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그래. 사람.”그 말이 공기 속에 흩어졌다.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겹쳤다.말보다 확실한 믿음이 그 안에 있었다.오후. 상담실 문이 열렸다.하연은 수경 옆자리에 앉아첫 상담을 관찰하고 있었다.의뢰인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짧은 머리에, 표정은 공허했다.“결혼 20년 차예요. 이젠 아내랑 대화가 없어요.”“대화가 없다는 건, 말이 없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듣지 않는다는 뜻인가요?”“둘 다요.”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엔 포기와 후회가 섞여 있었다.“제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어요.그냥 어느 날부터 서로의 말이 공기처럼 흘러가더라고요.”수경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럼 오늘은, 그 공기 속에 있는 말들을 꺼내볼까요.”“공기요?”“네. 사람은 말보다 ‘침묵’ 안에 진심이 숨어 있어요.”그 말에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하연의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었다.그녀는 몰랐다.누군가의 마음이 이렇게 조용하게 풀리는 순간이 이토록 숨 막히게 아름답다는 걸.상담이 끝난 후, 하연은 조용히 물었다.“선배, 방금 그 말은 즉흥적으로 한 거예요?”“응.”“근데 진짜… 마음을 열게 만드는 말이었어요.”“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야. 누군가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순간’을 지켜보는 거.”하연은 고개를 숙였다.“저도 언젠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그건 말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배워야 할 거야.”그녀의 눈빛이 선배를 향했다.수경은 그 눈빛에서 예전의 자신을 보았다.저녁이 되자, 하연은 먼저 퇴근했다.센터 안엔 나리와 제하, 수경만 남았다.조명이 낮게 깔리고, 커피 향이 잔잔히 퍼졌다.제하가 조용히 말했다.“오늘, 새로 시작하는 기분 어땠어?”“묘했어요.” 수경이 대답했다.“처음엔 두려웠는데, 누군가를 가르치다 보니까… 내가 나 자신을 다시 배우는 기분이었어요.”“그게 교육의 본질이지.”“가르치는 게 아니라, 같이 배우는 거.”“그 말, 마음에 든다.”나리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미소를
서울로 돌아온 첫날, 나리는 센터의 문을 열었다.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공간 안에 햇빛이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먼지 냄새와 커피 향이 섞인 공기가 익숙했다.그녀는 천천히 손끝으로 책상 위를 쓸었다.“돌아왔네.”그 말은 스스로에게 한 인사였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수경이 들어왔다.머리를 질끈 묶고, 한 손엔 종이컵 커피를 들고 있었다.“선배, 오늘 일찍 왔네요.”“이제 다시 시작해야지.”“선배가 없던 사이, 이곳이 조금 달라졌어요.”“좋은 방향으로?”“네. 사람들이 예전보다 많이 찾아와요.”“그래?”“그만큼… 이제 우리가 필요하다는 뜻이겠죠.”그녀의 목소리엔 자부심과 책임이 섞여 있었다.나리는 미소 지었다.“그래, 이젠 진짜 우리가 ‘팀’이네.”“선배는 여전히 중심이에요.”“아니야. 이젠 각자 중심이 있어야 해.”“그게 무슨 뜻이에요?”“모두가 중심에 서야, 누구도 무너지지 않거든.”그녀의 말에 수경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그 말이 낯설지 않게 들렸다.‘이젠 나도 중심이 되어야 하는구나.’며칠 후, 센터 한켠에 새로운 문패가 걸렸다.RE: 관계의 온도 2호점 - 홍대 지점간판이 완성되는 순간,수경은 숨을 들이쉬었다.“진짜네요.”“응. 이젠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 공간에서 또 시작되겠지.”나리가 문을 열었다.아직 비어 있는 공간이었지만, 그 공백이 주는 가능성이 느껴졌다.벽엔 하얀 페인트 냄새가 남아 있었고,바닥에는 아직 플라스틱 덮개가 깔려 있었다.“여기선 내가 상담하지 않을 거야.”“왜요?”“이건 너희 세대의 공간이니까.”“저희 세대요?”“응. 너랑 제하가 중심이 돼야지.난 그냥… 그림자처럼 옆에서 지켜볼게.”수경은 한참 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그녀는 문득, 예전의 자신이 떠올랐다.늘 나리의 뒤를 쫓던 시절.그때의 자신은 그림자였는데,이제는 빛을 받은 사람으로 서 있었다.“선배.”“응?”“그림자도 결국 빛이 있어야 존재하잖아요.그럼 선배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늘 같이 있는
비는 멈췄지만, 공기는 여전히 젖어 있었다.나리는 이른 아침부터 센터 안의 창문을 열었다.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흔들었다.그 바람 속에 사람들의 말과 눈물이 스며 있는 듯했다.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오늘은 쉬어야겠다.’하지만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그녀의 손은 여전히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책상 위엔 지난 며칠간의 기록이 쌓여 있었다.거기엔 수경의 글씨가 보였다.조심스러운 획, 망설임이 묻은 문장들.“사람을 돕는 일은 때로는 손을 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리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밖을 내다봤다.햇빛이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다.“수경이가 이제 나보다 더 단단해졌네.”그녀는 혼잣말하듯 말했다.잠시 후, 수경이 들어왔다.눈 밑에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지만,그 얼굴엔 이상한 안정감이 깃들어 있었다.