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집에 도착한 인협은 바로 한구석에 먼지 쌓인 채로 있던 낡은 교자상을 폈다.
그러고는 병째로 독한 술을 입에다가 들이붓기 시작했다. 세상을 향한 미움과 스스로를 향한 혐오가 올라올 때마다 그는 이렇게라도 마음을 씻어내렸다.
술기운에 정신이 몽롱해지면, 머릿속이 한층 둔해졌는데, 예전에는 멍청해지는 것만 같아서 싫던 감각이 이제는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내 주어서 좋았다.
폭발적으로 흘러가는 생각의 흐름의 물꼬를 막아주는 느낌이 들어서.
늘 생각의 끝에는 자기혐오가 똬리를 트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의 흐름을 독한 술로라도 끊어내야만 했다.
“후-.”술기운이 가득한 숨을 내뿜으며 인협은 바닥에 엉덩이를 두고 소파 앞에 기대어 앉은 채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군데군데 물이 샌 탓인지, 얼룩진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니 술병 여러 개가 굴러다니는 바닥이 보였다.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나무상, 아침에 개지도 않아 멋대로 구겨져 있는 이부자리.
여기서 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소원리에 온 후, 그가 전부라고 여겼던, 뒤처지면 죽을 것만 같던 분주한 세상과 단절되어 외딴섬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좋으면서도 비참했다.
좋은 이유는 고요해서 좋았다.
사람들을 더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좋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에 숨지 않아도 되어서.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의 눈빛에 등껍질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거북이처럼 움츠러들지 않아도 돼서.
비참한 이유는 이곳으로 도망치듯이 온 이유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상황에 등 떠밀려 이곳에 오게 된 탓이었다. 그리고 늘 그는 떠밀려버린 자신을 맨 끝에 미워하게 되었다.
나는 왜 이리 나약할까.
스스로 정직하고 강하다고 믿으며 자랑스러워하던 시절이 아득할 정도였다.
사실은 그 모든 게 거짓이고, 억지로 꾸며냈던 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그를 종종 집어삼켰다.
지금의 그는 형편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다 놓아버리고 싶었다.
고요하고 깜깜한 밤에 찾아오는 절망보다, 모두가 행복한 일상을 살아내는 대낮에 찾아오는 절망은 다르게 무거웠다.
인협은 그대로 취기를 빌려 잠을 청했다. 이렇게라도 한숨 자고 나면 한결 마음이 정리되는 것 같아서였다.
적어도 죽고 싶다는 깊은 절망에서는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마치 카페에 나오는 배경 음악처럼, 그날 이후로는 그의 머릿속에 늘상 재생되고 있는, 그를 힐난하는 목소리가 잠시나마 멈출 테니까.
***“내가 미쳤지.”
마을 초입에 세워진 택시에서 내린 에스더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끌어서 오르막길을 올라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인협의 낡은 집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손에 땀이 났다.
소원리에 온 후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 대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인협은 달랐다.
순간의 동정심이었나.
그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안주 없이 깡소주를 대낮부터 들이붓는 사람을 향한 동정심이 있지 않을까.
도의적 차원의 마음인 거지, 이건.
에스더는 속으로 스스로의 충동적인 행동에 대해 합리화했다.
소원 초등학교 교문 앞에 잠시 멈추어선 에스더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인협의 집을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밖으로 나간 거면 좋겠네.
속으로 간절히 기도한 그녀였으나, 그런 독한 술을 혼자서 들이붓고 인협이 즐겁게 산책이라도 갔으리라는 희망은 헛된 것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햇빛을 오래 맞으면 죽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는 늘 칩거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처럼 그가 밭을 돌볼 일도 없을 터였다.
“후-.”내가 저지른 짓. 내가 수습해야지.
에스더는 결의의 찬 눈빛으로, 손으로 끌던 장바구니를 교문 앞에 세워두고는 비닐봉지에 싸여진 컵 물회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가자. 가보자고.
에스더는 인협에게 줄 봉지를 들고서 길을 내려갔다.
생각보다 인협의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니 벌써 눈앞에 집이 있었다.
“저기요, 계세요?”에스더의 조심스러운 부름에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술 먹고 뻗은 건가. 그럼, 이것만 문 앞에 던지고 올까? 아니면 노크라도 할까?
