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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안셔스의 꽃말이 뭔지 알아요?”
그가 꽃잎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물었다. 차강현은 꽃을 다루는 손길마저 다정한 남자였다. 흰 꽃잎 끝을 엄지로 가볍게 쓸어 내리는 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곧았다. 값비싼 시계가 소매 아래로 미끄러져 나왔고, 손목을 따라 떨어진 햇빛이 은은하게 빛났다. 나는 꽃보다 그를 먼저 바라봤다. “……변치 않는 사랑?” “맞아요.” 풍성하게 겹친 흰 꽃잎 사이로 연한 분홍빛이 번져 있었다. 꽃다발을 감싼 아이보리색 포장지에는 얇은 리본이 매여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꽃 한 송이도 대충 고르지 않았다는 게 느껴졌다. 그가 웃으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계절을 지나더라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웃었다. 앞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봄이 남아 있는지 세어 보는 사람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꽃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요?” 그 말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말은 변명도 되고 거짓말도 되지만, 꽃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잖아요.” 나는 꽃을 받아 들었다. 그가 내게 건넨 마음이 영원할 거라고 믿으면서. “그럼 결혼 기념일마다 사 줘요.” “…….” “꽃이요. 다음 봄에도, 그다음 봄에도.” 조금 유치한 부탁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차강현 앞에서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계산하지 않고 마음껏 기대하고, 충만히 서로를 사랑하며 그렇게 오래 오래. “약속할게요, 연우연 씨.”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앞으로도 계속 사 줄게요. 질릴 때까지.” “꽃이 질릴 리가 없잖아요.” “그럼 내가 질릴 때까지.” 그의 손끝이 내 뺨을 가볍게 스쳤다. “우리 오래 사랑해요.”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했던 날의 꽃.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색의 꽃이 피었고, 거리의 나무들은 몇 번이고 잎을 틔웠다. 봄은 돌아왔고, 여름은 지나갔으며, 가을과 겨울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차강현은 더는 내게 꽃을 사 주지 않았다.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준 꽃은 결혼을 약속하던 날의 리시안셔스였다. *** 차강현은 자신이 했던 약속을 더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식을 올리기 전에 앞서 뱃속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린 아이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했고, 우리가 어떤 부모가 될지 이야기했다. 차강현은 내 배에 손을 얹고 아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아이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그래서 결혼식을 올린 뒤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잃었을 때, 나는 그 역시 나만큼 아플 거라고 믿었다. 우리가 함께 기다렸던 아이였으니까. 같은 슬픔을 나누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 견뎌야 할 상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아이는 사랑의 결실이 아니었다. 나와 결혼하기 위해 필요했던,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도대체 왜 이래요!” 처음에는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아버지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아이를 잃은 뒤에도 나는 그를 이해하려 애썼다. 나만큼이나 아플 테니, 나를 위로할 여유조차 없을 거라고. 어쩌면 제 슬픔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나에게 모진 말을 내뱉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견딜 만했다. 그가 달라진 이유를 상실에서 찾는 동안만큼은,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었으니까.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좀 조용히 해.” 차강현은 넥타이를 풀며 말했다. 며칠째 잠을 설친 사람처럼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그 피로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아이를 잃은 슬픔은 아닌 듯했다. “나도 힘들어요. 나만 힘든 거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가 무심하게 되물었다. “내가 뭘 해 줘야 하는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무엇을 해 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함께 슬퍼해 달라고, 나만 이 집에서 아이를 잃은 사람처럼 남겨 두지 말아 달라고. 고작 그 정도를 바랐을 뿐이었다. “당신도 우리 아이…….” “그 얘기 좀 그만해.” 강현이 말을 잘랐다. “하나 더 만들어주면 그만할래?”그 순간,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찰칵. 문이 안으로 열렸다. “…….” 휠체어에 앉은 내 시선에서는 손등을 가로지르는 굵은 핏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이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손.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이 실릴 때마다 손등의 힘줄이 희미하게 도드라졌다. 