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카르네티아 번화가에서 마차를 돌린 엘라엔은 잡초가 무성한 외곽 도로로 접어들었다.
황궁 서문 밖, 이끼 낀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낡은 쪽문 하나가 나타났다. 과거 궁정인들이 드나들던 이 좁은 문은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엘라엔은 미리 준비한 은화 몇 닢을 졸고 있는 보초병의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제국의 법도보다 은화가 더 힘이 있는 곳. 엘라엔이 카시안을 만나기 위해 설계한 유일한 틈이었다. “엘라엔!” 쪽문을 지나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황궁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낡은 분수대 앞에 카시안이 있었다. 그는 이 경계의 공간에서 엘라엔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했다. “카시안, 많이 기다렸지? 번화가 쪽 검문이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말이야.” 엘라엔은 숨을 몰아쉬며 카시안에게 다가갔다. 그는 엘라엔의 어깨를 감싸 쥐며 안색을 살폈다. “아니야. 네가 이 위험한 길을 매번 오게 해서 미안할 뿐이야. 라안느 공작….” “아버지는 정무로 바쁘셔. 그리고 절대 들키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엘라엔은 카시안의 걱정을 잠재우듯 장난스럽게 웃으며 품 안에서 만년필 상자를 꺼냈다. “엘라엔…!” 순간 카시안의 움직임이 절단된 것처럼 끊어졌다. 카시안은 한참을 뜨거운 시선으로 엘라엔의 얼굴에 파고들었다. 르세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이 습하고 그늘진 숲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에만 집중했다. 같은 시각, 저 멀리 황궁 본궁과 연결된 높은 곳. 르세인은 기사단의 훈련 일지를 검토하며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의 무심한 시선은 문득 황궁 담장 밖 무성한 숲이 우거진 외곽 지역을 훑었다. 숲 사이로 언뜻 비친 드레스 자락과 그 곁에 서 있는 초라한 체구의 남자. 르세인은 펜을 멈추고 그 방향을 보았다. ‘우습군.’ 그는 그 남자가 카시안임을 알아차렸다. 황궁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한 채 담장 밖 숲에서 밀회를 즐기는 두 사람의 모습. 르세인에게 그건 애틋한 로맨스가 아니라 관리 구역 근처에서 발생한 소동 정도로 분류되었다. 그는 황후 로잘린이 정해놓은 황태자비 후보라는 수식어 뒤에 붙은 이 거대한 오점이 자신의 정교한 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아주 건조하게 계산했다. 르세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굳이 기사들을 보내 그들을 적발할 소란을 피울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엘라엔이 느끼는 그 감정은 결코 자신의 논리적 설계를 이길 수 없음을 확신했으니까. 그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보고 : 서문 외곽 숲 보안 상태 미흡. 지시한 일정 앞당길 것.] 그는 엘라엔의 이름을 쓰는 대신 계획해왔던 일정을 앞당겼다. 그것이 그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엘라엔이 카시안의 손을 잡으며 느끼는 그 뜨거운 열정은 르세인의 펜 끝에서 차가운 행정 명령으로 치환되어 사라졌다. *** 라안느 공작저로 돌아온 엘라엔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제 드레스 자락에 묻은 숲의 잔재들을 거칠게 털어냈다. 그때,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온 두 개의 작은 그림자가 그녀를 붙잡았다. “누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누나!” 열 살이 된 하르만과 여덟 살 루시안이었다. 방금까지 검술 기초 훈련을 받았는지 땀방울이 송골 맺힌 아이들의 얼굴에는 누나를 향한 순수한 반가움이 가득했다. 이사벨라의 표독스러운 눈매를 닮지 않고 에드먼의 정갈한 이목구비를 닮은 아이들은 엘라엔이 이곳 마레즈나에서 유일하게 마음 편히 웃어줄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훈련은 열심히 했어? 하르만,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네. 루시안은 또 코끝이 탔구나.” 엘라엔은 섬세한 손길로 아이들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며 영락없는 다정한 누나의 면모를 보였다. 이 아이들이 나중에 가문을 이어받았을 때 적어도 누구에게든 휘둘리지 않도록 강하게 키우는 것 또한 그녀의 남모를 야심 중 하나였다. 하르만은 가문을 이어받아야 할 후계자였고, 루시안은 그런 형을 잘 따르는 영리한 동생이었다. 엘라엔은 자신이 황태자비가 되어 권력을 쥐어야만 동생들이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애님. 공작님께서 대회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의 전갈에 아이들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엘라엔은 둘의 볼을 가볍게 쥐어흔들며 속삭였다. “가서 씻고 기다리렴. 누나가 사 온 맛있는 간식을 줄 테니까.” 생긋 웃으며 달려가는 하르만과 루시안을 보내고 대회의실 문을 열자, 상석에 에드먼과 그 곁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이사벨라의 서늘한 기운이 엘라엔을 덮쳤다. “엘라엔. 일황자 전하의 전령이 다녀갔다.” 에드먼은 황실 인장이 찍힌 공문을 테이블 위로 밀어냈다. [서문 외곽 숲의 벌목과 요새화.] 