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3화 - 사형.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7 11:05:54

귓가가 먹먹해질만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째서 이들이 나를 끌고 가는가. 무엄하게도 내 몸에 손을 대는가. 곁에서 소리치는 말소리들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혼란한 상황에서 어렴풋이 사람들 틈으로..

“…라파엘라..!”

내 이름을 부르는 키엘은 본듯 했다. 저 남자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가. 왜 그리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짝!’

화끈한 통증과 함께 고개가 옆으로 꺽이듯 넘어갔다.

“어이. 정신차려라. 벌써부터 정신을 놓으면 곤란해.”

눈가에 흉터가 난 황궁 기사가 껄렁이는 말투로 히죽였다. 볼에 느껴지는 얼얼한 감각에 온몸이 떨려왔다.

“지금.. 지금 감히 누구에게…”

‘짝!’

“감히? 이게 아직 정신을 못차렸나본데?”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다시 고개가 넘어갔다. 양쪽 볼이 불타는 듯한 통증에 화끈거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픈것은 상처받은 자존심이었다. 눈 앞이 흐릿해지는걸 막기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아악!!”

“야, 눈에 힘 안빼? 니네 가문. 반역가문이라고. 완전 망해버렸다고. 아직도 모르겠냐?”

흉터가 난 기사가 내 머리카락을 틀어쥐고 흔들었다. 머리를 죄다 뽑으려드는 손길에 두피가 불타듯 아팠다. 내가 비명을 지를수록 순백의 기사들은 더욱 잔인하게 굴었다.

“이쯤하고 감옥에 집어넣어. 어차피 재판을 받게될 죄인이다.”

“자식만 불쌍하지 뭐. 지 아비가 한짓때문에.”

다른 기사들의 만류로 남자는 머리에서 손을 때고 감옥에 밀어 넣었다. 나는 차갑고 딱딱한 돌바닥에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든말든 기사들은 문을 잠그고 자리를 떠났다. 어둡고 습한 지하 감옥 속, 홀로 남은것이다.

“..생각해.. 생각해라 레일라..”

나는 스스로에게 되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모든 상황이 꿈만 같다. 하지만 이건 말도안되는 현실이고 당장에 내게 닥칠 현실이다.

보통의 죄인들은 사건 당일 다음날 재판에 넘겨져 잘잘못을 따진다. 그렇다면 앞으로 몇시간 후 재판이 시작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나눈다. 아버지.. 아니, 가주님이 요즘 어떠했는지와 가문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빠르게 상기한다.

괜찮다. 달라지는건 없다. 우리는 잘못을 하지 않았다.

“아..아아… 아아악!!!”

몇번을 울부짖으며 되내었다.

“슈미트 라파엘라를 황제 살인미수 죄로 기소한다. 본 재판은 철저한 조사와 진실만을 밝힐것을 약조하는 바이다.”

나이가 지긋한 휜수염을 가진 재판장이 자리에 앉았다. 병상에 누운 황제의 어린시절부터 대부분의 재판을 진행해온 유서깊은 이였다. 그의 곁에는 황족의 핏줄임을 나타내는 황금빛 머리결의 황녀와 황태자가 자리를 함께했다.

주변에는 엄숙한 분위기에 표정을 굳힌 귀족들과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나는 어떻게든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어젯밤 얻어맞은 양 볼이 퉁퉁 부어올라 있고 값 비싼 드레스가 더렵혀져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슈미트 라파엘라. 그대는 어제 2시경 황제폐하의 처소에 숨어들어갔다. 이 사실을 시인하는가?”

“저.. 저는 몰래들어간것이 아닌 정식 면회를 요청하여 폐하를 보러 간 것입니다!”

슈미트는 평소라면 상상할 수 없는 흐트러진 머리와 몰골로 재판의 중심에 서있었다. 제 아무리 감정이 없는 사내라 불리는 그라도 이곳이 주는 압박과 시선을 견디기는 힘드리라.

“재판장님. 슈미트의 말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그가 정식 면회를 요청한 것은 2시경이 아닌 5시였습니다. 그런데 3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기사들이 순찰을 간 사이 폐하의 방 안에 들어온 것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재판의 고발인으로 참석하여 진행하는 이는 드비드 가문의 영식이었다.

“또한 폐하의 방에서 독을 품은 아카루이 꽃이 발견 되었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이 꽃을 공작이 직접 폐하의 머리 맡에 두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카루이가 사람을 죽일만큼의 독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닙니까?!”

