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녀는 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테라스 너머 정원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그를 보았다. 카시안. 그는 공식적인 직함도 없는 허울뿐인 황자였지만 오늘 같은 대규모 다과회 날에는 외곽 경비를 보조한다는 명목으로 후원 어딘가에 배치되곤 했다. 뜨거운 열기에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는 그는 엘라엔이 앉아 있는 테라스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엘라엔은 황후와 영애들의 시선을 피해 아주 찰나의 순간에 카시안과 눈을 맞췄다. 그건 짧았지만 강렬한 위로였다. 질식할 듯한 향수 냄새와 가식적인 웃음소리, 그리고 태양보다 더 뜨거운 시기심이 들끓는 이 장소에서 엘라엔에게 카시안은 유일한 숨이었다. 카시안은 엘라엔의 시선을 확인하자마자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루해도 조금만 참아. 눈으로 그리 말하는 듯했다. 엘라엔은 그 무언의 위로에 비로소 긴장된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다과회는 황후의 피곤 섞인 한마디로 마무리되었다. 영애들은 아쉬운 척 우아하게 인사를 건네며 흩어졌고, 엘라엔은 하녀 마리를 먼저 마차로 보낸 뒤 후원의 한적한 사잇길로 접어들었다. 정오의 태양은 여전히 머리 위에서 잔인한 열기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엘라엔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가벼웠다. 미로처럼 얽힌 장미 넝쿨 너머, 인적이 드문 낡은 분수대 근처에는 카시안이 서 있었다. 그는 주변을 경계하며 엘라엔이 다가오는 소리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엘라엔! 이 더위에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카시안이 수줍게 웃었다. 그는 정부도 아닌, 미천한 하녀에게서 태어난 탓에 제국의 오점이라 여겨졌다. 그런 그에게 허락된 자리는 오직 뙤약볕 아래 보초였다. “너야말로. 물은 좀 마신 거야? 얼굴이 발갛게 익었네.” 엘라엔은 안쓰러운 듯 카시안의 뺨 근처로 손을 뻗었다가 멈칫하며 손을 거두었다. 보는 눈이 많은 황궁이었다. 하지만 카시안은 그녀의 머뭇거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소년의 손바닥은 뜨거운 태양을 닮아 열기가 가득했고 동시에 다정하게 젖어 있었다. “오늘 다과회에서 단연 네가 제일 예쁘더라. 다른 영애들은 하나도 안 보였어. 그냥… 네가 있는 자리만 다른 세상 같던걸?” 카시안의 순박한 찬사에 엘라엔은 영악한 영애의 가면을 벗고 소리 내어 웃었다. 오직 이 소년 앞에서만 허용되는 꾸밈없는 모습이었다. “바보야. 넌 보초 서는데 내 얼굴만 본 거야?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두 사람의 낮은 대화가 매미 소리에 섞여 들어갔다. 엘라엔은 카시안이 건네준 작은 야생화 한 송이를 만지작거리며 잠시나마 어깨에 얹힌 가문의 무게감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엘라엔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카시안을 향해 보내는 그 아주 작은 눈짓조차, 높은 곳에서 지켜보는 누군가의 시야에는 지워지지 않는 거대한 오차로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을. 후원 뒤편, 별관의 차가운 그늘 아래에서 르세인은 난간에 턱을 괸 채 조금 전부터 후원에서 웃음을 흘리는 두 개의 형체를 관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찰보다 분해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르세인에게 인간의 감정적 교류는 비효율적인 소모에 불과했고, 그는 즐거움이란 것도 호르몬의 일시적인 장난으로 치부했다. 그의 무미건조한 시선은 엘라엔의 루비빛 동공과 카시안의 푸른 동공이 허공에서 얽히는 지점을 아주 날카롭게 분석했다. 전장에서 세월을 보내느라 성인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르세인은 이제 막 복귀한, 황후의 적통 황자이자 제국이 우러러보는 차기 태양이었다. 하지만 적통 황자인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태양의 온기가 아닌, 달빛의 서늘함이었다. 그의 오묘한 녹색 눈동자가 엘라엔의 모습을 좇았다. “비효율적이군.” 르세인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표정만큼이나 낮고 단단했다. 그에게 둘의 모습은 하찮은 짐승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무의미한 유대처럼 보였다. 엘라엔은 일순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듯했다. 엘라엔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그리고 누군가와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테라스 위에 선 남자. 금발의 머리칼은 그늘 아래에서도 차갑게 빛나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 날카로웠다. 