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반면,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은 폭풍 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르세인은 바델이 올린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보고서에는 엘라엔이 오늘 하루 동안 보인 반응들이 시간 단위로 기록되었다.[오전 아홉 시 : 레일리 양과의 식사 소식을 듣고도 평온한 표정 유지.][오후 세 시 : 네르사 양의 소식을 듣고 숙면을 기원. 자수 작업에 몰두.]“숙면을 기원했다고?”르세인의 펜 끝이 서류를 찢을 듯 멈춰 섰다. 그는 셔츠 단추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던졌다.르세인은 사흘 동안 레일라와 네르사를 포함한 정부들을 곁에 두었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정부들의 재롱을 억지로 지켜보며 그녀들의 천박한 향기가 자신의 몸에 배도록 내버려뒀다.그 향기를 묻힌 채 엘라엔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가 코를 찌푸리며 질투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쏘아붙이기를 바랐다.하지만 엘라엔은 완벽하게 무관심했다. 그녀는 르세인이 설계한 질투의 굴레 밖에서 너무나 고결하고 평온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바델, 영애가 정말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나?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르며 불쾌해하지 않았단 말인가.”바델은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예, 황태자 전하. 영애께서는 오히려 평소보다 자수 작업에 더 몰입… 하셨습니다.”르세인은 실성한 듯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분노가 아닌, 지독한 모멸감이 그의 이성을 갉아먹었다.제국의 황태자인 자신이 고작 한 명의 여인에게 관심을 구걸하기 위해 정부들을 도구로 쓰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했다.“내 논리가 틀렸군. 결핍은 갈망을 낳는 법인데 그녀에게 나는 결핍조차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르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에는 서늘한 광기가 다시금 차오르기 시작했다.“황태자 전하, 어디 가십니까.”“그녀가 바라는 대로 숙면을 취하기 위해서라면 그 평온한 얼굴을 직접 짓밟아야겠어.”르세인은 아르젠트 궁을 나서 레비안 전각으로 향했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그의 심장은 비논리적인 열기로 타
그날 오후, 르세인이 예고도 없이 전각을 찾았다. 그는 집무복 차림으로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엘라엔의 뒤로 다가왔다. 르세인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저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그녀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가느다란 손목의 움직임을 관찰할 뿐이었다.그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엘라엔이 카시안의 일을 겪고 무너져 내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하지만 그 평정 아래 숨겨진 거대한 심연을 볼 때마다 르세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왜 평소처럼 내 논리에 반박하지 않는 거지? 왜 그 눈동자에 더 이상 나를 향한 분노조차 담기지 않은 거냐고.그는 엘라엔이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차라리 매달려 카시안을 살려달라 애원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라엔은 그저 평안했다. 그 평안이 르세인에게는 그 어떤 비명보다 더 큰 거절로 다가왔다.“영애, 책 내용이 마음에 듭니까.”결국 르세인이 먼저 침묵을 깼다. 엘라엔은 시선을 책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제국 건국사에 대한 기록이군요. 승자가 어떻게 패자의 역사를 지우고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는지 잘 적혀 있어요. 전하께서 좋아하실 법한 내용이네요.”“역사는 결과로 증명되는 법입니다. 패배한 오류는 기록될 가치가 없죠.”르세인은 엘라엔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가 읽던 책장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당신이 이 평안을 유지하려 애쓰는 이유를 압니다. 내게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서겠지. 영애…. 당신이 침묵할수록 나는 당신의 속내를 파헤치고 싶어지군요. 그게 잔인한 방식이 될지라도.”르세인은 엘라엔의 새하얀 뺨을 아주 느릿하게 그어내렸다. 우습게도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르세인은 이것을 소유물에 대한 집요한 탐구심이라 정의하려 애썼다.하지만 엘라엔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는 순간, 르세인은 깨달았다.자신이 지금 갈구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복종이 아니라 그녀의 루비빛 동공
