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검은 무복의 사내가 사라진 뒤에도 예령은 한동안 빈 길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연화가 달려와 예령의 손목을 살폈다. 무천에게 붙잡혔던 자리에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괜찮아.”
“그냥 저택으로 돌아가요.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호위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무천의 수하들에게 제압당한 것이 수치스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예령은 돌아갈 수 없었다.
무천이 자신을 데려가지 못했으니 조씨는 곧 다른 방법을 쓸 것이다. 진북후에게 파혼서를 전하는 일이 늦어질수록 불리해졌다.
“병영으로 간다.”
“하지만 아가씨…….”
“저들이 다시 돌아오지는 못할 거야.”
무천의 얼굴에 떠올랐던 공포는 거짓이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예령은 바닥에 떨어진 비녀를 주워 들었다. 끝에 묻은 피를 닦아 소매 안에 넣은 뒤 마차에 올랐다.
길을 다시 출발한 뒤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연히 지나던 무인이었다면 무천을 쫓아낸 뒤 사례를 요구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을 지켜보던 사람이라면 누구의 명을 받았는지가 문제였다.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
예령은 섣불리 결론짓지 않기로 했다.
황도 외곽의 병영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뒤였다.
병사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귀족가의 여인을 경계했다. 예령이 서씨 상단의 인장을 내보이자 그제야 안으로 들어가 확인했다.
잠시 후 체격이 다부진 중년의 사내가 막사에서 나왔다. 왼쪽 눈썹에서 뺨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가 있었다.
북방에서 군량을 관리했던 유강이었다.
“서 대인의 따님이시오?”
“예.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유강은 예령과 망가진 호위들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오는 길이 편하지 않았던 모양이군.”
“그래도 반드시 전해야 할 것이 있어 왔습니다.”
예령은 봉인된 파혼서를 내밀었다.
“진북후께 직접 전달해 주십시오.”
유강은 서신을 받지 않았다.
“집안의 혼사를 군영을 통해 해결하려는 것이오?”
“진북후부에 두 번 보냈지만 두 번 모두 봉인도 뜯기지 않은 채 돌아왔습니다.”
“진북후께서 거절하신 것일 수도 있지.”
“그렇다면 직접 거절하셨다는 답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예령은 무천이 사용한 재물의 내역도 꺼냈다.
“한무천 공자는 제 허락 없이 서씨 상단의 인장을 사용했습니다. 오늘은 길을 막고 저를 강제로 데려가려 했습니다.”
유강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소?”
“함께 온 사람들이 모두 보았습니다.”
예령은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진북후께 파혼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진실을 알리고, 직접 판단해 달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유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전쟁 중 서씨 상단이 약속한 날짜보다 먼저 군량을 보내지 않았다면 북방의 병사 수백 명이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는 그 빚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유강이 파혼서를 받아 들었다.
“사흘 안에 진북후께 직접 전하겠소.”
“중간에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치면 안 됩니다.”
“내 목을 걸고 약속하지.”
예령은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병영을 나설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연화가 예령의 손목에 약을 발랐다. 붉은 자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아까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나도 몰라.”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사라졌잖아요.”
예령은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자신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불편했다.
같은 시각, 진북후부의 별당.
무겸은 펼쳐 둔 북방 장부를 읽고 있었다.
열린 창으로 바람이 들어와 등불이 흔들렸다.
“돌아왔느냐.”
대답은 없었다.
무겸은 장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다친 곳은?”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없습니다.”
“그 여인은?”
“무사히 병영에 도착했습니다.”
그제야 무겸의 손이 멈췄다.
“무천은.”
“다시는 같은 방법을 쓰지 못할 겁니다.”
짧은 보고가 끝나자 방 안에는 다시 기척이 사라졌다.
무겸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내 이름은 밝히지 않았겠지.”
어둠 속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명하신 대로 했습니다.”
무겸은 천천히 장부를 덮었다.
예령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만 알 뿐, 누가 사람을 보냈는지는 모를 것이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가 지팡이 손잡이를 천천히 쓸었다.
“계속 모르는 척하게 둬.”
목소리는 태연했지만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신 다음에 또 누가 그 여인에게 손을 댄다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음번엔 살려 보내지 마라.”
어둠 속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무겸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령이 무천에게 붙잡힌 손목에는 분명 멍이 남았을 것이다. 직접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지금 찾아가면 자신이 사람을 붙였다는 사실까지 드러날 수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혼인 약조문을 펼쳤다.
두 개의 붉은 인장이 등불 아래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내가 지키겠다고 했으니.”
