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영애님! 어머, 안색이!”
마차 근처에서 대기하던 마리가 뛰어왔으나 엘라엔은 대답 대신 마차 문을 어서 열라는 손짓만 했다. ‘오차? 하.’ 엘라엔은 마차에 올라타 르세인의 시선을 지워버리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전장에서 돌아온 영웅이든, 적통이든 솔직히 말하면 자신과 무관했다. 사교계의 다수가 믿는 것이 진실이 되어야 했다. 이안과 약속한 안온한 미래만이 엘라엔이 믿어야 할 유일한 정답이었다. 르세인. 그는 곧 다시 전장으로 떠날 것이고 그전까지 마주치지 않으면 그만이다. 엘라엔은 그렇게 정의 내리며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마레즈나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엘라엔은 일부러 즐거운 생각만을 골라냈다. 다음 다과회에 입을 드레스의 색상. 카시안에게 보내줄 작은 선물의 종류. 이안이 황태자가 되었을 때 라안느 가문이 누리게 될 영광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녀는 창밖에 비치는 달빛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라안느 공작저 마레즈나에 도착하자 익숙한 장미 향기가 엘라엔을 반겼다. 방으로 들어온 엘라엔은 하녀들의 손길을 받으며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맞췄다. ‘잊힐 일일뿐이야. 그가 황궁에 있든 전장에 있든 내 세상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르세인이 던진 말에 휘둘리는 순간 자신의 완벽한 일상이 흔들리게 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는 감정이 없는 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시선 역시 어떤 전략적인 계산의 산물일 것이다. 라안느 공작가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행보이거나 이안을 견제하기 위한 유치한 도발이었겠지. 엘라엔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상황을 단순하게 정리했다. 내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카르네티아의 거리를 거닐거나 도서관에 갈 생각이었다. 르세인의 그 기분 나쁜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즐기리라. 잠자리에 들 준비를 끝낼 무렵에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에드먼과 이사벨라가 이제야 마레즈나로 돌아온 듯했다. 엘라엔은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말도 없이 먼저 자리를 떴다는 것에 대한 질책을 할 것이 분명했기에. 다음 날, 아침. 마레즈나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조금 묵직했다. 길게 늘어진 식탁 위에는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이 놓여 있었지만 그 누구도 성급히 포크를 들지 않았다. “엘라엔, 어제는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상석에 앉은 에드먼이 잘 구워진 아스파라거스를 나이프로 썰며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지 않았음에도 에드먼이 뿜어내는 분위기는 식탁 위의 더운 김을 식히기에 충분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두통이 심해 결례를 범했어요.” 엘라엔은 차분하게 대답하며 그제야 맑은 수프를 한 스푼 떴다. “두통이라니, 안쓰러워라. 괜찮니?” 맞은편에 앉은 이사벨라는 전혀 걱정스럽지 않다는 얼굴을 하고서 걱정 어린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눈에는 엘라엔의 실수를 즐기는 비릿한 흥미가 서려 있었다. “엘라엔. 제국의 정세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단다. 일황자 전하께서는 전장에서 돌아오시자마자 기세를 올리고 계시고, 이황자께서는 사교계의 신망을 두텁게 쌓고 계시잖니. 이런 시기에 누구에게든 책 잡힐 행동을 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이사벨라의 말에 에드먼이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금속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엘라엔을 직시했다. “엘라엔. 그 누구에게도 치우쳐서도 안 되고 결례를 범해서도 안 되는 시기다. 어제 연회장에서의 일을 본 자들이 한둘이 아니야. 네가 누구인지 사리 분별은 확실히 해야지.” 에드먼의 첨예한 눈빛에 엘라엔은 스푼을 내려놓고 무릎 위에 놓인 냅킨을 꽉 쥐었다. “명심할게요. 제 개인의 감정보다 가문의 명예와 정세를 먼저 살피겠습니다.” “그럼, 그래야지. 너는 라안느 영애이니.” “공작. 그래도 엘라엔에게 너무 엄하게 하지 마세요. 하지만… 어제 일황자 전하께서 엘라엔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는 걸 본 이들이 많다던데…. 혹여 전하께서 엘라엔을 좋지 않게 보신 건 아닐지 걱정이 되긴 하네요. 그분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분이라던데 말이죠.” 이사벨라는 입을 샐쭉이며 얼음이 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오차.’ 