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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왜 그 인간을 떠올려서

Author: 랑끗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7 10:51:57

는 개뿔. 

워낙 고요한 토요일의 한낮. 

에스더가 하루에 마을 앞 정류장을 네 번만 지나가는 버스를 타고서 읍내로 나가 장을 보기 위해 손잡이 달린 장바구니를 옆에 두고서 소원 초등학교 교문을 다시 잠그고 있을 때였다. 

카트식 장바구니는 읍내에 나가서 장을 보러 다니는 할머니들의 추천템이자, 필수템이었다. 

보통 마음씨 좋은 마을 어른이 도맡아 차가 없는 할머니들의 발이 되어주었으나, 그와 버금가게 마음씨 좋은 할머니들은 굽은 등이나 하얗게 센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종종 버스를 타고 읍내에 다니고는 했다. 

짤그랑, 짤그랑-.

마을 초입까지 이어진 동네 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 저 멀리에서부터 들려오는 맑은소리에 에스더는 호기심 어린 눈을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녀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인협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검은색 봉지가 쥐어져 있었는데, 인협이 무심하게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유리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요한 마을에 먹먹하게 울렸다.

“어쩌지?”

순간 밀려온 거부감에 에스더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닫힌 교문을 붙들었다. 

다시 들어갈까, 라는 충동이 일어서였다. 

그러나 이번 버스를 놓치면 점심시간은 지나야 읍내로 나갈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보통 아무 일정이 없는 토요일인지라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세 시간은 족히 지나야 다음 버스가 올 터였다. 

잘 모르는 남자 하나 때문에 제 루틴을 바꾸는 게 억울하게 느껴진 에스더였다. 

앞으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텐데.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쉰 에스더는 결의를 다진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짤그랑, 짤그랑-.

에스더의 발소리와 유리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더 서로에게 가까워졌다. 

온 세상을 보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건지, 고개를 숙인 인협은 가장 깜깜한 어둠보다 더 어두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다행히 그 덕분에 그는 아직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에스더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에스더는 긴장한 얼굴로 뒤에서 끌고 있는 장바구니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어, 거기 못 보던 사람이네!”

그때 인협의 바로 옆 밭에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햇빛 가리개 복면까지 한 사람은 고진태 이장이었다. 

소원리의 작은 마을회관을 돌보고, 마을의 여러 가지 귀찮은 잡무를 책임감 갖고 해결해 내는 그였다. 

가늘게 위쪽으로 찢어진 눈에. 얄상한 얼굴. 

턱은 갸름하지만, 광대가 유독 높은 편에 몸은 깡마른편이었다.

전체적으로 쥐를 연상시키는 인상이었다. 

고 이장의 큰 부름에도 인협은 세상과 소통하는 귀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서 앞으로만 걸어갈 뿐이었다.

“큰일 났네.”

그 광경을 목격한 에스더가 긴장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7, 80대 노인들이 가득한 이 마을 사람들 중에 제일가는 꼰대를 꼽으라면 단연 고 이장일 것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 건지, 아니면 원래도 그런 사람이었던 건지는 겨우 일 년 전에 이곳에 온 에스더는 알 수 없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일단 고 이장은 어마어마하게 상투적인 것과 예의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종종 그의 이장으로서의 권력을 남용하는 게 아닐까, 라는 외부인에 가까운 에스더가 할 정도로. 

그만큼 고 이장은 소원리를 사랑했으나,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품기까지는 아직 그릇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 이장의 얼굴이 꽤 험악해졌다. 

자고로 소원리 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꼭 알고 있어야만 하는 그였다. 

“어이, 거기 총각! 어르신이 이야기하는데 대꾸도 안 하고.”

집요한 부름에 인협이 걸음을 멈췄다. 

찰그랑-. 봉지 속 유리병들이 쉴 새 없이 부딪치며 일으키던 소음이 한순간 멎었다. 

에스더는 이 상황에 휘말려 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걸음을 서둘렀다.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이 소원리에서 에스더가 드물게 좋아하지 않는 편인 두 사람의 충돌이었다. 

“저 인협입니다.”

“어어? 누구?”

