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흔은 심하게 기침하며 고개를 저었다.이윽고 눈을 뚝뚝 떨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하성 오빠, 저 사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저 오빠... 오래전부터 좋아했어요.”하지만 아쉽게도 하성은 가흔의 절절한 고백을 듣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가흔을 품에 꼭 안으며 말했다.“말하지 마. 산소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말하면 숨이 막힐 거야.”가흔은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이 순간 죽음의 기운이 점점 저를 덮쳐오는 것 같아 감기는 눈을 애써 뜨며 하성에게 몸을 기댔다.이게 마지막이라면 하성과 같이 있고 싶었다.그걸 본 사람들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다.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즐거웠던 분위기가 한순간 지옥으로 변해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시련을 내린 것만 같았다.그러던 그때.문밖에 있는 소화기를 발견한 상혁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옷을 벗어 머리에 덮어쓰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상혁 오빠!”상혁은 제 몸을 덮쳐오는 불길도 상관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소화기를 꺼내 불이 붙은 곳을 향해 힘껏 쏘아댔다.“하연아, 얼른 나와. 다들 얼른 나와!”상혁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람들은 하나둘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순간, 밖에서 때마침 경보음이 들여왔다.“신가흔!”곧이어 하성의 울부짖음이 뒤따랐다.하지만 가은은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한편.연기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눈조차 뜨지 못하던 하연은 점점 희박해진 공기 때문에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워하다가 결국 그대로 쓰러졌다.이윽고 의식이 점멸되는 순간, 따뜻한 품속에 안긴 걸 느꼈다.그 순간 하연은 본인이 이대로 죽었다고 생각했다.그 뒤로 긴긴 꿈이 이어졌다.그러다 하연이 눈을 떴을 때는 그 일이 있은 사흘 뒤였다.F국.세계 최고의 의료 시스템을 자랑하는 병원에 최씨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최동신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침대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하연을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물었다.“하연이 대체 언제 깨어난다더냐?”“할아버지,
하민의 눈빛은 살짝 어두워지더니 입을 열었다.“하연아,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할아버지는 네 걱정 때문에 꼬박 사흘 동안 눈도 못 붙이셨어.”하연은 미안한 눈빛으로 최동신을 바라봤다.“할아버지, 죄송해요.”“너도 참, 할아버지한테 미안해할 거 뭐 있어? 이번 사고 때문에 몸도 성치 않으면서. 다행히 부씨 집안 그 녀석이 불길 속에서 너를 구해내서 다행이지.”상혁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하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디에도 상혁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하연은 이내 물었다.“할아버지, 상혁 오빠는 어디 있어요?”그때 뒤쪽에 서 있던 하민과 하성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하민이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부상혁 괜찮아. 팔과 등에 화상을 입어 치료받는 중이야. 이모가 곁에 있으니 걱정 마.”그 말에 하연은 이내 몸을 일으켰다.“뭐라고요? 상혁 오빠가 다쳤어요?”그 일을 떠올리자 하성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때 하성은 가흔을 지켜주느라 하연을 잊는 바람에 벌써 할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에게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이번에 하연을 구할 수 있었던 건 상혁 덕분이었다.때문에 상혁은 최씨 가문 은인이나 다름없다.“걱정하지 마. 세계 최고의 의료진이 치료해 주고 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너야말로,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저는 괜찮아요.”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더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 최동신이 막아 나섰다.“하연아, 너 어디 가려고 그러니?”“할아버지, 저 상혁 오빠 보러 갈래요. 너무 걱정돼요.”하연을 한참 설득하던 최동신은 설득하다 못해 끝내 하연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서두를 필요 없어. 내가 간호사더러 휠체어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휠체어에 안자 가.”“필요 없어요, 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요.”고집을 부리던 하연은 결국 최동신을 꺾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하민과 함께 상혁의 병실로 향했다.병실에는 아니나 다를까 조진숙이 지키고 있었고, 상혁은 등에 화상을 입은 탓에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상혁 오