그 단어가 이사벨라의 입에서 나오자 엘라엔은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에드먼은 눈썹을 찌푸리며 엘라엔을 한 번 더 경고하듯 바라보고는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질책은 끝났으나 식당을 가로지르는 무거운 기류는 여전했다. 엘라엔은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드먼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완벽한 조각상처럼 만들려 했고, 이사벨라는 그 조각상이 보존되길 바라면서도 금이 가길 바라는 양면적인 마음이 충돌하는 듯했다. ‘안 마주치면 그만이야.’ 엘라엔은 다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황태자는 이안이 될 것이고 르세인은 곧 잊힐 변수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식어버린 차와 함께 애써 불안을 삼켰다. 식사가 끝날 무렵 엘라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 오늘은 세실과 약속이 있어 번화가에 다녀올게요. 기분 전환도 하고, 장신구들도 좀 살펴보려고요.” “그래, 너무 늦지 않게 들어오너라.” 에드먼의 허락이 떨어지자 엘라엔은 빠르게 식당을 나섰다. 등 뒤로 이사벨라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가볍게 흘려버렸다. *** 수도 카르네티아의 번화가는 다른 종류의 열기로 들끓었다. 마차에서 내린 엘라엔은 양산을 펴기 전,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북적이는 인파를 응시했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귀족들과 땀을 흘리며 짐을 나르는 인부들, 그리고 상점마다 늘어선 다채로운 물건을 파는 상인들…. 이곳의 모든 것은 활기가 가득했다. “엘라엔! 여기야!” 광장 분수대 근처, 레이스가 층층이 달린 양산을 흔들며 세실이 다가왔다. 브리튼 백작가 영애답게 한껏 치장한 그녀의 모습은 여름꽃처럼 화사했다. 엘라엔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세실의 팔에 제 팔을 걸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세실. 아침은 늘 예상치 못한 잔소리로 길어지네.” “괜찮아.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어. 어서 가자! 오늘 보석상에 남부 대륙에서 온 희귀한 원석들이 들어왔대.” 세실은 엘라엔의 손등을 가볍게 치며 수다의 포문을 열었다. 두 소녀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길가에 늘어서 노점에서는 잘 익은 복숭아 단내가 진동했고, 근처 빵집에서 갓 구워낸 파이의 고소한 풍미가 눅진한 여름 공기에 섞여 들었다. 엘라엔은 세실의 재잘거림에 적절히 맞장구를 치면서도 틈틈이 상점들의 진열대를 살폈다. 그녀의 목적은 화려한 원석이 아니었다. 이 시끌벅적한 어딘가에 카시안의 서재에 어울릴만한 아주 소박하고도 견고한 물건을 찾는 것이었다. “이거 봐, 엘라엔. 이 사파이어 귀걸이! 어제 네가 하고 왔던 목걸이랑 세트처럼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석상 안은 바깥의 열기를 차단한 채 정숙했다. 벨벳 위로 전시된 보석들이 빛을 받아 비산하고 있었지만 엘라엔의 눈길은 화려한 귀걸이 대신 그 옆 유리장 구석에 놓인 은색 만년필에 머물렀다. 장식 하나 없이 매끄럽게 빠진 은빛 몸체. 잉크를 머금은 촉 끝은 예리하면서도 부드럽게 깎였다. ‘카시안에게 딱이야.’ 그는 비천한 출신이라며 늘 무시당하지만 누구보다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사람이었다. “세실, 난 저게 마음에 들어.” “응? 만년필? 너 글 쓰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차라리 저쪽 다이아몬드 머리핀을 봐.” “가끔은 정갈한 문장을 남기고 싶을 때가 있거든. 저게 좋아 보여.” 엘라엔은 점원에게 만년필을 포장해달라 요청했다. 선물 포장을 기다리는 내내 그녀의 심장은 묘한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보석상을 나온 두 소녀는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경쾌한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한참 수다를 나눌 때 광장의 시계탑이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를 열두 번 울렸다. 엘라엔은 그 소리를 들으며 세실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만 가야겠어. 세실, 먼저 가. 난 서점에 들러서 아버지께 드릴 신간을 좀 찾아보고 가려고.” “그래, 엘라엔. 곧 있을 다과회에서 보자!” 세실의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엘라엔은 좁은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얇은 여름용 망토를 꺼내 화려한 드레스 위로 덮어쓰고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장신구들은 품속에 감췄다. 골목 안은 소음이 차단되어 고요했다. 엘라엔은 골목 끝에 대기 중이던 낡은 고용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의 바퀴가 덜컹거리며 거친 길을 달리기 시작하자, 엘라엔은 비로소 깊은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가면 황궁 서쪽 외곽, 분수대가 있는 곳에서 카시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창문 너머로 펼쳐진 카르네티아의 풍경을 보았다. 