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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전 금욕주의
이혼 전 금욕주의
Author: 홍피코

1화

Author: 홍피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9 15:31:19

지독하게 가라앉은 열기 속에서, 권재하의 움직임은 여유로울 만큼 나른하고도 잔인했다.

“…….”

서인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제멋대로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려 깨물자, 재하의 낮게 가라앉은 시선이 그 버릇을 놓칠 리 없다는 듯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깨물지 말라고 했죠.”

나긋한 경고와 함께, 재하의 손가락이 짓누르듯 벌려놓은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젖은 점막을 헤집고 들어오는 손가락의 감각에 서인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본능적인 열락이 이성을 집어삼켰다.

서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단단한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입안으로 받아들였다. 부드럽게 얽혀드는 혀끝으로 감싸듯 천천히 빨아내자, 재하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거칠어졌다.

귓가에 질척한 물소리가 울렸다.

지독하게 배덕하고 음란한 감각이었다.

“……버릇이야, 정말.”

낮게 읊조린 재하가 손가락을 빼내려 했다.

그 찰나, 서인은 심술궂게 이를 세웠다.

날카로운 이빨 끝에 단단한 살점이 짓눌렸다.

“하…….”

재하가 짧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나 피하기는커녕, 다시 내려온 눈빛이 한층 진득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깨물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나직한 경고와 함께 재하가 서인의 골반을 단단히 붙잡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끈적한 열기로 젖은 살이 맞부딪혔다.

재하는 제 아래를 묵직하게 채우고 있던 단단한 성기를 천천히 빼냈다. 그리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다시 깊숙이 꽂아 넣었다.

“아아, 흣……!”

서인의 전신이 크게 들썩였다.

한 번에 밀려든 쾌락이 척추를 타고 뇌리까지 치솟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부서지고, 붙잡을 곳을 찾던 손이 다급하게 재하의 팔을 움켜쥐었다.

재하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묵직하고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눅눅한 소리.

젖은 곳을 거듭 파고드는 움직임.

안쪽을 짓이기듯 몰아치는 템포에 서인의 정신이 속절없이 흐트러졌다.

몇 번의 거친 허릿짓이 이어진 순간,

“아아…….”

서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왈칵 쏟아진 뜨겁고 묽은 애액과 함께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힘이 풀린 허벅지가 재하의 허리를 감싼 채 제멋대로 경련했다.

그 민감하고 무방비한 반응을 놓칠 리 없었다.

재하는 멈추지 않고 허리를 깊숙이 묻은 채 상체를 숙였다. 그의 시선이 서인의 하얗고 가늘게 떨리는 허벅지 사이로 떨어졌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아래로 완전히 내려갔다.

“……재하 씨, 잠깐…….”

당황한 서인이 그를 밀어내려 팔을 뻗었지만, 재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 입술로 그 흔적을 고스란히 쓸어내렸다.

끈적하게 젖은 살을 탐욕스럽고 진득하게 훑는 감각에 서인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달콤하고 진한 액체의 맛을 음미하듯 천천히 입술을 떼어낸 재하가 번들거리는 입가를 손등으로 쓸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맛있네요.”

그 한마디에 서인의 머릿속에서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어졌다.

수치심보다 흥분이 먼저 치솟았다.

겨우 가라앉던 몸이 다시 달아올랐다.

“흐…… 더, 더 해줘요. 재하 씨.”

서인은 제멋대로 떨리는 두 팔을 뻗어 재하의 단단한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애원하듯 몸을 비틀며 더 넣어달라고 헐떡이는 목소리에는 이미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재하에게 매달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못 참겠네, 정말.”

재하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그는 다시 서인의 위로 묵직하게 올라탔다.

이번에는 그에게도 여유가 없었다.

희고 가늘어 부서질 듯한 서인의 몸 위로 단단한 핏줄과 굴곡진 근육이 얽힌 재하의 육신이 짓누르듯 겹쳐졌다.

조각한 듯 서늘한 얼굴 위로 땀방울이 떨어졌다.

늘 오만하리만큼 흐트러짐 없던 얼굴이 흥분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은 지독하게 관능적이었다.

