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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مؤلف: 백소연
“채원아?”

심강후가 계단 아래로 다가갔다.

“날이 많이 쌀쌀해졌는데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와?”

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육채원은 양말조차 신지 않은 채 차가운 바닥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온서린 씨는 왜 리바이탈 프로젝트를 빼앗아 가려는 거예요? 강후 씨, 그 프로젝트는 반년 동안 제 모든 걸 쏟아부은 일이에요. 온서린 씨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남편을 잃었다고 이제는 온서린 씨를 마저 나를 밀어내는 건가요?”

말을 마친 순간 그녀의 몸이 힘없이 휘청였다. 중심을 잃고 계단 위에서 쓰러지려는 찰나, 심강후가 단숨에 계단을 뛰어 올라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채원아, 진정해.”

“강후 씨, 그 프로젝트는 제거예요. 처음에 온서린 씨 아이디어를 참고한 건 맞아요. 하지만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저예요. 저한테는 제 아이 같은 거라고요.”

육채원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자 굵은 눈물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이 떠났다고 이제 전 정말 이 집에서 설 자리마저 사라지는 건가요.”

“그만하고 일단 올라가서 옷부터 챙겨 입자. 아주머니한테 음식 좀 만들어 놓으라고 할 테니까 뭐라도 좀 먹어.”

심강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입맛 없어요.”

육채원은 짧게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난간을 붙잡고 위태롭게 계단을 오르던 그녀는 끝에 다다르자 입술을 감싸 쥐고 어깨를 들썩이다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강후 씨, 저를 버리듯이 해외로 보내지 말아줘요. 전 이 집이 좋아요. 여기서 자랐고 여기가 제 전부예요. 버릴 수가 없어요.”

멀어지는 그녀의 가느다란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심강후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이윽고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못을 박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있는 한 넌 영원히 심씨 가문 사람이야. 누구도 널 내보낼 순 없어.”

육채원이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붉게 젖은 눈으로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가을 저녁의 어둠은 유독 일찍 찾아왔다.

온서린은 업무를 마치자마자 곧장 한울원 별장으로 향했다. 차가 정문을 들어서자 현관 앞 계단에 웅크리고 앉은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심아린이었다. 아이는 그릇에 담긴 과일을 오물거리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서린은 서둘러 차에서 내려 아이에게 달려갔다.

“엄마!”

심아린한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엄마의 실루엣을 발견할 때였다. 아이는 단숨에 달려가 엄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온서린은 딸을 품에 안아 올리고는 참지 못해 아이의 뺨에 연신 입을 맞췄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달콤하고 포근한 아기 냄새에 하루치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때 거실 쪽에서 도우미가 나오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

“사모님 오셨어요? 저녁은 다 차려두었는데 대표님도 집에서 저녁을 드시나요?”

온서린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회사에서 일이 있고 난 뒤 심강후는 오후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마 안 올 것 같아요.”

이미 일곱 시 반을 넘긴 시각이었다.

“제가 아빠한테 전화해 볼게요!”

심아린은 짧은 다리로 달려가 소파 위의 키즈워치를 들고는 능숙하게 심강후의 번호를 눌렀다.

“아린아, 무슨 일이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심강후의 목소리에는 아이를 향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 있었다.

“아빠, 지금 어디예요? 저녁은 집에 와서 먹을 거예요?”

심아린이 혀 짧은 소리로 앙증맞게 묻자 심강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는 밖에서 먹었어. 엄마는 왔어?”

“네, 방금 왔어요!”

“그래, 그럼 엄마랑 맛있게 먹어. 아빠는 조금 늦게 들어갈게.”

심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키즈워치를 쥔 손을 온서린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엄마, 아빠랑 통화할래요?”

온서린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수화기 너머로 여자의 가냘픈 기침 소리가 몇 차례 섞여 들더니 이윽고 심강후의 음성이 이어졌다.

“아린아, 그만 끊자. 아빠가 최대한 빨리 갈게.”

“그래요.”

심아린은 전화를 끊고 온서린의 손가락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 손 씻고 밥 먹으러 가요.”

하지만 온서린은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던, 일부러 낮춘 듯한 여자의 기침 소리.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굳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식탁에는 정갈한 음식이 놓여 있었지만 온서린은 딴생각에 빠져 딸아이의 접시에 반찬을 얹어주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러자 아이는 제 존재를 알리듯 조그만 머리통을 엄마의 팔뚝에 대고 비비적거렸다.

