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안의 다정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은 엘라엔의 날선 긴장감을 차츰 부드럽게 풀어냈다.
이황자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전 회랑 위에서 보고 느꼈던 그 기이한 시선이 한낱 망상처럼 느껴졌다. “영애, 오늘따라 유독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군요. 형님의 귀환이 사교계의 영애들에게는 꽤나 위압적인 모양입니다.” 이안이 엘라엔의 샴페인 잔을 받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온화하게 웃었다. 엘라엔은 그 다정함에 기대어 억지로 가슴속의 울렁임을 눌러 내렸다. “…아무래도 전장의 이야기는 저희에겐 조금 생경하니까요. 하지만 전하께서 곁에 계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엘라엔의 말은 진심이었다. 황태자 책봉은 아직 멀었지만 제국은 이미 이안이라는 상냥한 지배자를 맞이할 준비를 끝낸 듯 보였다. 필시 그래야만 했다. 그녀는 이안의 뒤로 펼쳐진 견고한 황실의 예법과 정해진 미래를 믿었다. 엘라엔은 이 평화로운 연회가 끝나면 다시 마레즈나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카시안과 비밀스러운 우정의 편지를 주고받는 일상을 꿈꿨다. 하지만 그 안락한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가 웅장해지는 순간,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갈라졌다. 회랑 위에 멈춰 서 있던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르세인. 그는 황제에게 승전 보고를 마친 뒤, 비로소 사교라는 이름의 전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의 부츠 굽이 대리석 바닥을 짓누르는 규칙적인 소리가 음악의 박자와 묘하게 어우러졌다. 르세인은 화려하게 치장한 영애들의 인사를 받지도 않고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엘라엔과 이안이 서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엘라엔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엘라엔의 앞을 막아서며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형님. 여기 라안느 영애가 형님의 무용담에 꽤나 놀란 모양입니다.” 이안의 말은 정중했지만 그 안에는 엘라엔을 자신의 영역으로 보호하려는 명확한 의지가 담겼다. 르세인은 이안의 면전에 멈춰 섰다. 그의 키는 이안보다 한 뼘이나 더 컸고, 풍기는 기운은 이안의 온기를 단숨에 집어삼킬 만큼 압도적이었다. 르세인은 이안의 인사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의 시선은 이안의 어깨너머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엘라엔의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라안느 영애.” 르세인이 처음으로 그녀를 불렀다. “예, 전하.” 엘라엔은 이안의 등 뒤에서 나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품위를 유지하며 무릎을 굽혔다. “이안, 너의 배려가 지나치군. 라안느 영애는 네 보호가 필요한 유약한 존재가 아닐 텐데.” 르세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영애는 폐하께서 각별히 아끼는….” “폐하의 총애는 영애가 지닌 가치 때문이지, 감정 때문이 아니다.” 르세인은 이안을 완전히 무시한 채 엘라엔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엘라엔은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알 수 없는 기이한 압박감에 발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엘라엔은 이 점이 불쾌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거대한 위압감…. 머리가 하얘지는, 턱밑의 호흡까지 스산해지는, 태어나 처음 느끼는 아득하게 밀려오는 공포감은 표현이 불가했다. 그는 분명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단지 시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헤집어 놓는 르세인은 위험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르세인은 엘라엔을 향해 상체를 숙여 그녀의 루비빛 동공을 직시했다. “정원의 오차보다, 연회장의 오차가 더 심각하군.” 엘라엔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원의 오차. 그건 분명 카시안과 함께 있었던 순간을 뜻하는 말이었다. 엘라엔은 숨을 들이켜는 법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그녀의 시야는 오직 눈앞에 자리한 오묘한 녹색 동공으로 좁혀졌다. 르세인의 눈동자는 숲의 심연처럼 깊었지만 그 안에는 생명력이 아닌 죽음과 같은 정돈만이 자리했다. 엘라엔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엘라엔은 갈라지는 음성을 간신히 수습하며 대답했다. 입술은 말라붙고 경련이 일었다. 