복도의 끝. 지하 감옥으로 이어지는 육중한 철문 너머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엘라엔은 르세인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는 거대한 어둠을 보았다. 그건 제국을 제패하려는 군주의 눈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진심을 얻지 못해 미쳐가는 남자의 눈이었다.“대답이 없다…?”“황태자 전하!”입매를 잔뜩 비튼 르세인의 손아귀에 잡힌 엘라엔의 손목이 하얗게 질려갔다. 지하 감옥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의 입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는 회랑의 화려한 공기를 단숨에 집어삼켰다.르세인은 엘라엔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려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보게 했다. 그녀의 루비빛 눈동자에는 두려움보다 더 지독한 무언가가 있었다. 거부였다.자신의 모든 세상을 지배하려는 르세인을 향한 견고한 거부.“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답이 무엇입니까. 제가 그를 저주하길 원하시나요? 아니면 그의 비명 소리를 음악 삼아 전하와 춤이라도 춰야 하나요?”엘라엔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계단 아래, 어둠 저편에서 들려오는 듯한 환청 때문이었다.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긁는 소리,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 카시안.그 이름이 심장 속에서 맥박칠 때마다 엘라엔은 자신이 르세인의 질서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향한 증오는 여전했다. 자신을 기만하고 제국을 무너뜨리려 했던 스파이….하지만 그가 주었던 그 온기가 르세인이 강요하는 이 화려한 질서보다 더 인간적이었다는 사실이 엘라엔을 미치게 했다.그를 살려야 했다. 그가 죽으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감정의 조각도 영원히 사라질 것만 같았다.“피곤해요. 비켜주세요.”엘라엔은 강고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하?”르세인은 기가 막힌 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신경질적으로 금발을 쓸어넘겼다. 엘라엔은 그 틈에 얼른 발걸음을 돌려 회랑을 뛰기 시작했다.르세인은 저 가녀린 것을 당장 잡아다 끌고 와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으나 자신이 왜 이토록 제어를 못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왜…. 왜….그렇게 르세인은 허탈한
엘라엔의 옆얼굴을 응시하던 르세인은 가슴 한구석이 이유 없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수치화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려 했으나 지금 느껴지는 이 불쾌한 통증만은 도무지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방금 전, 그녀가 장미 차를 마시며 아주 찰나의 순간… 슬픔에 젖은 눈동자로 어딘가를 보았다는 것을 똑똑히 본 르세인은 미간을 좁혔다. 평소라면 절대 오지 않았을 이곳에 발을 들인 상황도 우스웠다.‘소유물의 결함인가. 아니면 관리의 부실인가.’그는 스스로 질문을 던졌지만 답은 명확하지 않았다. 엘라엔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차가운 이성 아래 잠들어 있던 야만적인 소유욕을 꿈틀거리게 했다.‘어머니가 그리운 건가.’르세인은 엘라엔의 찻잔에 손을 뻗어 각설탕 통을 그녀 앞으로 밀어주었다.“영애, 설탕을 넣죠. 당신의 눈에 서린 그 쓴맛을 지우려면 이 정도의 달콤함으로는 부족할 테니.”르세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게 깔렸다.그는 엘라엔이 설탕을 집어 드는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르세인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위로인지, 아니면 그녀의 내면을 확인하려는 추궁인지 알지 못했다.다만, 엘라엔이 모친이 아닌, 다른 대상에 대한… 그러니까, 카시안을 향한 미련의 조각을 조금이라도 내비친다면 그는 이 우아한 오찬장을 통째로 부숴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배운 적 없는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질투라는 이름의 발작이었다.황후 로잘린은 아들의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황태자. 그대가 라안느 양에게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단지 그 영특함 때문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좋습니다, 라안느 양. 이제 그대가 답할 차례예요. 황태자가 내미는 이 달콤함을 받아들이겠나요? 아니면 여전히 그대 마음속의 그 쓴맛에 머물겠습니까.”회랑 안의 모든 시선이 엘라엔의 손끝에 집중되었다. 엘라엔은 르세인이 밀어준 각설탕을 보았다. 그건 자신의 진심을 시험하려