슈미트가 큰소리로 물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가만히 앉아 듣고 있던 귀족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흔하디 흔한 꽃이고 독성도 거의 없다 싶이 하여 아카데미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꽃이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그거 하나로 살인미수는 심한거 같긴하군.”

사람들의 웅성임이 들려오자 슈미트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많은 이들이 동조해준다면 상황이 바뀔 수있었다.

역시 가주님에게는 생각이 있었다. 계획이 있었다. 나 역시도 그리 안심하였다.

“고작 그정도였다면 재판을 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과 달리 흘러갔다.

“증인을 이 자리에 모셔왔습니다.”

드비드 영식의 말을 끝으로, 엄숙하던 재판장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시아..?”

내 입에서 미약한 숨소리와 함께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주 어릴적부터 말벗으로 들어왔던 자작가의 딸, 시아 렌디. 믿을 사람 하나 없는 귀족 사회에서 내가 유일하게 믿고 마음을 털어둘 수 있는 몇 안되는 친구였다.

아니, 친구라고 믿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제국의 두 별을 뵙습니다.”

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예를 지키며 인사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내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시아. 아니지? 아닌거지..?”

자꾸만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작은 중얼거림이 터져나왔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레일라 라파엘라 소공작이 아카루이 꽃에 루이셀의 독을 몇방울 집어 넣는 모습을요!”

그녀의 말이 재판장에 울려퍼지자 여기저기서 헉! 하는 신음성이 들려왔다.

루이셀의 독.

시중에서 가장 보기 힘든 맹독으로, 루이셀이라 불리는 거대한 뱀의 독이었다. 흔히 구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루이셀의 개체 자체가 적어서도 있지만 작정하고 독을 뽑아내지 않는 이상 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꽃을.. 슈미트 공작에게 전달했고, 공작이 잘했다며 칭찬하는 모습을 제가 분명히 보았습니다.”

시아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끝까지 말을 이었다.

“…거짓말..”

걷잡을 수 없는 배신감에 주위를 살필 여력이 없었다.

“거짓말이야..!! 네가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어느새 나는 목이 터져라 그녀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시아는 그런 나를 보며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고개를 숙였다.

“우리 가문에 네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

소리칠 수록 목구멍에서 피맛이 섞인 가래가 들끌었다. 이대로 숨이 막혀 기절할 것만 같았다.

“라파엘라. 그만하거라.”

그런 나를 말린것은 놀랍게도 황태자도, 재판장도 아닌, 슈미트였다.

“가주님..”

슈미트는 아까전 표정과는 달리 뜻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나는 태어나서 처음 마주하였다.

“대체 왜..”

그러나 나의 말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아카루이 꽃의 성분을 검사해본 결과 루이셀의 독이 들어갔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안경.”

드비드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안이 회중석에서 잠시 일어났다.

“어제 밤 연구실에서 확인한 바로는… 루이셀의 맹독이 맞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확인삼아 질문드립니다. 그정도 독이면 건강이 악화되신 폐하께 치명적인게 맞습니까?”

“…예. 아마 2시간만 그대로 놔두고 꽃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면 지금쯤 폐하는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는 순간.

“결론이 나온것 같군. 본 법정은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겠다. 이 시간부로 라파엘라 공작가의 직위를 폐한다.”

그 말이 불러일으킨 파장으로 재판장이 소란스러워 졌다.

“조용! 또한 라파엘라 공작가의 모든 사용인들을 채찍형에 처하며 재산 또한 제국에 반환해야 할것이다.”

시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죄인 레일라 라파엘라. 그대는 살인미수 공모 죄로 노역 45년을, 죄인 슈미트 라파엘라. 그대는 직접적인 살인미수를 저지른 죄로 사형에 처한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원수에게 구원받았다.   10화 - 협박이 아닌 제안.