“선배, 오늘은 좀 쉬어요.”“너도 피곤할 텐데.”“전 괜찮아요.”“괜찮다는 말, 이젠 잘 안 쓰기로 했던 거 아니야?”“맞아요. 그래서 그냥… 괜찮은 척할게요.”그 말에 나리가 웃었다.“이젠 네가 나보다 솔직하다.”“솔직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어요.”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공간엔 커피 향만 은은하게 퍼졌다.나리가 천천히 컵을 내려놓았다.“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센터는 네가 맡아.”“제가요?”“응. 난 잠깐 쉬어야 할 것 같아.”“왜요?”“요즘은 내가 말보다 침묵이 많아졌어.그건 아마, 내 마음이 소리를 닫고 있다는 뜻이겠지.”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제가 있을게요. 선배 자리는 제가 지킬게요.”“너라면 믿을 수 있어.”“근데… 선배 없으면 허전할 거예요.”“그 허전함이 필요할지도 몰라.”“빈자리요?”“그래. 빈자리는 늘 사람을 가르치거든.”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묘하게 아팠다.수경은 고개를 숙였다.“그럼, 제가 잘 지켜볼게요.”제하는 그 시각, 창고에 앉아 있었다.조용한 방 안에 빛이
비가 온 지 이틀째.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센터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전화도, 발자국도, 말소리도 없었다.수경은 책상 앞에서 상담 기록을 정리하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휴대폰 화면에 낯선 번호가 깜빡이고 있었다.‘박이서.’그 이름을 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여보세요?”“선생님… 저예요.”목소리는 낮았고,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이서 씨, 무슨 일 있으세요?”“그냥, 잠깐 얘기하고 싶어서요.”“지금 괜찮으세요?”“괜찮아요. 그냥… 어제 그 사람 집 앞에 갔어요.”그 말에 수경은 손끝이 떨렸다.“집 앞이요?”“그 여자랑 같이 사는 집이요.”“이서 씨, 그러면 안 돼요. 그런 행동은”“근데 문이 열려 있었어요.”“…”“그냥, 안으로 들어가 봤어요.”그 짧은 문장 안에 묘한 긴장이 섞여 있었다.“이서 씨, 지금 어딨어요?”“그 사람 집 앞이에요.”“혹시 그 사람이나… 다른 사람은”“없어요.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수경의 손에 땀이 났다.“거기서 기다려요. 제가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코트를 집어 들었다.책상 위에 놓인 물잔이 툭, 쓰러졌다.물방울이 흘러내리며 서류를 적셨다.그 순간 나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무슨 일 있어?”“선배, 그분이… 박이서 씨가 그 사람 집 앞에 있어요.”“뭐?”“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갔다고 해요.”“지금?”“네. 저 가야 될 것 같아요.”나리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목을 잡았다.“혼자 가지 마.”“선배…”“이건 네가 감정적으로 얽혀 있는 일이야.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해.”“근데…”“나랑 같이 가자.”차 안은 무겁게 고요했다.빗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수경은 운전대를 꽉 잡고 있었다.그녀의 손등이 희게 질릴 정도였다.나리는 옆자리에서 조용히 말했다.“이서 씨, 위험한 상태일 수도 있어.”“저… 어제 상담 때 괜찮다고 했어요. 근데 그 괜찮아요가…그때는 진짜인 줄 알
강연이 끝난 지 삼일째 되는 날.센터 앞에는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전화는 끊이지 않았고, 메일함엔 ‘상담 문의’ 제목이 줄줄이 쌓였다.“선배, 이거 진짜 난리예요.”수경이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말했다.“어제 기사 떴어요. 이별을 넘어, 관계를 치유하는 사람들.”“기사 제목이 좀 무겁네.”“근데 반응은 좋아요. 댓글들도 대부분 긍정적이에요.”나리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화면 속 기사에는 세 사람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무대 위, 따뜻한 조명 아래. 그때의 웃음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이제 진짜 세상 밖으로 나왔네.”“그럼요. 이제 ‘관계 회복 컨설턴트’라는 직업이 알려질 거예요.”그녀는 조용히 웃었지만, 눈빛은 신중했다.“알려지는 건 좋은데… 그만큼 조심해야 돼.”“왜요?”“사람의 마음은, 관심을 받으면 더 예민해지거든.”“선배답네요. 늘 조심스러워요.”“그게 이 일의 기본이니까.”그때 초인종이 울렸다.“예약하신 분이에요.”수경이 문을 열었다.문 앞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검은 머리를 질끈 묶고, 손에는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안녕하세요. 방송 보고 왔어요.”“어서 오세요. 잠시만요.”수경이 안내하자 여자가 조심스레 들어왔다.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의자에 앉자마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그 사람은 지금 다른 여자랑 살아요.”그녀의 첫마디였다.“같이 살던 집에, 그 여자가 들어왔어요.”목소리는 억눌려 있었지만,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근데, 더 웃긴 건 뭔지 아세요?”“…”“제가 아직도 그 사람 걱정을 해요.”그녀의 눈빛이 떨렸다.“그 사람은 잘 먹고 있나, 감기 걸리진 않았나…그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요.”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나, 미쳤죠?”수경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사람이 사랑했던 기억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아요.”“근데 이제 그게 다 나만 괴롭혀요. 그래서 이곳에 왔어요.”그녀의 시선이 수경을 향했다.“선생님, 그 사람을… 잊