르세인은 자신의 지휘권 아래 그 구역을 제국 안보의 핵심 요충지로 재편하기로 한 결정을 통보했다. 르세인의 군사적 결단은 엘라엔의 개인적인 안식처를 파괴하는 것을 넘어 라안느 가문의 지원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하르만을 공사 현장의 참관인으로 지명하셨더구나. 라안느 가문의 차기 가주가 제국 군의 요새가 건설되는 과정을 직접 지켜보며 실무를 익히게 하라는 전하의 배려이시지.” 이사벨라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미소를 내보였다. “공작. 전하께서 우리 하르만을 직접 챙기시다니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어요? 엘라엔, 네가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니 전하께서 네 동생에게도 마음을 써 주시는 모양이구나.” 이사벨라의 말은 다정해 보였지만 너는 결국 내 아들의 앞길을 닦는 도구일 뿐이라는 조롱이 내포되어 있었다. 엘라엔은 하르만의 이름이 나오자 눈매를 가늘게 떴다. ‘배려라고? 아니, 분명 그에겐 배려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르세인이 하르만을 참관인으로 부른 것은 교육을 빙자한 라안느 가문의 차기 권력을 제 통제 아래에 두려는 계산임이 분명했다. 지독하게도 효율적이고 냉혹한 수였다. 그녀는 사랑하는 동생이 르세인의 그 건조하고 냉혹한 논리에 물들거나 그의 체스판 위 졸로 이용당하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 전하의 제안을 받아들이시되 조건을 거세요.”엘라엔의 낮은 속삭임에 르세인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더욱 껴안았다.달빛이 창틀에 머물다 녹아내리는… 카르네티아의 밤은 그렇게 가장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누구도 넘볼 수 없고, 누구도 나갈 수 없는 위협적인 소유의 완성.제국의 태양과 달은 그렇게 서로를 집어삼킨 채, 영원히 깨지 않을 아름다운 지옥의 한복판에서 사랑의 감정보다 더 깊은 영원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함께 채웠다.그들을 서로를 구원하지 않았다.대신 서로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체계를 세웠다. ***카르네티아의 겨울은 유독 길었으나 황궁 내부는 엘라엔이 조율한 온기 덕분에 계절을 잊은 듯 평온했다.르세인은 집무실 창가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라면 불필요한 생명력이라 치부하며 베어냈을 정원수들이 이제는 엘라엔의 취향에 따라 붉은 열매를 맺은 채 햇살을 머금었다.“폐하, 또 정무를 멀리하고 계시는군요.”부드러운 실크가 바닥을 끄는 소리와 함께 엘라엔이 들어섰다.그녀의 목에는 로잘린이 직접 채워주었던, 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거대한 사파이어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 푸른빛은 그녀의 루비빛 눈동자와 대비되어 기이할 정도로 압도적인 기품을 뿜어냈다.르세인은 돌아보지 않고 그녀의 체향을 느꼈다.장미 향기에 섞인 잉크 냄새.그건 이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지적인 포식자의 향이었다.“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짜놓은 이 완벽한 체계가 나를 한가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황후. 남부의 조세권과 북방의 광산 채굴권까지 당신의 인장 아래 움직이니, 내가 검을 휘두를 명분이 사라졌지 않습니까.”르세인이 다가와 엘라엔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이제 그녀의 배는 제법 불러 있었고, 그 안에서 맥동하는 새로운 생명은 르세인에게 생전 처음 느껴보는 모호한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선사했다.“무력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니까요. 폐하께서는 그저 상석에 앉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제 장부 안에서 처리될 테니.”엘라엔은 르세인의 셔츠 깃을 정리해 주며 고개를 들어 그를
황궁의 가장 높은 첨탑 위로 쏟아지는 달빛은 차갑고도 눈부셨다. 대륙의 모든 비명과 환호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 그 정적의 한복판에 르세인과 엘라엔이 서 있었다.르세인은 엘라엔의 등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의 손등 위로 보이는 흉터들은 그녀라는 안식처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온 훈장이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가슴에 등을 기대며 펼쳐진 제국의 야경을 응시했다.수만 개의 등불이 일렁이는 카르네티아의 밤은 그들을 축복하는 빛 같았다.르세인에게 엘라엔은 정복해야 할 영토이자, 결코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심연이었다. 그는 그녀를 옥좌 옆에 앉혔으나 사실 자신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가두었고, 엘라엔은 그 위협적인 소유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르세인이라는 괴물의 고삐를 쥐었다.엘라엔은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둘은 제국 안팎을 완벽하게 장악했고, 엘레니르 제국에는 완연한 평화가 찾아왔다.“고생 많았습니다, 황후.”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엘라엔은 왠지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으나 울지는 않았다. 