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혼인을 깨겠다고?”
서문백의 목소리가 넓은 집무실을 울렸다.
예령은 아버지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새벽부터 몇 번이나 같은 말을 설명했지만, 아버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했다.
한무천과 혼인하겠다며 몇 년 동안 아버지를 설득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진북후부의 사정이 어렵다는 말에도, 한무천이 허영심만 강하고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경고에도 귀를 닫았다.
그런 딸이 혼례를 두 달 앞두고 갑자기 혼인을 깨겠다고 나섰으니, 누구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예. 파혼하겠습니다.”
“무천과 다투기라도 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 집안에서 너를 홀대했느냐?”
“아직 시집도 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홀대를 받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이냐?”
예령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전생의 일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한무천이 서씨 상단의 재산을 빼돌리고, 가문을 역모에 끌어들여 모두를 죽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아버지조차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의 마음이 갑자기 식었다는 말로 넘길 수도 없었다.
예령은 준비해 둔 장부 한 권을 아버지 앞으로 밀었다.
“한무천이 지난달 서씨 상단의 이름으로 돈을 빌렸습니다.”
서문백의 눈빛이 단숨에 달라졌다.
그는 장부를 펼쳐 몇 장 넘기다가 미간을 좁혔다. 황도에서 값비싼 비단과 보석을 취급하는 상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한무천이 외상으로 가져간 물품과 금액이 빠짐없이 기록돼 있었다.
“이게 사실이냐?”
“상점 세 곳에 사람을 보내 확인했습니다.”
“우리 상단의 이름을 누가 쓰도록 허락했지?”
“제가 했습니다.”
예령은 담담히 인정했다.
“한 달 전 무천이 급하게 쓸 곳이 있다며 부탁했고, 저는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인장을 빌려주었습니다.”
전생의 자신은 물품의 행방을 확인하지 않았다. 무천이 진북후부의 사정 때문에 체면을 세워야 한다고 하자, 오히려 돈이 부족할까 걱정하며 더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보석들은 진북후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무천이 만나던 여인들과 권세 있는 관리들의 부인에게 선물로 흩어졌다. 그중에는 훗날 서씨 가문의 장부를 조작하는 데 힘을 보탠 사람도 있었다.
“이 물품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예령은 지금 알고 있는 것과 전생에서 알게 된 사실을 조심스럽게 구분했다.
“하지만 혼인도 하기 전부터 제 허락 없이 서씨 상단의 이름을 이용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혼인을 다시 생각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서문백은 한동안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경고했는데도 듣지 않더니, 이제야 그자의 속이 보이느냐?”
낮은 질책에 예령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한 번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딸이었다. 서문백은 그런 예령을 낯설게 바라보았지만, 더는 몰아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오래 묵은 걱정이 조금 풀린 듯한 기색이 번졌다.
“정녕 미련은 없는 것이냐?”
예령은 잠시 눈을 감았다.
죽어 가던 자신을 뒤로하고 감옥을 나가던 한무천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를 사랑하며 보낸 시간까지 모두 거짓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는 아깝지 않았다. 이미 전생에서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으니까.
“없습니다.”
이번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시는 그 사람과 혼인하지 않을 겁니다.”
서문백은 딸의 얼굴을 오래 살핀 뒤 장부를 덮었다.
“알겠다. 진북후부에는 내가 직접 파혼 의사를 전하마.”
“아직은 기다려 주세요.”
뜻밖의 말에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파혼하겠다더니 무엇을 기다린단 말이냐?”
“저들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진북후부에는 서씨 가문의 재물이 필요했다. 몇 해 동안 이어진 북방 전쟁으로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황실에서 내려오는 지원금마저 중간에서 새고 있었다.
특히 진북후 부인 조씨는 예령의 막대한 혼수를 이미 자기 재산처럼 여기고 있었다. 한무천 또한 서씨 상단의 돈과 인맥이 없으면 지금 계획해 둔 출세길을 밟을 수 없었다.
갑자기 파혼을 통보하면 그들은 이유를 캐고 예령의 마음을 돌리려 할 것이다. 심하면 서씨 가문에 흠집을 내서라도 혼인을 강행하려 들 수 있었다.
