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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기다린다는 말

Author: 아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9 10:41:04

연화가 물러간 뒤에도 예령은 한동안 창가를 떠나지 않았다. 처마 끝에 매달린 얼음이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고, 먼 골목에서는 밤 순라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시다 만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예령은 찻잔을 내려놓고 서실의 등불을 낮추었다.

무겸이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문밖에서 익숙한 발걸음이 멈추자 예령은 펼쳐 두었던 물건 목록을 덮었다. 연화에게 말을 전하라 한 것이 이제 와 조금 민망했으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무겸의 얼굴을 보자 그런 생각은 잦아들었다.

“아직 쉬지 않았소?”

“마무리할 일이 있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이제 오십니까?”

무겸은 외투를 벗어 문가에 걸었다. 어깨에 묻은 눈이 녹아 짙은 자국을 남겼다. 예령은 연화를 불러 따뜻한 차를 내오라 하고, 그가 앉을 자리를 비워 주었다.

“장터에서 붙잡은 자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칼을 쓴 자와 사주한 자 모두 관아에 넘겼소. 이번 일은 그것으로 끝낼 생각이오.”

그의 말에는 불필요한 단서도, 오래 끌 여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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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182화. 기다린다는 말

    연화가 물러간 뒤에도 예령은 한동안 창가를 떠나지 않았다. 처마 끝에 매달린 얼음이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고, 먼 골목에서는 밤 순라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시다 만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예령은 찻잔을 내려놓고 서실의 등불을 낮추었다.무겸이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문밖에서 익숙한 발걸음이 멈추자 예령은 펼쳐 두었던 물건 목록을 덮었다. 연화에게 말을 전하라 한 것이 이제 와 조금 민망했으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무겸의 얼굴을 보자 그런 생각은 잦아들었다.“아직 쉬지 않았소?”“마무리할 일이 있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이제 오십니까?”무겸은 외투를 벗어 문가에 걸었다. 어깨에 묻은 눈이 녹아 짙은 자국을 남겼다. 예령은 연화를 불러 따뜻한 차를 내오라 하고, 그가 앉을 자리를 비워 주었다.“장터에서 붙잡은 자들은 어찌 되었습니까?”“칼을 쓴 자와 사주한 자 모두 관아에 넘겼소. 이번 일은 그것으로 끝낼 생각이오.”그의 말에는 불필요한 단서도, 오래 끌 여지도 없었다. 예령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무겸이 직접 나서 주었다는 사실보다, 더는 누군가를 의심하며 장터에 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반가웠다.“내일은 상인들을 다시 만나려 합니다.”“듣고 있소. 부인이 그들에게 다른 길을 마련해 주었다고.”“길을 마련했다기보다, 서로의 물건을 한데 모아 보낼 수 있게 된 것뿐입니다. 팔릴 물건인지는 이제부터 두고 봐야지요.”무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위협이 물러가자마자 다음 일을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오늘 밤만은 쉬어도 좋으련만, 그것이 예령이 살아온 방식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다.“부인의 판단을 믿소. 다만 다친 손목에는 약을 바르시오.”예령은 무심코 소맷자락을 내렸다. 작은 멍을 그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이 정도는 금세 낫습니다.”“금세 낫더라도 아픈 건 아픈 것이오.”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예령은 그 짧은 대답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무겸은 늘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일과 감당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해 주었다. 그 선을 넘어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181화. 드러내지 않는 마음