해는 여전히 중천에 떠 있었고 그늘진 골목들조차 빛의 잔상으로 어른거렸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일상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탄 마차가 외곽 도로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말이다.대공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인 듯 거칠었다. 엘라엔은 무릎을 굽혀 블러드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황후 폐하의 총애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어요. 할아버지. 아시다시피 전하께서는 이제 황태자가 되셨으니까요….”베르제 대공은 마른 기침을 토해내며 엘라엔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눈이 엘라엔의 루비빛 눈동자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건 혈육을 향한 걱정이라기보다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집념에 가까웠다.“잘 듣거라, 엘라엔. 황태자 전하는 감정조차 논리로 치환해버리는 정교한 기계와 같은 분이다. 너를 얻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네가 아름다워서가 아니야. 자신의 세상을 비춰줄, 흠집 없는 유일한 거울이 필요하기 때문이지.”블러드의 손가락이 엘라엔의 뺨을 타고 내려와 목에 걸린 사파이어를 거칠게 움켜쥐었다.“황태자 앞에서는 진심을 보이지 말거라. 사랑이라는 그런 비논리적인 단어는 그분에게 네 약점을 잡아달라고 구걸하는 꼴일 것이니. 너를 소유하려 할수록 넌 그분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네 속을 텅 비워내야 해.”엘라엔은 숨을 들이켰다. 블러드의 말은 카시안이 주었던 위로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었다. 그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버리고 오직 권력의 정점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계가 되라는 선언 같았다.“네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지하실을 파거라. 그리고 그곳에 너의 진실한 증오와 설렘을 가두어둬. 황태자에게는 오직 그분이 설계한 완벽한 황태자비의 껍데기만을 보여주는 거다. 그분이 네 영혼까지 가졌다고 착각하게 만들 거라. 착각이 깊어질수록 그분은 네가 만든 논리의 덫에 스스로 발을 담글 테니까.”블러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낮게 읊조렸다. “소유당하는 척하며 그분의 세계를 잠식하거라. 사냥감이 사냥꾼의 목을 물어뜯는 유일한 방법은 사냥꾼의 품속으로 가장 깊숙이 파고드는 것뿐이다. 잊지 말거라. 베르제의 핏줄은 굴복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 오직 굴복시키는 법만을 배울 뿐이지.”블러드의 가르침은 엘라엔의
다음 날 아침. 늦가을의 서늘한 서리가 내려앉은 길을 따라 라안느 공작가의 마차가 움직였다.이사벨라는 엘라엔이 건국 공신 가문인 베르제 대공에게 자신의 아들들을 데려가는 모습이 흡족한 듯 연신 웃음을 흘리며 배웅했다.“누나, 여기 공기가 정말 좋아!”베르제 대공저의 숲길에 들어서자 루시안이 창밖으로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엘라엔은 아이들을 먼저 대공의 별장 정원에 내려주어 시종들과 놀게 한 뒤, 자신은 잠시 근처 숲을 산책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르세인이 심어둔 것 같은 감시 기사들이 따라붙었으나 엘라엔은 병약한 대공의 사저 주변을 기사들이 소란스럽게 하는 것은 무례하다는 논리로 그들을 대문 앞에 멈춰 세웠다.마침내 도착한 그가 머무는 방.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먼지를 털어내며 낡은 책을 읽고 있는… 카시안.“카시안….”엘라엔의 목소리에 카시안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카시안의 눈동자는 모든 것을 품어주는 고요한 호수 같았다.엘라엔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녀에게 카시안은 자신의 못난 모습도, 영악한 계산도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쉼 같은 존재였다.“잠시 숨을 쉬러 왔어. 할아버지를 뵈러 가기 전에.”엘라엔은 카시안의 옆자리에 스스럼없이 앉았다. 카시안에게서 풍겨오는 은은한 흙 내음과 말린 종이 향기는 포근하고 따스했다.그녀는 황후의 사파이어 목걸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보석이 주는 압박감을 이 평화로움에 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카시안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엘라엔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그 무심한 배려가 엘라엔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이것이 연정일까?아니면 그저 편안한 안도감을 주는 벗에 대한 감정일까?엘라엔은 아직 그 답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이제… 쉽게 만날 수 없겠지…?”“…그렇지, 엘라엔. 너는 제국의 가장 높은 곳으로 갈 테니까.”카시안의 덤덤한 목소리에 엘라엔은 묘하게 서운함을 느꼈다. 그가 조금 더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라는 마음과 이 위험
