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목요일 오후. 서인은 우진그룹 본사 로비를 가로질렀다. 몇 번 와본 곳이었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다만 오늘은 권재하의 아내가 아니라 한성그룹 상무로 방문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한서인 상무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안내 직원을 따라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최상층에서 문이 열렸다. 복도를 오가는 직원들이 서인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서인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회의실 앞에서 기다리던 직원이 문을 열었다. “한성그룹에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긴 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던 재하가 고개를 들었다. 아침에 집에서 본 남자와 같은 셔츠,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권재하 대표였다.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대표님.” 재하의 시선이 잠깐 서인에게 머물렀다. “앉으시죠.” 서인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곧 회의실 스크린에 이촌동 복합개발 사업안이 띄워졌다. “한성 측에서 제안한 출자 비율대로라면 우진이 부담하는 초기 사업비가 너무 큽니다.” 우진 측 담당자가 자료를 넘겼다. “특히 착공 전까지 들어가는 비용 대부분을 우진이 부담하게 됩니다. 이 구조라면 투자금 집행 시점을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인은 앞에 놓인 자료를 내려다봤다. “토지 가치가 빠져 있네요.” “감정가는 반영되어 있습니다.” “현재 기준으로요.” 서인은 해당 페이지를 펼쳤다. “개발계획 반영 전 감정가잖아요. 한성이 현금으로 출자하는 금액만 비교하면 당연히 우진 부담이 커 보이죠.” “아직 사업계획이 확정된 단계는 아닙니다.” “그래서 사업권까지 포함해서 평가하자는 거예요.” 서인이 자료를 앞으로 밀었다. “우진이 자금을 넣는 만큼 한성도 핵심 자산을 사업에 넣어요. 그 가치를 현재 감정가로만 계산하면 이 조건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재하는 말없이 자료를 보고 있었다. 종이를 한 장 넘긴 뒤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한성 안으로 다시 검토하
오전 9시를 조금 넘겨 입금 확인 메일이 도착했다. 서인은 화면에 찍힌 금액을 확인했다. 두 번째 인수 후보와 계약을 확정한 지 이틀 만이었다. 처음 예정했던 금액보다 8퍼센트 낮았다. 시간이 급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오늘 만기 건부터 처리하세요.” “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재무팀장이 서류를 챙기려는 사이 서인은 다음 장을 넘겼다. 다음 주 만기까지는 현재 현금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진행 중인 자산 매각 건은 실사가 밀려 있었다. 상대 측에서 제시한 일정은 다음 주 중순이었다. 서인은 자료에 적힌 날짜를 펜 끝으로 짚었다. “이 일정 당기세요.” 재무팀장이 자료를 내려다봤다. “상대 측에서는 다음 주 중반이 가장 빠르다고 했습니다.” “그쪽 일정에 맞출 상황 아니잖아요.” 서인은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겼다. “필요한 자료 오늘 다 넘기고, 실사 인력 더 붙여도 된다고 하세요. 우리가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부터 없애요.” “알겠습니다.” “기존 후보들도 다시 접촉하세요. 가격부터 맞추지 말고 실제로 언제 종결할 수 있는지부터 확인하고요.” “네.” “이번 건 들어왔다고 숨 돌릴 때 아니에요.” 서인이 자금 계획표를 앞으로 밀었다. “다음 주 지나면 또 만기 돌아옵니다. 그 전에 현금 더 만들어놔야 해요.”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안으로 다시 정리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오후 4시까지 주세요.” 팀장이 회의실을 나갔다. 서인은 다시 화면을 봤다. 오늘 빠져나갈 돈이 반영되자 확보한 현금은 금세 줄어들었다. 한 칸을 넘겼다. 다음 날짜가 나왔다. 서인은 펜을 들었다. ***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도착하자 밤 10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차가 대문 안으로 들어설 무렵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집 관리 직원에게 온 메시지였다. [침실 건조 작업은 내일 오전까지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후 상태 확인
