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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색무취의 질서

Author: 이클리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5 20:40:08

목소리의 주인, 르세인.

 

자신의 인생을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둔 설계자이자, 이 가증스러운 평화를 유지해 준 대가로 모든 것을 예약한 남자.

 

 

그의 구두 굽이 정원을 짓누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일정한 보폭과 흐트러짐 없는 박자는 포식자가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을 때 내는 가장 우아한 소음이었다.

 

“꽃향기가 너무 짙어. 영애 몸에 밴 향이 이 역겨운 정원의 것인지, 본연의 살 냄새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군.”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멈춰 섰다.

엘라엔은 그의 숨결이 이마에 닿는 것을 느꼈다.

 

“황태자 전하….”

 

엘라엔이 입술을 달싹였다.

 

루비처럼 붉고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는 르세인을 날카롭게 올려다보았다.

 

르세인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가죽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의 긴 손가락이 엘라엔의 턱 끝을 느릿하게 치켜올렸다.

 

거칠고도 부드러운 악력이 그녀의 여린 피부를 파고들었다.

 

여름의 매미 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고, 정원의 장미들은 열기에 지쳐 고개를 떨구려 했지만 르세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르는 긴장감은 날이 선 채 팽배하게 당겨졌다.

 

그는 엘라엔의 떨림을 즐겼다.

공포인지, 혹은 금기된 존재를 향한 갈망인지 알 수 없는 그 전율을…….

 

“에르디엔으로 떠날 준비는.”

“전하, 전 아직…….”

“아직?”

 

르세인이 짧게 냉소했다.

그의 목소리엔 감정의 고저가 없었다.

잘 닦인 칼날 위로 흐르는 물방울처럼 매끄럽고 냉혹했다.

 

오묘한 녹색 동공이 그녀의 눈을 꿰뚫었다.

 

라안느 공작과 거래를 하게 만들었던 그 치명적인 빛은 더욱 짙어진 붉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자신을 무너뜨릴 유일한 위협….

 

그는 엘라엔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일그러진 욕망을 보았다.

르세인은 그것이 불쾌했다.

 

그는 더욱 서늘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름답군.”

“…….”

“그 눈으로 다른 것을 보는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수만 송이의 장미가 뿜어내는 향기는 어느새 질식할 듯한 압박감으로 변했다.

 

르세인은 여전히 엘라엔의 얼굴을 탐하듯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자부했으나 이글거리는 루비빛 동공을 마주할 때만큼은 기묘한 질서의 균열을 느꼈다.

 

“전하, 지나치게 무례하십니다.”

 

엘라엔은 가늘게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뾰족이 날 선 말을 내뱉었다.

 

르세인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른 손을 느릿하게 떼어냈다.

 

그의 맨손은 차가웠으나 닿았던 자리는 불에 덴 듯한 화끈거림이 남았다.

 

“무례라…. 라안느 공작이 영애에게 예법을 가르칠 때 황실의 권위 위에 가문의 오만을 두라하진 않았을 텐데.”

 

르세인은 비릿한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떨어진 장미를 구두 굽으로 짓밟았다.

 

르세인은 그 장미가 마치 엘라엔의 꺾인 자존심인 양 무심하게 뭉개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분명 따스했으나 어쩐지 매섭도록 시린 여름의 바람이었다.

그때, 정원 저편의 회랑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곧 라안느 공작 에드먼과 그의 후처, 공작 부인 이사벨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드먼과 이사벨라의 아들들인 하르만과 루시안도 함께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예고도 없이 이곳까지 어찌….”

 

에드먼은 예를 갖추었다.

 

황실을 떠받치는 손이라 불리는 공작조차 르세인이 뿜어내는 그 서늘하고도 정제된 살기 앞에서는 몸을 사렸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화려한 깃털 부채 뒤로 입술을 깨물며 상황을 살폈다.

 

그녀는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혈통의 전처소생인 엘라엔을 증오했다.

