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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난 기다릴 수 있어

Author: 랑끗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2 15:19:48

“이놈의 여편네가! 요새 내가 조용히만 있었더니!!”

포터에서 내리자마자 집에서부터 들려온 거친 음성에 정렬이 집안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쾅. 

현관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자마자 거실 바닥에 주저앉듯이 쓰러진 엄마인 애라와 그 앞에 머리 위로 손을 들고 선 원길이 보였다. 

참 익숙하면서 끔찍하고 동시에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늘 유순한 시골 청년의 모습을 한 정렬의 두 눈에 일순간 분노의 불이 일었다. 

어렸을 적부터 봐왔던 아버지의 화내는 모습을 혐오해, 도통 화를 내는 적이 없는 정렬이었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포기한 아버지 원길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정렬이 거친 몸짓으로 신발을 벗고서 뛰어 들어가 애라 앞을 막아섰다. 

분노로 인해 거친 숨결을 내뱉는 원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결국 저보다 몸집이 커버린 아들 앞에서는 분노를 삭이고 말 비겁한 그였다. 

”네 엄마가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를 무시했다!”

그놈의 무시. 정렬이 어렸을 적부터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왔던 단어였다.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를 무시했는데요?”

애라는 기력도, 말수도 없는 여자였다. 애초에 무시할 힘조차도 없는 사람이었다.

늘 빼빼 마른 몸으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사부작거리며 이 집에 유령처럼 존재해왔을 뿐. 

일평생 순종적으로 살아오며 제대로 목소리 내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그래서 바보처럼 그녀는 이곳에서 폭력적인 남편 곁에 꾸역꾸역 머물러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집안에 점심거리 하나가 준비가 안 되어있어!”

“아버지가 자주 밖에서 드시잖아요. 그래서 준비를 못 하셨나 보죠.”

상 위에는 간단히 차려진 떡국과 김치 그릇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보나 마나 애라는 간단하게 점심만 때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집안에 당장 먹을 게 하나도 없는 게 말이 돼?!”

“아버지-.”

“고 이장네, 본용이 형님네 봐! 마누라들이 몇 분이면 뜨거운 요리 턱턱 내오지.”

“그러면 최 씨 아저씨도 보세요.”

“뭐?”

정렬의 대꾸에 원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최 씨 아저씨는 그렇게 사셔서 아줌마한테 좋은 대접받고 사세요?”

“…….”

“최 씨 아저씨는 부인을 때리지도 않고 그냥 구박만 했던 거였어요.”

타고나기를 마음이 약해 누군가에게 독설을 절대 못 하던 정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손을 파르르 떨면서도 참으며 독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 아버지인 원길 덕분이었다. 

“뭐?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이따위로 갚아-.”

“네, 먹여주고 재워주는 거 감사하죠. 그런데, 때리시기도 하셨잖아요.”

정렬의 결정타에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원길은 이내 욕지거리를 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쾅. 현관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정렬은 애라 앞에 털썩 앉았다. 

“엄마, 일어나.”

애라의 떨리는 손을 붙든 정렬은 바닥에 쓰러진 듯이 있던 그녀를 똑바로 앉혀주었다. 

애라는 영혼도 없어 보이게 텅 빈 얼굴로 겨우 미소 지었다. 어렸을 적부터 늘 봐왔던, 꼭 사람의 껍데기만 있는듯한 얼굴이었다. 

삶에 늘 지쳐있는, 그늘이 잔뜩 드리워진 얼굴은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힘이 쭉 빠져있었다. 

“괜찮아?”

정렬의 물음에 애라의 파리한 얼굴에 힘없는 미소가 깃들었다. 

“응, 고마워. 아들.”

“엄마, 우리 그냥 다 같이 도망갈까? 최 씨 아저씨네 아줌마처럼 말이야.”

정렬이 어느 때부터인가 늘 해오던 말이었다. 

“아니, 엄마는 여기가 좋아. 네 아빠 불쌍하기도 하잖니.”

꼭 여기에 심긴 나무처럼, 애라는 뿌리를 내린 이곳에서 거처를 옮기기를 거부하고는 했다. 

“뭐가 좋아. 나 출근했을 때 낮에 아버지가 이런 적 많아?”

“아니, 집에 잘 들어오시지도 않아.”

“…….”