아니, 아름다웠다. 아니, 매서웠다. “……!” 엘라엔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탓이었다. 르세인의 시선은 엘라엔의 붉은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짙푸른 녹음과 대비되는 붉음. 그건 그가 평생 보아온 어떤 보석보다도 이질적인 색채였다. 그 순간, 르세인의 머릿속에서 정교하게 구축된 논리의 성벽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겼다. ‘저건 뭔데 저토록 선명해.’ 그는 그것을 관심이라 정의하지 않았다. 호기심이라는 단어로도 포장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완벽하게 통제된 세상에 허락 없이 뛰어든 저 선명한 붉음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모호한 충동이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엘라엔, 왜 그래?” 카시안의 걱정 어린 물음에 그제야 엘라엔은 굳어 있던 호흡을 내뱉었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테라스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차가운 석조 난간만이 햇빛에 타올랐다. “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누가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엘라엔은 자신의 가슴팍을 손으로 눌렀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고 무겁게 뛰었다. 방금 마주한 남자의 눈빛은 사교계의 영애들을 훑던 황후의 예리함이나 자신을 탐내는 귀족 자제들의 음흉함과는 결이 달랐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대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잘 짜인 문장의 오타를 찾아내듯 지독하게 무기질적이고 건조한 시선이었다. “황자 전하께서 귀환하셨다는 소문이 있더니…. 혹시 그분이었을까.” 카시안이 낮게 중얼거리며 테라스 쪽을 경계하듯 살폈다. 그의 안색이 눈에 띄게 파리해졌다. 엘라엔은 카시안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 위에 남은 그 서늘한 낙인은 좀체 가시지 않았다. “…나 이만 가 봐야겠어. 다음에 또 보자, 카시안.” 엘라엔은 서둘러 카시안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평소라면 조금 더 머물며 영락없는 소녀처럼 수다를 떨었겠지만 지금은 이 장소를, 저 보이지 않는 시선의 그물망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직감적인 경고음이 머릿속을 울려댔다.르세인은 엘라엔을 자신의 말 위에 올렸다. 사냥은 이미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사냥감을 성역 안으로 끌고 가,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처참하게 망가뜨리는 포식자의 광기뿐이었다.르세인은 말을 몰아 황궁으로 향하며 자신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기이한 흥분과 살의를 즐겼다.말발굽 소리가 흙바닥을 짓누르는 소리보다 르세인의 거친 숨소리가 더 가깝게 들렸다.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르세인은 엘라엔을 자신의 앞에 앉혀 단단히 안았다. 그의 한 손은 고삐를 쥐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엘라엔의 허리를 부서뜨릴 듯 끌어안고 있었다.사냥터에서 발견된 카르노스의 단검은 르세인의 이성을 완전히 잃게 만든 듯했다.“전하, 허리가 아픕니다.”엘라엔의 말에도 르세인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되레 그녀의 귓불을 잔인하게 깨물었다.“끊어지는 게 나을지도. 그래야 내 품을 벗어나 그 유령 같은 놈에게 달려가는 상상조차 못 할 테니까.”*** 에르디엔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르세인은 엘라엔을 안아 들고 자신의 집무실 옆, 황태자만이 출입할 수 있는 비밀 침전으로 향했다.그곳은 햇빛조차 허락되지 않는, 오직 촛불의 일렁임과 르세인의 취향으로 점철된 차가운 석재 감옥이나 다름없었다.쾅!철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르세인은 엘라엔을 넓은 침대 위로 내동댕이치듯 던졌고, 엘라엔은 신음을 삼켜야 했다. 그는 상의를 거칠게 벗어던지며 탄탄한 근육을 내보였다.“이제 말해봐. 그 단검을 봤을 때 당신의 그 영리한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그러졌는지. 카시안이 나를 죽이고 당신을 구원하는 영웅적인 결말?”르세인은 침대 위로 올라와 엘라엔의 두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넣으며 목을 틀어쥐며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문질렀다.“전하, 참으로 유치하시군요. 고작 단검 하나에 제국의 황태자가 이토록 평정심을 잃다니. 전하가 두려워하는 것이 카시안입니까, 아니면 저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했다는 그 하찮은 자격지심입니까.”