무겸의 손끝이 예령의 인장 위에 잠시 머물렀다.
“그 약조부터 지켜야겠지.”
한편 진북후부로 돌아온 무천은 조씨의 처소로 향하지 않았다.
뺨의 상처와 부어오른 손목을 들키면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설명해야 했다. 그는 아무도 들이지 않은 채 방문을 걸어 잠갔다.
거울 속에는 겁에 질려 도망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무천은 분을 참지 못하고 거울을 내리쳤다.
쨍그랑.
깨진 조각마다 일그러진 얼굴이 비쳤다.
“형님이 보낸 놈이겠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이렇게까지 위협할 사람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두려움은 곧 더 짙은 증오로 변했다.
무천은 피가 맺힌 주먹을 움켜쥐었다.
관문이 다시 열린 뒤 사흘째 되는 아침이었다. 성안의 장터에는 겨우내 묶여 있던 수레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남쪽에서 가져온 비단과 차, 북방의 모피와 약재가 처마 아래 쌓였고, 상인들은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서로의 물건을 살폈다.예령은 상단 앞에 도착한 낯익은 마차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진가상회의 표식이 새겨진 문이 열리고 진서헌이 내려섰다. 그는 예령을 발견하자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태연히 웃었다.“부인께서 먼저 오셨군요. 저는 늦지 않으려 새벽부터 길을 나섰는데.”“예고도 없이 오신 분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아셨습니까?”“기다리시지 않을 걸 알기에 일찍 온 것입니다.”능청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가 펼쳐 보인 종이를 보고 예령은 웃음을 거두었다. 북방의 장터에 새로 들어선 상인들이 모피를 한꺼번에 사들이겠다고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값을 내걸었고, 사흘 안에 물건을 넘기는 상회에만 계약하겠다고 했다.“값을 잘 쳐 주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사들이겠다는 물건이 너무 많습니다. 이 고을 상회들이 겨우내 모아 둔 것보다도요.”예령은 종이를 다시 읽었다. 구매자의 이름은 낯설었지만 거래를 중개하는 곳에는 태성상단의 표식이 찍혀 있었다. 얼마 전 군량 장부 사건에서 벗어나자마자 또다시 황기문의 이름과 마주할 줄은 몰랐다.“진 상단주께서는 이 거래를 막으시려는 겁니까?”“아니요. 먼저 물건을 살피려 합니다. 부인께서도 보셔야 할 듯해서요.”“어째서 저입니까?”“부인께서는 값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선뜻 거래에 나서실 분이 아니지요. 저 역시 이번 거래가 어딘지 석연치 않습니다.”예령은 종이를 접어 돌려주었다. 말만 듣고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진서헌도 그 점을 아는지 더 설득하지 않았다. 대신 마당 끝에 세워 둔 마차를 가리켰다.“오늘 정오에 첫 물건을 공개합니다. 보시고도 시시하면 그대로 돌아오십시오.”그가 돌아가려는 순간 곽진이 말을 몰고 들어왔다. 뒤이어 무겸이 내렸다. 군영에서 돌아오는 길
군영을 떠난 마차가 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도 예령은 한동안 창을 닫지 않았다. 눈발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횃불 아래 서 있던 무겸의 모습이 눈앞에 남아 있었다. 연화가 추위에 감기라도 들겠다며 몇 번이나 청하고 나서야 예령은 창을 내렸다.이튿날 새벽에는 밤새 내리던 눈이 멎었다. 마당에 찍힌 발자국이 희미한 푸른빛을 띠었고, 처마 밑에서는 얼음 녹는 물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예령이 아침상을 물린 참에 연화가 작은 나무함과 서신 한 통을 가져왔다.“마님, 군영에서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장군님께서 전하라 하셨답니다.”함 안에는 매화 무늬가 새겨진 은제 손난로가 들어 있었다. 가장자리가 닳고 뚜껑에는 작은 흠집이 있는, 새 물건은 아니었다. 함께 온 서신에는 밤사이 북쪽 초소를 살필 일이 생겨 이틀쯤 군영에 머물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끝에는 추운 날 먼 길을 다니지 말고 손을 따뜻이 하라는 짧은 당부가 붙어 있었다.예령은 서신을 접고 손난로를 들어 보았다. 어젯밤 자신에게 겉옷을 둘러 주던 사람이 떠올랐다. 새 물건을 구할 겨를도 없이 평소 쓰던 것을 보냈을 터였다.“장군께서는 손이 시리지 않으시다더냐?”“그것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군영에 심부름 가는 사람이 있으면 숯과 두툼한 장갑을 함께 보내라. 이 손난로도 돌려드릴까 했는데, 그러면 괜한 마음을 쓰신 셈이 되겠구나.”연화는 웃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예령은 함을 덮은 뒤 서신을 다시 펼쳤다. 낯선 불빛을 보았다는 전갈이 그리 위중한 일은 아니기를 바랐다. 무겸은 염려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초소에 관한 일만큼은 직접 확인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아침이 밝자 예령은 상단으로 향했다. 관문이 열린 뒤 들어온 수레가 창고 앞에 서 있었고, 일꾼들은 평소의 속도로 곡식을 날랐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던 며칠이 먼일처럼 느껴질 만큼 마당은 평온했다. 예령은 그때 짐을 졌던 이들의 품삯이 빠짐없이 지급되었는지 살피고, 손을 다친 일꾼에게 며칠 더 쉬도록 했다.점심이 지나자 상단