더운 날씨에 밖에다가 두면 상할 게 뻔했기에 에스더는 결국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겨서 낡은 철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똑똑. 투박한 소리가 울려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은 고요했다. 쾅쾅쾅. 조금 더 힘이 실린 주먹이 철문을 쳤다.
그래도 집안은 조용했다.
“자나?”그럼, 어쩔 수 없지.
어깨를 한번 으쓱인 에스더가 물회를 집 앞에 내려놓으려던 순간, 에스더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하나 스쳤다.
혹시 잘못된 건 아니겠지?
금방이라도 자신을 놓을 것만 같았던, 위태위태해 보이던 인협이었다. 그런 데다가 술까지 들어갔으면.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에스더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쾅.
잠겨있지도 않았던 낡은 철문을 격하게 열어젖히자, 눈앞에는 창백한 얼굴로 소파에 쓰러지듯이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인협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요?”에스더는 긴장한 얼굴로 그런 인협을 바라보았다. 바닥에는 술병이 여럿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삶을 완전히 포기해 버린 사람의 모습 같았다.
“저기요! 인협 씨!”에스더는 물회가 든 봉지를 내팽개치고는 단박에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귀를 그의 가슴팍에 갖다 댔다.
쿵쿵-.
얄팍하게나마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
그 체온이 따스했고, 그 안에서 뛰는 심장 소리는 느렸으나 충분히 강했다.
"와, 십년감수했다.”
인협의 생사 확인을 마친 에스더가 인협 바로 옆에 무릎을 꿇고서 낮췄던 상체를 다시 일으켰을 때였다.
그때 인협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으아악-!!!!”화들짝 놀란 에스더는 비명을 질러댔다.
“시끄러워-.”술기운에 눈이 살짝 풀린 인협은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아, 미안. 미안해요.”에스더는 항복 자세처럼 양손을 펼친 채로 들고 있었다.
이내 흐리멍덩하던 인협의 두 눈에 빛이 돌아오며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네? 그게-.”마트에서 컵 물회를 원쁠원 세일을 하길래 그쪽이 안주도 없이 술 먹을 게 떠올라서 샀어요. 그래서 당신 집에 왔는데, 그쪽이 답이 없어서 어떻게라도 된 줄 알고 무단침입을 했어요.
그에게 어떻게 답할지 망설이는동안 머릿속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나열한 에스더는 눈을 꾹 감았다.
이거 원 말도 안 되는, 개뼉다구같은 소리네.
아주 너른 마음씨를 가진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해도 이해해줄까 말까인데, 누군가에게 분노를 터뜨리지 못해 혈안이 되어있는 인협에게 이해받을 수는 없을 터였다.
절대로.
매서운 인협의 눈빛에 에스더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요? 이렇게 불쑥 남의 집에 쳐들어온 이유가 뭐냐고요.”에스더가 활짝 열어둔 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빛은 엉망인 집안을 적나라하게 비춰주었다.
멋대로 놓인 채로 여기저기서 뒹구는 술병들을 본 인협은 더 큰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어딘가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나만의 추한 진실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에게 들킨 기분도 들었고.
“저-.”이상한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덜 이상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대느냐.
갈팡질팡하는 에스더의 마음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인협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가자, 그녀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제가 오늘 장을 보러 갔는데, 컵 물회가 원쁠원으로 싸게 팔지 뭐예요? 시식을 했는데 맛있어서 사고 싶었는데, 두 개를 먹을 자신은 없었고요. 얼려두고 나중에 먹기에는 집 냉동고에 자리가 없었어요.”
“그래서요?” “알다시피 날이 좀 덥잖아요. 문 앞에 두고 가면 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내가 회를 먹는지, 물회를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 있어요? 그리고, 왜 원하지도 않았는데 쓸데없는 짓을 합니까?” “…….”인협의 질문 세례에 늘 당당하던 에스더는 합죽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지나치게 뾰족했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누가 날 동정해달라고 했어요? 왜요? 나한테 이런 싸구려 친절 베풀어 주면, 그쪽 양심에 도움이 좀 되어서요?”부들부들.
마디가 새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쥔 에스더의 주먹이 떨렸다.
“그건-.”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를 어쭙잖게 동정한 건 사실이었다.