르세인은 활을 내리고 말에서 내려 엘라엔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를 말 위에서 끌어내렸다. 곧, 르세인은 거친 흙바닥 위에 등을 기댄 엘라엔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녀의 사냥복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전하! 왜 이러세요!”“제국을 제패하고 싶다고 했지? 좋아, 나와 함께 그 정점에 서는 거야. 하지만 그 정점에 서는 건 우리가 아니라 오직 나의 논리 아래 굴복한 당신만이 있을 뿐이야.”르세인은 거칠게 저항하는 엘라엔의 입술을 거칠게 짓뭉갰다. 흙냄새와 시린 겨울바람, 그리고 르세인의 뜨거운 욕망이 뒤섞인 사냥터의 한복판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욕망을 증명하려 들었다.엘라엔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지만 르세인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결박하며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그는 소름이 돋을 만큼 매혹적이게 웃으며 속삭였다.“당신이 나를 짐승이라 불렀으니 오늘은 정말 짐승처럼 당신을 유린해 보려고. 제국의 차기 안주인이 사냥터에서 어떤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지 기대가 되는군.”“전하!”르세인의 광기 어린 애정 행각이 극에 달하던 순간, 숲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고의로 떨어뜨린 듯한 은제 단검 하나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그 단검의 자루에는 르세인이 그토록 증오하는 카르노스 왕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숲의 바닥은 얼어붙어 너무나 차가웠고 서늘했다. 르세인은 엘라엔의 손목을 여전히 짓누른 채 거친 숨을 내뱉었다.사냥복의 거친 가죽 질감이 그녀의 셔츠 너머로 생경하게 전해졌다. 르세인은 짐승처럼 그녀의 살결을 핥고 짓씹으며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려 들었다.“이곳입니까. 당신이 그 유령과 함께 도망치려 했던 숲 말입니다.”르세인의 낮은 목소리에 엘라엔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손은 무자비하게 그녀의 허리선을 더듬어 내려갔다. 엘라엔은 흙바닥의 냉기가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르세인은 사과 대신 폭력을, 대화 대신 정복을 택했다. 그는 환멸이 나는 남자였지만 우습게도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엘라엔의 본능을
라비엔 궁의 철창이 걷힌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르세인은 사과 한마디 없이 전보다 더 거대하고 눈부신 인장을 벨모어 백작 부인을 통해 엘라엔에게 돌려보냈다.그건 분명 네가 원하는 판을 깔아줄 테니 어디 한번 발버둥 쳐보라는 거만한 초대장이었다.엘라엔은 차가운 우유로 목을 축이며 거울 앞에 섰다. 목에 남은 멍 자국은 옅은 화장으로 가려졌지만 르세인의 손이 닿았던 그 감각은 여전히 살갗 아래에서 맥동했다.그녀는 건조한 표정으로 짙은 녹색의 승마복으로 환복했다.“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접 말을 끌고 오셨습니다.”말리트의 목소리가 떨렸다. 엘라엔은 묵묵히 장갑을 꼈다.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르세인은 엘라엔을 가두는 것이 실패하자, 이제 그녀를 제국의 가장 화려한 무대 위로 끌어올려 더 거대한 감옥에 가두려 하고 있었다.궁의 정문에는 흑마 위에 올라탄 르세인이 보였다. 그는 거친 소재가 섞인 사냥복을 입고 있었는데, 풀어헤친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목선과 탄탄한 가슴 근육은 겨울의 서늘한 공기와 어우러져 지독하게 이질적인 위압감을 선사했다.“황태자비.”르세인은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손을 내밀었다. 엘라엔은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자신이 직접 준비한 백마의 고삐를 잡았다.르세인의 눈썹이 기분 좋게 꿈틀거렸다.