“후…… 씹.”

낮게 가라앉은 욕설이 귓가를 때렸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감각마저 집어삼켜졌다.

서인은 눈앞이 새하얘지는 절정과 함께 온몸을 팽팽하게 조였다.

재하 역시 억눌린 신음을 삼키며 깊숙이 허리를 묻었다.

그리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친 숨만 침실 안을 가득 채웠다.

***

폭풍처럼 몰아쳤던 열기가 지나가자 방 안은 기이할 만큼 고요해졌다.

흐트러진 시트와 아무렇게나 떨어진 옷가지, 아직 식지 않은 서로의 체온만이 조금 전까지 이 침대 위에서 벌어진 일을 증명하고 있었다.

재하는 잠시 거친 호흡을 고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서인은 그대로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하얗게 달아오른 피부 위로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재하는 침대 협탁에 놓인 부드러운 수건을 집어 들었다.

서인의 뺨에 흐른 땀과 몸에 남은 흔적을 손수 닦아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탐욕스럽게 몸을 탐하던 남자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사무적인 손길이었다.

다정한 말도 없었다.

입맞춤도 없었다.

서인 역시 바라지 않았다.

재하는 수건을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옆으로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서로의 몸속까지 헤집어놓았던 두 사람 사이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적당한 거리가 생겼다.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몸에는 아직 희미한 열감이 남아 있었다. 반면 절정의 끝에서 산산이 흩어졌던 이성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오고 있었다.

그러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일 오전의 약속이었다.

법무법인 세경.

오전 열 시.

예약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이제 그 전에 반드시 해야 할 말 하나만 남았다.

서인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재하는 팔 하나를 눈 위에 걸친 채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흐트러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느릿하게 오르내리는 단단한 가슴과 아직 마르지 않은 땀방울 정도가 그 흔적이라면 흔적이었다.

참 빠르게도 멀쩡해지는 인간이었다.

서인은 그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재하 씨.”

“네.”

잠든 줄 알았는데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서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 이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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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전 금욕주의   22화

    “그 정도는 돼요.”서인은 손을 잡고 일어났다.몸을 세우자 아직 남아 있던 어지럼증에 중심이 잠깐 흔들렸다. 재하가 곧바로 팔을 붙잡았지만 서인이 제대로 선 것을 확인한 뒤에는 별말 없이 손을 놓았다.두 사람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이 열렸다.안에는 네댓 명이 타고 있었다.서인은 별생각 없이 발을 내딛으려 했다.그런데 움직이지 않았다.아주 잠깐이었다.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대로 서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재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닫힌 문을 한번 보고는 옆에 있는 비상계단 표지로 시선을 옮겼다.“계단으로 가죠.”서인이 그를 봤다.“여기 4층이에요.”“알아요.”“나 멀쩡해요.”재하는 이미 비상계단 문을 열고 있었다.“천천히 가면 됩니다.”서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뒤따라 들어갔다.재하가 먼저 한 계단을 내려가 몸을 돌렸다.“와요.”“혼자 내려갈 수 있어요.”“압니다.”그러면서도 재하는 서인보다 한 계단 아래에서 내려갔다.서인이 난간을 짚고 천천히 뒤를 따랐다.---결국 이혼 신청은 하지 못했다.재하가 이미 병원에 연락까지 해둔 탓에 더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기본적인 검사를 받고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이번에도 큰 이상은 없었다.과로하지 말 것.당분간 비슷한 증상이 반복되는지 지켜볼 것.필요하다면 추가 검사를 받아볼 것.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서인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내려왔다.테이블 위에는 법원에서 그대로 들고 돌아온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 오후 내내 가방 안에 있었던 탓인지 한쪽 모서리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서인은 손끝으로 그 부분을 눌러 폈다.맞은편 소파에는 재하가 앉아 있었다.“회사 안 나가요?”재하가 휴대폰에서 시선을 들었다.“오늘 일정 정리했습니다.”“나 이제 멀쩡해요.”“알아요.”“알면서 왜 안 가요.”재하가 잠시 서인

