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지금 와서 알아차리기엔 좀 늦었지.”위준하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촛불로 불을 붙였다.입에 물고 몇 모금 천천히 피운 뒤, 긴 손가락으로 담배를 집어 자신이 방금 마셨던 와인잔에 재를 털었다.희미한 연기 속에서 그의 잘생긴 얼굴은 음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엄유미, 9년 전엔 내가 한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네가 나를 물어뜯을 기회를 줬지. 같은 실수를 두 번은 안 해.”“9년 전엔 네가 권력으로 나를 쫓아낸 거야! 너야말로 비열하고 음험해! 그때 내가 운이 좋지 않았다면, 넌 이미 나를 죽인 장본인이었어! 지금도
전우빈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전 비서님.”심윤영이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전 비서님이 할 수 있는 건 하나예요. 위준하랑 궁신아가 여기 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말하는 거예요.”전우빈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더니 깊게 한숨을 쉬었다.“말하겠습니다...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이야기는 위준하가 궁신아를 데리고 출국한 날부터 시작됐다.위준하는 궁신아를 F국으로 데려가 치료하겠다는 계획을 미리 궁씨 가문 쪽과 상의했었다.궁신아의 아버지는 궁신아가 그렇게 위준하를 따라가는 게 못내 아쉬
주치의가 떠난 뒤, 전우빈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이제 가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이쪽도 별다른 진전이 없어.”전화기 너머 남자의 목소리는 힘이 빠져 있었다.“너한테 부탁한 대로 해.”“네.”전우빈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는 안방 쪽을 한 번 바라보고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문을 닫았다.막 돌아서서 내려가려는 순간,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경호원이 급히 뛰어 올라왔다.“전 비서님, 사, 사모님이 오셨습니다!”전우빈은 매우 놀랐다.“누구라고?”경호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
그 말 없는 위로에 위민정은 더욱 얼굴을 들 수 없었다.아들이 이런 짓을 저질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었다.그리고 손주를 보러 와서 오히려 피해를 본 사돈에게 위로를 받는 처지가 너무나도 부끄러웠다.변영준은 한쪽 소파에 앉아 두 어른에게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넸다.“오셨어요?”함명우는 은우를 안은 채 가볍게 답했다.위민정이 변영준을 보며 말했다.“집사람이 오늘 윤영이 일이 있어서 네가 아이들 데리러 갔다고 하더라. 고생 많았어.”“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아이들 외삼촌이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그 말
“버리면 말라지!”은우는 화난 듯 말했다.“엄마를 몰래 울게 하는 나쁜 아빠, 나도 필요 없어!”변영준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두 조카의 대화를 들으며 마음이 복잡해졌다.사실 위준하에게 가장 큰 복수는 아이들이 그를 외면하고,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다.하지만 아이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아직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문제 때문에 상처받아서는 안 된다.아이들에게 어른의 행동은 곧 세상 전부다.어른이 보여주는 것이 곧 그들의 세계가 된다.건강하고 밝은 아이가 되려면 편안하고 따뜻한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변영준은 입
위준하와 궁신아가 떠난 뒤 3일 동안, 심윤영과 두 아들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이 3일 동안 쌍둥이는 매일 밤 갑자기 울며 깨곤 했고, 온 가족이 번갈아 가며 달래야 했다.병에서 막 회복된 심윤영은 아이들 때문에 이틀이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3일째에는 다시 미열까지 생겼다.진태현이 직접 의사를 데리고 집으로 와서 진찰했다.폐 상태는 괜찮았지만, 몸이 너무 약해진 데다 감정이 쌓여 미열이 난 것이었다.체력은 회복할 수 있지만, 감정 문제는 결국 심윤영 스스로 조절해야 했다.그런데 정작 심윤영이 자신은
“승현 씨 지금 뭐 하자는 거야?”고은미는 웨딩드레스를 휙 내던지며 말했다.“진짜 미친 거 아니야? 설마 널 이렇게 멀리까지 불러놓고 결혼식이라도 하겠다는 거야?”심지우는 그 웨딩드레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마를 찌푸렸다.“그 사람, 나랑 결혼하려는 건 아니야.”“응?”고은미는 팔짱을 끼며 되물었다.“결혼하려는 게 아니면 뭐야? 이혼하면서 웨딩드레스를 기념품으로 준다고? 진짜 자기가 무슨 국민 인기남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이혼하면서 이렇게 요란 떨기는 또 처음 보네, 진짜 기가 막힌다!”심지우는 아무 말이 없이 그
밤 9시가 가까워졌을 무렵, 짐 정리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그때 마침 변승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심지우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오늘 북성으로 돌아가.” 변승현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심지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이혼 증명서 받으러 가는 건 오늘 오후예요? 아니면 내일이에요?” “오후는 좀 빠듯할 것 같아.” 그때 거실 쪽에서 온주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우 씨, 이 책들 가져갈 거예요?” 심지우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 가져가요.” “알
심지우는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아직 아무 말도 꺼내기 전에 고은미와 온주원이 먼저 발끈했다.“변승현 씨는 진짜 양심도 없어요? 한쪽에선 주승희랑 결혼 준비하면서 한쪽에선 우리 지우랑 한방 쓰자고요? 도대체 뭐가 그리 대단하길래 이렇게 뻔뻔한 거죠?”고은미가 목소리를 높이자 온주원도 한술 더 떴다.“진짜 같은 남자로서 부끄럽네요.”하지만 변승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프런트 직원을 향해 무심하게 말했다.“여기 가족실은 어떤 구성인지 한번 설명해 주시겠어요?”프런트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했다.“네, 저희 가족실은 독립된
돌아오는 길에 심지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온주원은 몇 번이나 그녀를 힐끔 돌아봤지만 그녀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작업실 건물 앞에 도착한 후 그는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다 왔어요.” 온주원이 조용히 말했다. 심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차 문을 열려는 순간, 온주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변승현이 지우 씨한테 무슨 말 했어요?” 심지우는 돌아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협의서가 수정됐어요. 아직 자세히 보진 못했고 집에 가서 천천히 볼 생각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