“엄마, 나 고기 더 줘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온서린은 급히 생선 살을 발라 아이의 그릇에 올려주었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밤 아홉 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이를 씻기고 함께 영어 공부까지 마친 온서린은 심아린을 겨우 재운 뒤에야 서재로 향했다.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 무심결에 확인한 휴대전화 시계는 이미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회사 게시판에 짧은 공지 하나가 올라왔다.

[경영진의 종합적인 검토 결과, 리바이탈 과립제 개량 프로젝트의 후속 업무는 기존 주도권자인 육채원 박사가 계속해서 맡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아울러 온서린 박사는 비전 3상 프로젝트의 재검증 작업에 전념해야 함에 따라 해당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실무에서는 제외됨을 알려드립니다.]

연구개발부 부부장이 전달한 경영진의 최종 결정이었다.

이 소식은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처럼 사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모두가 결론을 알고 있었다.

육채원은 사실상 심씨 가문의 수양딸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온서린은 그저 그 집에 팔려 오다시피 한 며느리일 뿐이었다.

남과 식구, 둘 중 누가 더 적임자인지는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온서린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동정과 호기심 그리고 은근한 경멸이 섞인 시선들을 묵묵히 견뎌냈다.

그녀는 짧은 한숨과 함께 상부의 결정을 수용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사무실 밖으로 낯익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몸에 꼭 맞는 우아한 베이지색 슈트 차림에 얼굴에는 아직 병치레 뒤의 초췌함이 가시지 않은 모습.

며칠간 자취를 감추었던 육채원이었다.

직원들이 건네는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의 발걸음이 온서린의 사무실 앞에서 아주 잠깐 멈췄다.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녀의 자태는 어느새 예전처럼 도도하고도 우아한 기색을 완벽히 되찾아 있었다.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온서린도 느낄 수 있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육채원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온서린은 곁에 둔 따뜻한 차를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은은하게 감도는 단맛조차 목구멍 끝에서 치밀어 오르는 쓴맛을 차마 누르지 못하는 듯했다.

심강후는 프로젝트 하나로 그녀에게 확실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때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들려온 것은 낮게 깔리는 남자의 묵직하고도 감미로운 음성이었다.

“잠깐 내 방으로 와.”

온서린이 대표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묵직한 원목 문이 닫히며 외부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했다.

넓은 책상 뒤에 앉아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인 심강후의 모습에서는 오만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느껴졌다.

온서린이 프로젝트를 가로채려 했던 이번 사건은 그에게 고분고분하고 온순하기만 했던 아내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게 해주었다.

심강후의 서늘한 심문이 담긴 시선 앞에 온서린은 책상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큰 유리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바닥에 따스한 온기를 뿌리고 있었지만 차가운 톤으로 꾸며진 사무실의 공기는 여전히 얼어붙은 듯 냉랭하기만 했다.

“앉아.”

심강후가 턱끝으로 옆의 의자를 가리켰다.

온서린은 그 몸짓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꼿꼿하게 편 허리, 무릎 위에 가지런히 겹쳐 올린 두 손. 온화해 보였으나 그 자태에는 명확한 거리감이 서려 있었다.

“온서린.”

낮게 깔린 그의 음성에는 철저한 사무적인 냉담함이 배어 있었다.

“리바이탈 프로젝트는 채원이가 계속 맡을 거야. 이 일은 여기서 정리해.”

온서린의 속눈썹이 아주 찰나였으나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심강후의 뒷말을 기다렸다.

심강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고 건장한 체구의 그림자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큰 유리창 앞에 서서 발 아래 펼쳐진 차가운 빌딩 숲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서운해하는 거,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거 알아. 하지만 세상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중요한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야. 채원이는 지금 정서적으로 아주 불안정한 상태고 할머니께서도 채원이를 외국으로 내보낼 생각이야. 평생을 심씨 가문 하나만 보고 이 집안을 유일한 안식처로 삼아 모든 걸 쏟아부으며 살아온 여자야. 그런 사람을 너무 모질게 몰아붙이지 않는 게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좋을 거야.”

잠시 말을 멈춘 심강후가 고개를 돌려 온서린의 반응을 살폈다.

온서린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저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막막함이 그녀의 두 눈동자에 옅게 서려 있을 뿐이었다.

“형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지분 승계 문제까지 겹친 예민한 시기야. 지금은 그 무엇보다 안정이 우선이라는 뜻이지.”