그 손의 주인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백도겸이 서 있었다. “들어오시죠.” 백도겸은 내 휠체어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몸을 비켜 문을 넓게 열었다. “…….” 나는 그가 비켜 선 틈으로 안쪽을 살폈다. 상담실이라고 들었는데, 일반적인 병원 면담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창가에는 낮은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 있었고, 한쪽 벽에는 서류를 펼쳐 놓기에도 넉넉해 보이는 커다란 책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복도를 지나오는 내내 개미새끼 한마리 구경하지 못했다. 내가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백도겸이 문을 닫았다. 철컥.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문은 왜 잠그시는거죠?” “방해받기 싫어서요.”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고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휠체어에 앉은 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든 말든,
억지로 먹기 시작한 멜론은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제일 좋은 걸로 골라 왔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과육은 부드럽게 씹혔고, 입안에 퍼지는 단맛도 기분 좋을 만큼 진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꽤나 맛있게 먹고 있었다. 마지막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과즙을 삼키고 포크를 내려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우연아.” 차강현이 나를 불렀다. “몸은 좀 어때? 조금 나아졌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나 공을 들이는 걸까. 포크를 마저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응. 점점 괜찮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 강현은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더니, 협탁 위에 놓인 빈 용기를 제 쪽으로 가져갔다. “다행이다. 당신 아픈 거 보니까 내가 마음이 안 좋더라고.” 속으로 어이가 없어 웃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차강현은 그런 내 속도 모르고 퍽 다정한 얼굴을 연기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연아. 나 당신한테 할 말이 하나 있는데.” 아. 드디어 본론인가. 나는 무릎 위에 손을 얌전히 포개고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인데요?” “음, 별건 아니고.” 차강현의 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말을 고르는 듯한 시선이 잠깐 내 얼굴을 훑었다. 어른들 앞에 데려가면 누구라도 흡족해할 법한 단정한 인상에, 웃을 때면 눈매가 순하게 휘어지는 얼굴이 좋았었다. 반듯한 생김새만큼이나 마음도 올곧은 사람일 거라고 믿었는데. “당신도 이제 몸 좀 추스르고 나면…….” 그의 말끝이 느리게 늘어졌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꽃다발에 멜론까지. 삼 년 전 연애하던 시절의 다정함을 굳이 되살려 놓은 데에는 역시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회사에 일이 좀 생겼어.” 역시나. “무슨 일인데?” “큰일은 아니야. 당신이 신경 쓸 정도는 아니고.” 큰일이 아니라면서 저렇게 운을 띄우는 건 무슨 심보일까. “자금 들어오는 일정이 밀리면서 전체 계획이 틀어지게 생겼어. 계약은 이미 진행됐고,
백도겸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했다. ㅡ “VIP 병동 18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오른쪽 끝에 보안 데스크가 있을 겁니다. 거기서 제 이름을 대세요. 안쪽 전용 복도로 안내해 줄 겁니다.” ㅡ “복도 끝에 별도 상담실이 있습니다. 문에 적힌 번호는 1807호. 거기서 뵙죠.” 그때였다. 징징징. 손에 쥔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 깜짝 놀라 화면을 내려다봤다. 부재중 전화 알림과 함께 문자가 연달아 떠 있었다. [매너콜] 고객님께서 통화 중이신 동안 강현 씨(010-XXXX-XXXX) 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2건)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지금. 나는 서둘러 통화 기록을 열었다. 화면에는 차강현의 부재중 전화 두 건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나는 곧장 차강현의 이름을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울리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엉켜 들었다. ㅡ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장이 한 번 더 내려앉았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강현 씨. 전화했었어요?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ㅡ “어, 우연아.” ㅡ “너 좋아하는 멜론 사러 왔는데, 유바리 멜론이 다 팔렸다네.” 너무 예상치 못한 부분이라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아. 그래요? 아쉽네.” ㅡ “백화점도 다 문을 닫은 시간이라, 다른 멜론이라도 괜찮아?” 나는 최대한 평소처럼 대답했다. “……응. 다른 것도 괜찮아요.” ㅡ “그럼 적당한 걸로 사 갈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알았어요. 고마워요.” 전화를 끊자마자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유바리 멜론이라.” 참 다정하기도 하지. 아내가 좋아하는 과일 하나를 사려고 문 닫을 시간까지 발품을 파는 남편이라니. 누가 봤다면 감동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몇 달 전이었다면 그랬을 테고. 하지만 이제는 안다.
