는 입술 안쪽을 눌렀다.
‘벌써 길 길이를 재고 있어.’
“제 방에는 두 분 다 먼저 허락을 받고 오세요.”
두 사람이 레티를 보았다.
“가족끼리도 그렇게 해요. 노엘도 문을 두드려요.”
문밖에서 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는 대답도 듣고 들어가.”
노엘이 문을 반쯤 열고 서 있었다. 잠옷 위에 얇은 겉옷을 입고, 손에는 낮에 접다 남은 종이가 들려 있었다.
공작이 손짓했다.
“들어오렴.”
노엘은 유리엘에게 꾸벅 인사한 뒤 에런 옆으로 갔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레티에게 물었다.
“그럼 둘 다 안 가는 거야?”
“오늘부터 별채에서 지내실 거야.”
“어느 별채?”
그레고리가 다시 설명했다. 노엘은 동쪽을 가리켰다가 서쪽으로 손가락을 돌렸다.
“그러면 장미 정원에서 둘 다 만날 수 있겠네.”
“그렇겠지.”
“누나는?”
“나는 원래 방.”
노엘은 그 대답을 듣고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적어도 제 누나가 어디로 가는지는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유리엘이 물었다.
“아직 잠들지 않았나.”
“아버지가 아직 안 주무셔서요. 저녁도 조금밖에 안 드셨고요.”
공작이 헛기침했다.
레티는 아버지를 보았다. 생일상에서 케이크를 잘라 주느라 정작 제 접시는 몇 번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레고리가 말했다.
“전하께서도 식사 전이라고 들었습니다. 늦은 식사를 준비할까요?”
“그렇게 해 주게.”
공작이 대답했다.
노엘이 바로 손을 들었다.
“나도 같이 앉아도 돼?”
“너는 먹었잖아.”
레티가 말하자 노엘이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때는 지금보다 어렸어.”
‘한 시간 만에 얼마나 컸는데.’
에런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유리엘은 노엘의 의자를 보더니 그레고리에게 짧게 말했다.
“자리 하나 더 놓지.”
▽
식당에는 생일 케이크 접시가 아직 남아 있었다.
노라가 접시를 치우려 하자 노엘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짚었다.
“거기 꽃은 남겨 줘.”
설탕으로 만든 작은 꽃이었다. 노라는 꽃이 붙은 조각만 작은 접시에 옮겼다.
레티는 저녁을 먹은 자리로 돌아갔다. 에런이 의자를 당기자 유리엘이 탁자 위에 놓인 물잔을 안쪽으로 옮겼다.
앉다가 소매로 잔을 건드릴 뻔한 참이었다.
“감사해요.”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가 앉은 뒤 에런은 왼쪽에, 유리엘은 오른쪽에 앉았다. 노엘은 두 사람 얼굴을 모두 볼 수 있는 건너편 자리를 골랐다.
늦은 식사에는 구운 고기와 채소, 따뜻한 수프가 나왔다. 레티는 배가 불러 수프만 부탁했다.
그레고리는 작은 접시도 함께 놓았다.
“공작님께서 드시는 동안 조금 곁들이시지요.”
접시에는 채소가 몇 점 담겨 있었다.
레티는 포크를 들다가 멈췄다. 감자 옆에 가지 구이가 놓여 있었다. 기름을 머금은 껍질이 촛불 아래에서 반들거렸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먹을 수는 있었다. 다만 씹을 때마다 물컹한 속이 혀에 남아서, 다른 음식부터 먹다 마지막까지 미뤄 두곤 했다.
아버지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싫다는 말을 꺼내면 다음 날부터 식탁에서 아예 사라질 터였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럴 필요는 없었다.
레티는 감자에 포크를 댔다.
그때 오른쪽에서 집게가 들어왔다.
유리엘은 레티의 접시에 있던 가지 두 점을 집어 제 접시로 옮겼다. 고기 옆에 가지를 놓고 집게를 내려놓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레티는 포크를 든 채 유리엘을 보았다.
“전하.”
“왜.”
“그걸 왜 가져가세요?”
유리엘은 레티의 접시를 한 번 보았다.
“먹지 않을 것 같아서.”
“제가요?”