인협이 살짝 몸을 틀어서 길 바로 앞에 서 있는 고 이장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나 단번에 인협을 못 알아본 고 이장의 얼굴이 약간 찌푸려졌다.

“나인협이요. 저기 초등학교 옆에 살던 김 씨 할머니네 손주요.”

뒤이어 들려온 소개에 고 이장의 얼굴이 단숨에 환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기 가득했던 얼굴이 웬 인상 좋은 시골 어른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시골 매직. 

누군가가 얼마나 떠나있었느냐는 상관 없이, 작은 마을에서 출처가 분명하다고 여겨지기만 하면, 모두가 가족처럼 친밀하게 굴어댔다. 

“어어, 김씨 아주머니네 첫째 손주! 한참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왜 내려왔나? 결혼은 했나?”

그 말인즉슨, 시골 어르신들에게는 요즘 세상에는 무례함일지 친근함일지 모를 질문들을 마구 쏟아내어도 된다는 뜻이었다. 

“아-.”

그 질문에 불편한 기색을 굳이 감추지도 않은 인협이였다. 

불똥 튀기 전에 빨리 가자. 

아름은 인협이 제가 지나가는 걸 눈치채기 전에 빠르게 지나치리라 다짐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와? 뭔 일 있었나? 느이 부모님 사업 또 망했드나?”

고 이장의 해맑은 질문에 에스더는 숨을 크게 들이켰지만, 애써 못 들은 척했다. 

“그렇다기보다는, 잠깐 쉬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날 성가시게 하지 말라고요, 라고 으르릉거리는듯한 인협의 음성이었지만, 고 이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인협이 조금 전 드러낸 불편한 기색에 대해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래? 와, 반갑네. 저 집에서 어이 지내? 집을 아무도 돌본 사람이 없어서 꼴이 말이 아닐낀데.”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지랖을 불편해하는 인협의 음성이 이어졌다. 에스더는 고 이장이 그에게 적당히만 질문해줬으면, 하며 간절히 바랐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그가 터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나저나, 거기 봉다리에는-.”

고 이장의 집요한 시선이 검은 봉지 위로 삐져나온 빨간 뚜껑으로 향하자마자 인협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했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 그래-.”

어쭈? 그래도 이 정도 예의는 차릴 줄 아는 사람이었네. 

때마침 인협을 지나치게 된 에스더는 제게는 관심을 전혀 두지 않고서 다시 제 갈 길을 가는 그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짤그랑-. 맑은소리가 다시 반복적으로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이장님.”

“아, 황 선생님. 장 보러 갑니까?”

스쳐 지나간 인협이 오르막길을 올라가며 소리가 점점 더 멀어져갔다. 

에스더에게 평소보다 짤막한 인사를 건넨 고 이장은 인협이 사라진 쪽을 응시했다. 

“해봤자 스무 살 좀 넘었을 건데, 대낮부터 깡소주를-. 안주도 없이.”

“어-.”

소주였구나. 

생각해 보면 마을 초입에 있는, 최 씨가 운영하는 다 낡아빠진 구멍가게에 음료라고는 솔의 눙이라던지, 맹콜이라던지,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음료뿐이었다.

그리고 냉장고의 나머지 공간에는 고 이장의 무리가 즐기는 술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주, 막걸리, 맥주. 다 어르신 입맛에만 맞는 제품들이었다. 

쯧쯔. 혀를 끌끌 찬 고 이장은 이내 다시 밭으로 향했다. 

다행이다. 

평소 같았으면 너른 오지랖으로 에스더에게 질문 세례를 했을 고 이장은 인협이라는 미끼 덕분에 이쯤에서 그친듯 싶었다. 

그중 가장 고역인 건, 일흔 넘은 고 이장이 금지옥엽으로 키워온 막내아들이자, 소원 초등학교에 함께 근무하는 선생인 고제환과 에스더를 쉴 새 없이 엮어대는 것이었다. 

고제환은 마흔에 머리까지 반쯤 벗겨진 볼품없는 남자였다. 잘하는 거라고는 불평불만이었다. 

늘 불만이 가득한 두 눈에는 일종의 우수함이 차 있었다. 