“…….” 검색 결과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백도겸 대표, 투자회사 대표, 국내외 부동산 투자, 호텔 및 물류 사업. 기사마다 조금씩 표현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분명했다. 그가 손을 댄 사업은 규모가 컸고, 그가 투자한 회사는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나는 첫 번째 기사를 눌렀다. 〈Verdant 백도겸 대표, 대규모 투자 유치로 업계 주목〉 두 번째 기사에는 그가 인수한 호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세 번째 기사에는 해외 물류 기업과의 협력 소식이 담겨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을 검색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 나는 사진 속 남자를 확대했다. 병실에서 마주쳤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ㅡ ‘이런 건 녹음을 해야지.‘ ㅡ ’당하고만 있을 반푼이로는 안 보이는데.‘ 처음에는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사고를 당해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사람에게 할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꽤 정확하게 짚어 냈다. 남편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내. 그 사실을 들켰다는 걸 남편은 아직 모른다. “……백도겸.” 소리 내어 이름을 읽어 봤다. 그래서 차강현이 그토록 빌빌 기었구나 싶었다. 나는 다시 검색창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단어를 덧붙였다. [흥신소]. 검색 결과가 주르륵 나타났다. 사람 찾기, 외도 증거 수집, 개인 신원 조사, 기업 관련 조사. 지금 와서 생각하면 확인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건 따로 있었다. 차강현의 뒤를 조사해 달라고 의뢰하면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까. 결혼 전부터 나를 이용할 생각이었는던 것, 투자 유치를 위해 내 이름을 어디까지 들먹였는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인 일들까지 모조리 다 파헤칠 수 있을까. 다만 흥신소를 통해 얻어 낸 증거가 법정에서 어디까지 효력이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나는 검색창에 다시 시선을 고정했
“우연아!”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엄마가 침대 곁으로 달려왔다. 뒤따라 들어온 아버지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나를 살폈다. “세상에, 우연아……!”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였다. “어디 봐. 의식은 제대로 있는 거야?”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엄마는 내 이마와 뺨을 번갈아 어루만지다가, 뒤통수에 감긴 붕대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머리가 왜 이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무심코 손을 들어 뒤통수를 가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엄마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 “뭘 하고 있었는가.” 낮은 목소리가 불호령처럼 떨어졌다. 우림리테일의 대표이사, 연우림. 창업주인 할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의 이름을 따 회사명을 지었다. 그렇게 탄생한 우림리테일은 오랜 세월 유통업계에서 입지를 다져 온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운 나를 돌아봤다. 뒤통수에 감긴 붕대를 확인하는 순간, 굳게 다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내 딸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했느냐는 말이야.”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제가 더 세심하게 챙겼어야 했는데…….” “세심하게?” 아버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 “우연이를 자네랑 결혼시키지 말았어야 했어.” “아빠.” 끼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요. 이제 그만 나가줘요.” 아버지는 내가 아프다는 말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인어른, 제가 잘못했습니다.” 차강현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우연이에게 더 잘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네가 해야 할 책임을 다해. 헛물 켤 시간에 자네가 할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란 말이야.” 아버지는 차강현의 사업을 말 그대로 ’헛물‘이라 지칭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투자
“보기 좋네요.” 백도겸이었다. “난데없이 도로에 뛰어들길래 반푼이 아닌가 했더니.”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물론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놀란 기색이라도 보이면, 남자가 내 속내를 알아챘다는 사실을 차강현에게 들킬지도 몰랐다. “혼잣말입니다.” 그가 재킷 소매를 매만지며 내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 벌써 가시려고요?” 차강현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드렸는데……. 대표님께서 직접 병원까지 동행 해주셨는데 제가 이대로 보내 드릴 수는 없죠. 따로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차강현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 앞에서는 언제든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아니라, 그 모습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였으니까. “식사라.” “…….” “내 차가 당신의 아내를 친 게 뭐가 그리 감사할 일이라고.” 차강현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멈췄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실언했습니다.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는 잘 익은 벼처럼 연신 고개를 숙여 댔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내가 알던 차강현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대체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사업이 잘 풀린 뒤로 차강현은 늘 자신만만했다. 그 오만함마저 성공을 향한 확신처럼 보여 그를 사랑했었지. 그런 차강현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추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백도겸은 문 앞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문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만 느릿하게 돌렸다. “연우연 씨.”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다음엔 신호부터 확인하고 뛰어드세요.” “…….” “달려오는 차도 못 피하면서, 준비는 제대로 해둬야 하지 않겠어요?” 무심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걱정인지 핀잔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준비라니. 나는 그 말에서 다른 의미를 읽었다. 당장 차강현에게 달려가 따져 묻는 대신, 그가 모르는 사이에 증거를 모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