“여전히 그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있는 모습… 나쁘지 않습니다.”“전하의 호의는 늘 대가가 뒤따르지 않습니까. 그 대가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나왔을 뿐입니다.”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격돌했다. 르세인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머리를 돌렸다.제국의 귀족들이 모여 있는 북부 사냥터로 향하는 길은 르세인의 명령에 따라 황실 근위대만이 삼엄하게 경계태세를 갖췄다.사냥터에 도착하자, 수십 명의 귀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르세인은 엘라엔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대중 앞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완벽한 모습이었지만 엘라엔의 귓속에 닿는 숨결은 여전히
르세인은 땀에 젖은 금발을 쓸어 넘기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에메랄드 목걸이를 집어 들어 침대 위에 늘어진 엘라엔의 목에 채웠다.“오늘부터 당신의 구역은 이 방으로 한정됩니다. 베르제든, 라안느든 당신이 기댈 곳은 이제 없어. 오직 나만이 유일한 질서가 될 겁니다.”르세인은 만족스러운 듯 차가운 미소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홀로 남겨진 엘라엔은 차갑게 빛나는 에메랄드를 내려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 대신 서늘한 결의가 맺혀 있었다. 르세인은 자신을 가두었다고 믿겠지만, 엘라엔은 이 고립을 이용해 더 거대한 함정을 계획했다.“짐승을 길들이는 법은 간단해. 무질서한 짐승은 결국 제 집을 허무는 법이야.”*** 며칠간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에서 르세인은 모호한 고독감에 휩싸여 있었다.엘라엔을 굴복시켰고 그녀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새겼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구석이 시리도록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유치한 감정이 아니라, 완벽한 소유에 실패했다는 정복자의 허무라고 자신을 속였다.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그는 독한 술을 잔에 가득 채웠다. 르세인에게 세상은 언제나 명쾌한 체스판이었다. 말이 움직이면 결과가 나왔고, 공포를 심으면 복종이 돌아왔다.하지만… 엘라엔. 그녀만은 달랐다. 그녀는 그가 가장 아끼는 말이었고, 체스판 자체를 뒤흔드는 유일한 균열이었다.‘왜 굴복하지 않은 거지.’르세인은 잔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아는 사랑이란 완벽한 소유의 의미였다. 그러니 그녀의 모든 것은 자신의 논리 안에서 통제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베르제에서 그녀의 목을 졸랐을 때 엘라엔의 눈을 통해 보았던 것은 굴복이 아니라 명백한 경멸이었다.그것이 르세인을 미치게 했다. 제국의 황태자로서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그 건조하고 서늘한 멸시.르세인은 술은 단번에 들이켰다. 그는 엘라엔이 자신을 피하는 이유의 시작이 카시안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 생각했다. ‘나는
“…뭐라?”“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과는 자신의 잘못을 인지할 때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죠. 하지만 전하께서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신이라 믿는, 미쳐있는 짐승에게 무슨 감정을 소비할까요?”엘라엔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르세인의 안색이 굳어져갔다. 뺨을 얻어맞거나, 독설을 듣는 것보다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취급 당하는 이 감각은 그가 생전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모욕이었다.