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비가 온 지 이틀째.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센터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전화도, 발자국도, 말소리도 없었다.수경은 책상 앞에서 상담 기록을 정리하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휴대폰 화면에 낯선 번호가 깜빡이고 있었다.‘박이서.’그 이름을 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여보세요?”“선생님… 저예요.”목소리는 낮았고,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이서 씨, 무슨 일 있으세요?”“그냥, 잠깐 얘기하고 싶어서요.”“지금 괜찮으세요?”“괜찮아요. 그냥… 어제 그 사람 집 앞에 갔어요.”그 말에 수경은 손끝이 떨렸다.“집 앞이요?”“그 여자랑 같이 사는 집이요.”“이서 씨, 그러면 안 돼요. 그런 행동은”“근데 문이 열려 있었어요.”“…”“그냥, 안으로 들어가 봤어요.”그 짧은 문장 안에 묘한 긴장이 섞여 있었다.“이서 씨, 지금 어딨어요?”“그 사람 집 앞이에요.”“혹시 그 사람이나… 다른 사람은”“없어요.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수경의 손에 땀이 났다.“거기서 기다려요. 제가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코트를 집어 들었다.책상 위에 놓인 물잔이 툭, 쓰러졌다.물방울이 흘러내리며 서류를 적셨다.그 순간 나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무슨 일 있어?”“선배, 그분이… 박이서 씨가 그 사람 집 앞에 있어요.”“뭐?”“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갔다고 해요.”“지금?”“네. 저 가야 될 것 같아요.”나리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목을 잡았다.“혼자 가지 마.”“선배…”“이건 네가 감정적으로 얽혀 있는 일이야.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해.”“근데…”“나랑 같이 가자.”차 안은 무겁게 고요했다.빗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수경은 운전대를 꽉 잡고 있었다.그녀의 손등이 희게 질릴 정도였다.나리는 옆자리에서 조용히 말했다.“이서 씨, 위험한 상태일 수도 있어.”“저… 어제 상담 때 괜찮다고 했어요. 근데 그 괜찮아요가…그때는 진짜인 줄 알
강연이 끝난 지 삼일째 되는 날.센터 앞에는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전화는 끊이지 않았고, 메일함엔 ‘상담 문의’ 제목이 줄줄이 쌓였다.“선배, 이거 진짜 난리예요.”수경이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말했다.“어제 기사 떴어요. 이별을 넘어, 관계를 치유하는 사람들.”“기사 제목이 좀 무겁네.”“근데 반응은 좋아요. 댓글들도 대부분 긍정적이에요.”나리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화면 속 기사에는 세 사람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무대 위, 따뜻한 조명 아래. 그때의 웃음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이제 진짜 세상 밖으로 나왔네.”“그럼요. 이제 ‘관계 회복 컨설턴트’라는 직업이 알려질 거예요.”그녀는 조용히 웃었지만, 눈빛은 신중했다.“알려지는 건 좋은데… 그만큼 조심해야 돼.”“왜요?”“사람의 마음은, 관심을 받으면 더 예민해지거든.”“선배답네요. 늘 조심스러워요.”“그게 이 일의 기본이니까.”그때 초인종이 울렸다.“예약하신 분이에요.”수경이 문을 열었다.문 앞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검은 머리를 질끈 묶고, 손에는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안녕하세요. 방송 보고 왔어요.”“어서 오세요. 잠시만요.”수경이 안내하자 여자가 조심스레 들어왔다.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의자에 앉자마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그 사람은 지금 다른 여자랑 살아요.”그녀의 첫마디였다.“같이 살던 집에, 그 여자가 들어왔어요.”목소리는 억눌려 있었지만,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근데, 더 웃긴 건 뭔지 아세요?”“…”“제가 아직도 그 사람 걱정을 해요.”그녀의 눈빛이 떨렸다.“그 사람은 잘 먹고 있나, 감기 걸리진 않았나…그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요.”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나, 미쳤죠?”수경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사람이 사랑했던 기억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아요.”“근데 이제 그게 다 나만 괴롭혀요. 그래서 이곳에 왔어요.”그녀의 시선이 수경을 향했다.“선생님, 그 사람을… 잊
강당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스탭들이 의자를 정렬하고, 조명이 점검되는 동안 무대 한가운데엔 커다란 흰 배너가 걸려 있었다.“RE: 관계의 온도 - 서로를 이해하는 연습”그 문구를 바라보며 나리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손에는 대본 대신 노트 한 권이 들려 있었다.그 안에는 수많은 메모와 문장이 빼곡히 적혀 있었지만,오늘은 그 어떤 문장도 그대로 읽을 생각이 없었다.“오늘은 그냥, 내 이야기로 가야겠다.”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선배!”뒤에서 수경이 다가왔다.화이트 셔츠에 단정한 재킷, 하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오늘 진짜 시작이에요.”“그래. 이제 우리가 이 일을 세상에 보여줘야지.”“솔직히… 좀 무서워요.”“무서운 게 맞아.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한다는 건 늘 조심스러운 일이니까.”“그래도, 선배가 있어서 다행이에요.”