  • 이혼 전 금욕주의   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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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전 금욕주의   20화

    수요일 오후.서인은 약속한 시간보다 십 분 먼저 법원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기 전 가방 안을 한 번 확인했다. 신분증과 미리 준비해둔 서류가 차례로 들어 있었고, 도윤이 전날 보내준 확인 사항도 빠짐없이 챙겼다.입구 근처에는 재하가 먼저 와 있었다.“왔어요?”“일찍 왔네요.”“나도 방금.”재하는 혼자였다. 서인이 주변을 한번 둘러보다 물었다.“비서실은요?”“차에 있어요.”“웬일이에요.”재하가 법원 건물을 한번 올려다봤다.“이혼하는 것도 구경시켜야 합니까?”서인의 입가에 짧게 웃음이 걸렸다.맞는 말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 오후인데도 건물 안은 제법 붐볐다. 서류봉투를 든 사람들이 민원실과 복도를 오갔고, 안내판 앞에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층을 확인하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서인은 걸음을 옮기며 휴대폰을 꺼냈다.도윤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도착하셨어요?][네. 지금 들어왔어요.][서류 확인하시고 문제 있으면 연락 주세요.][알겠어요.]답장을 보내고 화면을 끄자 옆에서 재하가 물었다.“차도윤?”“네.”“오늘도 친절하시네.”“담당 변호사니까요.”“그러네요.”그게 끝이었다.재하는 더 묻지도 않았고 서인의 휴대폰을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다.엘리베이터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여럿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문이 열리자 앞쪽에 있던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갔고, 서인도 그 틈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재하가 마지막으로 타자 문 앞까지 사람이 찼다.서인은 안쪽 벽에 가까이 섰고 재하는 자연스럽게 그 앞에 자리했다. 한 손에는 서류봉투를 들고 있었다.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한 층 위에서 몇 사람이 내렸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이 새로 들어왔다. 앞에 선 남자의 어깨가 서인 쪽으로 밀려오자 재하는 별말 없이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넓은 등이 사람들과 서인 사이를 가렸다.서인은 잠깐 그 등을 바라보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아직 여유가 있었다.화면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그때부터였다.

  • 이혼 전 금욕주의   19화

    말이 먼저 나갔다. 서인의 시선이 아주 느리게 재하에게 돌아갔다. 재하도 보고 있었다. 몇 초.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재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럴 수도 있죠.” 낮은 목소리였다. 서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재하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운동.” “…….” “요즘 못 했잖아요.” 서인은 그를 잠시 바라봤다. “그 얘기였어요.” “나도.” 입꼬리가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뻔뻔한 얼굴이었다. 서인은 혀를 한번 찼다. “누가 뭐래요.” 재하가 낮게 웃었다. 서인은 그대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 위에 희미하게 비친 재하의 얼굴에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차가 완만한 커브를 돌았다. 이번에는 무릎이 닿지 않았다. *** 주말이 지나자 법원에 갈 날이 가까워졌다. 월요일 오후, 서인은 차도윤의 사무실에 들렀다. 제출할 서류와 이후 절차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도윤은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필요한 부분만 짚었다. “이건 당일에 두 분 다 서명하시면 되고요.” “네.” “신분증은 꼭 챙겨 오세요.” “알겠어요.” “확인기일은 신청하고 바로 잡히는 건 아니니까 일정 나오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이 다음 서류를 집으려다 손을 멈췄다. 시선이 서인의 손으로 향했다. “손 베였어요?” “네?” 서인이 손을 내려다봤다. 검지 옆에 가느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아침에 서류를 넘기다 종이에 베인 모양이었다. “아.” 도윤이 서랍을 열어 작은 밴드 하나를 꺼냈다. 서인 앞에 내려놓았다. “붙여요.” “이 정도 가지고.” “물 닿으면 따가워요.” 그 말만 하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서인은 잠시 밴드를 내려다보다 포장을 뜯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도윤은 이미 다음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서인은 밴드를 붙인 뒤 펜을 들었다. “다음은요?” 도윤이 서류 한 장을 앞으로 밀었다. “이거요.” 서인은