    “뭐..?”“레일라 말이야! 레일라 라파엘라.”“그 이름이 갑자기 왜 나오는지 모르겠군.”키엘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를 데려다 놓고 처음 듣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이름을 헤일릿의 입에서 들을줄은 상상도 못했다.“어제 들었는데 고생을 정말 많이 한것 같아.. 주저앉아서 울고.. 이름도 멜리아라고 그러고.”“뭐? 잠깐만 그녀가 뭐라 그랬다고?”“주저앉아 울었다고! 믿겨져? 레일라가 그런적 한번도 없었잖아.”“아니, 그거 말고.”키엘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번뜩였다.“라파엘라가 어제 무슨 얘기를 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얘기해봐.”업무실의 문은 한동안 열리지 않았다.“멜리아! 어제 손님 접대하다가 다쳤다며? 괜찮아??”“아.. 이젠 괜찮아. 헤일릿님이 친절하게도 치료를 해주셨거든.”멜리아는 붕대가 감긴 손을 들어올려 미셀에게 보였다. 이미 하녀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돌았는지 많은 이들이 멜리아와 친구들을 감싸고 서있었다.“시종장님이 보시는 앞에서 실수했다며?”“그만하길 다행이다 진짜. 내가 만약 그랬으면… 상상도 하기 싫어 진짜.”한두마디씩 걱정어린 말들이 얹어졌다.“당연하지. 라파엘라니까 무사한거잖아.”물론 그중에는 날카로이 툭 튀어나온 말도 섞여 있었다. 니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멜리아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녀에게 향했다. 불만에 찬 얼굴로 멜리아를 빤히 보던 니키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생각해봐 나나 너네같은 평민 출신이었으면 지금쯤 시종장님께 끌려가 혹독히 매질 당했을껄?”니키가 손가락으로 자신과 모여있는 하녀들을 가르켰다.“과거의 이름 좀 날렸다고 우리들과 대우 자체가 다른거지. 가증스럽게도.”“니키! 말이 너무 심하잖아. 멜리아는 다치기까지 했다고.”“무슨 말이 심하다는거야 대체. 내가 말한게 틀려? 맞잖아.”“그동안 멜리아가 우리와 다른 대우를 받는다던가, 일을 쉰적있어? 있냐구!”미셀은 자신이 더 억울하다는 듯 나서서 외쳤다

  • 원수에게 구원받았다.   9화 - 몇 번이고 연기해 줄게.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멜리아의 입에서 떨리는 음색이 터져나왔다. 고개 조차 들지 못한채 벌벌 떠는 그녀가 정말 레일라가 맞나..? 헤일릿은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생각이 멈추었다.“죄송하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당장 헤일릿 아가씨께 용서를 구하도록 해. 그리고 이 일은 주인님이 오시는 즉시 보고할테니 그리 알도록 해라.”멜리아의 얼굴이 곧 기절 할듯 겁에 질려버렸다. 화상으로 인해 퉁퉁 부어올라 살갗이 얇게 벗겨진 빨간 손등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아아..! 시종장님.. 제발 백작님께는 말하지 말아주세요!”멜리아는 애처로이 부르짖었다. 보는 이들의 마음이 아플만큼 간절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종장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그녀를 내려다 봤다.“헤일릿님.. 제가..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세요..!”멜리아는 눈물이 잔뜩 고인 눈으로 옆에 얼어붙은 헤일릿에게 다가갔다. 헤일릿은 지금 자신이 보고 듣는 모습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멜리아의 눈과 허공에서 마주치고 그녀의 퉁퉁 부은 손을 보고나자 정신이 차츰 돌아왔다.“멜리아 당장 여기서 나가도록 해!”시종장이 거칠게 멜리아의 팔을 붙잡고 문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찌나 악력이 강한지 질질 끌려가듯 팔을 붙잡혔다.“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죠?!”그러나 문에 닿기 전, 헤일릿이 헐레벌떡 달려와 시종장의 손을 붙잡았다. 헤일릿은 정신이 든 순간부터 강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지금 이렇게 다친게 안보이세요? 당장 의사를 불러오라구요!”헤일릿이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멜리아를 부축해 일으켰다.“하지만…”“지금 왜 가만히 있죠? 내 말이 들리지 않아요? 의사를 데려오라구!”헤일릿이 흔치 않게 소리를 지르자 이번에는 반대로 시종장이 사색이 되어 방을 뛰쳐나갔다. 그제야 방안에 둘이 남아 헤일릿은 안심하였다. “세상에…! 고운 손이.. 아프지는 않아요?”그녀는 부드럽게 멜리아를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 그때까지도 멜리아의 몸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고, 아무

  • 원수에게 구원받았다.   8화 - 피하고 싶던 만남.