“손이 멈췄다.”
레티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랬나. 감자를 고르느라 잠깐 멈춘 것은 맞았다.
하지만 유리엘은 감자도, 당근도 아닌 가지를 가져갔다. 묻지도 않고 두 점 모두 골라냈다.
전생에 함께 식사한 횟수는 많지 않았다. 그때도 레티는 가지를 접시 가장자리로 밀어 놓기만 했다.
유리엘이 그 접시를 보았는지는 몰랐다.
“다른 것도 옮겨 드릴까요?”
에런이 물었다.
레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나머지는 먹어요.”
유리엘이 가져간 가지를 잘라 먹었다. 레티는 그 손을 한 번 더 보다가 감자를 입에 넣었다.
노엘이 고기 접시를 조금 밀었다.
“전하 형님.”
공작의 숟가락이 멎었다.
“노엘.”
“왜요? 누나 남편이면 형님이잖아요.”
노엘은 유리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부르면 안 돼요?”
“상관없다.”
허락이 떨어지자 노엘은 바로 접시를 가리켰다.
“저도 고기 조금 주세요.”
유리엘은 고기를 잘라 노엘의 접시에 놓았다. 노엘이 포크를 들었다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런 형님.”
“네, 도련님.”
“경은 고기를 작게 잘라 주셨는데.”
에런은 접시를 당겨 고기 한 점을 잘랐다. 레티가 손을 뻗기 전에 노엘의 접시에 두 번째 고기가 놓였다.
노엘은 포크를 꽂고 만족스럽게 앉았다.
“두 분 다 잘 잘라 주시네.”
“노엘.”
레티가 부르자 노엘이 입을 다물었다.
“아까 먹은 것까지 생각하고 먹어.”
“작게 잘랐잖아.”
“작으면 없어지는 건 아니야.”
에런이 남은 고기를 접시 쪽으로 돌려놓았다. 유리엘도 집게를 내려놓았다.
노엘은 두 사람 손을 차례로 보고 물을 마셨다.
공작이 수프를 뜨며 말했다.
“이 집에서 누가 가장 바빠질지는 알겠군.”
그레고리가 빈 접시를 들었다.
“주방에 고기 양을 늘리라고 하겠습니다.”
“노엘 몫을 말한 것은 아니네.”
“그 몫은 늘리지 않겠습니다.”
노엘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레티는 냅킨으로 입가를 눌렀다.
▽
식사가 끝날 무렵, 노엘은 설탕 꽃이 놓인 접시를 레티에게 내밀었다.
“이건 누나 거야.”
“남겨 달라고 했잖아.”
“생일 꽃인데 내가 먹으면 안 되지.”
설탕 꽃의 끝이 조금 깨져 있었다. 옮기다가 떨어진 조각을 노엘이 접시 한쪽에 모아 두었다.
레티가 접시를 받자 유리엘이 의자를 뒤로 당겨 주었다. 에런은 남아 있던 물잔을 들어 레티의 소매가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겼다.
아까와 손을 맡은 사람이 반대였다.
레티는 접시를 양손으로 들고 일어났다.
‘다음에는 내가 물잔을 치워야겠네.’
공작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내일은 집안에서 지낼 때 필요한 이야기를 더 하지요. 오늘은 늦었습니다.”
“그러시지요.”
유리엘이 대답했다.
에런도 고개를 숙였다. 그레고리는 이미 문가에 열쇠 쟁반을 준비해 두었다.
레티는 식당을 나서다 멈췄다.
“한 가지는 지금 말씀드릴게요.”
두 사람이 돌아보았다.
“저를 데려가거나 뭘 대신 해 주시기 전에, 제게 먼저 물어봐 주세요.”
유리엘은 레티의 손에 든 접시를 보았다가 시선을 올렸다.
“알겠다.”
에런이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가씨.”
“저도 두 분께 미리 말씀드릴게요. 오늘처럼 숨기지는 않을게요.”
공작이 옆에서 작게 숨을 내쉬었다. 레티는 아버지에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접시 위의 설탕 꽃이 기울었다. 레티는 손가락으로 꽃을 바로 세웠다.
이번에는 누구도 대신 손을 내밀지 않았다.