같은 시각,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 르세인은 바델이 올린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카시안은.”“여전히 함구하고 있습니다. 카르노스의 연락망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지만 영애의 안위에 대해서만 반복적으로 묻고 있습니다.”르세인의 펜 끝이 멈췄다. 그는 서류 위에 묻은 잉크 얼룩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그 질문이 나올 때마다 그에게 형을 가하라 했을 텐데. 바델, 내 명령이 비효율적으로 전달된 건가.”“아닙니다, 전하…. 이미 그의 몸은… 서, 성하지 않습니다….”르세인은 다시 펜을 움직였다.“그가 영애를 걱정할수록 영애는 내 곁에서 더욱 화려하게 피어날 거다. 그 절망의 대비는 가장 완벽한 제국의 풍경이 될 테지.”*** 레비안 전각의 정오를 알리는 시계탑의 타종 소리는 묵직했다.엘라엔은 벨모어 백작 부인이 내민 비단 장갑을 끼고 있었다.“영애. 황후 폐하와의 오찬은 제국에서 가장 정교한 연극이어야 합니다. 특히 정부들은 영애의 사소한 실수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엘라엔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무표정한 안색을 응시했다.가슴속에는 여전히 카시안이 남긴… 타버린 나뭇조각이 숨어져 있었다.배신감에 치를 떨며 그를 저주하다가도, 문득 지하 감옥의 습한 공기 속에 홀로 남겨진 그를 떠올리면 숨이 턱 막혔다. 그건 미련이라기보다 자신의 유일한 구원이라 믿었던 환상이 무너진 자리에 남은 비참한 파편이었다.“준비가 끝났습니다. 나가시죠.”엘라엔은 시녀들을 거느리고 전각을 나섰다.오찬이 있을 회랑의 천장은 정교하게 세공된 유리로 덮여 있어, 정오의 태양광이 쏟아질 때마다 바닥의 녹색 대리석 위로 몽환적인 물결무늬를 만들어냈다.그 빛은 부드러웠으나 그 아래 모인 여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바늘 끝 같았다.엘라엔은 황후 로잘린의 바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르세인이 하사한 백색 실크 드레스 위로 황후가 직접 선물한 남부산 레이스 숄을 어깨에 두른 채였다.황후는 엘라엔을 바라보는 내내 흐뭇
“무겁다고 들었습니다. 내 논리가 그대를 질식하고 있다고.”“사실이지 않습니까. 이 드레스에 박힌 진주 하나하나가 저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돌덩이처럼 느껴져요.”르세인은 피식 웃으며 엘라엔의 가슴팍, 레이스가 덧대어진 부분으로 손을 뻗었다. 곧 그의 손가락이 흉터가 숨겨진 자리를 꾹 눌렀다.얇은 비단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체온은 소름 끼치도록 뜨거웠다.“흉터를 가리기 위해 레이스를 덧대라고 명한 건 나입니다. 그대의 오답을 가려주는 자애로운 처사라고 생각했는데. 영애에겐 그마저도 굴레였나 보군.”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라엔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 노출된 코르셋의 끈을 직접 잡아당겼다.“하윽…!”엘라엔의 상체가 뒤로 젖혀지며 르세인의 가슴팍에 닿았다. 르세인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영애, 이 드레스는 제국의 법도이자 나의 의지입니다. 당신이 이것을 무겁게 느낀다는 건 여전히 내 질서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이지.”그는 코르셋 끈을 더욱 단단히 조이며 속삭였다.“당신이 숨이 막혀 기절하더라도 나는 이 드레스를 입힌 채로 제단 위에 세울 겁니다. 당신의 육체는 이미 나의 수집품이고 그 안의 영혼은 내가 재조립할 부품이니.”르세인은 엘라엔의 목선에 자신의 차가운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엘라엔은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그의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묘하게 뒤섞였다.르세인은 단연코 포식자였다. 그는 엘라엔의 반항조차 즐기며 그녀가 무너지는 과정을 흥미롭게 감상했다.잠시 뒤, 르세인은 그녀를 놓아주며 다시 평소의 냉철한 얼굴로 돌아왔다.“가봉을 계속하십시오. 이번에는 내 눈으로 직접 지켜보겠습니다.”그는 근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바델이 가져온 서류 뭉치를 펼쳤다.엘라엔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르세인의 시선이 자신의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다시 백색의 감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