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집에 도착한 인협은 바로 한구석에 먼지 쌓인 채로 있던 낡은 교자상을 폈다.
그러고는 병째로 독한 술을 입에다가 들이붓기 시작했다. 세상을 향한 미움과 스스로를 향한 혐오가 올라올 때마다 그는 이렇게라도 마음을 씻어내렸다.
술기운에 정신이 몽롱해지면, 머릿속이 한층 둔해졌는데, 예전에는 멍청해지는 것만 같아서 싫던 감각이 이제는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내 주어서 좋았다.
폭발적으로 흘러가는 생각의 흐름의 물꼬를 막아주는 느낌이 들어서.
늘 생각의 끝에는 자기혐오가 똬리를 트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의 흐름을 독한 술로라도 끊어내야만 했다.
“후-.”술기운이 가득한 숨을 내뿜으며 인협은 바닥에 엉덩이를 두고 소파 앞에 기대어 앉은 채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군데군데 물이 샌 탓인지, 얼룩진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니 술병 여러 개가 굴러다니는 바닥이 보였다.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나무상, 아침에 개지도 않아 멋대로 구겨져 있는 이부자리.
여기서 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소원리에 온 후, 그가 전부라고 여겼던, 뒤처지면 죽을 것만 같던 분주한 세상과 단절되어 외딴섬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좋으면서도 비참했다.
좋은 이유는 고요해서 좋았다.
사람들을 더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좋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에 숨지 않아도 되어서.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의 눈빛에 등껍질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거북이처럼 움츠러들지 않아도 돼서.
비참한 이유는 이곳으로 도망치듯이 온 이유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상황에 등 떠밀려 이곳에 오게 된 탓이었다. 그리고 늘 그는 떠밀려버린 자신을 맨 끝에 미워하게 되었다.
나는 왜 이리 나약할까.
스스로 정직하고 강하다고 믿으며 자랑스러워하던 시절이 아득할 정도였다.
사실은 그 모든 게 거짓이고, 억지로 꾸며냈던 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그를 종종 집어삼켰다.
지금의 그는 형편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다 놓아버리고 싶었다.
고요하고 깜깜한 밤에 찾아오는 절망보다, 모두가 행복한 일상을 살아내는 대낮에 찾아오는 절망은 다르게 무거웠다.
인협은 그대로 취기를 빌려 잠을 청했다. 이렇게라도 한숨 자고 나면 한결 마음이 정리되는 것 같아서였다.
적어도 죽고 싶다는 깊은 절망에서는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마치 카페에 나오는 배경 음악처럼, 그날 이후로는 그의 머릿속에 늘상 재생되고 있는, 그를 힐난하는 목소리가 잠시나마 멈출 테니까.
***“내가 미쳤지.”
마을 초입에 세워진 택시에서 내린 에스더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끌어서 오르막길을 올라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인협의 낡은 집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손에 땀이 났다.
소원리에 온 후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 대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인협은 달랐다.
순간의 동정심이었나.
그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안주 없이 깡소주를 대낮부터 들이붓는 사람을 향한 동정심이 있지 않을까.
도의적 차원의 마음인 거지, 이건.
에스더는 속으로 스스로의 충동적인 행동에 대해 합리화했다.
소원 초등학교 교문 앞에 잠시 멈추어선 에스더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인협의 집을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밖으로 나간 거면 좋겠네.
속으로 간절히 기도한 그녀였으나, 그런 독한 술을 혼자서 들이붓고 인협이 즐겁게 산책이라도 갔으리라는 희망은 헛된 것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햇빛을 오래 맞으면 죽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는 늘 칩거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처럼 그가 밭을 돌볼 일도 없을 터였다.
“후-.”내가 저지른 짓. 내가 수습해야지.
에스더는 결의의 찬 눈빛으로, 손으로 끌던 장바구니를 교문 앞에 세워두고는 비닐봉지에 싸여진 컵 물회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가자. 가보자고.
에스더는 인협에게 줄 봉지를 들고서 길을 내려갔다.
생각보다 인협의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니 벌써 눈앞에 집이 있었다.
“저기요, 계세요?”에스더의 조심스러운 부름에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술 먹고 뻗은 건가. 그럼, 이것만 문 앞에 던지고 올까? 아니면 노크라도 할까?
더운 날씨에 밖에다가 두면 상할 게 뻔했기에 에스더는 결국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겨서 낡은 철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똑똑. 투박한 소리가 울려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은 고요했다. 쾅쾅쾅. 조금 더 힘이 실린 주먹이 철문을 쳤다.
그래도 집안은 조용했다.
“자나?”그럼, 어쩔 수 없지.
어깨를 한번 으쓱인 에스더가 물회를 집 앞에 내려놓으려던 순간, 에스더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하나 스쳤다.
혹시 잘못된 건 아니겠지?