▽
본관 현관에서 길이 갈렸다.
웨스가 가져온 여행 가방은 동쪽 문 앞에 놓였고, 에런의 짐은 서쪽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에런의 짐도 가방 하나였다.
노엘이 두 가방을 세어 보고 레티를 올려다보았다.
“누나는 생일에 선물을 많이 받았네.”
“가방은 내 선물이 아니야.”
“안에 뭐가 들었는데?”
“그건 물어보지 마.”
노엘은 에런에게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유리엘이 문가에 섰다. 에런도 접어 두었던 외투를 팔에 걸쳤다. 레티는 두 사람 사이를 한 번 보았다.
“편히 쉬세요.”
“너도.”
“아가씨도 편히 주무십시오.”
에런이 먼저 서쪽으로 걸었다. 유리엘은 웨스에게 가방을 맡긴 뒤 동쪽 길로 내려갔다.
레티는 현관 안에 서서 두 사람이 장미 정원 양쪽으로 멀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한집 안인데도 갈림길에서 인사를 두 번 해야 했다.
노엘이 하품하자 공작이 어깨를 잡고 계단 쪽으로 돌렸다.
“너는 네 방으로.”
레티도 계단을 올랐다. 노라가 설탕 꽃 접시를 받아 들고 뒤따랐다.
방에 들어서자 화장대 앞의 종이꽃이 먼저 보였다. 노엘이 낮에 준 큰 꽃과 찻잔에 세워 두었던 작은 꽃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노라는 그 옆에 설탕 꽃을 놓았다.
레티는 창가로 갔다. 서쪽 별채 창문에 사람이 지나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동쪽에서는 커튼이 조금 움직였다.
노라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뭘 적으려고?”
“별채에 필요한 것들을요. 이제 두 곳 다 사람이 사시니까요.”
노라는 첫 장을 펼치고 펜을 들었다. 레티는 창문에 손바닥을 댔다.
동쪽과 서쪽 별채에 동시에 불이 켜졌다.
「별채 일지 — 봄 셋째 달 10일. 남편: 둘.
방 배정: 동쪽 전하, 서쪽 에런 경. 아가씨: 창가에서 확인하심.」
(9화 끝)
레티는 남은 차를 천천히 마셨다. 잔 바닥에 볶은 보리 한 조각이 가라앉아 있었다.내일 아침에는 이것을 치울 시간이 없을 터였다. 레티는 잔을 씻어 받침 위에 엎어 두고, 북부로 보낼 답장을 봉투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등불을 끄기 전 예복 덮개를 살짝 들었다.흰 소매 끝에 작은 단추들이 가지런했다.레티는 손가락으로 단추 하나를 만진 뒤 덮개를 내렸다.▽“아가씨, 손을 조금만 더 내려 주세요.”레티는 거울 앞에서 손을 내렸다. 노라가 마지막 단추를 잠갔다. 새벽빛은 아직 창 아래까지 닿지 않았다.“너도 오늘은 손이 느리네.”“단추를 잘못 잠그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요.”“벌써 다섯 번은 확인한 것 같은데.”“여섯 번입니다.”노라는 대답하고도 소매 끝을 한 번 더 살폈다.‘이러다 생일이 끝나겠네.’레티가 웃자 노라도 입가를 풀었다. 탁자 위의 작은 여행 가방을 들기 전에 노라가 거울 속 레티와 눈을 맞췄다.“생일 축하드립니다, 아가씨.”“고마워.”“결혼도요.”“그건 조금 뒤에 다시 해 줘.”“두 번 해 드릴 수 있습니다.”노라가 방문을 열었다.복도에는 공작이 서 있었다. 안경을 벗었다 쓰던 손이 멈췄다. 레티가 다가가자 공작은 소매를 펴고 팔을 내밀었다.“불편한 곳은 없느냐?”“없어요.”“신발은?”“어제도 신어 봤잖아요.”“오늘은 오래 서 있어야 하니.”레티는 공작의 팔에 손을 올렸다. 단단히 굳어 있던 팔이 조금 내려갔다.계단 아래에서는 노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지 상자를 두 손으로 받친 채였다. 레티를 보자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왜?”“계단부터 내려오세요.”“말하면 내가 넘어질까 봐?”“그럴 수도 있잖아요.”노엘은 레티가 마지막 계단을 밟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누나, 생일 축하해.”“고마워.”“그리고 오늘은 상자 확인 안 해도 돼. 집사님하고 벌써 했어.”그레고리가 문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안에 반지도 있습니다.”“그것까지 말하시면 어떡해요.”노엘이 상자를 조금 몸 쪽으