서인은 재하를 빤히 바라봤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조금 전 제 다리를 훑고 올라온 시선까지 생각하면 뜻을 모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요.” 재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걸 물어?” “재워준다면서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재하가 웃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덮었다. “가요.” “어디를요.” “자러.” 의자를 밀고 일어난 재하가 서인 옆을 지나쳤다. 서인은 멀어지는 등을 잠깐 바라보다 그 뒤를 따라갔다. *** 침실로 돌아온 재하는 자연스럽게 협탁 앞으로 갔다. 손목에서 풀어낸 시계를 내려놓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목 아래부터 하나씩 느슨해지던 셔츠가 벌어지고, 마지막 단추까지 푼 재하가 그대로 옷을 벗었다.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 아래로 잔근육이 선명하게 잡혀 있었다. 셔츠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거는 순간 등에서 팔로 이어지는 선이 길게 움직였다. 서인의 시선이 잠깐 그 위에 머물렀다. 재하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서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불을 걷었다. 재하도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자 잠시 뒤 물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럽게 다시 한 침대를 쓰게 됐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 침대에서 같이 잔 게 한두 번도 아니었다. 서인은 아까 누웠던 자리로 들어가 베개에 머리를 댔다. 욕실의 물소리가 한동안 이어지다 멎었다. 문이 열렸다. 재하는 홈웨어 차림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나왔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아낸 뒤 침대 반대편으로 들어왔다. 서인은 천장을 바라봤다. 재하가 이불을 끌어올리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잠시 후 그가 손을 뻗었다. 서인의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였다. 손이 협탁 위 조명 스위치에 닿았다. “불 끌게요.” “네.” 서인은 이불 안에서 손가락을 살짝 말아 쥐었다. 조명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서인은 눈을 뜬 채 누워 있었다. 옆에서 이불이 한번 스쳤다. 그게 끝이었다. 서인은 천장을 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재하는
오후 늦게 이사회 결과가 올라왔다. 예상대로 반대는 있었다. 기존 협상가보다 8퍼센트 낮은 매각가가 끝까지 문제가 됐지만, 당장 그만한 현금을 마련할 다른 방법을 내놓은 사람은 없었다. 서인은 수정된 계약서를 마지막 장까지 확인했다. “통과된 거죠?” “네. 상대 측에서도 최종 조건 수락했습니다.” 재무팀장이 서류 한 장을 앞으로 밀었다. “계약은 목요일 오전으로 잡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서인은 결재란에 서명했다. 오전까지 비어 있던 자금 계획표의 한 칸이 채워졌다. 그 아래에는 아직 숫자가 몇 줄이나 더 남아 있었다. 펜 끝으로 다음 만기일을 짚었다. “이건요.” 재무팀장이 다시 자료를 펼쳤다. 서인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것부터 봐요.” 하나가 끝났고, 바로 다음이었다. *** 회사를 나온 건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차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평소에는 없던 작업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에 들어서고 나서야 안쪽에서 낮게 돌아가는 기계음까지 들렸다. 서인은 구두를 벗으며 위층을 올려다봤다. “무슨 일이에요?”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다가와 가방을 받아 들었다. “오후에 가사 직원이 발견했습니다. 2층 욕실 매립 배관 쪽에서 누수가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샜는데요?” “사모님 침실 드레스룸 쪽입니다.” 서인은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침실 앞에는 보양재가 깔려 있었고 드레스룸으로 이어지는 벽면의 목재 패널 일부가 뜯겨 있었다. 천장 안쪽을 확인하기 위해 마감재를 걷어낸 자리 아래로 제습 장비가 돌아가고 있었다. 드레스룸 안에 있던 옷과 물건들도 대부분 다른 방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누수는 잡았습니다.” 작업자가 다가와 설명했다. “다만 내부가 완전히 마른 뒤에 마감을 다시 해야 해서 침실은 이틀 정도 사용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서인은 뜯겨 나간 벽면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게스트룸 쓸게요.” 옆에 있던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드레스룸 물건을 급하게 빼면서