군영의 잔치가 끝나 갈 무렵, 밤하늘에는 다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낮 동안 녹았던 눈이 찬바람에 얼어붙으면서 처마마다 가느다란 고드름이 맺혔다. 마당을 밝히던 횃불은 하나둘 꺼지고, 술기운에 달아올랐던 병사들의 목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예령은 무릎 위에 놓인 무겸의 겉옷을 가지런히 접었다. 돌려주려던 참에 막사 쪽에서 급히 걸어오는 병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곽진에게 몇 마디를 전한 뒤 물러났고, 곽진은 곧장 무겸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무겸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온기가 사라졌다.“먼저 들어가 보겠소.”예령이 고개를 들었다.“급한 일입니까?”“북쪽 초소에서 전갈이 왔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그는 곽진에게 예령을 마차까지 모시라고 이른 뒤 막사로 향했다. 예령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병사들과 한솥밥을 나누던 사람과 지금 걸어가는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었다. 무겸에게는 잠시의 평온마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모양이었다.곽진이 다가와 말했다.“부인, 바람이 차갑습니다. 안에서 기다리시지요.”“장군께서는 늘 저렇게 밤늦게까지 일을 보십니까?”“전쟁 중에는 밤낮이 따로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한결 나아진 편입니다.”담담한 대답이었으나 예령은 그 말에 담긴 세월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그녀가 후부에서 처음 만났던 무겸은 다리를 다친 채 사람들의 시선에서 물러나 있던 사내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누구도 그의 지난 상처를 먼저 떠올리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을 놓는 듯했다.“곽진 님은 장군을 오래 모셨지요?”“예. 북방에 처음 오셨을 때부터 함께했습니다.”“그때도 지금과 같으셨습니까?”곽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희미하게 웃었다.“지금보다 말씀은 더 없으셨습니다. 다만 병사들이 굶는 꼴은 그때도 보지 못하셨지요.”예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겸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으나, 그를 오래 지켜본 이들의 입을 통해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 무렵, 군영의 취사장에서는 구수한 고기 국물 냄새가 피어올랐다. 평소라면 훈련을 마친 병사들이 말없이 지나갔을 마당에 긴 탁자가 놓이고, 커다란 솥에서는 김이 쉴 새 없이 솟았다. 눈이 녹아 질척해진 길 위로 장작을 나르는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였다.예령이 마차에서 내리자 곽진이 다가와 예를 갖췄다.“부인, 장군님께서는 막사에서 잠시 일을 보고 계십니다. 먼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이렇게 많은 음식을 준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병사들이 며칠 전부터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다만 솥을 지키는 자들이 먼저 맛을 본다며 국물을 너무 퍼 마셔서 걱정입니다.”그 말에 예령이 웃었다. 연화는 가져온 보자기를 풀어 떡을 내놓았다. 갓 지은 떡은 아니었지만 따뜻한 곳에 품고 온 덕분에 아직 말랑했다. 곽진이 그중 하나를 집으려다 연화의 눈길을 보고 손을 거두었다.“그건 장군님 드릴 것입니다.”“아직 손도 대지 않았다.”“손을 뻗으셨잖아요.”곽진은 억울하다는 듯 예령을 바라보았고, 예령은 모른 척 보자기를 다시 여몄다.잠시 뒤 무겸이 막사에서 나왔다. 군복 위에 두른 검은 겉옷에는 찬 기운이 묻어 있었다. 그는 예령을 발견하자 곧장 걸음을 옮겼다.“오래 기다렸소?”“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먼저 구경하고 있었습니다.”“볼 만한 것이 있소?”“장군께서 아시면 곤란해하실 일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무겸이 곽진을 돌아보자 그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장군님, 아직 술은 한 방울도 나가지 않았습니다.”“내가 술을 물었느냐?”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무겸은 못 들은 척 예령에게 안쪽 자리를 권했다. 탁자에는 투박한 사발과 나무젓가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화려한 그릇은 없었지만 누군가 정성껏 닦아 둔 흔적이 역력했다.그때 취사장을 맡은 늙은 병사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예령 앞에 유독 큰 만두를 내려놓고는 뿌듯하게 수염을 쓸었다.“부인께 드리려고 속을 넉넉히 넣었습니다.”“이걸 혼자 다 먹으란 말씀이십니까?