    멜리아는 살면서 그리 운이 없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적어도 공작가가 없어지기 전까지는.별의 별 일들을 겪으며 나름 불운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키엘이 노예시장에서 나를 데려온것보다도 더 최악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기에 실행해야 했지만 왜 하필이면 그 여자란 말인가!“헤일릿 르부.”멜리아는 입 안을 멤도는 이름을 발음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하녀들과 시녀들이 다른 가문의 영애를 맞이하기는 힘들거라 생각한 시종장이 멜리아에게 차 시중을 들라 명했기 때문이다.멜리아는 언제부터 그 여자를 신경쓰기 시작했나 떠올렸다.아마, 키엘과의 첫 만남이었을 것이다.“키엘 공. 정말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황제는 아픈 중에도 몸을 이끌고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럴만도 했다. 그동안 골머리를 앓던 이웃 나라들에 대한 전쟁을 모두 불식 시키고 온 영웅이 아니던가. 그리고는 하는 말이 ‘저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나라의 안위와 폐하께서 강건하시기를 바랄뿐입니다..’ 라니. 누가보아도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훤칠한 몸에 인물이 사는 얼굴을 가지고 저런 말을 하니 세상에 다시 없을 영웅이었다. “이상하구나..”성년식을 치르기 전의 레일라는 본인과 또래로 보이는 키엘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며 여상히 내뱉었다.“네? 뭐가 이상해요? 완전 꿈의 기사님 같지 않아요?!”당시 곁에 착 붙어 다니던 시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레일라는 처음 그를 멀리서 봤을때부터 탐탁치 않았다. “자꾸…”그러나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다.어떻게 말하겠는가. 제국의 영웅이자 멀쩡히 생긴 저 남자와 자꾸만 눈이 마주친다고. 그것도 굉장히 노골적이고 집요한 시선이 따라 붙는다고. ‘내가 자의식과잉이 아니라면 저 사람이 할 말이 있는거겠지.’레일라는 그리 생각하며 끝나지를 않는 황제와 키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뭐라도 좋으니 말해보아라. 작위와 금전적인 상은 이미 내렸으니, 다른 소원을 말해보거라.”이미 주어진 보상이 엄청난 것이었으나 황제는 멈

  • 원수에게 구원받았다.   7화 - 오랜만에 듣는 이름.

    “기상! 모두 준비 후 홀로 나오도록.”하녀들의 일정은 생각보다 더 단순했다. 매일 아침 동이 터오는 시간에 기상해 아침단장을 한다. 옷은 검은 바탕에 하얀 프릴이 달린 그리 풍성하지 않은 생활복을 입어야 했다. “멜리아. 어쩜 이런 옷을 입어도 고급진 느낌이 난다!”“그래..? 고마워. 미셀.”처음에는 혼자 옷을 입어야 한다는 어색함과 끈을 묶는 어색함이 있었으나 미셀을 통해 한두번 배우니 곧잘 하게 되었다. 원래도 암기와 몸을 사용하는 일을 어려워하지는 않았고 배움이 빨랐기에 금방 하였다. 다만 미셀은 지독히도 눈치가 없었지만 오히려 그런 성격이라 다행이기도 했다.“머리만 하고 어서 나가자.”머리는 단정히 땋아 양쪽으로 묶거나 어깨에 닿지 않는 짧은 머리여야 했다. 나는 유독 길고 정돈된 머리였기에 아침마다 양옆으로 땋아야 했다.“오늘 아침은 감자샐러드에 고기가 들어간 스튜래.”“요 며칠 굉장히 잘 나오네? 무슨 일 있나.”“우리 같은 하녀가 주인님들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삼삼오오 모여 사용인 식당으로 내려갈때면 자연스레 그날의 메뉴를 알 수 있었다. 중간중간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이 따라 붙었지만 그 역시도 일주일 정도가 지나니 익숙해졌다. 첫 날에 비하면 힘들지도 않았다.‘네가 그 아가씨라며?’‘이곳에서 혹여라도 텃세부리거나 하면 그냥 내비두지 않을거야!’‘공주처럼 떠받들어 줄거라 생각하지 마. 조금이라도 논땡이를 부리면 바로 시종장님께 말씀드릴거니까.’아무런 말없이 식당에 내려와 앉아있던 내게 먼저 다가와 온갖 경고와 의심어린 눈빛을 보내는건 기본이었다. 심지어는 그날의 주어진 일들을 다 하는지 보려고 감시하는 이들도 있었다.‘이상하다. 왜 잘 안 닦이지?’‘야, 너 이런거 처음 해봐? 걸레질은 물기가 너무 많으면 잘 안닦여. 이럴땐 적당히 짜고 써야 해.’그들이 곁에서 떠나질 않는 덕분에 오히려 일을 빨리 배울 수 있었다. 애초부터 빠르게 적응하고 인맥을 늘릴려고한 나에게는 최상의 환경이었다.그로부터 일

  • 원수에게 구원받았다.   6화 - 어둠 속 희망.

