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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수집품에 대한 관리 욕구

Author: 이클리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5 20:50:55

이안의 다정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은 엘라엔의 날선 긴장감을 차츰 부드럽게 풀어냈다.

 

이황자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전 회랑 위에서 보고 느꼈던 그 기이한 시선이 한낱 망상처럼 느껴졌다.

 

“영애, 오늘따라 유독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군요. 형님의 귀환이 사교계의 영애들에게는 꽤나 위압적인 모양입니다.”

 

이안이 엘라엔의 샴페인 잔을 받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온화하게 웃었다.

 

엘라엔은 그 다정함에 기대어 억지로 가슴속의 울렁임을 눌러 내렸다.

 

“…아무래도 전장의 이야기는 저희에겐 조금 생경하니까요. 하지만 전하께서 곁에 계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엘라엔의 말은 진심이었다.

황태자 책봉은 아직 멀었지만 제국은 이미 이안이라는 상냥한 지배자를 맞이할 준비를 끝낸 듯 보였다. 필시 그래야만 했다.

 

그녀는 이안의 뒤로 펼쳐진 견고한 황실의 예법과 정해진 미래를 믿었다.

 

엘라엔은 이 평화로운 연회가 끝나면 다시 마레즈나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카시안과 비밀스러운 우정의 편지를 주고받는 일상을 꿈꿨다.

 

하지만 그 안락한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가 웅장해지는 순간,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갈라졌다.

회랑 위에 멈춰 서 있던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르세인.

 

그는 황제에게 승전 보고를 마친 뒤, 비로소 사교라는 이름의 전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의 부츠 굽이 대리석 바닥을 짓누르는 규칙적인 소리가 음악의 박자와 묘하게 어우러졌다.

 

르세인은 화려하게 치장한 영애들의 인사를 받지도 않고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엘라엔과 이안이 서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엘라엔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엘라엔의 앞을 막아서며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형님. 여기 라안느 영애가 형님의 무용담에 꽤나 놀란 모양입니다.”

 

이안의 말은 정중했지만 그 안에는 엘라엔을 자신의 영역으로 보호하려는 명확한 의지가 담겼다.

 

르세인은 이안의 면전에 멈춰 섰다.

 

그의 키는 이안보다 한 뼘이나 더 컸고, 풍기는 기운은 이안의 온기를 단숨에 집어삼킬 만큼 압도적이었다.

 

르세인은 이안의 인사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의 시선은 이안의 어깨너머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엘라엔의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라안느 영애.”

 

르세인이 처음으로 그녀를 불렀다.

 

“예, 전하.”

 

엘라엔은 이안의 등 뒤에서 나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품위를 유지하며 무릎을 굽혔다.

 

“이안, 너의 배려가 지나치군. 라안느 영애는 네 보호가 필요한 유약한 존재가 아닐 텐데.”

 

르세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영애는 폐하께서 각별히 아끼는….”

“폐하의 총애는 영애가 지닌 가치 때문이지, 감정 때문이 아니다.”

 

르세인은 이안을 완전히 무시한 채 엘라엔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엘라엔은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알 수 없는 기이한 압박감에 발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엘라엔은 이 점이 불쾌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거대한 위압감….

머리가 하얘지는, 턱밑의 호흡까지 스산해지는, 태어나 처음 느끼는 아득하게 밀려오는 공포감은 표현이 불가했다.

 

그는 분명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단지 시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헤집어 놓는 르세인은 위험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르세인은 엘라엔을 향해 상체를 숙여 그녀의 루비빛 동공을 직시했다.

 

“정원의 오차보다, 연회장의 오차가 더 심각하군.”

 

엘라엔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원의 오차.

 

그건 분명 카시안과 함께 있었던 순간을 뜻하는 말이었다.

 

엘라엔은 숨을 들이켜는 법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그녀의 시야는 오직 눈앞에 자리한 오묘한 녹색 동공으로 좁혀졌다.

 

르세인의 눈동자는 숲의 심연처럼 깊었지만 그 안에는 생명력이 아닌 죽음과 같은 정돈만이 자리했다.

 

엘라엔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엘라엔은 갈라지는 음성을 간신히 수습하며 대답했다.

입술은 말라붙고 경련이 일었다.