마을에 사는 구닥다리 어른들과는 다르게 본인은 신세대처럼 깨어있고, 집에서 워낙 예쁨을 다 받았던 탓에 그는 그가 정말로 멋진 남자인 줄로 굳게 믿고 있었다. 

키도 작은 데다가 왜소한 그는 볼록 튀어나온 배를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여자들은 올챙이 배를 매력으로 느끼지 않냐며 한 번씩 에스더에게 질문할 때는 정말이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곤란할 만큼.

유일하게 그가 자랑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는 햇빛 하나 보지 못해 보이는, 소원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하얀 피부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백옥같이 예쁜 톤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매우 아파 보이는 빛이었다. 

그의 두 눈 아래 늘 짙게 존재하는 다크서클도 그를 병약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데 한몫했다. 

어딘가 심술궂은 뱀파이어 같은 느낌이랄까. 

 

“아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못 써.”

에스더는 어느새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진 것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실상, 사람을 대체로 가리지 않는 편인 에스더가 유독 힘들어하는 부분은 제환의 음흉한 미소였다. 

선생이라고는 셋뿐인 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다 보면, 그를 마주칠 때가 많았는데 때때로 제환은 마치 에스더가 저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것처럼 굴 때가 많았다. 

제 딴에는 의미심장하고 매력 발산하는 멘트라고 던져오지만, 사실은 음흉하고 불쾌한 말들이 많았다. 

마치 에스더가 곧 자신의 매력에 빠져들 거라는, 암시를 넘어선 어떠한 저주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으으, 즐거운 주말인데 뭐하러 생각해.”

이내 에스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고 선생에 관한 생각을 떨쳐냈다.

***

신화읍의 농합마트. 

이곳은 에스더만의 작은 파라다이스였다. 

제대로된 한인 마트도 없는 미국 작은 도시에서 워낙 오랜 시간 살았던 지라, 한국의 마트는 늘 그녀에게 즐거운 곳이었다.

한국에는 어쩜 이리 맛있고 신기한 게 많은지. 

일 년 동안 이곳에서 장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늘 새롭고 재밌었다. 

농합 마트를 들리고 걸어서 5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다이수까지 들린 후, 10분쯤 걸어가면 바닷가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대형 카페에 들르는 게 그녀만의 토요일 아침 루틴이었다. 

카페는 소원리에서 최연장자인 문인자 할머니의 첫째 딸, 문영애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동해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이런 대우가 익숙지 않아 거절도 하고, 카페에는 절대 안 들리기도 했던 에스더였지만, 마을에서 마주칠 때마다 반협박식으로 카페를 들르라는 영애의 강력한 권유에 에스더는 마지못해 이 방문을 시작하게 됐다. 

소원리에서 지내고 있는 영애의 조카들을 에스더가 가르치는 덕분에 영애는 늘 그녀에게 커피와 빵을 공짜로 내어주고는 했다. 

또한 때때로 마주칠 때마다 해외에 살던 젊은 사람이 외진 곳에 와서 얼마나 따분하고 힘드냐며 영애는 에스더의 고생을 알아주었다. 

가식이나 잘 보이려는 마음이 한 톨도 보이지 않고, 그저 오롯이 에스더의 마음을 헤아려주려는 그 깊은 배려에 에스더는 여태 방문을 매주 이어오고 있었다. 

“룰루-.”

농합마트를 천천히 둘러보던 그녀는 갑자기 시작된 요란한 행사에 눈을 그쪽으로 돌렸다.

 

“요즘 핫한 컵 물회가 왔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오늘 원쁠원 행사합니다.”

물회? 

에스더는 눈을 반짝거리며 해산물 코너 앞에 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시식용 물회를 바라보았다. 

“한번 드셔보세요-.”

직원은 에스더를 발견하고는 곧장 그녀의 손에 시식 컵을 쥐여주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그녀는 입안에 내용물을 털어 넣었다.

그러자, 새콤달콤한 물회가 입안에서 놀았다. 

“으음-.”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은 에스더를 본 직원은 옆에서 컵 물회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자, 진짜 쌉니다. 두 개의 단돈 8,990원이에요. 냉동이 아니라 신선한 회로 만든 거예요.”

진짜 싸네. 근데, 두 개는 너무 많은데. 

이미 장을 많이 봐서 냉동고에 넣을 자리도 없을 것 같고. 