그저 촉촉이 젖은 눈으로 르세인을 올려다보며 하늘에 떠있는 달빛을 품은 것처럼 어둠에서도 환하게 웃음 지을 뿐이었다.“당신도… 당신도 고생 많았습니다, 폐하.”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일을 잘 해냈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위로였다.밖으로는 소리 없이 눈이 내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겨울밤.소복하게 쌓인 새하얀 눈과 달빛….그 광경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눈을 뜨고 있음에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르세인은 엘라엔의 그 웃음 하나에 가슴께가 뻐근하게 무거워졌다.그녀가 웃으면 언제부턴가 두 감정이 교차하곤 했다.고마움과 미안함.그러나 그는 그것을 티 내지 않았다.엘라엔은 엘레니르 제국의 황후로서 더 없는 황실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었고 르세인은 그것이 매우 만족스러웠고 흡족했다. 그러나 그녀의 초반 인생을 설계하고 자신의 논리 안에 가둔 건 분명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뒤늦게 깨
엘라엔의 목소리는 서늘하면서도 감미로웠다. 그녀는 르세인의 겉옷을 받아 시종에게 넘기며 그가 앉은 책상 위로 새로운 포고문을 밀어 넣었다.그건 바로 제국 무역 연합의 창설안이었다.르세인은 포고문을 읽어 내리며 입매를 부드럽게 늘였다.“무역 연합이라. 말이 좋아 연합이지, 결국 제국의 화폐를 쓰지 않는 자들은 굶겨 죽이겠다는 말이군요, 황후.”“폐하, 주변 소국들이 제국의 화폐 가치에 종속되는 순간, 그들은 군대를 일으킬 자금조차 제국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겁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르세인은 그녀의 손길을 황홀하게 느끼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당신은 내 검보다 더 잔인한 무기를 휘두르고 있어. 적들은 서서히 말라죽어가겠죠.”“폐하, 제 지략이 마음에 드십니까.”르세인은 엘라엔의 손을 잡아 제 입술로 가져갔다.“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연합에 가입을 거부하는 속국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특히 동부의 무역 도시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발악하겠지. 그들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엘라엔의 눈매가 매혹적으로 가늘어졌다.“이미 그들 내부의 상인 연합을 매수해 두었습니다. 경제적 파멸은 아주 확실한 통제 수단이죠.”르세인은 고개를 얕게 저었다가 얼굴를 돌리고 엘라엔의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추었다. 점차 달아오르는 분위기 속에서 책상 위에 흩어진 수많은 장부와 채권 증서들이 두 사람의 움직임에 눌려 바스락거렸다.*** 대륙을 뒤덮었던 전쟁의 화마가 잦아들고 제국의 수도 카르네티아는 전례 없는 고요와 풍요에 잠겼다.하지만 황궁의 가장 깊은 곳, 르세인의 집무실만큼은 여전히 지독하게 농밀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르세인은 옥좌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단 한 장의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카르노스의 인장이 찍힌, 그러나 공식적인 외교 문서가 아닌 밀약서였다.[카르노스는 엘레니르 제국의 영구적인 속국임을 자처합니다. 다만, 제국의 검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국을 향
같은 시각, 제국 황궁에서 엘라엔은 사흘 밤낮을 이어진 정무의 피로조차 잊은 듯 마지막 숙청 대상자들의 명단을 검토하고 있었다.그녀의 책상 위에는 해카테의 문양이 박힌 금고 열쇠들과 남부 상단 연합의 지배권 양도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그때, 집무실 문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 기사들의 제지도 뚫고 들어온 이는 태후 로잘린이었다.로잘린은 엘라엔의 책상 위에 놓인 해카테 파산 보고서를 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황후, 정말로 한 부족의 숨통을 장부 하나로 끊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황제가 전장에서 그들의 숨통을 조이는 동안, 그대는 그들의 가치 자체를 말소시켰군요.”엘라엔은 펜을 내려놓고 로잘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태후 폐하, 폐하의 제국에는 가난한 속국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오직 폐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생산 기지만이 필요할 뿐이지요. 해카테는 이제 완벽한 제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로잘린은 엘라엔에게서 르세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위엄 그 자체였다.“황제가 돌아오면 황후를 두려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쥔 이 장부들이 황제의 검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말이죠.”“폐하께서는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뻐하시겠지요. 태후 폐하, 이제 시작입니다.”엘라엔은 창밖을 보았다. 멀리서 승전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탓이었다.르세인의 함대가 개선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엘라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르세인에게 바칠 가장 화려한 전리품인, 파산한 해카테의 항복 문서를 손에 쥐고서.***황궁의 정문, 개선의 가도를 메운 것은 승전의 함성보다 더 무거운 경외였다.칠흑 같은 군마 위에 올라탄 르세인이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그의 말 안장 곁에는 해카테 족장이 평생을 지켜온 보석이 박힌 황금 왕관이 볼품없는, 하찮은 물건처럼 매달려 덜렁거렸다.르세인은 고개를 들어 황궁의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그곳엔 제국의 휘장을 배경으로 엘라엔이 서 있었다. 그녀는 승전의