“파혼을 확실하게 끝내려면 저쪽에서 반박할 수 없는 명분이 필요합니다.”
“무슨 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예령은 사실대로 답했다.
지금 가진 것은 전생의 기억뿐이었다. 그 기억이 모든 일을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면서 한무천과 진북후부를 막아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제게 며칠만 시간을 주세요.”
서문백은 미덥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을 주마. 그동안 무천과는 만나지 말거라.”
“예.”
“상단의 인장도 오늘부터 내가 보관하겠다.”
예령은 반발하지 않고 허리춤에서 인장을 꺼내 아버지 앞에 내려놓았다.
전생이라면 자신을 믿지 못하느냐며 화부터 냈을 것이다. 이제는 아버지가 왜 이토록 완고하게 자신을 막으려 했는지 알았다.
그는 언제나 딸을 지키려 했다.
예령만 그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집무실을 나온 예령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연화가 새로 정리한 진북후부의 인물 명단과 재정 장부가 놓여 있었다. 예령은 촛불을 가까이 끌어당기고 한 사람씩 이름을 살폈다.
진북후 한진악.
그의 부인 조씨.
둘째 아들 한무천.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적힌 장남의 이름에서 예령의 손이 멈췄다.
한무겸.
전생의 예령은 그와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무겸은 진북후부의 장남이자 본래 후계자였다. 북방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지만, 삼 년 전 전장에서 크게 다친 뒤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람들은 그가 오래 서 있기도 힘들 만큼 몸을 망쳤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예령이 기억하는 한무겸은 소문과 달랐다.
혼례 날 멀리서 본 그는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을 때는 불편한 다리를 거의 끌지 않았고, 술잔을 쥔 손에는 검을 오래 다룬 사람에게서나 생기는 굳은살이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고도 흘려넘겼다.
이제 돌이켜보니 그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그렇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더 중요한 기억도 있었다.
한무천은 형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날카롭게 반응했다. 자신이 세운 공이 형과 비교되는 것을 견디지 못했고, 진북후가 후계자를 확정하지 않을 때마다 술에 취해 분노했다.
전생의 무천이 그토록 두려워한 사람.
진북후부의 안쪽 사정을 알면서도 조씨와 한무천에게 밀려나 있는 사람.
예령에게는 파혼을 성사시킬 힘이 필요했고, 한무겸에게는 다시 움직일 명분과 자금이 필요할 터였다.
그녀는 한동안 그의 이름을 바라보다가 새 종이를 꺼냈다.
“연화야.”
“네, 아가씨.”
“진북후부 별당으로 서신을 전할 사람을 구해 줘.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야 해.”
연화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령은 붓에 먹물을 묻혔다.
처음에는 파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한무천은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보다 서씨 상단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그가 탐내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면 된다.
한무천이 평생 넘어서지 못했던 사람에게.
예령은 종이 위에 짧은 문장을 적었다.
‘진북후부의 후계 자리를 되찾고 싶으시다면, 내일 밤 저를 만나 주십시오.’
서신을 접은 예령은 밀랍으로 봉한 뒤 연화에게 건넸다.
전생에는 한무천을 선택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이번 생에는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의 형을 선택할 것이다.