망설이는 에스더의 머릿속에 문득 소주병이 든 봉지를 들고 홀로 걸어가던 인협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 안주로 그쪽에다가 하나 줄까?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생각으로? 

눈앞에 인협이 들고 가던 봉투 사이로 삐쭉 나와 있던 소주병 뚜껑이 아른거렸다. 

그래, 외로운 영혼 하나 위해 선심 한 번 쓰자. 

무슨 충동인지, 그렇게 에스더는 장바구니에 컵 물회 두 개를 담았다. 그렇게 나머지 장을 본 후 계산을 마친 그녀였다. 

”아, 맞다. 내 커피-.”

벌써 20도를 훌쩍 넘어선 날씨에 컵 물회를 들고서 마음껏 돌아다닐 수는 없을 것이었다. 

다이수와 카페까지 들려야 다음 버스 시간에도 딱 맞을 텐데.

“이런-.”

낭패네. 택시를 타야 하려나? 

에스더는 자신의 멍청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렇다고 마을에 들어갔다가 장 본 걸 두고서 다시 나오기도 귀찮았다.

“아-.”

에스더는 울상이 된 채로 마트 부근에 있는 택시 하나를 불러서 탔다. 

난 아까 왜 그 인간을 떠올려서. 

주말의 다이수 쇼핑과 공짜 빵이랑 커피가 아쉬워 입맛을 다시며 에스더는 얼굴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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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겸의 차 안. 주변에 들킬까 봐 어느 한적한 공원 주차장에서 만난 봉길과 우겸이었다. “레브님은 컨택해 보셨어요?” “네.” “어땠어요?” “많이 침울해 보였어요. 상처가 커서 앞으로 리그 오브 카오스 판으로 다시 돌아올 의향이 있는지도 의문이고요.”봉길의 말에 우겸은 탄식했다. 분명 좋은 팀을 만나고, 좋은 기회를 하나라도 잡을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인협은 우겸에 견줄만한 선수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참 어렵네요.” “우겸 씨는 이제 곧 원티드랑 계약 종료되죠?” “네. 그래서 때맞춰서 이적해서 제가 직접 팀을 꾸릴 예정이었어요. 엘비 그룹 아시죠? 거기서 신생팀을 하나 꾸리고 싶다면서 제게 컨택을 해오셨거든요.” “엘비 그룹이요?”엘비라면 가전제품부터 시작해, 몸집을 키워온 대기업이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절대로 모를 수 없는 거물이었다. “네, 그리고 그쪽에서 저를 중심으로 새로 출발하는 만큼 저만 제안을 승낙하면 제가 원하는 것을 모두 맞춰주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봉길 코치님께 직접 감독 제안을 할 수 있는 거고요.” “……”엘비 그룹이 서포트해주는 팀에다가 우겸이 수장인 조합이라면 훨훨 날 일만 있을 팀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인협이가 이 팀으로 복귀했으면 좋겠는데. 팀의 새로운 시작에 걸맞게, 인협도 새롭게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처음에는 저의를 의심했으나, 우겸은 지켜보면 볼수록 올곧은 심성의 사람이었다. 제 팀의 스폰서와 코치진이 손을 잡고서 일방적으로 승부조작을 해서 장장 2년여 간의 시간 동안 1위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밝혀내자마자 우겸은 그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인협의 복귀를 위해서 가장 먼저 힘을 쓰고 있었다. 비리와 조작으로 쓰게 된 왕관은 수치심을 일으킬 뿐이었다. 리그 오브 카오스에서 최고라고 여겨지는 우겸마저도 다 내던지고 도망가 버리고 싶어질 정도로. “월말쯤 이적해서 훈련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그리고 두세 달 정도 집중 훈련 후, 실전에서 손발을 맞추는 연습