차분한 애라의 음성은 늘 정렬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깊고도 잔잔한 물속에는 도통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듯이, 정렬은 애라의 고요한 얼굴 속에 담긴 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점은 그를 늘 불안하게 만들고는 했다. 곧 시들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선, 그저 주어진 불행을 버티기만을 선택하는 엄마의 모습이.

“엄마….”

“괜찮아. 밥 안 먹고 들어왔지?”

“됐어, 앉아 있어. 내가 알아서 차려 먹을게. 떡국 불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애라를 앉힌 정렬은 그녀 대신 부엌으로 향해 밥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숨죽여 눈물을 흘리고는 손등으로 거칠게 그것을 닦아냈다. 

숨 막힐 정도의 분노가 휩쓸고 지나가면, 또다시 숨 막히는 고요함이 내려앉는 집안이었다. 

이런 내가 어떻게. 

잠시 감은 눈앞에 에스더의 밝게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부정해도 더러운 주정꾼의 피가 흐르는 그였다. 

어쩌면 사랑하는 여자에게도 저도 그렇게 돌변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사랑해서 야반도주를 했던 부모님의 사랑이 이렇게 악취 나게 변질되어 버린 것처럼. 

정렬은 밀려오는 공포에 이내 에스더를 향한 마음에 체념을 다짐하고 말았다.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끔찍한 경험을 선물해 줄 필요는 없잖아, 라고 누군가가 그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

그날 저녁. 식탁에 마주 앉은 에스더와 인협이 밥을 먹고 있었다. 

“내일 교장 선생님이 옆집 문 열어주신대. 지금 우리 집에 있는 가구 그대로 옆집에 있다던데.”

“아, 진짜?”

“그리고 내일부터 출근하면 된대. 아이들 수업 자료 넘겨줄게.”

“네가 좀 많이 알려줘. 아이들 가르쳐 본 경험이 전혀 없어서.”

“좋아. 일단 예체능은 확실히 부담이 덜하니까, 걱정하지 마. 대부분 네가 자율적으로 준비하면 될 거야.”

에스더의 작은 응원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별것 아닌 말을 해서 상대를 힘 나게 해주는 재주가 있는 그녀였다. 

“덕분에 살 곳이랑 일자리까지 구했네. 고마워.”

“고마우면 나중에 한턱내던지.”

“그래.”

“나중에 동해 시내 나가서 맛있는 거 사줘. 읍내 말고.”

에스더의 제안에 인협이 잠시 멈칫했다. 

“왜?”

“귀찮은데 읍내로 나가거나 배달시키자.”

“인협아, 여기 읍내에서도 30분은 들어와야 하는 시골이야. 배달은 안 온단다.”

“그럼….”

“아 됐어, 밥 사주기 싫으면 말아라. 보기보다 치사빤스네.”

애스더의 토라진 얼굴을 본 인협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냐, 밥 사주고 싶어. 당연히 사야지.”

“근데, 왜 시내는 안 되는데? 거기까지는 나가야 맛있는 게 많지.”

“…….”

인협은 차마 사람들이 저를 알아볼까 봐, 라는 걱정 어린 진심을 꺼내지 못했다.

“봐봐, 시내 나가서 밥 사달라고 말 꺼낸 나만 이상한 사람 같잖아.”

“왜 네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데?”

“나만 신나서 안달 난 사람처럼, 그림이 좀 그렇잖아.”

입술을 쑥 내민 에스더를 본 인협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답지 않은 인협의 다정한 말에 에스더가 시선을 들어 인협을 마주 보았다. 

“내가 사정상 사람 많은 곳은 좀 힘들어서 그래.”

“아-.”

대인기피증, 뭐 그런 건가? 

에스더는 인협의 사정도 모르고 조금 전 투정을 부린 게 미안해져, 금방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그럼 나랑 밥은 먹고 싶다는 소리인 거지?”

“그럼,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건 뭔데.”

“어어? 집밥이랑 밖에서 사 먹는 밥은 다르지!”

금세 기분이 좋아져 들뜬 에스더를 본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를 보고 있자면, 죽은 줄만 알았던 인협의 감정에 그녀의 다채로운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마치 흐릿한 색만 있는 그의 팔레트에 에스더가 알록달록한 색을 입혀주는 듯한 느낌이랄까. 

뭐가 그리 좋은 것도 많고, 싫은 것도 많은지.

그일 이후로 키워진 분노 외엔 일평생 크게 기쁠 것도 없고 슬플 것도 없이 살아왔던 인협에게는 새로웠다. 

“뭐가 그렇게 달라?”