“이젠 네가 나보다 더 단단해.”“그건 아니에요.”“오늘 끝나고 나면 그 말, 다시 생각하게 될 거야.”수경은 작게 웃었다.그 미소 뒤로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고 있었다.그녀는 손목에 차고 있던 작은 팔찌를 매만졌다.그건 나리가 선물해준 ‘은 팔찌’였다.“이거 차고 있으면 이상하게 덜 불안해요.”“그건 너한테 잘 어울려.”“그럼 오늘은, 이 팔찌 덕분에 괜찮을 거예요.”무대 뒤편, 제하는 카메라를 정비하고 있었다.렌즈를 조정하고, 조도를 확인하고, 한 번씩 셔터를 눌러 테스트했다.그의 눈빛은 집중되어 있었지만, 어딘가 따뜻했다.“이 장면, 나중에 다큐로 만들면 좋겠다.”그가 혼잣말을 했다.“이별을 다루던 사람들이, 이제 관계를 회복시키는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라니.”그는 카메라를 들고 무대 뒤에서 나리와 수경을 번갈아 바라봤다.둘 다 자신만의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얼굴이었다.긴장과 결심,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섞인 얼굴.그건 제하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조명이 천천히 어두워지고, 무대 중앙에 빛이 켜졌다.청중석에는 약 백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봄이 완전히 돌아왔다.거리는 벚꽃이 지고, 연초록의 잎이 자라기 시작했다.나리는 창문을 열고 공기를 들이마셨다.묘하게 단내가 섞인 바람이었다.‘이 냄새, 익숙하다.’그녀는 무심코 중얼거렸다.이별 직후에도, 위로의 자리에서도, 늘 이런 냄새가 있었다.새로운 시작과 끝의 경계.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곳이 딱 그 지점이었다.책상 위에는 몇 장의 상담 기록이 정리되어 있었다.그 중 하나에는 수경이 쓴 메모가 눈에 띄었다.‘사람은 상처를 잊는 게 아니라, 그 위로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거예요.’그 문장을 읽으며 나리는 미소를 지었다.‘이젠 완전히 자기 목소리를 찾았네.’그녀는 그 문장을 천천히 손끝으로 짚었다.종이의 질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그때, 문이 열렸다.“선배, 어제 상담했던 분이 오늘도 다녀가셨어요.”수경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약 없이?”“네. 그냥 커피 한 잔 두고 갔어요. ‘오늘은 말보다 커피가 위로가 될 것 같아서요.’ 라고 하시더라고요.”나리는 웃음을 지었다.“그분, 잘 회복 중이네.”“네. 근데 그 말이 참 좋았어요. 오늘은 말보다 커피가 위로가 된다.”“맞아. 사람이 꼭 말을 해야 위로받는 건 아니니까.”“선배는 그런 순간 많았어요?”“많았지. 이 일은, 말보다 ‘눈빛’으로 하는 일이야.”그녀의 말에 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선배는, 제 눈빛에서도 그런 게 보여요?”“응.”“어떤 거요?”“예전엔 두려움이었는데, 이젠 책임감이 보여.”그 말에 수경은 살짝 웃었다.“책임감이라…”“사람의 마음을 다룬다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야.그걸 알게 된다는 건, 이제 진짜로 사람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는 뜻이지.”수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녀의 눈에 선배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이제는 ‘이별 전문가’가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 한 구석을 비추는 등불 같았다.“선배.”“응.”“저… 이제는 누군가의 상처를 보면서 울지 않아요.”“그래?”“네. 이젠 그 사람의 회복을 기다리는 마음이 생겼어요
‘선배는 위로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같이 걸어가는 사람이었구나.’그 시각, 나리는 카페 한쪽에 앉아 있었다.손에는 종이컵 커피가 들려 있었다.따뜻해야 할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창문 밖으론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그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이렇게 평범한 소리가 이렇게 낯설다니.’이별을 위로하던 사람이 이제는 일상의 온기를 배우고 있었다.“혼자예요?”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제하였다.“어떻게 알고 왔어.”“네가 이럴 때 혼자 있을 리가 없잖아.”“그럼 왜 왔는데.”“그냥.”“그냥은 무슨.”“그냥 보고 싶었어.”그 말이 공기 속에 가라앉았다.그녀는 시선을 내렸다.“나, 오늘 상담 못 했어.”“그래야지.”“근데 이상하게 불안해.”“불안해도 괜찮아.”“나, 누군가의 감정이 아니라 내 감정을 다뤄야 하니까.”“그게 네가 회복 중이라는 증거야.”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제하야.”“응.”“사람은 왜 이렇게 늦게 배우는 걸까.”“늦게 배워야 오래 남는 거니까.”“그 말, 예전 같았으면 웃겼을 텐데.”“지금은?”“지금은 좋다.”그녀는 작게 웃었다.그 웃음이 오랜만에 진짜 같았다.해 질 무렵, 수경은 상담을 마치고 문을 닫았다.창밖으로 노을빛이 번졌다.그녀는 책상에 앉아 조용히 일지를 썼다.오늘은 처음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대신’ 듣지 않았다.내가 내 목소리로 말했으니까.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손가락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그 작은 흔적이 이상하게 뿌듯했다.그때 제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나리랑 같이 있어. 오늘 그냥 쉬기로 했어.'그녀는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그래, 선배도 사람인데.’그녀는 조용히 불을 끄고, 창가에 서서 노을을 바라봤다.빛이 천천히 사라지는 대신, 공간 안엔 따뜻한 그림자가 남았다.밤. 나리와 제하는 카페를 나섰다.가로등 불빛이 젖은 길 위로 번졌다.그녀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이제 좀 살겠네.”
