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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형

Author: 아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6 20:20:45

2화. 그의 형

“혼인을 깨겠다고?”

서문백의 목소리가 넓은 집무실을 울렸다.

예령은 아버지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새벽부터 몇 번이나 같은 말을 설명했지만, 아버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했다.

한무천과 혼인하겠다며 몇 년 동안 아버지를 설득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진북후부의 사정이 어렵다는 말에도, 한무천이 허영심만 강하고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경고에도 귀를 닫았다.

그런 딸이 혼례를 두 달 앞두고 갑자기 혼인을 깨겠다고 나섰으니, 누구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예. 파혼하겠습니다.”

“무천과 다투기라도 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 집안에서 너를 홀대했느냐?”

“아직 시집도 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홀대를 받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이냐?”

예령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전생의 일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한무천이 서씨 상단의 재산을 빼돌리고, 가문을 역모에 끌어들여 모두를 죽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아버지조차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의 마음이 갑자기 식었다는 말로 넘길 수도 없었다.

예령은 준비해 둔 장부 한 권을 아버지 앞으로 밀었다.

“한무천이 지난달 서씨 상단의 이름으로 돈을 빌렸습니다.”

서문백의 눈빛이 단숨에 달라졌다.

그는 장부를 펼쳐 몇 장 넘기다가 미간을 좁혔다. 황도에서 값비싼 비단과 보석을 취급하는 상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한무천이 외상으로 가져간 물품과 금액이 빠짐없이 기록돼 있었다.

“이게 사실이냐?”

“상점 세 곳에 사람을 보내 확인했습니다.”

“우리 상단의 이름을 누가 쓰도록 허락했지?”

“제가 했습니다.”

예령은 담담히 인정했다.

“한 달 전 무천이 급하게 쓸 곳이 있다며 부탁했고, 저는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인장을 빌려주었습니다.”

전생의 자신은 물품의 행방을 확인하지 않았다. 무천이 진북후부의 사정 때문에 체면을 세워야 한다고 하자, 오히려 돈이 부족할까 걱정하며 더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보석들은 진북후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무천이 만나던 여인들과 권세 있는 관리들의 부인에게 선물로 흩어졌다. 그중에는 훗날 서씨 가문의 장부를 조작하는 데 힘을 보탠 사람도 있었다.

“이 물품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예령은 지금 알고 있는 것과 전생에서 알게 된 사실을 조심스럽게 구분했다.

“하지만 혼인도 하기 전부터 제 허락 없이 서씨 상단의 이름을 이용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혼인을 다시 생각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서문백은 한동안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경고했는데도 듣지 않더니, 이제야 그자의 속이 보이느냐?”

낮은 질책에 예령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한 번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딸이었다. 서문백은 그런 예령을 낯설게 바라보았지만, 더는 몰아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오래 묵은 걱정이 조금 풀린 듯한 기색이 번졌다.

“정녕 미련은 없는 것이냐?”

예령은 잠시 눈을 감았다.

죽어 가던 자신을 뒤로하고 감옥을 나가던 한무천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를 사랑하며 보낸 시간까지 모두 거짓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는 아깝지 않았다. 이미 전생에서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으니까.

“없습니다.”

이번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시는 그 사람과 혼인하지 않을 겁니다.”

서문백은 딸의 얼굴을 오래 살핀 뒤 장부를 덮었다.

“알겠다. 진북후부에는 내가 직접 파혼 의사를 전하마.”

“아직은 기다려 주세요.”

뜻밖의 말에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파혼하겠다더니 무엇을 기다린단 말이냐?”

“저들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진북후부에는 서씨 가문의 재물이 필요했다. 몇 해 동안 이어진 북방 전쟁으로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황실에서 내려오는 지원금마저 중간에서 새고 있었다.

특히 진북후 부인 조씨는 예령의 막대한 혼수를 이미 자기 재산처럼 여기고 있었다. 한무천 또한 서씨 상단의 돈과 인맥이 없으면 지금 계획해 둔 출세길을 밟을 수 없었다.

갑자기 파혼을 통보하면 그들은 이유를 캐고 예령의 마음을 돌리려 할 것이다. 심하면 서씨 가문에 흠집을 내서라도 혼인을 강행하려 들 수 있었다.

“파혼을 확실하게 끝내려면 저쪽에서 반박할 수 없는 명분이 필요합니다.”

“무슨 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예령은 사실대로 답했다.

지금 가진 것은 전생의 기억뿐이었다. 그 기억이 모든 일을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면서 한무천과 진북후부를 막아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제게 며칠만 시간을 주세요.”

서문백은 미덥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을 주마. 그동안 무천과는 만나지 말거라.”

“예.”

“상단의 인장도 오늘부터 내가 보관하겠다.”

예령은 반발하지 않고 허리춤에서 인장을 꺼내 아버지 앞에 내려놓았다.

전생이라면 자신을 믿지 못하느냐며 화부터 냈을 것이다. 이제는 아버지가 왜 이토록 완고하게 자신을 막으려 했는지 알았다.

그는 언제나 딸을 지키려 했다.

예령만 그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집무실을 나온 예령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연화가 새로 정리한 진북후부의 인물 명단과 재정 장부가 놓여 있었다. 예령은 촛불을 가까이 끌어당기고 한 사람씩 이름을 살폈다.

진북후 한진악.

그의 부인 조씨.

둘째 아들 한무천.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적힌 장남의 이름에서 예령의 손이 멈췄다.

한무겸.

전생의 예령은 그와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무겸은 진북후부의 장남이자 본래 후계자였다. 북방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지만, 삼 년 전 전장에서 크게 다친 뒤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람들은 그가 오래 서 있기도 힘들 만큼 몸을 망쳤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예령이 기억하는 한무겸은 소문과 달랐다.

혼례 날 멀리서 본 그는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을 때는 불편한 다리를 거의 끌지 않았고, 술잔을 쥔 손에는 검을 오래 다룬 사람에게서나 생기는 굳은살이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고도 흘려넘겼다.

이제 돌이켜보니 그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그렇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더 중요한 기억도 있었다.

한무천은 형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날카롭게 반응했다. 자신이 세운 공이 형과 비교되는 것을 견디지 못했고, 진북후가 후계자를 확정하지 않을 때마다 술에 취해 분노했다.

전생의 무천이 그토록 두려워한 사람.

진북후부의 안쪽 사정을 알면서도 조씨와 한무천에게 밀려나 있는 사람.

예령에게는 파혼을 성사시킬 힘이 필요했고, 한무겸에게는 다시 움직일 명분과 자금이 필요할 터였다.

그녀는 한동안 그의 이름을 바라보다가 새 종이를 꺼냈다.

“연화야.”

“네, 아가씨.”

“진북후부 별당으로 서신을 전할 사람을 구해 줘.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야 해.”

연화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령은 붓에 먹물을 묻혔다.

처음에는 파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한무천은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보다 서씨 상단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그가 탐내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면 된다.

한무천이 평생 넘어서지 못했던 사람에게.

예령은 종이 위에 짧은 문장을 적었다.

‘진북후부의 후계 자리를 되찾고 싶으시다면, 내일 밤 저를 만나 주십시오.’

서신을 접은 예령은 밀랍으로 봉한 뒤 연화에게 건넸다.

전생에는 한무천을 선택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이번 생에는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의 형을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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