 

황태자의 정비로 낙점된 건 분명 가문에 더없는 경사스러운 일이나, 이사벨라는 엘라엔이 자신을 내려다볼 미래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영악했다. 미래의 황후가 될 엘라엔의 면전에 대놓고 독설을 내뱉을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라안느 공작. 영애에 대한 교육이 다소 소홀한 모양입니다. 내 비가 될 몸이 이토록 무질서하게 피어 있다니.”

 

르세인의 말에 이사벨라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끼어들었다.

 

“황태자 전하. 엘라엔이 워낙 고집이 세서 제 말은 듣지도 않는답니다. 하르만과 루시안조차 누님의 방종함을 걱정할 정도이지요.”

“…….”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엘라엔이 잠시 더위를 먹었나 봅니다.”

 

이사벨라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르세인의 눈치를 살피며 엘라엔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르세인은 그 가식적인 연극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그는 이들이 엘라엔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즐겼다. 엘라엔이 기댈 곳이 사라질수록 자신의 품이 유일한 안식처가 될 것임을 알기에.

 

르세인은 대답 대신 이사벨라를 보았다.

 

그 서늘한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이사벨라는 목에 칼날이 닿는 듯한 공포를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방종하군.”

 

르세인의 단 한 마디에 정원이 얼어붙었다.

 

“공작 부인의 자제들은 예법이 훌륭한 듯 보이는데, 어찌하여 영애만은 이토록 무질서하게 방치된 겁니까.”

“…황태자 전하! 당장 엘라엔을 방에 가두고 엄히 가르치겠습니다!”

 

에드먼이 식은땀을 흘리며 외치자, 르세인은 그 비굴한 외침을 비웃듯 시선을 다시 엘라엔에게 돌렸다.

 

엘라엔은 가족들의 비겁한 모습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 넓은 마레즈나에 자신의 편은 없었다. 오직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자들과 수거하려는 포식자뿐이었다.

 

그녀는 다리가 후들거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르세인은 그런 엘라엔을 보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의 그림자가 엘라엔의 가녀린 체구 위로 짙게 드리웠다.

 

정오의 태양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지만 엘라엔은 르세인의 그림자 안에서 기묘한 오한을 느꼈다.

 

르세인은 허리를 숙여 엘라엔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테르시아.”

 

엘라엔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안색마저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동요를 르세인은 놓치지 않았다.

 

“그 폐허 같은 사저에서 당신이 누구와 밀어를 나누었는지, 그 비천한 품에서 어떤 위안을 얻는지….”

“……!”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건 효율적이지 않아, 엘라엔.”

 

르세인의 손이 엘라엔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그 손길은 언제든 그녀의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었다.

 

“제국에서 내 질서를 방해하는 자는 형제라 해도 예외는 없어.”

 

엘라엔은 그의 말에 카시안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르세인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고 갈 권력이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는 엘라엔의 뒤통수를 그러쥐며 거칠게 끌어안았다.

 

“나는 말이야, 엘라엔. 당신이 제 발로 에르디엔의 아르젠트 궁으로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는 거야.”

 

르세인은 엘라엔의 귓불을 살짝 깨물듯 스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그 오만한 자존심이 꺾이고, 유일한 도피처였던 카시안이 죽음의 문턱에서 허덕일 때….”

“……!”

“당신이 내 발치에 엎드려 제발 데려가 달라고, 나를 당신의 주인으로 삼아달라고 울며 매달리는 그 순간을 아주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다고.”

 

르세인은 자신의 품에 있던 엘라엔을 내동댕이 치듯 떼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안면은 다시 무색무취의 질서로 돌아가 있었다.

 

“라안느 공작,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바델.”

“예, 황태자 전하.”

“가지.”

 

르세인은 기사단을 이끌고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짓밟힌 장미 꽃잎들이 피비린내 나는 흔적처럼 짓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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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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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골골
혐관 너무 좋아요ㅎㅎㅎ빅잼
goodnovel comment avatar
베이비팡팡
재밌어요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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