금방이라도 자신을 놓을 것만 같았던, 위태위태해 보이던 인협이었다. 그런 데다가 술까지 들어갔으면.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에스더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쾅.
잠겨있지도 않았던 낡은 철문을 격하게 열어젖히자, 눈앞에는 창백한 얼굴로 소파에 쓰러지듯이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인협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요?”에스더는 긴장한 얼굴로 그런 인협을 바라보았다. 바닥에는 술병이 여럿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삶을 완전히 포기해 버린 사람의 모습 같았다.
“저기요! 인협 씨!”에스더는 물회가 든 봉지를 내팽개치고는 단박에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귀를 그의 가슴팍에 갖다 댔다.
쿵쿵-.
얄팍하게나마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
그 체온이 따스했고, 그 안에서 뛰는 심장 소리는 느렸으나 충분히 강했다.
"와, 십년감수했다.”
인협의 생사 확인을 마친 에스더가 인협 바로 옆에 무릎을 꿇고서 낮췄던 상체를 다시 일으켰을 때였다.
그때 인협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으아악-!!!!”화들짝 놀란 에스더는 비명을 질러댔다.
“시끄러워-.”술기운에 눈이 살짝 풀린 인협은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아, 미안. 미안해요.”에스더는 항복 자세처럼 양손을 펼친 채로 들고 있었다.
이내 흐리멍덩하던 인협의 두 눈에 빛이 돌아오며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네? 그게-.”마트에서 컵 물회를 원쁠원 세일을 하길래 그쪽이 안주도 없이 술 먹을 게 떠올라서 샀어요. 그래서 당신 집에 왔는데, 그쪽이 답이 없어서 어떻게라도 된 줄 알고 무단침입을 했어요.
그에게 어떻게 답할지 망설이는동안 머릿속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나열한 에스더는 눈을 꾹 감았다.
이거 원 말도 안 되는, 개뼉다구같은 소리네.
아주 너른 마음씨를 가진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해도 이해해줄까 말까인데, 누군가에게 분노를 터뜨리지 못해 혈안이 되어있는 인협에게 이해받을 수는 없을 터였다.
절대로.
매서운 인협의 눈빛에 에스더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요? 이렇게 불쑥 남의 집에 쳐들어온 이유가 뭐냐고요.”에스더가 활짝 열어둔 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빛은 엉망인 집안을 적나라하게 비춰주었다.
멋대로 놓인 채로 여기저기서 뒹구는 술병들을 본 인협은 더 큰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어딘가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나만의 추한 진실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에게 들킨 기분도 들었고.
“저-.”이상한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덜 이상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대느냐.
갈팡질팡하는 에스더의 마음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인협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가자, 그녀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제가 오늘 장을 보러 갔는데, 컵 물회가 원쁠원으로 싸게 팔지 뭐예요? 시식을 했는데 맛있어서 사고 싶었는데, 두 개를 먹을 자신은 없었고요. 얼려두고 나중에 먹기에는 집 냉동고에 자리가 없었어요.”
“그래서요?” “알다시피 날이 좀 덥잖아요. 문 앞에 두고 가면 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내가 회를 먹는지, 물회를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 있어요? 그리고, 왜 원하지도 않았는데 쓸데없는 짓을 합니까?” “…….”인협의 질문 세례에 늘 당당하던 에스더는 합죽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지나치게 뾰족했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누가 날 동정해달라고 했어요? 왜요? 나한테 이런 싸구려 친절 베풀어 주면, 그쪽 양심에 도움이 좀 되어서요?”부들부들.
마디가 새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쥔 에스더의 주먹이 떨렸다.
“그건-.”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를 어쭙잖게 동정한 건 사실이었다.
혼자고, 삶이 괴로워 보이니까 당연히 이런 조그마한 친절을 고마워하리라고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이 작은 친절이 인협에게 한 줄기 빛이 되지 않을까, 라는 약간의 오만함도 있었다.
“갖다 버릴게요.” “네?”에스더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자 심기가 더 불편해진 인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저걸.” “그래도 어떻게 버려요? 그것도 사다 준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데?” “못 들었어요? 나는 싫어요.”인협이 몸을 재빠르게 움직여 바닥에 뒹구는 봉지를 집어 들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 순간 에스더는 벌떡 일어나 그런 그의 팔을 붙들었다. 보기보다 단단한 팔이었다.
“버리지 마요. 빈속에 술 먹지 말라고 산 거라고요.” “남이사, 빈속에 술을 먹든 말든 뭔 상관이냐고요? 이거 놔요.”인협이 힘을 실어서 팔을 한번 세게 흔들었다. 그러나 에스더 양손의 힘도 어마어마한 탓에 그녀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요즘 교사 월급이 얼마나 박봉인 줄 알아요?” “하-.”이번엔 동정심 유발 작전인가.