분명 그녀는 어떤 난처한 상황에서도 미소 뒤에 본심을 숨기고 우아하게 빠져나가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르세인 앞에서 작동하는 건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 남자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아.’ 르세인은 대답 대신 그녀의 얼굴을 탐색하듯 보았다. 그런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이안이 참지 못하고 사이를 가로막으려 손을 뻗었으나 르세인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이안의 팔을 가볍게 쳐냈다. 무심한 손길이었으나 이안의 몸이 비틀거릴 정도의 힘이 실렸다. “형님! 무례하십니다. 영애가 겁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 이안의 높아진 언성에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 쏠렸다. 하지만 르세인은 그 쏟아지는 시선들을 공기 중의 먼지보다 가볍게 여겼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제 눈앞의 오점을 정렬하는 일뿐이었다. “무례라…. 이안, 너는 여전히 비논리적인 말을 하는군. 나는 지금 국가의 자산이 될 황태자비 후보의 결함을 확인하는 중이다.” 르세인은 다시 엘라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오차는 수정되어야만 질서가 완성되지. 영애가 정원에서 나누던 그 비효율적인 교감은 제국의 법도에도, 나의 논리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엘라엔이 이를 악물며 말을 내뱉었다. 카시안의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를 방어하려 했다. 하지만 그 말은 르세인에게 되레 더 명확한 해답을 던져준 꼴이 되어버렸다. 르세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결코 다정하지 않은 미소가 걸렸다. 비웃음이 아닌 정답을 맞힌 관찰자의 만족감이었다. “잘못의 유무를 판단하는 건은 제국의 법이죠. 당신의 반응은 명백한 정보고.” “……!”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오점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겠지만….” 르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엘라엔의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가까이서 제대로 보고 싶다는 모호한 충동을 불러일으키던 그 붉은 루비빛이 공포로 인해 파르르 떨리는 모습. 이질적인 색채가 주는 시각적 자극이 르세인의 뇌리 속에 묘한 파동을 일으켰다. 전장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갈 때도 평온했던 그의 심박이 아주 미세하게… 본인조차 자각하기 힘든 속도로 박동을 달리했다. 그는 이것을 보존하고 싶은 가치가 있는 수집품에 대한 관리 욕구라고 치부했다. 본래 내뱉으려던 말을 틀어 바꾼 것 역시도. “…앞으로 조심하십시오.” 르세인은 엘라엔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연회장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그의 숨결만이 엘라엔의 신경을 긁어내렸다. 말을 마친 르세인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안면은 다시 무색무취의 완벽한 질서로 돌아갔다. 엘라엔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비로소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 하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한 그녀를 이안이 다급히 부축했다. “영애! 괜찮습니까?” 엘라엔은 떨리는 손으로 목에 걸린 사파이어 장식을 꽉 쥐었다. 이안이 좋아하는 푸른 보석은 르세인의 눈앞에서 아무런 빛도 발하지 못했다. 이안의 다급한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엘라엔은 즉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르세인이 사라진 방향의 허공에 못 박혀 있었으니까. 방금 전, 귓가를 스친 르세인의 숨결은 여름밤의 습기를 단숨에 서늘하게 만들었고 앞으로 조심하라는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엘라엔은 심호흡을 하며 흐트러진 차림을 정돈했다. “…괜찮습니다, 이황자 전하. 일황자 전하의 기운이 워낙 압도적이라 잠시 기가 눌렸나 봅니다.” 엘라엔은 떨리는 손을 이안의 손에서 부드럽게 빼내며 부채를 꽉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고통이 선명해질수록 의식은 명징했다. “전하, 몸이 좋지 않아 이만 실례해야겠습니다. 오늘 나누어 주신 다정함은 잊지 않겠습니다.” 엘라엔은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안의 눈에는 우려가 가득했으나 엘라엔은 그 온기에 더 이상 기댈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의 부름을 뒤로하고 대연회장을 빠져나와 복도로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황궁의 긴 복도는 평소보다 훨씬 길고 어둡게 느껴졌다.