아침 햇살이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비추고 있었다. 예령은 창문을 열어젖히다 말고 골목 저편에서 들려오는 바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단단히 얼어붙은 흙길 위로 수레가 지나가는 소리였다. 며칠 전만 해도 그 소리를 듣는 것조차 마음이 쓰였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반가웠다.연화가 따뜻한 물을 들고 들어왔다.“아씨, 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서씨 상단의 수레도 오늘부터 지나갈 수 있답니다.”예령은 물수건을 내려놓았다.“정말이냐?”“예. 아침 일찍 공문이 내려왔대요. 상단 사람들이 벌써 짐을 싣고 있답니다.”예령은 겉옷을 걸치며 웃었다. 누명을 벗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이제야 일이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 곡식을 나르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발밑에서 얼음이 울릴 때마다 서로를 돌아보던 이들이었다.마당으로 나오자 무겸이 말에 안장을 얹고 있었다. 곽진이 옆에서 고삐를 잡고 있다가 예령에게 인사했다.“관문에 가시려는 겁니까?”“예. 수레가 무사히 지나가는 걸 제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무겸이 그녀를 돌아보았다.“나도 군영에 가는 길이오. 함께 가지.”“장군께서도 확인하실 일이 있으십니까?”“부인이 그리 기다리던 길이 열렸으니,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오.”무심한 듯 건넨 말에 예령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미소 지었다. 마침 마당 앞으로 마차가 들어서자 무겸은 먼저 다가가 발판이 미끄럽지 않은지 살폈다. 예령이 마차에 오르는 동안 곁에서 기다리던 그는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서야 말에 올랐다.관문 앞에는 이른 시각부터 수레가 줄지어 서 있었다. 곡식 자루를 단단히 묶은 상단 일꾼들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문을 지키는 병사가 공문을 확인한 뒤 길을 비켜서자, 첫 번째 수레가 천천히 관문을 통과했다. 뒤따르던 사람들 사이에서 짧은 환호가 터졌다.“상단주님!”수레를 몰던 늙은 일꾼이 모자를 벗었다. 예령은 그를 알아보았다. 언 강을 건널 때마다 가장 앞에서 얼음의 두께를 살피던 사람이었다.“이제는 강으
밤새 내리던 눈이 그친 아침, 관아의 처마 끝에서는 녹은 눈물이 느리게 떨어졌다. 예령은 마당에 들어서며 젖은 돌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이곳을 드나들었지만 오늘만큼은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손에 쥔 것은 더 이상 의심을 풀어 달라는 청원이 아니라, 이미 드러난 사실을 바로잡으라는 요구였다.자사는 어제보다 수척한 얼굴로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곁에는 장부를 관리하던 서리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서씨 상단주.”자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대가 제출한 기록을 밤새 대조했소.”예령은 조용히 예를 갖췄다.“결과를 듣고 싶습니다.”자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곁의 서리가 두 손으로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관아에서 보관하던 출입 기록과 백운상회의 열쇠 출납책, 창고지기가 남긴 기록을 대조한 결과였다. 이백 석을 운반했다는 날짜에 관문을 통과한 수레는 없었다.“운송 기록에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오.”“착오라 하기에는 창고지기의 이름까지 적혀 있습니다.”예령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자사는 더 이상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그 이름을 누가 썼는지 밝혀 주십시오.”서리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마당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에게 쏠렸다.“소인이 적었습니다.”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매 끝을 움켜쥐었다.“상부에서 수량을 맞추라 하여…… 창고지기가 쓰던 장부를 보고 이름을 옮겨 적었습니다. 실제로 곡식이 들어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누가 지시했느냐?”무겸의 물음에 서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침묵이 길어지자 무겸이 다시 말했다.“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네 진술은 따로 기록할 것이다.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하겠다.”곽진이 병사들에게 눈짓했다. 서리는 끌려가기보다 보호받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령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사에게 시선을 돌렸다.“서씨 상단에 내린 처분을 거두어 주십시오. 백운상회에 씌워진 의혹도 함께 바로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