월요일 아침부터 회의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서인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자료를 다시 넘겼다. 같은 숫자를 벌써 세 번째 보고 있었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언제 통보받았어요?” “오늘 아침입니다.” 재무팀장이 대답했다. “최종적으로 인수 검토를 중단하겠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이유는요.” “시장 상황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서인의 손이 멈췄다. “지난주 금요일까지 문제없다던 곳에서요?” “네. 내부 투자심의에서 최종적으로 보류됐다고 합니다.” 서인은 다시 자료를 내려다봤다. 한성이 매각을 추진하던 비핵심 계열사의 지분이었다. 조건이 좋은 거래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성 쪽에서 상당 부분 양보했다. 지금 필요한 건 높은 가격보다 빠른 현금이었으니까. 지난주까지만 해도 협상은 거의 끝난 상태였다. 법무 검토를 마쳤고 상대가 요구한 자료도 전부 넘겼다. 남은 건 최종 계약뿐이었다. 그게 오늘 아침 깨졌다. “다른 후보는요.” “2순위와 다시 접촉 중입니다.” “가능성은?” 재무팀장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으로 충분했다. 서인이 자료를 덮었다. “얼마나 비어요.” 이번에는 자금 담당 임원이 입을 열었다. “이번 매각 대금이 예정대로 들어오는 걸 전제로 자금 일정을 맞춰놓은 상태라…….” “그래서 얼마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600억 안팎입니다.” 서인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한성의 규모를 생각하면 감당하지 못할 돈은 아니었다. 문제는 지금이었다. 앞으로 들어올 돈이 아니라 정해진 날짜에 당장 쓸 수 있는 돈. 그게 없었다. “상환 일정 보여주세요.”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 주부터 돌아오는 일정이 빼곡하게 떠올랐다. 가장 가까운 만기부터 그 뒤에 이어질 금액까지. 한 군데가 막히자 뒤에 맞춰놓은 일정도 줄줄이 틀어져 있었다. “보유 현금으로 어디까지 가능해요?” “운영자금까지 건드리면 당장 돌아오는 건 막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요.” “……어렵습
포토부스 안은 생각보다 좁았다. 둘이 나란히 앉자 어깨가 닿았다. 곧이어 화면에 카운트다운이 떴다. 3, 2, 1. 찰칵. 첫 번째 사진이 화면 구석에 작게 나타났다. 갈 곳 잃은 둘의 시선이 정면을 보고 있었다. 서인이 사진을 보며 말했다. “우리 무슨 증명사진 찍어요?” “그럼 어떻게 찍어야 되는데요.” 다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화면 한쪽에 손가락 하트 모양의 포즈 안내가 떴다. 서인이 그걸 봤다. 재하도 봤다. 하지만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찰칵. 두 번째 사진이 추가됐다. 서인이 결국 웃었다. “아니, 우리 무슨 머그샷 사진 찍냐고요.” “한서인 씨도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재하 씨가 할 줄 알았죠.” “내가 저런 걸 왜 합니까.” 화면에는 다시 숫자가 나타났다. 3, 2, 1. 서인의 웃음이 커졌다. 재하가 옆을 봤다. 그 순간, 찰칵. 세 번째 사진이 찍혔다. 서인은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 속 자신은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었다. 재하는 그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재하 씨.” “왜요.” “카메라 봐요.” “보고 있었는데.” “아닌데?”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서인이 손을 뻗어 재하의 턱을 정면으로 돌렸다. “여기.” 재하가 어이없다는 듯 서인을 봤다. 찰칵. 촬영이 끝났다. 잠시 뒤 기계 아래에서 사진 두 장이 나왔다. 서인이 한 장을 집어 재하에게 내밀었다. “가져요.” “서인 씨 가져요.” “두 장 나왔어요.” “둘 다 가지면 되죠.” “똑같은 걸 두 장씩 왜 가져요.” 재하는 사진을 내려다보더니 순순히 받아 들었다. “그럼 줘요.” 서인은 남은 한 장을 가방 안에 넣었다. 마침 휴대전화가 울렸다. 식당에서 온 입장 알림이었다. *** 식당 안은 예상대로 좁고 시끄러웠다. 테이블마다 숯불이 놓여 있었고 고기 익는 냄새와 사람들 목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안쪽 작은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옆 테이블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큰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