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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의 아버지

Author: Doong_E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6-04 22:21:52

스튜디오 유리문 너머로 아버지가 서 있었다.

한기석.

서윤은 그 이름을 속으로 천천히 불렀다.

아버지라고 부르면, 또 무너질 것 같아서.

그는 비에 젖은 코트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두툼한 봉투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유리문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

한기석이 손잡이를 한 번 더 잡아당겼다.

딸랑.

문 위의 작은 종이 흔들렸다.

“서윤아.”

유리문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 열어. 아빠랑 얘기 좀 하자.”

서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작업대 위에는 아직 쓰다 만 공식 입장문이 떠 있었다.

저는 제 인생을 더 이상 타인의 입으로 설명하게 두지 않겠습니다.

그 문장을 적을 때까지만 해도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손끝이 차가웠다.

아버지의 뒤쪽, 골목 끝에는 카메라를 든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은 우산 아래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윤은 그 사람을 보자마자 알았다.

아버지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문 안 열어요.”

서윤이 말했다.

한기석의 얼굴이 굳었다.

“뭐?”

“거기서 말씀하세요.”

“이런 얘기를 밖에서 어떻게 하냐. 비 오잖아. 문 열어.”

“카메라 보내고 오세요.”

한기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서윤은 놓치지 않았다.

“무슨 카메라?”

“아빠 뒤에 있는 사람요.”

“기자 아니야. 그냥 아는 사람이야.”

서윤은 조용히 웃었다.

아는 사람.

기자에게 계약서를 넘긴 것도 직접 넘긴 건 아니라고 했다. 이번에도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늘 그런 식이었다.

자기가 한 일의 이름을 흐렸다.

거짓말이 아니라 오해.

협박이 아니라 걱정.

이용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선택.

서윤은 휴대폰을 들어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럼 저도 녹화할게요.”

한기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빠가 데려온 사람도 찍고 있잖아요.”

“찍는 거 아니라니까!”

“저도 녹화하는 거 아니에요.”

한기석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벌렸다.

서윤은 유리문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문은 열지 않았다.

그 얇은 유리문 하나가 지금 서윤이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경계였다.

예전이었다면 문을 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비를 맞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화를 내니까.

아버지가 가족이니까.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여기 온 이유가 뭐예요?”

서윤이 물었다.

한기석은 손에 든 봉투를 들어 보였다.

“네가 달라던 자료다.”

서윤의 시선이 봉투에 닿았다.

그 안에는 자신이 몰랐던 계약 조건이 들어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숨긴 것들, 태경이 숨긴 것들, 그리고 자신만 몰랐던 3년의 이유.

보고 싶었다.

동시에 보고 싶지 않았다.

“문 밑으로 넣고 가세요.”

한기석의 얼굴이 험하게 굳었다.

“아빠가 여기까지 왔는데 문도 안 열어 줘?”

“네.”

“한서윤.”

그가 낮게 불렀다.

어릴 때 잘못을 했을 때마다 듣던 목소리였다.

서윤은 그 목소리에 익숙했다. 익숙해서 더 싫었다.

“너 아빠한테 이럴 거냐?”

“아빠는 저한테 그랬잖아요.”

한기석이 멈칫했다.

서윤은 유리문 너머의 아버지를 똑바로 보았다.

“내 결혼 계약서를 기자에게 넘겼잖아요.”

“그건 너를 위해서…”

“아니요.”

서윤은 그의 말을 끊었다.

“아빠 회사를 위해서였죠.”

한기석의 입술이 굳었다.

“너 정말 그렇게 말할 거냐? 내가 누구 때문에 버텼는데. 네 엄마 죽고 나서 너 혼자 키우느라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또 엄마였다.

서윤의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아버지는 늘 엄마의 이름을 꺼냈다. 서윤이 더 묻지 못하게 만들 때, 더 화내지 못하게 만들 때, 결국 자신을 이해하게 만들 때.

하지만 오늘은 그 이름 앞에서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엄마 얘기하지 마세요.”

한기석의 눈이 커졌다.

“뭐?”

“엄마가 살아 있었으면, 나를 이런 결혼에 밀어 넣지 않았을 거예요.”

한기석의 얼굴이 붉어졌다.

“밀어 넣어? 누가 널 밀어 넣었다고 그래. 네가 사인했잖아!”

“절반만 알고요.”

“그게 뭐가 중요해!”

그의 목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서윤은 휴대폰을 더 단단히 쥐었다.

한기석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결국 네 덕에 우리 집 살았고, 너도 태경 며느리로 살았잖아. 남들 못 누리는 거 누리고 살았으면 된 거 아니냐?”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진심이 너무 분명해서.

그에게 서윤의 3년은 외로움도, 모멸감도, 사랑받지 못한 시간도 아니었다.

대가를 치렀으니 마땅히 누렸어야 할 생활.

그 정도였다.

“아빠는.”

서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행복했는지 궁금한 적 없었죠.”

한기석은 시선을 피했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서윤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봉투 주세요.”

“이거 보면 너 후회한다.”

“후회는 제가 충분히 했어요.”

그 말에 한기석이 그녀를 보았다.

서윤은 조용히 말했다.

“이제 아빠 차례예요.”

한기석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봉투를 한참 움켜쥐고 있었다. 내밀 듯하다가 멈추고, 다시 쥐었다.

“너 정말 아빠 버릴 거냐?”

“저는 아빠를 버리는 게 아니에요.”

서윤은 유리문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아빠가 저한테 떠넘긴 것들을 돌려드리는 거예요.”

한기석의 눈빛이 흔들렸다.

처음으로 그는 서윤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았다.

늘 참고, 이해하고, 결국 문을 열어 주던 딸.

그 딸은 이제 없었다.

한기석은 이를 악물고 봉투를 문 아래 틈으로 밀어 넣었다.

젖은 종이봉투가 바닥을 긁으며 안쪽으로 들어왔다.

서윤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무거웠다.

종이의 무게가 아니었다.

숨겨진 시간의 무게였다.

“이제 가세요.”

서윤이 말했다.

한기석의 얼굴이 무너졌다.

“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경이 널 지켜 줄 것 같아? 차태오가 끝까지 네 편일 것 같냐?”

서윤은 봉투를 품에 안았다.

“그건 제가 판단해요.”

“네가 뭘 안다고 판단해!”

한기석이 유리문을 세게 두드렸다.

딸랑.

종이 거칠게 흔들렸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네가 지금 누구 돈으로 여기까지 온 건지, 네가 무슨 빚 위에 서 있는지 하나도 모른다고!”

서윤의 손끝이 굳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한기석은 말을 뱉고 나서야 후회한 듯 입을 다물었다.

서윤은 유리문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뜻이냐고요.”

한기석은 시선을 피했다.

“아니다.”

“아빠.”

“그냥 자료 보고 얘기해.”

“지금 말하세요.”

한기석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비가 더 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골목 끝 카메라맨의 우산 위로 빗소리가 두드렸다.

한기석은 마른 입술을 한 번 핥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네 엄마 병원비도.”

서윤의 숨이 멎었다.

한기석은 고개를 돌린 채 말을 이었다.

“그 돈에서 나왔어.”

서윤의 손에서 봉투가 미끄러질 뻔했다.

“……뭐라고요?”

한기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서윤은 유리문 안쪽에 선 채,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모르는 빚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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