심강후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

“당신과 채원이, 한 명은 내 아내고 다른 한 명은 내 형수님이야. 두 사람 사이가 틀어져서 밖으로 잡음이 새 나가면 우리 가문에 좋을 게 없어. 할머니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도 가족 간의 화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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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후, 빛나는 삶   제30화

    “그러니까 심씨 가문의 자원을 총동원해 육채원 씨의 앞길을 닦아 주고 명분까지 세워주는 걸로도 모자라, 경영상 리스크까지 감수하면서 심씨 가문에 남을 이유를 만들어주겠다는 뜻인가요?”온서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더 서늘해져 있었다.“그래.”심강후의 대답에는 티끌만큼 망설임도 없었다.“좋아요.”온서린은 형수님을 향한 그의 유별난 배려까지도 기꺼이 수용하기로 했다.심강후는 그녀가 자신의 결정에 동의하자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지분 보상 외에 추가로 두 가지 조건이 더 있어요.”온서린은 운전대를 단단히 쥐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좋아, 말해봐.”심강후는 의외라는 듯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온서린은 언제나 다투거나 욕심을 부리는 법이 없었다.물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그 성정이야말로 그가 그녀를 가장 높이 사는 부분이었다.그러니 그녀가 내놓는 요구 또한 자신을 크게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으리라 믿고 있었다.심강후는 술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는 온서린이 조건을 내놓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녀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별장에 도착했을 때, 심아린은 홀로 계단에 앉아 있었다.얇은 외투를 걸친 채 손에 쥔 마술봉의 불빛을 연신 켰다 껐다 하며 시간을 보내던 아이의 얼굴이 차 소리를 듣는 순간 환하게 피어났다.차를 세우고 온서린이 막 문을 열고 내리려는 순간 심강후가 그녀보다 한발 앞서 차에서 내렸다.심아린이 환한 얼굴로 심강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아빠! 왜 엄마 차 타고 왔어요?”“아빠가 술을 좀 마셨거든.”아이를 품에 안은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아빠, 이제 술 마시면 안 돼요.”고사리 같은 손이 그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의 얼굴이 사뭇 엄숙했다.“제 말 잘 들어야 해요, 알겠죠?”심강후는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다음부턴 조금만 마시마.”그 광경을 바라보는 온서린의 가슴 한복판이 뜨겁게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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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후, 빛나는 삶   제28화

    심우혁 일행이 실험실을 떠난 뒤에도 온서린의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차를 마신다는 핑계로 자리를 벗어나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문가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르듯 멈춰 서 있었다.권지한의 성정을 그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그는 고작 높은 연봉에 혹해 연구소를 등지고 수익 중심의 의료 기관으로 옮길 위인이 아니었다.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심강후가 그조차 거절할 수 없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을 거라는 것.창밖의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졌지만 온서린의 내면은 오히려 서늘하게 얼어붙고 있었다.저녁 시간, 회사 인근의 식당에서 권지한의 환영 만찬이 열렸다. 이번 자리는 심강후가 직접 주최한 것이었다.상석에는 당연하다는 듯 심강후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의 왼쪽으로 심우혁과 육채원 그리고 한생의 주요 임원들이 있었다.온서린이 들어서자 심우혁이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형수님, 이쪽으로 앉으세요.”온서린은 심강후가 이 자리에 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한생은 그룹 내에서도 순위권에 드는 회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룹의 총수인 그가 일개 기술 담당 임원의 환영회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다니 조금은 의외였다.“서린 씨, 여기 앉을래요? 내가 자리 옮겨줄게요.”육채원은 당당하고 거리낌없는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온서린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육채원은 특별히 작업복을 벗고 석양빛을 닮은 은은한 분홍빛 벨벳 롱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긴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웨이브가 더해져 어깨 위로 흩어져 내렸고 정교하게 완성된 얼굴에는 힘을 뺀 여유가 서려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오늘 이 자리가 그녀를 위해 마련된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괜찮아요. 전 여기 앉을게요.”온서린은 연구개발부 부부장 옆자리에 조용히 앉으며 이 자리에 온 것을 후회했다.심우혁이 그녀에게 알려줄 때는 그저 가벼운 식사 자리라고만 했다.게다가 그녀와 권지한은 같은 업계인 데다 같은 스승을 둔 인연도 있으니 전문적인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덧붙였을