관문이 다시 열린 뒤 사흘째 되는 아침이었다. 성안의 장터에는 겨우내 묶여 있던 수레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남쪽에서 가져온 비단과 차, 북방의 모피와 약재가 처마 아래 쌓였고, 상인들은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서로의 물건을 살폈다.예령은 상단 앞에 도착한 낯익은 마차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진가상회의 표식이 새겨진 문이 열리고 진서헌이 내려섰다. 그는 예령을 발견하자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태연히 웃었다.“부인께서 먼저 오셨군요. 저는 늦지 않으려 새벽부터 길을 나섰는데.”“예고도 없이 오신 분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아셨습니까?”“기다리시지 않을 걸 알기에 일찍 온 것입니다.”능청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가 펼쳐 보인 종이를 보고 예령은 웃음을 거두었다. 북방의 장터에 새로 들어선 상인들이 모피를 한꺼번에 사들이겠다고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값을 내걸었고, 사흘 안에 물건을 넘기는 상회에만 계약하겠다고 했다.“값을 잘 쳐 주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사들이겠다는 물건이 너무 많습니다. 이 고을 상회들이 겨우내 모아 둔 것보다도요.”예령은 종이를 다시 읽었다. 구매자의 이름은 낯설었지만 거래를 중개하는 곳에는 태성상단의 표식이 찍혀 있었다. 얼마 전 군량 장부 사건에서 벗어나자마자 또다시 황기문의 이름과 마주할 줄은 몰랐다.“진 상단주께서는 이 거래를 막으시려는 겁니까?”“아니요. 먼저 물건을 살피려 합니다. 부인께서도 보셔야 할 듯해서요.”“어째서 저입니까?”“부인께서는 값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선뜻 거래에 나서실 분이 아니지요. 저 역시 이번 거래가 어딘지 석연치 않습니다.”예령은 종이를 접어 돌려주었다. 말만 듣고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진서헌도 그 점을 아는지 더 설득하지 않았다. 대신 마당 끝에 세워 둔 마차를 가리켰다.“오늘 정오에 첫 물건을 공개합니다. 보시고도 시시하면 그대로 돌아오십시오.”그가 돌아가려는 순간 곽진이 말을 몰고 들어왔다. 뒤이어 무겸이 내렸다. 군영에서 돌아오는 길
군영을 떠난 마차가 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도 예령은 한동안 창을 닫지 않았다. 눈발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횃불 아래 서 있던 무겸의 모습이 눈앞에 남아 있었다. 연화가 추위에 감기라도 들겠다며 몇 번이나 청하고 나서야 예령은 창을 내렸다.이튿날 새벽에는 밤새 내리던 눈이 멎었다. 마당에 찍힌 발자국이 희미한 푸른빛을 띠었고, 처마 밑에서는 얼음 녹는 물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예령이 아침상을 물린 참에 연화가 작은 나무함과 서신 한 통을 가져왔다.“마님, 군영에서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장군님께서 전하라 하셨답니다.”함 안에는 매화 무늬가 새겨진 은제 손난로가 들어 있었다. 가장자리가 닳고 뚜껑에는 작은 흠집이 있는, 새 물건은 아니었다. 함께 온 서신에는 밤사이 북쪽 초소를 살필 일이 생겨 이틀쯤 군영에 머물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끝에는 추운 날 먼 길을 다니지 말고 손을 따뜻이 하라는 짧은 당부가 붙어 있었다.예령은 서신을 접고 손난로를 들어 보았다. 어젯밤 자신에게 겉옷을 둘러 주던 사람이 떠올랐다. 새 물건을 구할 겨를도 없이 평소 쓰던 것을 보냈을 터였다.“장군께서는 손이 시리지 않으시다더냐?”“그것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군영에 심부름 가는 사람이 있으면 숯과 두툼한 장갑을 함께 보내라. 이 손난로도 돌려드릴까 했는데, 그러면 괜한 마음을 쓰신 셈이 되겠구나.”연화는 웃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예령은 함을 덮은 뒤 서신을 다시 펼쳤다. 낯선 불빛을 보았다는 전갈이 그리 위중한 일은 아니기를 바랐다. 무겸은 염려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초소에 관한 일만큼은 직접 확인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아침이 밝자 예령은 상단으로 향했다. 관문이 열린 뒤 들어온 수레가 창고 앞에 서 있었고, 일꾼들은 평소의 속도로 곡식을 날랐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던 며칠이 먼일처럼 느껴질 만큼 마당은 평온했다. 예령은 그때 짐을 졌던 이들의 품삯이 빠짐없이 지급되었는지 살피고, 손을 다친 일꾼에게 며칠 더 쉬도록 했다.점심이 지나자 상단