    아득해지는 시선 너머로 낙찰이 되었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전부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까지도 전부.그러나 저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의 모든 결단과 결심들이 무너져 내림을 느꼈다. ‘왜 하필…’어째서 라는 말을 하기에는 이미 모든 상황들이 너무도 최악이었다. 경매사들이 이끄는데로 끌려가며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거칠어지는 숨을 진정시켜야…“레일라 라파엘라.”그러나 키엘의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오는 순간 눈 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지독한 악연에 손이 떨려왔다.치욕스러움에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반응해봤자 내 뒤에서 두팔을 강하게 구속하고 있는 하르트 가문의 기사들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때 그가 나의 턱을 붙잡아 올렸다.올려다 본 시선 위로 새까만 눈동자가 집요하게 나를 내려다봤다.“너는 이제부터 내것이다. 내가 죽으라면 죽고,살라면 살아야 되는 존재가 된거다.”남자는 한자 한자 씹어내듯 말을 뱉었다.나는 구역질이 치미는 것을 참으며 보란듯 입꼬리를 올렸다. 남자, 키엘의 눈썹이 움찔거렸다.“차라리 죽는게 나을듯 하군.”“언제까지 그리 건방을 떨 수 있는지 기대가 되는군.”키엘은 거칠게 나의 턱을 놓으며 오만하게 고개짓했다.“오늘부터 하녀로서의 행동거지 뿐 아니라 주인을 섬기는 마음도 배워야 할것이다.”“그것이 내가 너를 데려온 이유니.”한 마디, 한 마디가 도저히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다. 나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하르트 가문은 대대로 내려온 유서 깊은 가문은 커녕 만들어진지 10년조차 되지 않은 신생 가문이었다. 그럼에도 단번에 백작가라는 작위를 부여받은 근본없는 이들의 집합소.멜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종들을 따라 걸었다.백작가의 구조는 공작가와는 많이 달랐다. 라파엘라 가문은 사용인이 머무는 처소와 가문의 사람이 머무는 처소가 구별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건물이 연결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넓고 깔끔한 외관과 내부였지만 그럼에도 정돈되지 못

  • 원수에게 구원받았다.   5화 -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제국.

    나의 나라.나의 사랑하는 제국. 나의 사랑해 마지 않는 하이르트. 온갖 수식어들을 떠올리며 거칠게 잡아당기는 손길을 따라 끌려갔다.눈을 가린 거친 천의 감촉이, 입을 틀어막은 뭔지도 모를 재갈이, 그와중에 뚫린 귀 사이로 들려오는 조롱과 모욕들이 너무나 생생했다. 얼마나 이동을 하는지도 모른채 걷고 때로는 흔들리는 거친 마차에 던져졌다. 얼마나 덜컹이는지 온몸이 흔들리고 이리저리 부딪쳐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도착했을때 쯤에는 안아픈 곳이 없었다.“잘왔다. 신입들.”다행인것은 도착하자마자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어줬다는 사실이었다. 까슬거리면 천에 쓸려 눈가가 쓰라렸다.“이번에는 운이 좋았어. 대어를 물었다고!”누군가 나의 등을 잡아당겨 한 남자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검은 수염이 인상적인 남성이 나를 보자 놀란듯 입을 벌렸다.“옷을 보아하니 잘사는 집안 자제 같은데?! 설마.. 납치해온거는 아니겠지?”“하핫! 그럴리가. 우리 상단을 말아먹을 일 있어?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냐고.”“그럼 뭐야. 몰락 귀족? 돈이 없어서 팔려왔나?”검은 수염의 남성이 흥미롭다는 듯 나를 찬찬히 뜯어봤다.“아니. 무려 반역가문의 아가씨야. 요즘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그 라파엘라 가문의 아가씨라고!”뒤에서 몸을 떠민 남자가 흥분에 차 재잘거렸다.“그런 거물을 왜 우리 상단에 보냈지?”“글쎄. 내가 들은건 최대한 먼 노예시장에 아무도 모를 곳으로 보내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야.”“어허.. 이것 참.”대화 끝에 그들은 나를 가장 마지막 상품으로 소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큰 돈을 쓸어모으겠다며 말이다.사람을 보고 상품을 운운하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목구멍 사이로 신물이 올라왔다. 입을 틀어막은 재갈만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토악질을 했을 것이다. 상황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들은 나와 비슷하게 묶인 이들을 남녀노소 한 자리에 모아두고는 찬물을 뿌려댔다. 얼마나 차가운지 얼음장과 같은 물이 살에 닿아올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살면서 언제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