“그래, 그런 사람은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찮아. 이 일은 너희들한테 맡길게.”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무언중에 협의를 달성하는 순간, 구완선의 최후는 이미 정해졌다.며칠 뒤.완선은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음습한 방 안에 갇혀 있다.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입에는 냄새 나는 양말이 물려 있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방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 애원하는 듯했다.하연은 방 안에 서서 처참한 몰골의 완선을 내려다보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나야, 최하연.”말소리가 들리자 마구 버둥대던 완선은 동작을 멈췄다.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눈을 가린 검은 천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하연이 손을 뻗어 그 천을 풀어주자 공포로 가득한 완선의 두 눈이 드러났다. 심지어 몸을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하연은 완선의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왜? 무서워? 애초에 방화할 때는 이럴 거라는 거 생각 못 했나 봐?”완선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공포에 젖은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하연이 자비 없는 태도로 완선의 입을 막고 있던 양말을 빼내자 완선은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최하연,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빌게, 제발 한 번만 봐줘.”하연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하지만 그 웃음에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봐 달라고? 너는 나 봐준 적 있어?”그때 완선은 분명 하연의 목숨을 노렸다.그날 만약 구조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모든 사람이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었을 거다.‘그런데 봐달라고? 꿈도 야무져.’“최하연, 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너무 화나서 그랬어, 너무 화나서 너한테 겁만 주려고 한 거였어. 다른 의도는 정말 없었어. 나 풀어줘, 응? 나 더 이상 여기 있기 싫어. 못 있겠어.”완선이 이곳에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바퀴벌레와 쥐가 지나다녔는지 모른다. 심지어 더러운 썩은 냄새가 코를 자극해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며칠 동안
짤막한 비명을 지르자마자 완선은 그대로 쓰러졌다.그 모습은 CCTV를 통해 감시실에 있는 사람의 눈에 고스란히 전해졌다.하성은 입가에 냉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독도 없는 뱀을 보고도 저렇게 겁을 먹다니.”그 말에 옆에 있던 하경이 말했다.“여자애들은 거의 다 뱀을 무서워해. 그저 평범한 얼룩 뱀이어도 공포의 대상일 거야. 물론 오늘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매일 뱀 한 마리씩 추가해. 한계를 테스트해 보지 뭐. 감히 우리 공주님을 건드리다니, 미치거나 바보가 될 때까지 몰아붙여야지. 우리 하연을 건드린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헤야지.”“...”옆에서 듣고 있던 하성이 몸서리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그래. 그렇게 하지 뭐.”완선이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는 하연은 모든 걸 두 오빠한테 맡기고 곧바로 떠나갔다. 그러고는 병원으로 가 상혁을 보살피는데 집중했다.상혁의 상황은 심각한 게 아니었지만 양가 어르신들 등쌀에 못 이겨 보름 정도 입원한 뒤에야 퇴원했다.그동안 F국에만 있던 하연은 B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리 없었다.그때 하성이 최근 기사를 하연에게 보여주었다.“자, 이번 패션쇼 엄청 성공적이야.”“정말요?”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얼른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직접 봐. 국내외 매체에서 난리 났어. 네티즌들도 거의 호평이고. 앞으로 DS 그룹에 주문 많이 들어오겠는데?”하성의 말에 하연은 들으며 곧바로 기사를 확인했다.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국내외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 네티즌들도 이번 패션쇼에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이것만으로도 이번 패션쇼가 아주 성공적이었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정말 다행이에요. 우리 브랜드 홍보도 하고 우리나라 문화도 해외에 널리 알렸네요.”“그럼, 우리 하연이가 누구인데. 당연히 최고지.”하성의 칭찬에 하연은 싱긋 미소 지었다.“셋째 오빠, 고마워요. 저 앞으로 더 노력할게요.”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 번호를 확인한 하연은 이내 엄숙한 표정을
