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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작가: 아람

1화. 죽은 아내가 돌아왔다

작가: 아람
last update 게시일: 2026-09-06 20:20:40

서예령이 죽던 날, 한무천은 다른 여인의 처소에 있었다.

그 여인은 이제 막 그의 아이를 가졌고, 진북후부에서는 오랜 경사라도 맞은 듯 값비싼 약재와 비단을 아낌없이 들여보냈다.

삼 년 동안 이름뿐인 아내로 살았던 예령에게는 단 한 번도 내어 주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예령은 차가운 감옥 벽에 기대어 앉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멀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 안쪽이 날카롭게 갈라졌다.

열두 살에 처음 마음을 주었다.

스물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스물셋이 된 지금, 예령은 자신이 사랑한 남자의 손에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무천과 혼인한 첫날부터 부부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전장에서 입은 내상이 낫지 않았다는 말로 합방을 피했고, 예령은 그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해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후사를 낳지 못한다며 그녀를 몰아세울 때도, 의원과 약재를 구해 오라며 친정에 손을 벌릴 때도 예령은 묵묵히 감당했다.

남편이 아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혼인한 지 일 년이 지난 뒤였다.

그는 여색을 즐겼다. 권세가의 딸부터 기방의 여인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았고, 은밀한 만남이 필요할 때마다 예령의 이름과 재물을 이용했다.

그 사실을 알고도 예령은 떠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품어 온 마음이 너무 길었고, 자신이 선택한 혼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두려웠다. 무엇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도 언젠가는 자신을 돌아봐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 어리석은 믿음이 서씨 가문을 무너뜨렸다.

한무천은 예령이 건네준 상단의 장부와 인장을 이용해 금지된 물품을 거래했고, 일이 드러나자 모든 죄를 서씨 가문에 뒤집어씌웠다. 아버지는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쓴 채 끌려갔고, 평생 일군 상단과 재산은 진북후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증인인 예령은 이곳에 갇혔다.

쇠문이 열리는 소리에 예령이 눈을 떴다.

한무천이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옷자락에는 낯선 향이 배어 있었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조차 없었다. 그는 쓰러져 가는 아내보다 품속의 문서가 더 중요한 듯 그것부터 꺼내 들었다.

“상단의 마지막 창고 열쇠가 어디 있지?”

예령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죽기 전에 남편에게서 듣는 마지막 말조차 재물에 관한 것이었다.

“끝까지 그것뿐이군요.”

무천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장소만 말하면 고통 없이 보내 주겠소.”

“말하면 아버지는 살려 줄 건가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예령은 벽에 기대었던 몸을 바로 세웠다. 힘이 거의 남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죽고 싶지는 않았다.

“열쇠는 이미 없앴어요.”

무천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당신 손에 넘어가게 둘 것 같았나요?”

그제야 그의 단정한 얼굴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예령은 그 표정을 보며 뒤늦은 허탈함을 느꼈다.

삼 년 동안 사랑을 구할 때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재물 하나를 내어 주지 않자 비로소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예령.”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시오.”

예령은 대답 대신 손을 펼쳤다.

손바닥에는 검게 그을린 작은 금속 조각이 놓여 있었다. 창고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이미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게 녹아 있었다.

한무천이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어디까지 나를 방해할 셈이지?”

“죽을 때까지.”

예령은 흔들림 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제가 죽으면, 당신은 평생 그 문을 열지 못할 거예요.”

잠시 후 한무천이 손을 놓았다.

그는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간수에게 건넨 뒤 뒤돌아섰다.

예령은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저 사람이 자신을 돌아봐 주기만을 바라며 수없이 기다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간수가 내민 잔에서는 씁쓸한 냄새가 났다.

예령은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받아 들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사랑 같은 것은 믿지 않겠다.

한무천에게 재물도, 인맥도, 마음도 내어 주지 않겠다. 그가 자신의 것을 빼앗기 위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하나씩 거두고, 마지막에는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이 자리보다 더 낮은 곳에 그를 무릎 꿇릴 것이다.

독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몸속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예령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고 생각한 순간,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예령은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햇살이 창호지를 통과해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침상 곁에는 죽기 전 이미 쫓겨났던 시녀 연화가 멀쩡한 얼굴로 서 있었고, 탁자 위에는 붉은 비단과 혼수 목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예령은 숨도 쉬지 못한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에 걸린 달력을 확인하는 순간 손끝이 굳었다.

한무천과 혼인하기 두 달 전이었다.

“아가씨?”

연화가 걱정스레 다가오자 예령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연화의 대답을 들은 뒤에도 예령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침상에서 내려와 혼수 목록을 집어 들었다.

진북후부에 보낼 금과 비단, 약재와 토지 문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전생에는 한무천을 위해 기꺼이 내어 주었던 것들이었다.

예령은 목록을 천천히 찢었다.

한 장이 두 장이 되고, 두 장이 다시 네 장이 되었다. 잘게 찢긴 종잇조각이 바닥 위로 눈처럼 떨어졌다.

“아가씨, 이건 혼례 때 가져가실…….”

“혼례는 없을 거야.”

예령은 남은 종이까지 손안에서 구겼다.

이번에는 한무천의 아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사랑한 여섯 해도, 아내로 버틴 삼 년도 이미 한 번이면 충분했다.

예령이 고개를 들었다.

죽기 전까지 남아 있던 미련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아버지께 말씀드려.”

차분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한무천과의 혼인을 깨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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