군영의 잔치가 끝나 갈 무렵, 밤하늘에는 다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낮 동안 녹았던 눈이 찬바람에 얼어붙으면서 처마마다 가느다란 고드름이 맺혔다. 마당을 밝히던 횃불은 하나둘 꺼지고, 술기운에 달아올랐던 병사들의 목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예령은 무릎 위에 놓인 무겸의 겉옷을 가지런히 접었다. 돌려주려던 참에 막사 쪽에서 급히 걸어오는 병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곽진에게 몇 마디를 전한 뒤 물러났고, 곽진은 곧장 무겸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무겸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온기가 사라졌다.“먼저 들어가 보겠소.”예령이 고개를 들었다.“급한 일입니까?”“북쪽 초소에서 전갈이 왔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그는 곽진에게 예령을 마차까지 모시라고 이른 뒤 막사로 향했다. 예령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병사들과 한솥밥을 나누던 사람과 지금 걸어가는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었다. 무겸에게는 잠시의 평온마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모양이었다.곽진이 다가와 말했다.“부인, 바람이 차갑습니다. 안에서 기다리시지요.”“장군께서는 늘 저렇게 밤늦게까지 일을 보십니까?”“전쟁 중에는 밤낮이 따로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한결 나아진 편입니다.”담담한 대답이었으나 예령은 그 말에 담긴 세월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그녀가 후부에서 처음 만났던 무겸은 다리를 다친 채 사람들의 시선에서 물러나 있던 사내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누구도 그의 지난 상처를 먼저 떠올리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을 놓는 듯했다.“곽진 님은 장군을 오래 모셨지요?”“예. 북방에 처음 오셨을 때부터 함께했습니다.”“그때도 지금과 같으셨습니까?”곽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희미하게 웃었다.“지금보다 말씀은 더 없으셨습니다. 다만 병사들이 굶는 꼴은 그때도 보지 못하셨지요.”예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겸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으나, 그를 오래 지켜본 이들의 입을 통해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 무렵, 군영의 취사장에서는 구수한 고기 국물 냄새가 피어올랐다. 평소라면 훈련을 마친 병사들이 말없이 지나갔을 마당에 긴 탁자가 놓이고, 커다란 솥에서는 김이 쉴 새 없이 솟았다. 눈이 녹아 질척해진 길 위로 장작을 나르는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였다.예령이 마차에서 내리자 곽진이 다가와 예를 갖췄다.“부인, 장군님께서는 막사에서 잠시 일을 보고 계십니다. 먼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이렇게 많은 음식을 준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병사들이 며칠 전부터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다만 솥을 지키는 자들이 먼저 맛을 본다며 국물을 너무 퍼 마셔서 걱정입니다.”그 말에 예령이 웃었다. 연화는 가져온 보자기를 풀어 떡을 내놓았다. 갓 지은 떡은 아니었지만 따뜻한 곳에 품고 온 덕분에 아직 말랑했다. 곽진이 그중 하나를 집으려다 연화의 눈길을 보고 손을 거두었다.“그건 장군님 드릴 것입니다.”“아직 손도 대지 않았다.”“손을 뻗으셨잖아요.”곽진은 억울하다는 듯 예령을 바라보았고, 예령은 모른 척 보자기를 다시 여몄다.잠시 뒤 무겸이 막사에서 나왔다. 군복 위에 두른 검은 겉옷에는 찬 기운이 묻어 있었다. 그는 예령을 발견하자 곧장 걸음을 옮겼다.“오래 기다렸소?”“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먼저 구경하고 있었습니다.”“볼 만한 것이 있소?”“장군께서 아시면 곤란해하실 일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무겸이 곽진을 돌아보자 그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장군님, 아직 술은 한 방울도 나가지 않았습니다.”“내가 술을 물었느냐?”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무겸은 못 들은 척 예령에게 안쪽 자리를 권했다. 탁자에는 투박한 사발과 나무젓가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화려한 그릇은 없었지만 누군가 정성껏 닦아 둔 흔적이 역력했다.그때 취사장을 맡은 늙은 병사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예령 앞에 유독 큰 만두를 내려놓고는 뿌듯하게 수염을 쓸었다.“부인께 드리려고 속을 넉넉히 넣었습니다.”“이걸 혼자 다 먹으란 말씀이십니까?