창문 틈새로 바람이 스며들었다.하늘은 아직 흐릿했고, 공기 속엔 비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나리는 커피를 내리며 손목을 가볍게 풀었다.오늘은 유난히 손끝이 차가웠다.‘몸이 아니라 마음이 긴장하고 있는 거겠지.’그녀는 스스로를 달래듯 속삭였다.문이 열렸다.“선배, 박채린 씨 도착했어요.”수경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응. 들어오시게 해.”“선배, 혹시 오늘은 제가 먼저 얘기 시작해도 될까요?”“좋아. 네가 오늘 진행 맡아.”“진짜요?”“응. 네 감정으로 부딪혀봐.”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네가 성장하는 방법이야.”박채린은 지난번보다 훨씬 차분한 얼굴이었다.검은 셔츠에 짧은 머리, 눈가에는 여전히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그 속에 조금의 평화가 비쳤다.“안녕하세요.”“어서 오세요.”수경이 먼저 손짓했다.“오늘은 어떤 이야기부터 해볼까요?”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그날… 마지막 통화요.”“남편분과요?”“네. 그날 다퉜어요. 아주 사소한 말이었는데,그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죠.”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그때 제가 말했어요. 당신이 없어도 난 괜찮아.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서 떠나질 않아요.”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나리의 숨이 멈췄다.그 문장. 그 익숙한 말투.그건 그녀 자신이 과거에 온유에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나, 너 없이도 괜찮을 것 같아.”그녀의 머릿속에 그날의 장면이 번개처럼 스쳤다.온유의 표정, 그 짧은 정적, 그리고 그 후의 침묵. 그녀는 손끝을 꼭 쥐었다.수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 말을… 후회하세요?”“후회보다, 그때 그 말을 왜 했는지조차 모르겠어요.”“아마, 그 말로 자신을 지키고 싶었던 걸 거예요.”“지키려고 한 게, 결국은 무너뜨렸어요.”박채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사람이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라 매일 다시 시작이더라고요.그 사람이 없다는 걸 매일 새로 확인하는 게.”그 말에 수경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그 감정, 알
아침 공기는 맑고 차가웠다. 유리창 너머로 햇살이 부서지며 방안을 환하게 밝혔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창가에 앉아 손에 쥔 머그컵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젯밤의 소리를 떠올렸다. 벽을 긁던 그 마찰음, 그리고 내 심장을 파고들던 속삭임. 아무리 고개를 흔들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피부 속에 새겨진 문신처럼, 지워낼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부엌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하가 커피를 내리고 있었고, 수경은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와 마주쳤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자마자
아침이 오자 창밖은 분명히 환했지만, 내 눈에는 세상이 여전히 흐릿하고 무거워 보였다. 멀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출근길의 발걸음이 분주히 이어졌지만, 그 모든 것이 유리 너머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나는 주방 의자에 앉아 멍하니 커피를 마셨다. 잔을 손에 쥐고 있어도 따뜻함이 손끝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새벽에 들었던 그 꿈의 한마디가 자꾸만 반복되었다. “곧, 문을 열어야 해. 그때 알게 될 거야.”그 말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너무도 구체적이었고, 내 마음 깊은 곳을 겨냥하고 있었다.
밤이 지독하게 길었다. 아무리 불을 환히 켜두어도, 집 안 구석구석에 웅크린 그림자는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거렸다. 나는 거실 바닥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창문을 응시했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창백했고, 눈동자 속엔 피로와 두려움이 엉켜 있었다. 잠깐만 눈을 감으면 온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낮고 서늘한 울림이 귀와 가슴을 동시에 찔렀다.제하는 현관문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새벽 내내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한 듯, 그러나 의식은 또렷해 보였다. 손에 들린 주머니칼을 무심히 굴리며 창밖을 주시했
새벽이 그렇게 흘러갔다.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한 나는 커피잔을 손에 쥔 채 창가에 서 있었다. 검은 액체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무런 온기도 전해지지 않았다. 밤새 들렸던 그 목소리“곧, 만나게 될 거야.” 는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단순한 위협이라기보단, 예고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제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고, 수경은 작은 담요를 둘러쓴 채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들의 숨소리가 고르게 이어지는 동안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