  • 이혼 전 금욕주의   18화

    잔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로 밀려들었다. 웃음소리와 샴페인 향, 천장에 매달린 조명의 빛까지 한꺼번에 제자리를 찾았다. 그 한가운데 재하의 손만 여전히 허리에 남아 있었다. 서인이 옆을 돌아봤다. 재하는 이사의 말을 들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고 있었다. 가끔 짧게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옆얼굴을 타고 높은 콧대에 조명이 스쳤다. 허리를 감싼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재하가 눈썹을 살짝 들었다. “왜요?” “뭐가요?” “아까부터 보길래.” 서인은 잠시 그의 얼굴을 봤다. “얼굴 좀 봤어요.” 재하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 “마음에 들어요?” “쯧.” 서인이 고개를 돌렸다. 낮은 웃음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그때 누군가 두 사람을 불렀다. “권 대표님, 한 전무님. 사진 한 장만 부탁드릴게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재하의 손이 다시 서인의 허리를 감쌌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찰칵. 플래시가 터졌다. 서인은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 행사는 생각보다 길었다. 사진을 몇 번 더 찍고, 후원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재하는 중간에 재단 이사장에게 붙잡혔다. 서인이 샴페인 잔을 바꾸려던 때, 태림그룹 부회장의 아내인 정혜원이 옆으로 다가왔다. 몇 년 전부터 우진문화재단 후원 행사에서 종종 마주치던 사람이었다. “두 분은 여전히 보기 좋네요.” 서인이 웃었다. “감사합니다.” “결혼한 지 이제 삼 년 됐죠?” “네.” “아직도 신혼 같아.” 마침 돌아온 재하가 그 말을 들었다. “제가 좀 잘합니다.” 서인이 그를 돌아봤다. “뭘요?” 재하가 옆에 서며 태연하게 말했다. “결혼 생활.” 혜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감 좀 봐.” 서인도 잔을 들며 웃었다. “본인 평가가 좀 후해요.” 재하의 손이 다시 서인의 허리에 가볍게 얹혔다. “여보가 별말 없었으면 잘한

  • 이혼 전 금욕주의   17화

    금요일 오후. 서인은 사무실에서 마지막 메일을 보내고 노트북을 덮었다. 시계는 5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비서가 가져다 놓은 검은색 드레스 커버가 걸려 있었다. 오늘 저녁 일정은 우진문화재단 후원 행사였다. 한성의 자구안 협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빴지만, 오래전부터 잡혀 있던 공식 일정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행사장은 청담동의 작은 갤러리였다. 정식 만찬보다는 후원자와 재단 관계자들이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자리라 규모는 크지 않았다. 서인이 도착했을 때 이미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검은 드레스 위로 얇은 숄을 걸친 채 몇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한 전무님.” 재단 이사가 반갑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잘 지내셨어요?” “나는 똑같죠. 그런데 권 대표는?” “회사에서 바로 온다고 했어요.” “웬일이래. 오늘은 따로 오나 봐요?” 서인이 웃었다. “오늘 타이밍이 좀 안 맞았네요.” “그래도 금방 오겠죠?” “네. 거의 다 왔다고 했어요.” 그때 입구 쪽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서인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권재하였다. 짙은 네이비 슈트에 넥타이는 없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놓은 탓에 평소보다 목선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조명 아래로 걸어 들어오는 얼굴은 멀리서도 선이 또렷했다. 이마에서 곧게 떨어지는 높은 콧대와 그 아래 단정하게 다물린 입술, 사람을 볼 때마다 느슨하게 휘어지는 긴 눈매까지. 반듯한 차림을 하고 있으면 차가워 보이는 얼굴인데, 오늘은 셔츠 깃이 조금 풀어진 것만으로 인상이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아침마다 현관에서 보던 단정한 모습보다 한결 느슨했다. 재하는 입구에서 재단 관계자와 악수하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지나가던 여자 둘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한 명은 걸음을 늦추며 한 번 더 돌아보기까지 했다. 서인은 다시 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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