  • 이혼 후, 빛나는 삶   제27화

    온서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얼굴은 여전히 평온하고 담담했다.“대표님의 제안은 고려해 볼 가치가 있겠네요. 하지만 현재 한생 프로젝트의 절반 이상이 제 손을 거치고 있어요. 만약 제가 자리를 옮긴다면 강후 씨가 순순히 동의하지 않을 텐데요.”“형수님...”심우혁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제 생각엔 형도 동의하실 거예요.”온서린은 잠시 침묵을 선택했다. 그가 내민 손을 섣불리 잡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쳐내지도 않은 채 묘한 여지를 남겼다.그녀는 자신이 한생에서 차지하는 기술적 입지를 고려할 때 심강후가 쉽게 놓아줄 리 없다고 확신했다.심우혁은 온서린의 태도에 당황하지 않고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했다.“형수님께서 왜 망설이는지 저도 이해해요. 급할 건 없어요. 앞으로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오늘 만남은 제 성의를 먼저 보여드리기 위한 자리였다고 생각해 주세요.”온서린은 조용히 미소를 짓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을 나선 심우혁은 다시금 싹싹하고 밝은 태도로 그녀의 곁을 걸으며 말했다.“아, 형수님. 이번 주 금요일에 내부 세미나가 하나 있어요. 업계 전문가들을 모시고 고서에 기록된 한약 처방을 현대 약리학 기술로 재탄생시킨다는 주제로 담론을 나누는 자리인데 분명 흥미로우실 거예요. 초대장은 이미 메일로 보내두었어요.”온서린은 잠시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시간 되면 참석 할게요.”사무실로 돌아온 온서린은 미간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심우혁은 젊고 날카로웠으며 그 야심 또한 절대 작지 않았다. 그는 심씨 가문 내부의 권력 구도와 복잡한 관계를 어느 정도 꿰뚫고 있는 듯 보였다.그리고 어쩌면 그녀를 이용해 심강후가 그룹 내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에 도전장을 내밀려는 것인지도 몰랐다.혹은 전혀 다른 속내가 숨어 있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어떤 의도이든 새롭게 설립된 ‘강녕미래'라는 독립 플랫폼은 온서린에게 분명 매력적인 기회였다.그곳은 그녀가 자신의 힘을 비축하고 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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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후, 빛나는 삶   제25화

    강도윤은 전송된 파일 몇 장을 천천히 넘겨본 뒤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칭찬과 호감이 묻어났다.“서린아, 네가 수정한 부분 아주 좋아. 회의에서 논의해 보고 결과 정리해서 다시 알려줄게.”“오빠는 이번 협력 가능성을 어떻게 보세요?”온서린의 목소리에는 이 프로젝트를 반드시 성사하고 싶어 하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강도윤은 금테 안경을 가볍게 고쳐 썼다. 단정한 얼굴 위로 이성적인 판단이 깊게 내려앉았다.“초안 기준으로 보면 충분히 실행할 수 있는 안이야. 다만 예산이 예상보다 커질 거야. 특히 네가 제안한 정밀 바이오마커 분석이랑 장기 추적과 조사 부분은 한주 쪽에서도 자원이 많이 들어가거든. 선택지는 두 가지야. 일부 항목의 우선순위를 조정해서 단계적으로 진행하거나 아니면 외부 자금을 추가로 확보하는 방법.”온서린은 그 말의 핵심을 즉각 이해했다.“알겠어요. 회사 쪽에 정식으로 신청하고 예산 문제는 제가 해결해 볼게요.”강도윤은 그녀의 확신에 찬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너는 정말 한생 그룹의 미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온서린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제 몫의 배당금은 챙겨야 하니까요. 돈 문제에 있어서는 꽤 확실하게 챙기는 편이거든요.”강도윤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알기로 너를 데려가려는 곳은 사방에 널렸어. 네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돈일까, 아니면 사람일까?”그의 말에 온서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굳게 닫혔던 기억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이익 때문에 심강후와 결혼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의 마음 어딘가에는 심강후라는 이름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몇 년 전, 바이오 업계 정상회의에서 지도교수의 갑작스러운 병가로 대신 무대에 올랐던 온서린은 한약재 단일 성분 분리 연구 자료를 발표하고 있었다.손에 쥔 마이크는 미세하게 떨렸고 그녀는 그저 이 자리를 빨리 끝내고 내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런데 앞줄에 앉아 있던, 짙은 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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