  • 웰컴 투 소원리   32. 한번 멀어져 봐

    에스더와 인협은 잔뜩 부른 배를 쥐고서 길을 걷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며 보이는 주변 풍경을 각자의 방식대로 둘러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있었다. “아으, 배부르다!” “버스가 20분 후면 온다고 했지?” “응. 아, 이 코스에서 다이수까지 들려줬어야 완벽한 건데 말이야.” “거기까지 들리는 게 네 토요일 루틴이야?” “응. 다이수가 얼마나 귀한데-.” “미국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이 많이 있어서?”인협이 대신해서 문장을 마쳐주자, 에스더가 푸하하, 웃었다.“올, 제법인데? 독심술도 할 줄 알아, 너?” “그런가 봐.” “근데 하나가 빠졌지롱. 모든 물건들이 엄청 튼튼하고 엄청 저렴해.” “그나저나, 너 미국에서 어렸을 적부터 살았다면서 한국말은 왜 이렇게 잘해?” “왜? 2개 국어 하는 게 이상해? 생각보다 나 같은 사람 흔한데.”인협의 의심에 에스더가 대꾸했다.“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하는 환경에 있어서 그래.” “그래? 미국에서 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하는 환경은 또 뭐지.” “한국인들만 있는 교회에 다녔거든. 내 이름에서부터 알겠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중에 완전 신실하신 분이시고. 좁디좁은 이민 사회에서 그 사실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너는 모르지?”“치명적? 부모님의 종교 생활이 너한테 영향이 갈 일이 있어?”인협의 질문에 에스더는 과거의 어려움을 떠올린 듯이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그럼, 많지. 미국에서의 삶은 일종의 소원리의 확장판 같았달까?” “그게 뭔데?” “얼마 되지도 않는 한국 사람들끼리 모든 한국 사람의 모든 걸 다 알고 있고, 전혀 진실과 가깝지 않은 헛소문이 퍼지기도 하고, 약간의 진실이 섞였지만, 허무맹랑한 소문이 퍼져서 그게 나를 직접적으로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정사실이 되기도 하고.” “그렇구나.” “그리고 소원리 보다 더 어려운 점은 사람들이 더 많아서, 그걸 제대로 해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거? 내가 수십 명, 수백 명에게 직접

  • 웰컴 투 소원리   31. 너랑은 올만 하겠다

    “오! 여기다. 생각보다 가까웠네. 여기서 후딱 먹고 가면 되겠다.” “그래.”두 사람이 열심히 검색해 도착한 아귀찜 전문 식당. 두 사람은 옆 벽면에 붙은 메뉴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로 드려요?” “사장님, 여기 아귀찜 소자 하나요. 감사합니다.” “네~. 여기 아귀찜 소자 하나!”노년을 향해 달려가는 주름진 얼굴의 사장이 주문을 받아서 식당으로 외쳤다. 모든 게 오래된 식당이지만 내부는 깨끗했다.오후 한 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식당 안에는 그들 외에는 6, 70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부부가 앉아 있는 두 테이블뿐이었다. “아주 좋아.” “뭐가?” “그냥, 식당 분위기가 아주 좋네. 마음에 쏙 들어.”인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식당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며 말했다. “안 바글바글한 곳이라 다행이네. 내가 널 위해 친히 검색했지.” “아휴, 고마워.”에스더의 생색에 인협은 고마움을 표했다. “웬일로? 순순히?” “야, 나 그 정도는 아니야.” “그으래?”의아해하는 에스더를 얄밉다는 듯 쳐다보는 인협이었다. “그래서, 읍내에서 적당히 연습 끝나면 나랑 시내로 나가줄 거야? 아님, 내가 시내에 최악의 식당 하나 알아볼게. 거기부터 연습해 볼래?”“아직.” “알겠어. 으이그, 사연 많은 나인협.”에스더가 인협을 향해서 눈을 흘기던 순간, 식당 문이 열리며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셋이서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을 본 인협은 숨을 참으며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렸다. 제발 이쪽으로는 오지 말아라. 제발. 간절한 기도가 통한 건지, 다행히도 사장은 그들을 식당 반대편 자리로 이끌었다. “후-.” “뭐야? 너 혹시….”그런 인협을 지켜보던 에스더가 목소리를 낮추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범죄자는 아니지? 뭐 사회에서 굉장히 비난받을 짓을 했다거나…” “…….”정곡을 찔린 인협은 아무 답도 하지 못한 채로 마른침을 삼켰다. “야, 케이비 요새 폼이 너무 떨어졌더라.”익숙한 단어에 인협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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