“그건 벌써 주방에 말해 뒀어.”유리엘이 레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대답했다.“제가 받아 드리기 전부터요?”“네 식사니까.”레티는 반지가 끼워진 손을 조금 들었다. 창가의 불빛 아래에서 작은 돌이 반짝였다. 유리엘은 손가락이 불편하지 않은지 살피다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너무 꼭 맞나?”“아니요. 잘 맞아요.”“불편하면 고치면 돼.”“차부터 고쳐 드릴게요. 아주 식었어요.”레티가 빈 잔을 가져오자 유리엘이 주전자를 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레티가 손을 받치지 않았다. 차가 두 잔에 고르게 나뉘어 담겼다.“이제 혼자 하시네요.”“옆에서 보고 있잖아.”레티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유리엘도 잔을 들었다. 탁자 가운데의 빈 반지 상자는 닫지 않은 채 두었다.밖에서 마차 바퀴가 멎는 소리가 났다.레티는 남은 차를 마시고 일어났다. 유리엘이 먼저 의자를 밀어 주었다.“날짜도 정해야겠군.”“제 생일에 하고 싶어요.”유리엘의 손이 의자 등받이에 머물렀다.“같은 날에?”“네. 이번에는 제가 정한 일로 바쁘고 싶어요.”유리엘은 열린 반지 상자를 닫았다.“그럼 그렇게 하자.”▽봄 둘째 달에 들어서자 공작저 서재의 큰 탁자가 다시 서류로 덮였다.이번에는 한 지붕 법 조문이 아니었다. 손님 명단과 신전에서 보낸 준비 목록, 천 견본을 붙인 종이가 나란히 놓였다.공작은 안경을 올리고 명단을 살폈다.“아침 예식이면 피로연은 점심에 해야겠구나. 노엘, 그 상자는 탁자에 내려놓아도 된다.”“괜찮아요.”노엘은 작은 반지 상자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그레고리가 점심 쟁반을 들여왔을 때도 상자는 무릎 위에 있었다. 노엘은 한 손으로 빵을 집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레티가 손을 내밀었다.“먹는 동안 누나가 맡아 줄까?”“제가 맡기로 했잖아요.”“지금은 연습용 상자야. 반지는 아직 안 넣었어.”“그러니까 지금 연습해야죠.”노엘은 상자를 옆구리에 끼우고 빵을 먹었다. 한쪽 팔꿈치가 지나치게 올라가 있었다.유리엘이 빵 접시를 조금
유리엘이 외투 끈을 다시 묶어 주었다. 북쪽 길에서 불어온 바람에 풀린 매듭이었다.레티는 손을 내리고 매듭 끝을 잡았다.“너무 꽉 묶지는 마세요.”“바람이 들어온다.”“목까지 막으실 필요는 없어요.”유리엘의 손이 조금 내려갔다. 매듭이 느슨해지고, 접힌 옷깃이 펴졌다. 레티는 길의 굽은 곳을 한 번 더 본 뒤 마차 쪽으로 돌아섰다.마차 문을 연 유리엘이 손을 내밀었다.“빵은 잊지 않을게요.”“벌써 그 이야기인가.”“두 분이 성문까지 오는 동안 여러 번 말씀하셨잖아요.”“브리그 경은 옆에 두라고 했지.”“유리엘은요?”“먹는 것까지 확인한다고 했다.”레티가 내민 손을 잡았다.‘떠나도 승부는 남네.’마차에 오르자 유리엘이 외투 자락을 안으로 넣어 주었다. 문이 닫힌 뒤에도 레티는 무릎 위의 매듭을 잠깐 만졌다.▽봄 첫째 달 20일 오후, 봄날의 찻잔 창가에는 작은 빵 접시가 놓여 있었다.레티는 찻잎을 덜어 낸 뒤 그 접시를 곁눈질했다. 빵 위에 덮은 천의 모서리가 반듯했다. 접시 아래에는 유리엘이 접어 둔 쪽지가 있었다.「식기 전에 먹어.」빵은 이미 식었다.“찻잎 봉지를 묶는 동안 먹으려고 했어요.”맞은편에 앉은 유리엘이 접시를 보았다.“그 봉지는 다 묶었잖아.”“다음 봉지가 있었죠.”“지금은?”레티는 손에 든 빈 봉지를 내려놓았다.“지금은 먹을게요.”유리엘이 덮개를 걷었다. 레티는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에런 경은 잘 보이는 데 놓아 달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제 손앞까지 밀어 달라고는 안 하셨는데요.”“눈앞에 있어도 안 먹으니.”“확인하겠다고 하신 건 기억해요.”“약속은 지켜야지.”레티가 한입 먹자 유리엘은 그제야 접시에서 손을 뗐다. 빵 부스러기가 새 앞치마에 떨어졌다. 레티는 손바닥으로 털어 작은 쓰레기통에 넣었다.다시 단 앞치마 걸이는 허리 높이에 있었다. 예전에는 문 옆에 높이 달려 있어 매번 까치발을 들었다. 새 걸이는 레티가 직접 자리를 정했다.작은 선반도, 찻잔을 말리는 받침도 그랬