“미친… 짐승이라….”르세인은 낮게 읊조리며 엘라엔의 책을 거칠게 뺏어 바닥에 던졌다. “왜요? 또 제 목을 조르시려고요?”“내가 짐승이라면 당신은 그 짐승의 우리 안에 갇힌 먹잇감일 뿐이야. 내가 당신을 이토록 화려하게 치장하고 제국의 절반을 쥐여준 이유를 잊었습니까. 당신은 나의 완벽함을 증명하는 가장 고귀한 장식품이어야 해.”“장식품은 감정이 없죠. 그러니 앞으로 저를 찾지 마세요. 전하의 그 구역질 나는 논리를 받아내기엔… 제 인내심은 이미 베르제에서 바닥났으니까요.”르세인은 이를 악다물었다. 그는 엘라엔의 목에 남은 자신의 손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거칠게 문질렀다.“피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나를 경멸할수록, 나는 당신을 더 깊은 나락으로 끌어내고 싶어지거든.”르세인은 엘라엔을 몰아세우며 그녀의 입술을 탐하려 들었다. 엘라엔은 피하지 않았다. 눈조차 감지 않은 채 죽은 인형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그를 받아냈다.반항도, 순종도 없는 그저 의무 같은 것. 르세인은 되레 그 허무함에 질려버린 듯 그녀를 밀쳐내고 라비엔 궁을 빠져나갔다.“이거였구나.”엘라엔은 한쪽 입매를 치켜들며 웃은 뒤, 그가 던진 책을 주워 읽기 시작했다. 콧노래와 함께.*** 아르젠트 궁 집무실로 돌아온 르세인은 바델에게 광기 섞인 명령을 내렸다.“라비엔 궁의 모든 창문에 철창을 둘러라. 그리고 베르제 대공저로 향하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해. 자신의 오만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지 뼛속까지 새기게 만들 테니!”르세인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그는
시어드가 소리쳤고, 엘라엔의 얼굴은 점차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르세인의 손을 떼어내려 버둥거렸지만 광기에 휩싸인 르세인의 악력은 보통 힘이 아니었다.엘라엔은 눈앞이 흐릿해지는 공포 속에서 그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사랑이 아닌, 오직 상대를 파괴해서라도 소유하겠다는 야만적인 욕망만이 가득했다. 엘라엔은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말해봐. 당신의 그 결백한 눈동자 뒤에 내가 모르는 오답이 숨어 있는지.”“이게… 이게 전하가 말한 논리입니까! 하아. 고작… 고작… 목을 조르는 게… 하아. 하. 전하의 위대한 질서냐고요!”엘라엔이 마지막 힘을 다해 일침을 놓자, 르세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시어드는 엘라엔의 발갛게 충혈된 눈을 보며 르세인을 향해 경악하듯 목소리를 높였다.“전하! 당장 그 손 놓으십시오! 베르제의 혈통을 죽이시려 한다면 이 자리에서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르세인은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멈칫하다가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분노를 삭인 뒤 손을 풀어냈다. 엘라엔이 마른 기침을 토해내며 상체를 숙일 때 그는 이번에 엘라엔의 턱을 잡아 올려 자신을 똑바로 보게 했다. 르세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하아, 하아. 당신은 사람이 아니야. 역시 사람은 바뀌지 않아. 당신은 그저 논리의 탈을 쓴 짐승일 뿐이야!”엘라엔은 목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르세인을 지나쳐 마차로 향했다.르세인은 그녀를 붙잡으려 했고, 엘라엔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말을 덧붙였다.“따라오지 마세요! 궁으로 가긴 하겠지만 이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전하를 볼 때마다 짐승의 썩은 냄새가 나는 듯해 구역질이 나니까!” ***라비엔 궁으로 돌아온 엘라엔은 철저하게 르세인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궁 문은 굳게 닫혔고, 르세인이 보내는 그 어떤 것도 문턱을 넘지 못했다.벨모어 백작 부인과 시녀들은 르세인이 집무실에서 물건을 부수며 폭주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