엘라엔의 낮은 속삭임에 르세인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더욱 껴안았다.달빛이 창틀에 머물다 녹아내리는… 카르네티아의 밤은 그렇게 가장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누구도 넘볼 수 없고, 누구도 나갈 수 없는 위협적인 소유의 완성.제국의 태양과 달은 그렇게 서로를 집어삼킨 채, 영원히 깨지 않을 아름다운 지옥의 한복판에서 사랑의 감정보다 더 깊은 영원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함께 채웠다.그들을 서로를 구원하지 않았다.대신 서로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체계를 세웠다. ***카르네티아의 겨울은 유독 길었으나 황궁 내부는 엘라엔이 조율한 온기 덕분에 계절을 잊은 듯 평온했다.르세인은 집무실 창가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라면 불필요한 생명력이라 치부하며 베어냈을 정원수들이 이제는 엘라엔의 취향에 따라 붉은 열매를 맺은 채 햇살을 머금었다.“폐하, 또 정무를 멀리하고 계시는군요.”부드러운 실크가 바닥을 끄는 소리와 함께 엘라엔이 들어섰다.그녀의 목에는 로잘린이 직접 채워주었던, 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거대한 사파이어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 푸른빛은 그녀의 루비빛 눈동자와 대비되어 기이할 정도로 압도적인 기품을 뿜어냈다.르세인은 돌아보지 않고 그녀의 체향을 느꼈다.장미 향기에 섞인 잉크 냄새.그건 이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지적인 포식자의 향이었다.“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짜놓은 이 완벽한 체계가 나를 한가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황후. 남부의 조세권과 북방의 광산 채굴권까지 당신의 인장 아래 움직이니, 내가 검을 휘두를 명분이 사라졌지 않습니까.”르세인이 다가와 엘라엔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이제 그녀의 배는 제법 불러 있었고, 그 안에서 맥동하는 새로운 생명은 르세인에게 생전 처음 느껴보는 모호한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선사했다.“무력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니까요. 폐하께서는 그저 상석에 앉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제 장부 안에서 처리될 테니.”엘라엔은 르세인의 셔츠 깃을 정리해 주며 고개를 들어 그를
황궁의 가장 높은 첨탑 위로 쏟아지는 달빛은 차갑고도 눈부셨다. 대륙의 모든 비명과 환호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 그 정적의 한복판에 르세인과 엘라엔이 서 있었다.르세인은 엘라엔의 등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의 손등 위로 보이는 흉터들은 그녀라는 안식처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온 훈장이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가슴에 등을 기대며 펼쳐진 제국의 야경을 응시했다.수만 개의 등불이 일렁이는 카르네티아의 밤은 그들을 축복하는 빛 같았다.르세인에게 엘라엔은 정복해야 할 영토이자, 결코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심연이었다. 그는 그녀를 옥좌 옆에 앉혔으나 사실 자신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가두었고, 엘라엔은 그 위협적인 소유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르세인이라는 괴물의 고삐를 쥐었다.엘라엔은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둘은 제국 안팎을 완벽하게 장악했고, 엘레니르 제국에는 완연한 평화가 찾아왔다.“고생 많았습니다, 황후.”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엘라엔은 왠지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으나 울지는 않았다. 그저 촉촉이 젖은 눈으로 르세인을 올려다보며 하늘에 떠있는 달빛을 품은 것처럼 어둠에서도 환하게 웃음 지을 뿐이었다.“당신도… 당신도 고생 많았습니다, 폐하.”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일을 잘 해냈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위로였다.밖으로는 소리 없이 눈이 내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겨울밤.소복하게 쌓인 새하얀 눈과 달빛….그 광경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눈을 뜨고 있음에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르세인은 엘라엔의 그 웃음 하나에 가슴께가 뻐근하게 무거워졌다.그녀가 웃으면 언제부턴가 두 감정이 교차하곤 했다.고마움과 미안함.그러나 그는 그것을 티 내지 않았다.엘라엔은 엘레니르 제국의 황후로서 더 없는 황실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었고 르세인은 그것이 매우 만족스러웠고 흡족했다. 그러나 그녀의 초반 인생을 설계하고 자신의 논리 안에 가둔 건 분명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뒤늦게 깨