 

분명 그녀는 어떤 난처한 상황에서도 미소 뒤에 본심을 숨기고 우아하게 빠져나가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르세인 앞에서 작동하는 건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 남자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아.’

 

르세인은 대답 대신 그녀의 얼굴을 탐색하듯 보았다.

 

그런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이안이 참지 못하고 사이를 가로막으려 손을 뻗었으나 르세인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이안의 팔을 가볍게 쳐냈다.

무심한 손길이었으나 이안의 몸이 비틀거릴 정도의 힘이 실렸다.

 

“형님! 무례하십니다. 영애가 겁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

 

이안의 높아진 언성에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 쏠렸다.

 

하지만 르세인은 그 쏟아지는 시선들을 공기 중의 먼지보다 가볍게 여겼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제 눈앞의 오점을 정렬하는 일뿐이었다.

 

“무례라…. 이안, 너는 여전히 비논리적인 말을 하는군. 나는 지금 국가의 자산이 될 황태자비 후보의 결함을 확인하는 중이다.”

 

르세인은 다시 엘라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오차는 수정되어야만 질서가 완성되지. 영애가 정원에서 나누던 그 비효율적인 교감은 제국의 법도에도, 나의 논리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엘라엔이 이를 악물며 말을 내뱉었다.

카시안의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를 방어하려 했다.

하지만 그 말은 르세인에게 되레 더 명확한 해답을 던져준 꼴이 되어버렸다.

 

르세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결코 다정하지 않은 미소가 걸렸다.

비웃음이 아닌 정답을 맞힌 관찰자의 만족감이었다.

 

“잘못의 유무를 판단하는 건은 제국의 법이죠. 당신의 반응은 명백한 정보고.”

“……!”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오점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겠지만….”

 

르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엘라엔의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가까이서 제대로 보고 싶다는 모호한 충동을 불러일으키던 그 붉은 루비빛이 공포로 인해 파르르 떨리는 모습.

 

이질적인 색채가 주는 시각적 자극이 르세인의 뇌리 속에 묘한 파동을 일으켰다.

 

전장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갈 때도 평온했던 그의 심박이 아주 미세하게… 본인조차 자각하기 힘든 속도로 박동을 달리했다.

 

그는 이것을 보존하고 싶은 가치가 있는 수집품에 대한 관리 욕구라고 치부했다.

본래 내뱉으려던 말을 틀어 바꾼 것 역시도.

 

“…앞으로 조심하십시오.”

 

르세인은 엘라엔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연회장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그의 숨결만이 엘라엔의 신경을 긁어내렸다.

 

말을 마친 르세인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안면은 다시 무색무취의 완벽한 질서로 돌아갔다.

 

엘라엔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비로소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 하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한 그녀를 이안이 다급히 부축했다.

 

“영애! 괜찮습니까?”

 

엘라엔은 떨리는 손으로 목에 걸린 사파이어 장식을 꽉 쥐었다.

이안이 좋아하는 푸른 보석은 르세인의 눈앞에서 아무런 빛도 발하지 못했다.

 

이안의 다급한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엘라엔은 즉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르세인이 사라진 방향의 허공에 못 박혀 있었으니까.

 

방금 전, 귓가를 스친 르세인의 숨결은 여름밤의 습기를 단숨에 서늘하게 만들었고 앞으로 조심하라는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엘라엔은 심호흡을 하며 흐트러진 차림을 정돈했다.

 

“…괜찮습니다, 이황자 전하. 일황자 전하의 기운이 워낙 압도적이라 잠시 기가 눌렸나 봅니다.”

 

엘라엔은 떨리는 손을 이안의 손에서 부드럽게 빼내며 부채를 꽉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고통이 선명해질수록 의식은 명징했다.

 

“전하, 몸이 좋지 않아 이만 실례해야겠습니다. 오늘 나누어 주신 다정함은 잊지 않겠습니다.”

 

엘라엔은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안의 눈에는 우려가 가득했으나 엘라엔은 그 온기에 더 이상 기댈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의 부름을 뒤로하고 대연회장을 빠져나와 복도로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황궁의 긴 복도는 평소보다 훨씬 길고 어둡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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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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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캉몰캉
작가님 필력에 홀리듯 끌려가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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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골골
첫눈에 반하고 뭐 그런게아니라 할말하고 자리 떠버리는 르세인 좋아욬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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