“일단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다르잖아. 일단 밖에서 만나서 밥 먹으려면 약속 날까지 설레고 기분이 좋아. 적당히 차려입고 준비도 해야 하고, 시내까지 나가면 평소에 달라진 환경에 또 기분이 좋고.”

“그래?”

인협은 오늘의 저녁 메뉴인 간장 계란밥을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맛있는 밥이 딱 대령이 된다는 것. 뒤처리도 할 필요가 없어. 난 음식 맛만 즐기기만 하면 끝.”

“같이 외식하는 게 그 정도의 의미야?”

“그러엄, 게다가 두 사람이 각자의 소중한 시간을 내서 밥을 함께 먹는 데에도 의미가 있지.”

에스더의 세세한 설명에 인협의 입꼬리는 어느새 올라가 있었다. 

무채색으로 재미없게 칠해져 있어서 큰 의미가 없던 외식이라는 단어가 에스더로 인해 알록달록 물든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의 일상이 그러하였듯이.

사소하게는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도, 더운 날 집에 도착해 에어컨을 트는 것도. 

에스더는 일상의 부분들이 마치 큰 행복의 근원이 되는 양 기쁨을 크게 느끼는 듯해 보였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인협에게까지 전염이 되어 미소로 번졌다. 

“귀엽네.”

“응?”

인협이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에스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응시했다. 

미친, 나 왜 갑자기 뜬금없이 저 말을 한 거지? 

인협은 당황하며 재빨리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아, 오늘 양 목사님 댁에 반찬통 갖다드리면서 예솜이를 봤었거든. 갑자기 예솜이 얼굴이 떠올라서.”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예솜이 핑계로 겨우 둘러댄 인협은 에스더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예솜이? 진짜 귀엽지! 근데 너는 지난번에 애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기나 하고-.”

다행히 에스더의 얼굴에는 일말의 의심조차 없어 보였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래서 오늘 사과했어. 예솜이가 나 나올 때는 안아주던데.”

“우리 예솜이가 소원리에 소문난 천사라서 다행이지.”

“그때는…. 알잖아. 물론 아이 마음에 상처 낸 걸 핑계 대면 안 되는 거긴 하지만.”

인협의 진심 어린 고백에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를 째려보던 에스더는 표정을 풀었다. 

“알겠어. 이번에는 봐줄게. 대신, 너 학교에서 가르칠 때 애들한테 그런 식으로 조금이라도 막 대하면 바로 교장 선생님한테 내가 보고할 거야.”

“알겠어.”

“아무튼, 그럼, 사람 많은 데 갈 수 있게 되면 나랑 시내 나가서 밥 한 끼 먹어. 그날은 당연히 네가 사고.”

에스더의 집요함에 인협은 쿡쿡 웃고 말았다. 

“뭐가 이렇게 집요해?”

“그냥, 너한테 밥 한 끼 정도는 얻어먹어야겠어.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하면 널 좀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에스더의 대꾸에 밥그릇에 시선을 두었던 인협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되게 속이야기 안 하는 거 알아? 사실 나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왜 알고 싶은데?”

인협의 대꾸에 답을 고민하는 에스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냥.”

“뭐야, 그게.”

“그냥 궁금해, 네가. 사실 여기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

에스더의 간결한 대답에 인협은 잠시 생각에 잠긴 채로 에스더를 응시했다. 

너는 어디까지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나중에.”

“응?”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인협의 답에 에스더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래, 언제든지 준비되면 말해줘.”

“뭐가 그렇게 좋아? 네가 궁금한 거 지금 당장 말해줄 생각 없다는데.”

“거절은 아니잖아. 서서히 네가 준비되면 알려준다는 거니까. 날 경계할 사람으로 느낀 건 아니라는 의미기도 하고.”

“…….”

“그러니까 나는 기다릴 수 있어.”

소원리 고 이장 무리를 비롯해 그의 가족까지. 

인협의 삶 속에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마음 문을 멋대로 두들겨대고 있던 터라 그런지, 그를 향한 에스더의 여유가 유독 크게 와닿은 그였다. 

어쩌면 존중이라는 마음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마음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열어줘.”

“…….”

“밥도, 네 이야기도 난 기다릴 수 있어.”

그녀가 한 발짝 물러나 준 만큼 인협은 드디어 숨 쉴 틈이 생긴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방에서 모든 게 그를 욱여싸고 압박해 대던 삶 속에서 드디어 온전한 그로써 숨 쉴 수 있는 틈새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

최 씨 가게 다음으로 마을 초입에 가까운 고 이장의 집. 