종소리가 잦아들자 오르반이 칙서 위에 손을 얹었다.“말씀하신 이름대로 기록하겠습니다.”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이 탁자 옆으로 다가왔고, 에런은 노엘이 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노엘은 아버지가 쥐여 준 손수건을 접지도 않은 채 들고 있었다.“형님, 내일 아침에는 있어요?”“있습니다.”“같이 먹어요?”“도련님께서 늦잠을 주무시지만 않으면요.”“안 잘 거예요.”에런이 노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레티는 두 사람이 나란히 신전 문을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에런의 보폭은 평소보다 짧았다.오르반이 서약 기록을 따로 거두었다.“내일은 작은 기도실로 오시면 됩니다. 두 분 손을 확인하고 서약을 거둘 겁니다.”“손을요?”레티가 왼손을 들었다.“없어진 줄이 잠깐 보일 수도 있습니다.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에런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따로 준비할 것이 있습니까?”“맨손으로 오시면 됩니다.”레티는 약지를 엄지로 한번 문질렀다. 유리엘이 곁에서 기다렸다. 내밀지는 않은 손이 레티의 손 가까이에 있었다.밖으로 나서자 마고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내가 더 떨었네.”“계속 숨 안 쉬고 있었지?”“중간에 쉬었어. 네가 알려 줬을 때.”노라가 잉크병 뚜껑을 꼭 닫았다. 아버지는 가방을 들었고, 노엘은 에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레티도 그 뒤를 따라갔다. 내일 올 때는 사람이 적을 터였다. 꽃이 걸린 신전 문을 한 번 돌아본 뒤 마차에 올랐다.▽다음 날 아침, 노엘은 식당에 가장 먼저 와 있었다.머리 뒤쪽이 눌려 있었고 소매 한쪽이 접혀 있었다. 그래도 자리에 앉아 빵이 담긴 바구니를 지키고 있었다.“늦잠 안 잤어요.”에런이 들어오자 노엘이 바로 말했다.“확인했습니다.”“빵도 남겨 뒀어요.”“감사합니다.”레티가 자리에 앉자 에런이 오른쪽 의자를 당겼다. 유리엘은 왼쪽에 앉았다. 그레고리가 놓은 잔과 접시는 어제와 수가 다르지 않았다.레티는 빵을 집다가 에런 앞에 놓인 작은 접시를 보았다. 노엘이 골라 놓은 듯
레티가 잔을 비우자 에런이 빈 잔을 받침 가운데로 옮겼다. 유리엘은 찻주전자 손잡이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더 마실 거야?”“아니요. 오늘은 이만 마실래요.”아버지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 아래에 밀어 둔 서류 가방을 챙기려다 레티와 눈이 마주쳤다.“내일 가져갈 것만 넣어 두마.”“법전은 제 방에 있어요.”“알고 있다.”“몰래 가져가시면 알아요.”“그레고리에게 부탁하지도 않았다.”아직이라는 말은 붙지 않았다. 레티는 아버지의 가방을 한 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유리엘이 의자를 잡았다. 에런은 식탁 위에 놓인 레티의 얇은 숄을 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둘이 한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내일 아침에 뵐게요.”“푹 주무십시오, 아가씨.”“늦게까지 일지 읽지 말고.”