에스더는 애원하듯이 인협에게 따졌다. 그리고 그걸 본 인협은 어이가 없어져서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버리지는 말자고요.”초장에 잡아야 이런 짓을 다시는 안 하지.
에스더의 말에 더 단호해진 눈빛으로 인협은 손을 뻗어서 봉투를 잡았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안 돼요!”인협의 팔을 두 팔로 얽어 잡은 에스더는 자리에 앉은 채로 제 온 몸무게를 실어서 버티기 시작했다.
“뭔 여자가 이렇게 무식하게 힘이 세?” “안된다고요!” “놔-.” “싫어요!”이어진 실랑이에 이성은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둘은 유치한 어린아이들 싸움하듯이 우겨대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하게 구는 에스더에게 점점 더 화가 난 인협은 더 강한 힘을 실어서 팔을 세게 떨쳐냈다.
“어-.”에스더는 인협의 팔을 놓쳤고, 그녀가 양팔에 힘을 실었던 만큼 빠르게 몸이 뒤로 기울어지는 걸 느꼈다.
“어어-!”쾅. 순간 에스더의 눈앞에 별이 반짝했다.
“아으, 으으-.”곤히 잠들어있던 에스더는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살며시 떴다. 아직 어두운 새벽 시간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느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한,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에 에스더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둑이 든 건 아니겠지? 누군가가 인협의 목이라도 조르는 듯한 끔찍한 소리였다. 에스더는 긴장한 채로 옆에 보이는 스탠드를 집어 들었다. 이 정도면 도둑을 아프게 만들 수 있겠지.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둠 속, 어렴풋이 보이는 거실에는 다른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으으, 아니야. 그만-.” “인협아-.”에스더는 스탠드를 내려놓고서 인협에게 달려갔다. 그의 표정은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주룩-. 도통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인협의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인협아, 일어나봐. 야-.”에스더가 인협의 어깨를 붙들고 거칠게 흔들어대자, 신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때, 인협이 숨을 거칠게 쉬며 눈을 떴다. “괜찮아?”아직도 꿈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인협은 눈이 살짝 풀린 채로 에스더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가득한 절망과 무력감이 고스란히 에스더에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아, 에스더도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악몽 꿨어?”에스더의 나지막한 물음에 인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손으로 그의 등을 받쳐서 에스더는 인협의 상체를 일으켜주었다.그러자 인협이 순순히 그녀의 움직임을 따랐다.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 “무슨 악몽이길래-. 물이라도 한잔 갖다줘?”에스더의 음성은 인협을 달래듯이 절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응, 고마워.”인협의 답에 에스더는 물 한 잔을 준비해 그에게 갖다주었다. 묵묵히 그녀만 기다리던 인협은 그것을 받아서 들자마자 몽땅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에스더는 달빛 아래 보이는 그 모습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괜찮아?”잔을 내리며 한
최 씨는 구멍가게 앞, 낡을 대로 낡아 색이 다 바래버린 자판기 옆 평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위에 길게 늘어진 처마 너머로 내려오는 빗줄기를 구경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가 들려있었고, 그의 앞에는 조금 전 기탁이 방문하며 놓고 간 보온 가방이 있었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말라는 다정한 잔소리를 늘 꿋꿋이 해대는 양반이었다.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최 씨를 여태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인물이기도 했고. 원래 이렇게 반강제로 농사를 쉬어야 하는 날이면 고 이장의 무리가 방문하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무도 소식이 없었다.오늘이 나를 빼고 노는 날이던가. 최 씨는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고, 때때로 공짜로 마른안주나 술을 내어주기도 해서 그들이 자신을 이용 가치로만 보는 걸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를 아래로 보고, 때때로 그를 뒤에서나 앞에서 대놓고 비웃기도 하면서 최 씨를 종종 모임에 끼워주고는 했다. 남 주려니 아깝고, 진짜 친구로 받아들이자니 그들의 눈에는 최 씨가 한참 모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부인이 그를 두고 도망간 버린 후부터 원래도 팽배했던 그들의 업신여김이 더 심해졌다. ‘자고로 성공한 사내라면 옆에 훌륭하게 내조해 주는 부인이 꼭 있어야지.’그런 말을 끝마친 고 이장이나 심 씨의 시선 끝에 걸리는 건 최 씨였다. “후-.”최 씨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연기가 되어 흩어져 나왔다. 아내는 첫째 딸의 아이보는 걸 도와줘야한다며 서울로 떠나버렸다. 딸아이가 육아로 많이 힘들어한다면서 도와야겠다는 이유였다. 그게 벌써 5년 전이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듣자 하니 아내는 두 집을 오가며 손주들을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난 후,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소원리에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하게 되는 연락도 용건만 간단히. 최 씨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면, 그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그렇다고 아내와 마을 사람들
꺄아아-.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 “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
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 “갈아입을 옷이-.” “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 “네….”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 “네.”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좋다-.”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그 환
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끄으응-.”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