하민은 질문한 하성이 아닌 하연을 바라봤다.“하연아, 방금 정태훈한테서 연락받았는데...”태훈의 이름을 들은 순간 하연은 대충 무슨 일을 말할지 짐작했다.“패션쇼 현장에서 벌어졌던 그 일 때문이에요?”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옷 망가뜨린 범인 잡았대. 패션쇼에 가위를 소지해 들어왔다는 것도 인정하고, 몯델의 신발에 칼날 숨긴 것도 인정했다.”들으면 들을수록 하연은 화가 치밀었다.“그리고요?”“찾아봤더니 그 사람 고아였어. 가족도 친척도 없는 사람이 뜬금없이 계좌로 몇천만 원이 입금돼서 조사했는데 아무 단서도 못 찾았어. 그리고 입 꾹 다물고 있어. 그저 본인 잘못 인정만 하고 누가 지시했는지는 말하지 않아.”“...”여기까지 들은 하연은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그러니까 다른 단서는 없다는 거네요?”“응. 상대방은 분명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를 공격하고 있어. 막기 어려워. 잘 생각해 봐, 너 평소에 누구 심기 건드린 적 있어?”하연은 어깨를 으쓱했다.“그건 저야 모르죠. 그런데 저를 싫어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에요.”그 말에 하민의 낯빛은 더 어두워졌다.“설마 한서준 그놈 때문에 너한테 이러는 건 아니겠지?”민혜경만 봐도 아주 좋은 선례다.“혹시 민씨 가문 짓은 아닐까?”하연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민씨 가문은 이미 몰락했어요. 그렇게 큰돈을 선뜻 내놓으면서 그런 지시를 내렸을 리 없어요.”하연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지만 하민은 그것 외에 다른 경우는 떠오르지 않았다.“큰오빠, 그 사람이 인정했다면 우리 집안 규칙대로 처리하는 건 어때요?”하민은 하연의 뜻을 단번에 이해했다.“우리 최씨 집안 사람을 건드리면 당연히 그 대가를 치러야지. 이 일은 오빠한테 맡겨.”그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하민이 오히려 걱정되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하연아, B시는 너무 위험해. 네가 혼자 그곳에 가 있으면 우리 모두 마음 놓지 못해. 차라리 DS 그룹은 포기하고 여기 F국에 있는 본사로 돌아오는 건 어때?”“
하연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하민은 하연이 F국을 떠나는 걸 끝내 동의했다.B시로 돌아온 하연은 곧바로 안형준을 만나러 길을 떠났다.그 시각, 안형준은 민성시립 대학교 교수 사무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이번 하연이 패션쇼에서 선보인 복장을 평가하고 있었다.“안 교수님, 이번 패션쇼가 성공리에 막을 내린 건 모두 메인 의상 덕분이었어요.”안형준의 제자인 주형민이 먼저 의견을 내비치자 안형준도 그 말에 동의했다.“맞아. 이번 디자인 무척 훌륭해. 벌써 해외 패션쇼의 초대도 받았어.”“정말이에요? 그러면 우리 이번 기회에 해외에서 패션쇼 열 수 있겠네요?”그 말에 다른 제자도 흥분한 듯 눈을 반짝였다.“당연하지.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해?”“국제 패션쇼에서 예전에는 우리 작품 꺼리더니. 심지어 우리는 세계 무대에 설 만한 복장을 디자인하지 못한다고 무시도 했었잖아. 그런데 이런 걸 보면 우리 실력을 제대로 증명했나 봐.”“어떡해, 너무 흥분돼.”“...”흥분한 듯 말을 보태는 학생들 속, 유일하게 한 사람만 기쁨이 아닌 비아냥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디자인도 평범하고, 포인트도 없구먼. 다들 어쩜 보는 안목이 이렇게 없어?”그 말 한마디에 기쁨으로 가득 찼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서창섭, 너 그게 무슨 뜻이야? 너도 우리나라 디자인 무시하는 거야?”서창섭이라 불린 사람은 귀찮은 듯 대답했다.“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지연 선배는 어떻게 이겼나 몰라. 교수님, 대체 무슨 생각이예요? 어떻게 이런 사람을 메인 디자이너로 선발하셨어요?”지연의 이름이 언급되자 안형준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다른 학생들도 지연의 이름에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서창섭, 자고로 말은 적게 하랬어. 말할 줄 모르면 조용히 닥치고 있는 게 어때?”“네가 지연 선배 짝사랑하는 건 알겠는데, 이번 일은 엄연히 따지면 지연 선배 잘못이야.”“잘못한 건 인정해야지. 편 들어주면 어떡해?”다른 학생들의 말에 창섭의 낯빛은 순간 어두워졌다.“너희가 뭘 알