아침 햇살이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비추고 있었다. 예령은 창문을 열어젖히다 말고 골목 저편에서 들려오는 바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단단히 얼어붙은 흙길 위로 수레가 지나가는 소리였다. 며칠 전만 해도 그 소리를 듣는 것조차 마음이 쓰였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반가웠다.연화가 따뜻한 물을 들고 들어왔다.“아씨, 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서씨 상단의 수레도 오늘부터 지나갈 수 있답니다.”예령은 물수건을 내려놓았다.“정말이냐?”“예. 아침 일찍 공문이 내려왔대요. 상단 사람들이 벌써 짐을 싣고 있답니다.”예령은 겉옷을 걸치며 웃었다. 누명을 벗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이제야 일이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 곡식을 나르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발밑에서 얼음이 울릴 때마다 서로를 돌아보던 이들이었다.마당으로 나오자 무겸이 말에 안장을 얹고 있었다. 곽진이 옆에서 고삐를 잡고 있다가 예령에게 인사했다.“관문에 가시려는 겁니까?”“예. 수레가 무사히 지나가는 걸 제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무겸이 그녀를 돌아보았다.“나도 군영에 가는 길이오. 함께 가지.”“장군께서도 확인하실 일이 있으십니까?”“부인이 그리 기다리던 길이 열렸으니,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오.”무심한 듯 건넨 말에 예령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미소 지었다. 마침 마당 앞으로 마차가 들어서자 무겸은 먼저 다가가 발판이 미끄럽지 않은지 살폈다. 예령이 마차에 오르는 동안 곁에서 기다리던 그는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서야 말에 올랐다.관문 앞에는 이른 시각부터 수레가 줄지어 서 있었다. 곡식 자루를 단단히 묶은 상단 일꾼들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문을 지키는 병사가 공문을 확인한 뒤 길을 비켜서자, 첫 번째 수레가 천천히 관문을 통과했다. 뒤따르던 사람들 사이에서 짧은 환호가 터졌다.“상단주님!”수레를 몰던 늙은 일꾼이 모자를 벗었다. 예령은 그를 알아보았다. 언 강을 건널 때마다 가장 앞에서 얼음의 두께를 살피던 사람이었다.“이제는 강으
밤새 내리던 눈이 그친 아침, 관아의 처마 끝에서는 녹은 눈물이 느리게 떨어졌다. 예령은 마당에 들어서며 젖은 돌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이곳을 드나들었지만 오늘만큼은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손에 쥔 것은 더 이상 의심을 풀어 달라는 청원이 아니라, 이미 드러난 사실을 바로잡으라는 요구였다.자사는 어제보다 수척한 얼굴로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곁에는 장부를 관리하던 서리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서씨 상단주.”자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대가 제출한 기록을 밤새 대조했소.”예령은 조용히 예를 갖췄다.“결과를 듣고 싶습니다.”자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곁의 서리가 두 손으로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관아에서 보관하던 출입 기록과 백운상회의 열쇠 출납책, 창고지기가 남긴 기록을 대조한 결과였다. 이백 석을 운반했다는 날짜에 관문을 통과한 수레는 없었다.“운송 기록에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오.”“착오라 하기에는 창고지기의 이름까지 적혀 있습니다.”예령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자사는 더 이상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그 이름을 누가 썼는지 밝혀 주십시오.”서리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마당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에게 쏠렸다.“소인이 적었습니다.”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매 끝을 움켜쥐었다.“상부에서 수량을 맞추라 하여…… 창고지기가 쓰던 장부를 보고 이름을 옮겨 적었습니다. 실제로 곡식이 들어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누가 지시했느냐?”무겸의 물음에 서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침묵이 길어지자 무겸이 다시 말했다.“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네 진술은 따로 기록할 것이다.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하겠다.”곽진이 병사들에게 눈짓했다. 서리는 끌려가기보다 보호받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령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사에게 시선을 돌렸다.“서씨 상단에 내린 처분을 거두어 주십시오. 백운상회에 씌워진 의혹도 함께 바로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