엘라엔의 목소리는 서늘하면서도 감미로웠다. 그녀는 르세인의 겉옷을 받아 시종에게 넘기며 그가 앉은 책상 위로 새로운 포고문을 밀어 넣었다.그건 바로 제국 무역 연합의 창설안이었다.르세인은 포고문을 읽어 내리며 입매를 부드럽게 늘였다.“무역 연합이라. 말이 좋아 연합이지, 결국 제국의 화폐를 쓰지 않는 자들은 굶겨 죽이겠다는 말이군요, 황후.”“폐하, 주변 소국들이 제국의 화폐 가치에 종속되는 순간, 그들은 군대를 일으킬 자금조차 제국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겁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르세인은 그녀의 손길을 황홀하게 느끼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당신은 내 검보다 더 잔인한 무기를 휘두르고 있어. 적들은 서서히 말라죽어가겠죠.”“폐하, 제 지략이 마음에 드십니까.”르세인은 엘라엔의 손을 잡아 제 입술로 가져갔다.“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연합에 가입을 거부하는 속국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특히 동부의 무역 도시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발악하겠지. 그들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엘라엔의 눈매가 매혹적으로 가늘어졌다.“이미 그들 내부의 상인 연합을 매수해 두었습니다. 경제적 파멸은 아주 확실한 통제 수단이죠.”르세인은 고개를 얕게 저었다가 얼굴를 돌리고 엘라엔의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추었다. 점차 달아오르는 분위기 속에서 책상 위에 흩어진 수많은 장부와 채권 증서들이 두 사람의 움직임에 눌려 바스락거렸다.*** 대륙을 뒤덮었던 전쟁의 화마가 잦아들고 제국의 수도 카르네티아는 전례 없는 고요와 풍요에 잠겼다.하지만 황궁의 가장 깊은 곳, 르세인의 집무실만큼은 여전히 지독하게 농밀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르세인은 옥좌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단 한 장의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카르노스의 인장이 찍힌, 그러나 공식적인 외교 문서가 아닌 밀약서였다.[카르노스는 엘레니르 제국의 영구적인 속국임을 자처합니다. 다만, 제국의 검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국을 향
같은 시각, 제국 황궁에서 엘라엔은 사흘 밤낮을 이어진 정무의 피로조차 잊은 듯 마지막 숙청 대상자들의 명단을 검토하고 있었다.그녀의 책상 위에는 해카테의 문양이 박힌 금고 열쇠들과 남부 상단 연합의 지배권 양도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그때, 집무실 문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 기사들의 제지도 뚫고 들어온 이는 태후 로잘린이었다.로잘린은 엘라엔의 책상 위에 놓인 해카테 파산 보고서를 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황후, 정말로 한 부족의 숨통을 장부 하나로 끊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황제가 전장에서 그들의 숨통을 조이는 동안, 그대는 그들의 가치 자체를 말소시켰군요.”엘라엔은 펜을 내려놓고 로잘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태후 폐하, 폐하의 제국에는 가난한 속국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오직 폐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생산 기지만이 필요할 뿐이지요. 해카테는 이제 완벽한 제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로잘린은 엘라엔에게서 르세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위엄 그 자체였다.“황제가 돌아오면 황후를 두려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쥔 이 장부들이 황제의 검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말이죠.”“폐하께서는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뻐하시겠지요. 태후 폐하, 이제 시작입니다.”엘라엔은 창밖을 보았다. 멀리서 승전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탓이었다.르세인의 함대가 개선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엘라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르세인에게 바칠 가장 화려한 전리품인, 파산한 해카테의 항복 문서를 손에 쥐고서.***황궁의 정문, 개선의 가도를 메운 것은 승전의 함성보다 더 무거운 경외였다.칠흑 같은 군마 위에 올라탄 르세인이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그의 말 안장 곁에는 해카테 족장이 평생을 지켜온 보석이 박힌 황금 왕관이 볼품없는, 하찮은 물건처럼 매달려 덜렁거렸다.르세인은 고개를 들어 황궁의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그곳엔 제국의 휘장을 배경으로 엘라엔이 서 있었다. 그녀는 승전의