    “진 상단주, 제가 의원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무겸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에서 잠깐 멈췄다.진서헌은 붕대가 감긴 팔을 내려다보더니 웃었다.“오늘은 사양하겠습니다. 부인께서 장터를 정리하시는 모습을 끝까지 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의원의 잔소리를 한 번 더 들어야겠군요.”“피가 다시 났으니 반드시 살펴보셔야 합니다.”“알겠습니다. 내일은 얌전히 있지요.”그는 예령에게 고개를 숙이고 무겸을 향해서도 예를 갖추었다. 무겸은 마차에 오르는 진서헌을 붙들지 않았다. 다만 마부에게 의원까지 곧장 가라고 일렀다.“진 상단주.”진서헌이 마차의 휘장을 걷었다.“부인을 구해 준 일은 다시 한번 감사하오.”“장군님께서는 이미 충분히 말씀하셨습니다.”“고마움을 여러 번 전한다고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오.”진서헌은 잠시 무겸을 바라보다 조용히 답했다.“그렇다면 저도 여러 번 말씀드려야겠군요. 부인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마차가 떠나자 예령은 멀어지는 바퀴 소리를 잠시 들었다. 다친 몸으로 장터를 찾아온 진서헌이 마음에 걸렸다. 감사의 뜻으로 무엇을 보내야 할지 생각했지만, 물건 몇 가지로 오늘 일을 갚을 수는 없었다. 무겸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은근한 웃음을 건네던 진서헌의 얼굴과, 그의 상처를 살피던 예령의 눈길이 마음에 남았다. 그러나 고맙다는 마음까지 질투로 덮을 수는 없었다.“장군, 군영으로 돌아가셔야 하지 않습니까?”“그래야겠소. 붙잡은 자들을 살펴야 하니.”“이번 일 때문에 군무에 지장을 드렸습니다.”“부인이 칼을 맞을 뻔한 일이오. 내 일이기도 하오.”무겸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예령이 무언가 말하려 하자 그가 먼저 장터 쪽을 돌아보았다. 태성상단의 사내들이 사라진 뒤에도 상인들은 선뜻 짐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오늘 이곳에 군사 몇을 남기겠소. 부인의 거래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장터에서 다시 칼을 드는 자가 없게 하려는 것이오.”“그렇다면 상인들도 안심하겠군요.”“거래는 부인이 원하는 대로 하시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180화.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사내는 잠시 예령을 노려보더니 허리춤에서 은전 주머니를 꺼내 좌판 위에 내려놓았다. 묵직한 소리에 상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말은 누구나 그럴듯하게 하지. 하지만 오늘 당장 이만한 돈을 내놓을 사람은 우리뿐이오.”그가 주머니를 열자 은전이 반짝였다. 늙은 모피 장수는 침을 삼켰고, 뒤에 선 젊은 상인들은 저마다 눈치를 살폈다. 예령은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긴 겨울을 버틴 사람들에게 당장 손에 쥘 돈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고 있었다.“그 돈을 받으면 내년에도 같은 값을 받을 수 있습니까?”“내년 일은 내년에 걱정하면 되지 않소.”“그렇다면 오늘 높은 값을 주는 이유부터 말씀해 보시지요. 다른 상단이 모피를 사지 못하게 하려는 것 아닙니까?”사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령은 상인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모두 저와 거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물건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지 마십시오. 장터에 여러 손님이 있어야 값을 제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좋은 말씀이오만, 우리 집에는 당장 먹을 쌀이 없소.”젊은 사내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품에는 낡은 모피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예령은 잠시 생각하다 그에게 다가갔다.“그 두 장은 제가 사겠습니다. 나머지 물건은 다른 상인들과 함께 남쪽으로 보내십시오. 팔릴 때까지 기다릴 수 있도록 운송비는 제가 먼저 부담하지요.”젊은 상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들었다. 예령은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같은 조건을 제안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당장 팔 물건을 남겨 두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함께 모피를 보내자는 것이었다.“서씨 상단이 그렇게까지 하겠다고?”태성상단의 사내가 비웃었다.“남의 물건 팔아 주느라 제 돈을 잃겠다는 말이오?”“손해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할 일입니다.”예령의 대답에 뒤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사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손짓하자 동행한 자들이 길목으로 나서며 상인들의 짐수레 앞을 막았다.“좋소. 그럼 어디 한번 옮겨 보시오. 이 장터에서 누가 길을 열어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179화. 곁에 남은 온기

    무겸은 식어 버린 국그릇을 살피더니 연화를 불렀다. 따뜻한 것을 다시 내오라는 말에 예령이 손을 저었다.“이대로도 괜찮습니다.”“괜찮다는 말을 오늘 몇 번이나 했는지 아시오?”뜻밖의 물음에 예령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의원에서도,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같은 말만 반복했다. 무겸은 더 추궁하지 않고 그녀 앞에 놓인 잔에 차를 따랐다.“놀라지 않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소. 나에게까지 강한 척하지 않아도 되오.”예령은 잔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온기가 닿자 장터의 소란이 다시 떠올랐다. 쏟아진 은전과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자신을 밀쳐 내던 진서헌의 손. 조금만 늦었다면 그가 아닌 자신이 피를 흘렸을 것이다.“진 상단주가 아니었다면 위험했을 겁니다.”“알고 있소.”“그분께 큰 빚을 졌습니다.”무겸은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예령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다른 사내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에 걸렸다. 하지만 그것은 예령에게 내보일 감정이 아니었다.“빚이라고 여기지 마시오. 진 상단주도 부인이 그런 생각으로 자신을 대하는 건 바라지 않을 거요.”“장군께서는 그분의 마음을 어찌 아십니까?”“나라도 그랬을 테니까.”짧은 대답이었다. 예령은 차를 마시려다 손을 멈췄다. 무겸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식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국이 오면 조금이라도 드시오. 빈속으로 밤을 지새우면 내일 장터에도 못 나갈 테니.”“내일 일을 알고 계셨습니까?”“곽진에게 들었소. 상인들을 모으겠다 했다지.”“태성상단이 모피를 독차지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대신 전부 사들일 형편도 아니고요.”“방법은 있소?”“서씨 상단의 거래처를 소개하려 합니다. 작은 상인들이 서로 힘을 합치면 굳이 태성상단이 부르는 값에 매달릴 이유가 없지요.”무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장터를 지킬 병력을 보내겠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랐으나 삼켰다. 예령에게 필요한 것은 대신 결정을 내려 줄 사람이 아니라, 그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178화. 칼날 뒤에 남은 것