에르디엔 황궁 연회장의 소란스러운 음악 소리가 대리석 벽에 부딪혀 아득한 메아리로 변해갈 무렵이었다.엘라엔은 황후의 궁을 나와 차가운 회랑을 걷고 있었다. 그녀의 목에는 로잘린이 직접 채워준 목걸이의 사파이어 펜던트가 차갑게 번뜩였다.“어머니께서 생각보다 더 노골적이군.”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에 엘라엔은 발걸음을 멈췄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그는 어느새 엘라엔의 바로 뒤로 다가왔다. 백색 대례복에 덧대어진 금사 망토는 바스락거리며 기분 나쁜 위용을 내뿜었다.르세인은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엘라엔의 목선 위에 놓인 목걸이 줄을 건드렸다. 엘라엔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이건 단순한 보석이 아닙니다, 영애. 폐하께서 그대를 이 제국의 차기 안주인으로 허락했다는 인장이지. 그리고….”르세인은 목걸이 줄을 따라 걸음을 옮겨 엘라엔의 앞으로 섰다가 가볍게 목걸이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숙였다.“…내가 그대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선언에 대한 어머니의 추인이기도 하지. 비논리적일 정도로 완벽한 결합이 아닌가.”“……황태자 전하의 논리에는 우연이란 없으니 이 또한 전하께서 설계하신 판이겠지요.”엘라엔의 담담한 대답에 르세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손가락을 밀어 넣어 사파이어의 무게를 가늠하듯 잠시 행동을 멈췄다가 이내 그녀를 놓아주었다.“곧 그 푸른빛이 그대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제국 전체가 목격하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그 영악한 머릿속을 잘 정돈해두도록.”르세인은 모호한 말을 남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서늘한 수목 향만이 남아 엘라엔의 콧속을 찔렀다.*** 마레즈나로 돌아가는 라안느 공작가의 마차 안은 황궁의 정적과는 대조적으로 터질 듯한 흥분으로 가득했다. 맞은편에 앉은 라안느 공작 에드먼은 평소의 엄격함을 잊은 채 르세인의 책봉식을 연신 떠올렸고, 이사벨라는 부채를 바쁘게 흔들며 격양된 목소리를 쏟아냈다.“엘라엔! 너도 보았니? 황후
에르디엔 황궁의 대전은 압도적인 금빛의 향연이었다.서늘한 가을의 공기가 내부를 훑었으나 수십 개의 촛불이 내뿜는 열기와 운집한 귀족들의 숨결은 그 서늘함을 눅진하게 달구었다.르세인 폰 루카르디아의 황태자 책봉식은 새로운 질서의 선포였다.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대전의 높은 천장을 울리며 퍼질 때, 르세인은 눈이 시릴 만큼 하얀 순백의 정식 대례복을 입고 등장했다. 어깨 위로 길게 늘어진 망토에는 제국의 상징인 사자가 황금 실로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으며 그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망토 자락이 바닥을 쓸며 긴장감을 자아냈다.단상 위에 앉아 있던 황제와 황후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르세인은 계단을 오르면서도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금발은 촛불의 일렁임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났고, 오묘한 녹색 눈동자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인 수많은 귀족을 무심하게 훑었다.황제가 직접 황금관을 그의 머리에 씌워주는 순간, 대전 안에 모인 모든 귀족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제국의 차기 태양이시여. 황태자 전하의 무궁한 영광을!”파도처럼 밀려오는 찬양의 소리 속에서도 르세인의 표정에는 고양감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이 화려한 굴복의 연회 한복판에서 오직 단 한 사람. 와인빛 머리카락의 여인만을 서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책봉식 현장에 이황자 이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르세인의 황태자 책봉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황권을 뒤흔들지도 모를 재앙이 된다는 것을 똑똑히 인지했다.이안은 스스로 황제 헤이브릭의 승인을 받아, 황후 로잘린의 친정인 후작저로 거처를 옮겼다. 그것만이 그가 적통 황자로서 평생을 안온하게 살 수 있는, 본인의 목숨 줄을 연명하는 길이었으니.책봉식의 열기가 대연회장으로 이어지는 동안, 한쪽 구석에 마련된 정원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이사벨라를 중심으로 모인 반디아 상업 연맹의 부인들은 평소의 거드름은 간데없이 잔뜩 위축된 기색이었다.불과 이전만 해도 소금 전매권을 빌미로 라안느 공작