혼자고, 삶이 괴로워 보이니까 당연히 이런 조그마한 친절을 고마워하리라고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이 작은 친절이 인협에게 한 줄기 빛이 되지 않을까, 라는 약간의 오만함도 있었다.
“갖다 버릴게요.” “네?”에스더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자 심기가 더 불편해진 인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저걸.” “그래도 어떻게 버려요? 그것도 사다 준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데?” “못 들었어요? 나는 싫어요.”인협이 몸을 재빠르게 움직여 바닥에 뒹구는 봉지를 집어 들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 순간 에스더는 벌떡 일어나 그런 그의 팔을 붙들었다. 보기보다 단단한 팔이었다.
“버리지 마요. 빈속에 술 먹지 말라고 산 거라고요.” “남이사, 빈속에 술을 먹든 말든 뭔 상관이냐고요? 이거 놔요.”인협이 힘을 실어서 팔을 한번 세게 흔들었다. 그러나 에스더 양손의 힘도 어마어마한 탓에 그녀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요즘 교사 월급이 얼마나 박봉인 줄 알아요?” “하-.”이번엔 동정심 유발 작전인가.
에스더는 애원하듯이 인협에게 따졌다. 그리고 그걸 본 인협은 어이가 없어져서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버리지는 말자고요.”초장에 잡아야 이런 짓을 다시는 안 하지.
에스더의 말에 더 단호해진 눈빛으로 인협은 손을 뻗어서 봉투를 잡았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안 돼요!”인협의 팔을 두 팔로 얽어 잡은 에스더는 자리에 앉은 채로 제 온 몸무게를 실어서 버티기 시작했다.
“뭔 여자가 이렇게 무식하게 힘이 세?” “안된다고요!” “놔-.” “싫어요!”이어진 실랑이에 이성은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둘은 유치한 어린아이들 싸움하듯이 우겨대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하게 구는 에스더에게 점점 더 화가 난 인협은 더 강한 힘을 실어서 팔을 세게 떨쳐냈다.
“어-.”에스더는 인협의 팔을 놓쳤고, 그녀가 양팔에 힘을 실었던 만큼 빠르게 몸이 뒤로 기울어지는 걸 느꼈다.
“어어-!”쾅. 순간 에스더의 눈앞에 별이 반짝했다.
이렇게 올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연재가 매우 뜸해진 이유를 설명드리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ㅜ ㅜ 다름이 아니라, 제가 9월부터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워낙에 해야할 양이 많다보니 소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리 불성실한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ㅜ ㅜ 작품을 지켜봐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마도 앞으로 10회 이내에 이 작품은 완결될 예정이오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아이씨, 정현이만 아니었어도 이런 개고생 안 하는 건데 말이야.”“행님도, 참. 의리가 너무 좋으시다 아닙니까?”폐건물의 구석진 곳. 남자들의 대화 소리를 못 들은 척, 기절한 척을 한 인섭이었다. 불과 10분 전쯤 남자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고, 머리를 발에 차인 인섭은 기절한 척을 하기로 했다. 녹음기는 잘 켜져 있을 거야. 인섭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강의 때 챙겨 다니던 녹음기를 몸에 지니고 온 터였다. 늘 강의 내용을 녹음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것으로 인협에게 유리한 단서를 잡아내 볼까 싶어서였다. 일단 박정현 감독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나왔네. 인섭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똑똑. 누군가가 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뭐야? 그 형 놈인가?”“저…. 세분 드실 것 좀 사 왔어요.”부용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한 그녀의 음성에 세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 온 지 어언 세 시간째. 슬슬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아까 쟤 오기 전에 혼자 내뺀 거 아니었어?”“내빼기는요. 사실 아들을 이런 일로 보기도 껄끄럽고,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잠시 나가 있다가 세분이 좀 허기질 것 같아서요.”“…….”아들을 향한 일말의 모성애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에 가담했을까.부용의 말에 한 남자는 코웃음을 쳤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박판에 온 사람치고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없기 때문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도박할 돈을 그때그때 뜯어내고는, 가족들이 얼마나 빈곤하거나 곤란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들이야 도박판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남자가 말을 얹지 않은 것은 부용이 가져온 음식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장남 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글쎄요. 30분이면 올 거리일 텐데요….”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때, 건물 밖에서부터 차 소리가 들렸다. 셋 중 하나가 황급히 일어나 바깥 상황을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