엘라엔은 온몸을 떨며 주저앉은 공작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안색이 단번에 창백하게 굳은 공작을 보는 엘라엔은 잔인하게 번들대는 눈으로 웃음을 내보였다.“감히 나를 독살하려 하다니. 그대의 가문은 제국 법에 의해 멸문될 것이며 그대가 아끼던 그 비축 식량과 금괴 모두 전장의 군자금으로 귀속될 것이다.”“화, 황후 폐하…!”“폐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광장에 걸린 그대의 잘린 얼굴은 폐하께 바칠 나의 첫 번째 전리품이 되겠지.”엘라엔은 짙게 웃으며 공작의 떨리는 턱밑을 쓸었다.공작은 엘라엔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으며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쉴 새 없이 같은 말을 토해냈다. 급박하고 절절함이 가득 묻어 나오는 어투였다.연회장에 모인 모든 이들은 그 모습을 제대로 목도하며 숨을 편히 쉬지도 못할 만큼 굳어버렸다.무언가에 결박 당한 것처럼 그 어떤 움직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동안 여인의 몸으로 정치를 논하는 황후의 코를 납작하게 해야 한다며 호기롭게 얘기했던 지난날의 제 입들을 마구 잡아 뜯고 싶었다. 지금 엘라엔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살기였다.모든 것이 음습해서 오싹했다.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아둔했었는지를 비소로 깨달았다.***베리튼 공작에서 시작된 피의 숙청은 동이 트기도 전에 제국 전역의 상권으로 번져나갔다.엘라엔은 잠을 자는 대신 집무실의 커다란 책상 위에 대륙의 경제 지도를 펼쳤다.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마다 금권을 쥔 가문들의 몰락이 결정되었다.“황후 폐하, 해카테 부족의 주력 함대가 멈췄다는 소식입니다.”정보 상단의 수장 리논이 나타나 보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외심과 함께 미세한 전율이 섞여 있었다.“채권 매집 소식이 그들의 함대에 닿자마자 급료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기함을 포위했습니다. 해카테 부족이 발행한 어음은 이제 쓰레기 조각이 되었으니까요.”엘라엔은 찻잔을 들어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으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했다
엘라엔은 단호하게 말을 잘라냈다. 르세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라기보다 철저히 계산된 확신이었다.르세인이 해카테 부족 함대를 바다 밑으로 가라앉히는 동안, 엘라엔은 해카테의 경제적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다.“제국 내부의 반대파 귀족들, 특히 문제가 아주 많은 파브르 공작 일가의 사유 재산을 몰수해서 그 자금으로 해카테의 채권을 매입하세요. 그들이 돈을 갚아야 할 상대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해카테 족장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군요.”엘라엔은 펜을 들어 서명을 하고 명령서에 인장을 찍었다. 쿵, 소리와 함께 금사의 인장이 찍힐 때마다 해카테라는 거대한 부족의 기둥이 하나둘씩 꺾여 나갔다.*** 이틀 뒤, 집무실에 태후 로잘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잘린은 엘라엔이 벌이고 있는 이 거대한 경제 전쟁의 규모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엘라엔의 책상 위에 놓인 장부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황후, 그대는 황제보다 더 지독한 사냥꾼이 아닙니까.”로잘린은 엘라엔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었다.“태후 폐하, 오셨습니까.”“남부 귀족들이 그대를 누르기 위해 연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돈줄을 죄어오는 것에 미쳐버린 모양이지. 어떻게 할 셈입니까, 황후.”엘라엔은 서류를 정리하며 차분하게 대꾸했다.“제 발로 그 연회장에 가야지요. 남부 전체의 상권 지배권을 완전히 가져올 절호의 기회인 것을요, 태후 폐하.”엘라엔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로잘린은 그런 엘라엔을 보며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며칠 뒤, 남부 귀족들이 마련한 연회는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베리튼 공작의 별관에서 열렸다. 겉으로는 황후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연회장 곳곳에서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엘라엔은 호위 기사를 최소화한 채, 시녀들만을 대동하고 그 독사들의 굴로 발을 들였다.별관의 연회장은 그녀가 등장함과 동시에 수군거리던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