레티는 유리엘을 보았다.“노라가 이야기했어요?”“네 방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앞으로도 가끔 날 거예요.”“그래.”유리엘이 의자를 식탁 안으로 밀었다. 레티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식당을 나왔다.계단 끝에서 돌아보자 그레고리가 오른쪽 빈자리에 놓인 의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인데도 다른 의자와 똑같이 반듯하게 맞췄다.▽다음 날 아침, 노라는 레티의 소매 끝을 펴고 단추를 다시 확인했다.밝은 회색 드레스는 앉아도 무릎께가 많이 구겨지지 않는 옷이었다. 레티가 직접 골랐다. 노라가 꺼낸 진주 목걸이는 화장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정말 안 하실 거예요?”“목이 좀 답답할 것 같아.”“그럼 이 핀만 꽂을게요.”노라가 머리 옆에 작은 핀을 꽂았다. 거울 속에서 밤색 머리카락 한 가닥이 다시 빠져나왔다. 노라는 손끝에 물을 조금 묻혀 눌러 주었다.“너도 앉을 자리 있지?”“신전에서 하인들 자리도 마련해 주신대요.”“기록하느라 계속 서 있지는 말고.”노라가 앞치마 대신 입은 단정한 옷의 주머니를 눌렀다. 작은 수첩 모서리가 보였다.“앉아서도 적을 수 있어요.”“오늘은 많이 적을 필요 없어.”“이름은 틀리면 안 되잖아요.”
“오늘만이라는 말, 유리엘한테도 하신 거예요?”에런이 동쪽 별채 창을 다시 보았다.“들리지는 않으셨을 겁니다.”“그럼 제가 전할까요?”“내일 아침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레티는 장갑을 벗어 가방 위에 얹었다. 에런이 현관 문을 열어 주었다. 목도리는 아직 목에 느슨하게 둘려 있었다.“그런데 내일도 문을 먼저 열어 주시려고요?”“아침 식탁 의자는 먼저 빼 드릴 수 있습니다.”“퇴근길만 양보하신 거군요.”“오늘만이라고 했습니다.”레티는 웃으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에런이 느릅관 쪽으로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동쪽 창의 불도 아직 켜져 있었다.▽봄 첫째 달 14일 오후, 아버지의 서재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레티가 문틈으로 들여다보자 에드윈 공작이 안경을 벗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법전과 얇은 서류철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서류철 모서리에 붙인 종이가 유난히 많았다.“들어오너라. 의자는 치웠다.”“왜 치우셨어요?”“아니, 의자에 있던 책을 치웠다는 말이다.”레티는 책상 앞 의자를 보았다. 앉을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대신 옆의 작은 탁자 위에 책이 높이 쌓여 있었다.‘옮긴 걸 치웠다고 하시는구나.’레티가 앉자 아버지는 법전을 밀어 주었다. 펼쳐진 곳의 종이는 다른 쪽보다 더 닳아 있었다.“이걸 또 읽고 계셨어요?”“마지막으로 확인했다.”“지난번에도 마지막이라고 하셨는데요.”“그때는 서약 해제에 관한 조항을 확인한 거고.”아버지는 헛기침을 했다. 레티는 책에 붙은 종이 하나를 들춰 보았다. 아버지의 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딸이 직접 말할 것.」그 아래에는 그 말에 밑줄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이건 외우셨겠어요.”“첫날부터 외웠다.”“그런데 왜 계속 보세요?”아버지는 안경을 다시 썼다. 법전의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눌렀지만, 페이지는 자꾸 조금씩 들렸다.“혹시 다른 조항이 이 말을 막고 있을까 봐.”레티는 붙임 종이를 놓았다.아버지는 서류철을 열었다. 황실 문양이 찍힌 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