소원리에서 가장 넓고, 가장 새로 지어진 순옥과 영애의 집 다음으로 예쁘게 꾸며진 집이었다. 

안방에는 런닝에 트렁크 차림으로 침대에 누운 고 이장이 배를 긁으며 티브이에 골프 채널을 틀어놓고 있었다. 

집 안 거실에 놓인 가죽 소파에 앉은 심 씨는 저녁에도 여전히 심술궂은 얼굴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늘 배경음악처럼 틀어놓는 티브이 속에는 패널들이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식아!”

[아, 엄마. 전화 너무 자주 하지 말라니까.]

“너, 너. 또 걔가 뭐라고 하니?”

수화기 너머로부터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엄마, 내가 피곤해서라고 몇 번을 말해. 그리고 걔가 아니라 정민이라고 불러]

“말해봐, 걔가 뭐라 했냐고!”

[엄마, 매번 이러면 나 전화 안 받아]

“뭐라고?”

[매번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는 고함만 질러대고, 며느리 존중은 할 줄도 모르고]

“제식아-.”

충격에 물든 심 씨의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너, 도대체 걔가 어떻게 굴었길래 너희 엄마한테 이래? 응?”

[엄마, 나 엄마한테 살가웠던 적 단 한 번도 없어. 그나마 정민이가 안부 전화 드리고 받으래서 받는 거지]

“뭐? 걔가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마는 거야? 네가 걔 종이야?!”

[끊어요. 다시는 전화 안 받아요. 이번 추석에도 안 내려가]

“야, 고제식! 제식아!”

심 씨의 성난 외침 후 이어진 요란한 통곡 소리에 안방에서 고 이장이 불편한 기색을 담아 기침을 했다. 

“왜 또 난리야! 집안 시끄럽게!”

“아니, 글쎄 우리 제식이가 독한 말 할 줄 모르는 앤데 앞으로 전화 안 받겠다고 하더라니까요?”

“뭐? 이 자식이-.”

고 이장은 핸드폰을 집어 들어서 제식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상냥한 안내에 고 이장은 성난 얼굴로 핸드폰을 확 내려놓았다.

“그럼, 제민이한테 전화를 걸어보자.”

“제민이는 일 년 전부터 연락도 끊고 발길도 끊었잖아요.”

“…….”

“제순이 제옥이는 오래전에….”

“…….”

심 씨의 토로에 둘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에이씨, 자식 농사는 망했어. 그러게 당신이 좀 잘 좀 돌보지 그랬어.”

“자식 농사 망하기는. 내가 얼마나 번듯하게 잘 키웠는데! 며느리랑 사위 농사가 망한 거지.”

애초에 살가운 적도 없던 아들딸들이었다. 

젊은 날의 고 이장과 심 씨는 밭일이다, 술자리다 해서 바쁘게 다니느라 첫째인 제식과 둘째인 제옥이 육아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는 했다.

그마저도 해놓으면 성에 안 찬다며 고 이장과 심 씨에게 야단맞기 일쑤였다. 

그 시절의 부모들이 그랬듯이, 손찌검도 자주 했었다. 

화룡점정은 자녀들이 결혼한 후였다. 

지원을 안 해준 채로 자녀들이 결혼한 후, 그전까지 안 하던 부모 노릇을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심 씨와 고 이장은 자식들에게 제멋대로 굴고는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소원리 방문을 서서히 줄였던 남매들은 결혼 후 하나둘씩 발길을 아예 끊기 시작했다.

딸이라는 이유로 식모처럼 살며 심 씨의 폭력에 가까운 언사를 견뎌왔던 제옥과 제순부터 시작해, 아들들까지.

결국 어렸을 적부터 막내라고 품에 애지중지 끼고 살던 제환만 덜렁 이 소원리에 남게 된 것이었다. 미운 마흔 살이 되어서.

“아, 추석에 마을 사람들한테는 또 뭐라 둘러대?”

“그래봤자 지네가 별수 있겠어요? 잠시는 착각할 수 있어도 부모 품이 최고라는 걸 언젠가는 깨닫겠죠.”

“그래.”

“피 섞인 부모만큼 자기네들 위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다고. 에휴-.”

심 씨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랑끗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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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 웰컴 투 소원리   71. 이대로 끝날 수는 없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 웰컴 투 소원리   70.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 웰컴 투 소원리   69. 물음표로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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