엘라엔은 온몸을 떨며 주저앉은 공작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안색이 단번에 창백하게 굳은 공작을 보는 엘라엔은 잔인하게 번들대는 눈으로 웃음을 내보였다.“감히 나를 독살하려 하다니. 그대의 가문은 제국 법에 의해 멸문될 것이며 그대가 아끼던 그 비축 식량과 금괴 모두 전장의 군자금으로 귀속될 것이다.”“화, 황후 폐하…!”“폐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광장에 걸린 그대의 잘린 얼굴은 폐하께 바칠 나의 첫 번째 전리품이 되겠지.”엘라엔은 짙게 웃으며 공작의 떨리는 턱밑을 쓸었다.공작은 엘라엔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으며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쉴 새 없이 같은 말을 토해냈다. 급박하고 절절함이 가득 묻어 나오는 어투였다.연회장에 모인 모든 이들은 그 모습을 제대로 목도하며 숨을 편히 쉬지도 못할 만큼 굳어버렸다.무언가에 결박 당한 것처럼 그 어떤 움직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동안 여인의 몸으로 정치를 논하는 황후의 코를 납작하게 해야 한다며 호기롭게 얘기했던 지난날의 제 입들을 마구 잡아 뜯고 싶었다. 지금 엘라엔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살기였다.모든 것이 음습해서 오싹했다.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아둔했었는지를 비소로 깨달았다.***베리튼 공작에서 시작된 피의 숙청은 동이 트기도 전에 제국 전역의 상권으로 번져나갔다.엘라엔은 잠을 자는 대신 집무실의 커다란 책상 위에 대륙의 경제 지도를 펼쳤다.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마다 금권을 쥔 가문들의 몰락이 결정되었다.“황후 폐하, 해카테 부족의 주력 함대가 멈췄다는 소식입니다.”정보 상단의 수장 리논이 나타나 보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외심과 함께 미세한 전율이 섞여 있었다.“채권 매집 소식이 그들의 함대에 닿자마자 급료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기함을 포위했습니다. 해카테 부족이 발행한 어음은 이제 쓰레기 조각이 되었으니까요.”엘라엔은 찻잔을 들어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으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했다
엘라엔은 단호하게 말을 잘라냈다. 르세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라기보다 철저히 계산된 확신이었다.르세인이 해카테 부족 함대를 바다 밑으로 가라앉히는 동안, 엘라엔은 해카테의 경제적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다.“제국 내부의 반대파 귀족들, 특히 문제가 아주 많은 파브르 공작 일가의 사유 재산을 몰수해서 그 자금으로 해카테의 채권을 매입하세요. 그들이 돈을 갚아야 할 상대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해카테 족장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군요.”엘라엔은 펜을 들어 서명을 하고 명령서에 인장을 찍었다. 쿵, 소리와 함께 금사의 인장이 찍힐 때마다 해카테라는 거대한 부족의 기둥이 하나둘씩 꺾여 나갔다.*** 이틀 뒤, 집무실에 태후 로잘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잘린은 엘라엔이 벌이고 있는 이 거대한 경제 전쟁의 규모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엘라엔의 책상 위에 놓인 장부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황후, 그대는 황제보다 더 지독한 사냥꾼이 아닙니까.”로잘린은 엘라엔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었다.“태후 폐하, 오셨습니까.”“남부 귀족들이 그대를 누르기 위해 연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돈줄을 죄어오는 것에 미쳐버린 모양이지. 어떻게 할 셈입니까, 황후.”엘라엔은 서류를 정리하며 차분하게 대꾸했다.“제 발로 그 연회장에 가야지요. 남부 전체의 상권 지배권을 완전히 가져올 절호의 기회인 것을요, 태후 폐하.”엘라엔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로잘린은 그런 엘라엔을 보며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며칠 뒤, 남부 귀족들이 마련한 연회는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베리튼 공작의 별관에서 열렸다. 겉으로는 황후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연회장 곳곳에서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엘라엔은 호위 기사를 최소화한 채, 시녀들만을 대동하고 그 독사들의 굴로 발을 들였다.별관의 연회장은 그녀가 등장함과 동시에 수군거리던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