강당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스탭들이 의자를 정렬하고, 조명이 점검되는 동안 무대 한가운데엔 커다란 흰 배너가 걸려 있었다.“RE: 관계의 온도 - 서로를 이해하는 연습”그 문구를 바라보며 나리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손에는 대본 대신 노트 한 권이 들려 있었다.그 안에는 수많은 메모와 문장이 빼곡히 적혀 있었지만,오늘은 그 어떤 문장도 그대로 읽을 생각이 없었다.“오늘은 그냥, 내 이야기로 가야겠다.”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선배!”뒤에서 수경이 다가왔다.화이트 셔츠에 단정한 재킷, 하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오늘 진짜 시작이에요.”“그래. 이제 우리가 이 일을 세상에 보여줘야지.”“솔직히… 좀 무서워요.”“무서운 게 맞아.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한다는 건 늘 조심스러운 일이니까.”“그래도, 선배가 있어서 다행이에요.”“이젠 네가 나보다 더 단단해.”“그건 아니에요.”“오늘 끝나고 나면 그 말, 다시 생각하게 될 거야.”수경은 작게 웃었다.그 미소 뒤로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고 있었다.그녀는 손목에 차고 있던 작은 팔찌를 매만졌다.그건 나리가 선물해준 ‘은 팔찌’였다.“이거 차고 있으면 이상하게 덜 불안해요.”“그건 너한테 잘 어울려.”“그럼 오늘은, 이 팔찌 덕분에 괜찮을 거예요.”무대 뒤편, 제하는 카메라를 정비하고 있었다.렌즈를 조정하고, 조도를 확인하고, 한 번씩 셔터를 눌러 테스트했다.그의 눈빛은 집중되어 있었지만, 어딘가 따뜻했다.“이 장면, 나중에 다큐로 만들면 좋겠다.”그가 혼잣말을 했다.“이별을 다루던 사람들이, 이제 관계를 회복시키는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라니.”그는 카메라를 들고 무대 뒤에서 나리와 수경을 번갈아 바라봤다.둘 다 자신만의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얼굴이었다.긴장과 결심,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섞인 얼굴.그건 제하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조명이 천천히 어두워지고, 무대 중앙에 빛이 켜졌다.청중석에는 약 백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아침이 오자 창밖은 분명히 환했지만, 내 눈에는 세상이 여전히 흐릿하고 무거워 보였다. 멀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출근길의 발걸음이 분주히 이어졌지만, 그 모든 것이 유리 너머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나는 주방 의자에 앉아 멍하니 커피를 마셨다. 잔을 손에 쥐고 있어도 따뜻함이 손끝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새벽에 들었던 그 꿈의 한마디가 자꾸만 반복되었다. “곧, 문을 열어야 해. 그때 알게 될 거야.”그 말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너무도 구체적이었고, 내 마음 깊은 곳을 겨냥하고 있었다.
밤이 지독하게 길었다. 아무리 불을 환히 켜두어도, 집 안 구석구석에 웅크린 그림자는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거렸다. 나는 거실 바닥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창문을 응시했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창백했고, 눈동자 속엔 피로와 두려움이 엉켜 있었다. 잠깐만 눈을 감으면 온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낮고 서늘한 울림이 귀와 가슴을 동시에 찔렀다.제하는 현관문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새벽 내내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한 듯, 그러나 의식은 또렷해 보였다. 손에 들린 주머니칼을 무심히 굴리며 창밖을 주시했
새벽이 그렇게 흘러갔다.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한 나는 커피잔을 손에 쥔 채 창가에 서 있었다. 검은 액체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무런 온기도 전해지지 않았다. 밤새 들렸던 그 목소리“곧, 만나게 될 거야.” 는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단순한 위협이라기보단, 예고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제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고, 수경은 작은 담요를 둘러쓴 채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들의 숨소리가 고르게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날 새벽,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창밖에서 들려온 그 한마디. “…나리.” 아직도 귓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바람 소리에 섞여 흘러나온 것 같기도 했고, 내 이름을 선명히 또렷하게 부르는 듯도 했다. 귀를 틀어막아도 잦아들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속에서 메아리처럼 퍼졌다. 분명 착각일 거야. 그렇게 되뇌면서도 손끝은 식어 있었고, 심장은 멈추지 않고 쿵쾅거렸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부엌으로 가 물을 마시며 한참이나 싱크대에 매달려 있었다. 찬물이 목을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