    진서헌의 대답은 담담했다. 무겸은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오늘의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는 상처 하나만 남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의원 앞을 떠나려던 무겸이 다시 걸음을 멈췄다. 진서헌의 팔을 감싼 붕대가 소매 아래로 비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곡식값을 두고 맞서던 사내가 오늘은 예령을 대신해 칼을 맞았다.“상처가 아물 때까지 무리하지 마시오.”“의원도 큰 상처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내 부인을 구하다 다친 상처요. 어찌 모른 척하겠소.”진서헌은 잠시 무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무겸의 말에는 빈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진서헌 역시 가벼운 농담으로 대꾸할 수 없었다.“부인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무겸은 그제야 말에 올랐다. 진서헌은 말발굽 소리가 멀어진 뒤에도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 팔을 조금 움직이자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나 자꾸 떠오르는 것은 칼날보다 자신을 붙들고 상처를 살피던 예령의 얼굴이었다.그날 저녁, 예령은 돌아온 뒤에도 쉬이 저녁상을 받지 못했다. 연화는 갈아입으려 벗어 놓은 옷에 피가 묻은 것을 발견하고 놀라 달려왔다.“마님, 어디 다치셨습니까?”“나는 다치지 않았다. 진 상단주가 나를 구하다 팔을 베였어.”연화는 안도의 숨을 내쉬다가도 핏자국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령은 옷을 한쪽에 접어 놓았다. 진서헌이 제 몸을 돌려 칼을 막아선 순간을 떠올리니 지금도 손끝이 서늘했다. 평소에는 웃으며 거래를 흥정하던 사람이었다. 오늘만큼은 그 웃음 뒤에 감추어진 용기가 고마웠다. 장터에서 들었던 옷 찢어지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때 진서헌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칼끝은 어디에 닿았을까.“장군님께서는 아십니까?”“의원까지 오셨다. 나보다 진 상단주에게 먼저 고맙다고 하시더구나.”말을 마친 예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겸이 자신의 손목에 남은 작은 상처까지 알아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마차 문을 열어 주었던 것도.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177화. 피 묻은 소매

    칼날이 옷깃을 찢고 지나가는 순간, 진서헌의 몸이 예령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그녀를 뒤로 밀어내면서도 끝내 팔을 거두지 않았다. 검은 두건의 사내가 다시 칼을 들어 올리자 장호가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달려들었다.“마님, 물러서십시오!”장호의 칼집이 사내의 손목을 내리쳤다. 짧은 칼이 돌바닥을 튀었고, 뒤따라온 호위 둘이 사내를 엎어 눌렀다. 장터의 비명은 그제야 한꺼번에 터졌다. 엎어진 좌판에서 은전이 굴러다녔지만 누구도 줍지 못했다.예령은 진서헌을 붙들었다. 짙은 남색 소매 아래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웃으려 하자 예령의 표정이 굳었다.“움직이지 마십시오. 상처부터 봐야 합니다.”“부인께서 다치지 않으셨으니 됐습니다.”“저를 구하시려다 다치셨는데 어찌 괜찮다고만 하십니까.”예령은 목에 둘렀던 얇은 비단을 풀어 그의 팔을 감쌌다. 피가 곧장 스며들었다. 진서헌은 잠시 예령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칼끝 앞에서도 태연하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상처가 깊지 않아야 할 텐데요.”“이 정도는 괜찮습니다.”“괜찮은지는 의원이 판단할 일입니다.”예령은 장호에게 가장 가까운 의원을 부르라 이르고, 붙잡힌 사내를 돌아보았다. 두건이 벗겨진 얼굴은 낯설었다. 사내는 땅바닥에 뺨을 붙인 채 중개인이 서 있던 자리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모피를 사들이던 자들은 소동을 틈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천막 아래에는 빈 저울과 뒤집힌 나무함만 남아 있었다. 물건을 사겠다며 그토록 요란하게 사람을 모아 놓고, 정작 한 꾸러미도 챙겨 가지 않은 것이다.예령은 붙잡힌 사내를 바라보다가 장호에게 물었다.“저자가 처음부터 저를 노린 것이 맞습니까?”장호가 이를 악물었다.“예, 마님. 분명 마님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제가 한발 늦었습니다.”“장호 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선 사람부터 살펴 주십시오.”예령은 사내의 손에 묻은 먹물을 보았다. 검지 끝과 손톱 밑이 검었다. 칼을 쥐었던 자라기보다 종일 무언가를 적던 사람의 손이었다.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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