엘라엔의 말에 르세인의 입가에 희미한 고뇌의 미소가 걸렸다. 그는 엘라엔의 지략이 좋으면서도 가끔은 그 냉철함에 묘한 서늘함을 느꼈다.“…좋습니다. 당장 남부로 정보원들을 급히 파견하죠. 폰테의 창고를 봉인하고 황실의 이름으로 소금을 풀도록 하지.”르세인은 짧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서늘한 수목 향만이 남았다.이사벨라는 엘라엔을 보며 새침한 눈초리로 말을 꺼냈다.“참 영리해, 넌. 황후 폐하의 독한 사랑까지 네 판의 말로 이용하다니.”“이용하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 살아남으려는 것뿐이죠.”엘라엔은 창밖을 보았다. 저 멀리 황궁의 실루엣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곳 어딘가에서 황후 로잘린은 아들을 위해 한 행동에 대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엘레니르 제국의 수도 카르네티아의 가을은 잔인했다.낮의 태양은 여전히 폰테 후작저를 태웠던 불길의 여열을 머금은 듯 뜨거웠으나 지평선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대기는 서늘해졌다.그 급격한 온도 차이는 마치 르세인의 아름다운 얼굴 뒤에 숨겨진 잔혹한 본성과도 닮아 있었다.폰테 후작가가 불타오른 지 단 사흘 만에 제국의 남부 경제는 르세인의 손바닥 위에서 다시 쓰였다.황후 로잘린이 뿌린 피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르세인은 그 위로 가장 정교한 논리의 성벽을 쌓아 올렸다.황실 행정부의 집무실에서 르세인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서류 더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오묘한 녹색 눈동자에는 피로도, 동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기계적인 냉정함만이 감돌 뿐.“남부 협곡의 요새는 황실 금위대가 영구 주둔하는 것으로 확정한다. 폰테의 유가족 중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방계 혈족들은 전원 남부 연안의 소금 채취 부역자로 압송하도록.”“전하. 그들은 직접적인 반역 증거가 없습니다. 가혹하다는 여론이 생길 수도…”정무관의 조심스러운 진언에 르세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정무관은 숨이 막히는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폰테 후작가가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비보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라안느 공작저에 도착했다.자신의 방에 감금되어 있던 엘라엔은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불길한 종소리를 들었다. 황궁에서 울리는 그 종소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장송곡이었다.‘……뭔가 잘못됐어.’엘라엔은 책상에 놓인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르세인과 함께 그렸던 그 정교한 도면 위로 붉은 잉크를 쏟은 듯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폰테 후작가의 처리는 엘라엔의 조언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이토록 피비린내 나게 변했다면 르세인의 칼은 이제 누구를 향하게 될 것인가.방문 너머에서는 공작 부인의 히스테릭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레즈나에 불어닥칠 폭풍의 서막이었다.한참 뒤,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평소라면 결코 허용되지 않았을 무례한 소음이었다.“영애님! 황자 전하께서…! 전하께서 와 계십니다!”헐떡이며 들어온 하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엘라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하자 그녀의 연한 보랏빛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쓸며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공작 부인께서는 어디 계시지?”“이미 대접견실에서 전하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영애님… 황자 전하의 기색이… 예사롭지 않으십니다.”엘라엔은 겁에 질린 하녀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감금 상태나 다름없는 처지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복도를 지나는 동안 마주친 사용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었다. 제국의 거대 세력 중 하나였던 폰테가 단 하룻밤 만에 사라졌다는 공포는 공작저의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황후 폐하께서 움직이셨어.’그건 엘라엔의 계산에 없던 변수였다. 르세인과 함께 세웠던 계획은 폰테 후작을 서서히 압박해 그들의 자금줄을 르세인의 수하로 귀속시키는 것이었다.폰테 후작가가 장악하고 있던 협곡은 남부의 숨통이나 다름없었다. 제국의 주된 소금 산지인 남부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그 좁고 험한 협곡이었기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