“서창섭! 너 그게 무슨 말이야. 하연 선배는 본인 실력으로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따냈거든. 패션쇼도 성공적으로 끝나고, 사회적으로 평가도 얼마나 좋은데, 이거로 하연 선배 실력은 증명된 거 아닌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동기의 충고에도 창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하하, 고작 이게 뭐라고.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해! 최하연이여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서창섭, 그만해!”참다 못한 형민이 결국 나섰지만 창섭의 태도는 여전히 똑같았다.“최하연, 정말 이번 패션쇼에 본인 신분과 배경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하연은 그 말에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그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창섭을 확인했다. 분명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기에 하연은 상대의 이런 적대적인 태도가 더 이해되지 않았다.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이번 메인 디자이너 선발은 공평하게 진행되었어요. 창섭 씨가 말한 더러운 수단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창섭은 큰 소리로 웃었다.“그 말을 누가 믿지? 너희는 믿어?”그때, 형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서창섭, 메인 디자이너는 공정한 경쟁으로 선정한 거야.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의견을 하연 선배를 선택했고. 그러니까 소란 그만 피워!”그 말에 창섭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형민을 바라봤다.그리고 그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 모든 건 그가 지연한테서 들은 것과 완전히 달랐으니까.“서창섭,”그때 안형준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무슨 연유로 이러는지 몰라도 하나만은 명확히 알려주지. 하연 양의 디자인은 모든 사람이 확인하고 충분히 고민한 끝에 선정된 거다. 오늘 너희가 모두 여기 모였으니 내가 솔직히 말하마.”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학생들은 모두 안형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안형준은 제자들의 시선 속에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양, 내가 패션쇼 전에 대충 얘기한 적은 있어도 제대로 설명은 안 했었죠?
“스승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싱긋 미소 지으며 내뱉은 하연의 대답에 모두가 함께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차 한잔을 하연에게 건넸다.하연은 차를 받아 들고 안형준의 앞에 다가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스승님, 절 받으세요.”안형준은 하연이 건넨 차를 받아 들더니 미리 봉투에 넣어 두었던 용돈을 하연에게 건넸다.“그만 일어나거라.”“감사합니다.”입문 의식이 끝나자 안형준은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심지어 당장이라도 자기 제자를 데리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나 하더니 끝내 업계에서 친한 친구들한테 문자로 이 일을 자랑했다.마치 세상에 모두 알리기라도 하듯이....민성 시립대학교에서 나오자마자 하연은 저에게로 걸어오는 웬 훤칠한 남자를 발견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운석이 먼저 하연을 알아보고 성큼성큼 걸어왔다.“여신님! 귀국했네요?”피곤함에 찌든 운석의 모습에 하연은 놀라운 듯 물었다.“운석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운석은 대답 대신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본인이 할 말을 내뱉었다.“화재 사고를 당했다던데,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괜찮아요?”“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하연의 대답에 운석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그동안 운석은 사업 때문에 D시에 있느라 B시의 소식을 여쭈어볼 새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연락했을 때, 하연이 화재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때문에 일을 마치자마자 바로 돌아왔고, 지금 하연이 무사한 걸 확인하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거예요?”그때, 하연이 멀지 않은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캐리어를 가리키며 물었다.운석은 부정하지 않고 서류를 꺼내더니 칭찬을 기대하는 어린이처럼 하연에게 그 서류를 모두 건네며 말했다.“자, 봐봐요. 제가 그동안 이룬 실적이에요.”“이렇게나 많이요?”하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류 뭉치를 확인하더니 속으로 운석의 능력에 탄복했다.그러자 운석은 득의양양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